이태수 시집
후창
문학세계사
이 태 수 시인
1947년 경북 의성에서 출생, 1974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 『마음의 길』(2025, 문학세계사), 『은파』(2025, 문학세계사), 『먼 여로』(2024, 문학세계사), 『유리벽 안팎』(2023, 문학세계사), 『나를 찾아가다』(2022, 문학세계사), 『담박하게 정갈하게』(2022, 문학세계사), 『꿈꾸는 나라로』(2021, 문학세계사), 『유리창 이쪽』(2020, 문학세계사), 『내가 나에게』(2019, 문학세계사), 『거울이 나를 본다』(2018, 문학세계사), 『따뜻한 적막』(2016, 문학세계사), 『침묵의 결』(2014, 문학과지성사), 『침묵의 푸른 이랑』(2012, 민음사), 『회화나무 그늘』(2008, 문학과지성사), 『이슬방울 또는 얼음꽃』(2004, 문학과지성사), 『내 마음의 풍란』(1999, 문학과지성사), 『안동 시편』(1997, 문학과지성사), 『그의 집은 둥글다』(1995, 문학과지성사), 『꿈속의 사닥다리』(1993, 문학과지성사), 『안 보이는 너의 손바닥 위에』(1990, 문학과지성사), 『물속의 푸른 방』(1986, 문학과지성사), 『우울한 비상의 꿈』(1982, 문학과지성사), 『그림자의 그늘』(1979, 심상사), 시선집 『잠깐 꾸는 꿈같이』(2024, 그루), 『먼 불빛』(2018, 문학세계사), 육필시집 『유등 연지』(2012, 지식을 만드는 지식), 시론집 『예지와 관용』(2024, 그루), 『현실과 초월』(2021, 그루), 『응시와 관조』(2019, 그루), 『성찰과 동경』(2017, 그루), 『여성시의 표정』(2016, 그루), 『대구 현대시의 지형도』(2016, 만인사), 미술산문집 『분지의 아틀리에』(1994, 나눔사), 저서 『대구문학사』(공저, 2020, 대구문인협회), 『가톨릭문화예술』(2011. 천주교대구대교구) 등을 냈다. 한국시인협회상(2021), 상화시인상(2020), 천상병시문학상(2005), 한국가톨릭문학상(2000), 동서문학상(1996), 대구시문화상(1986), 예술가곡대상(2022), 대구미술메세나상(2018), 대구예술대상(2008) 등을 수상했으며, 매일신문 논설주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대구한의대 국문과 겸임교수, 대구시인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시인의 말
오늘이 마지막 날같이, 첫날처럼
살아가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이즈음 시는 그런 마음의 그림이며
낮은 꿈의 무늬와 결들이다.
새봄에 스물네 번째 시집을 낸다.
2026년 봄
이태수
차례
Ⅰ
함월산含月山―――12
속‧달항아리―――14
달 판타지아―――16
주월사住月寺―――18
초승달, 그믐달―――20
청잣빛 하늘―――21
가을 나무―――22
풍경, 늦가을 황혼―――23
적멸궁 한 채―――24
청단풍 한 잎―――25
까치밥 하나―――26
첫눈을 기다리며―――27
나무의 겨울나기―――28
겨울나기―――30
크리스마스 무렵―――31
포인세티아―――32
남천 울타리―――33
겨울 화살나무―――34
한겨울 망중한―――35
한겨울 어느 날―――36
Ⅱ
어느 날 아침―――40
기억이 나를 들여다본다―――42
반반―――44
나는 기다린다―――46
수수꽃다리 엽흔葉痕―――48
잎눈, 꽃눈―――49
수선화 필 무렵―――50
꽃무릇―――52
어제―――54
오늘―――55
어제 오늘 내일―――56
나는 여기 남고―――57
지금 여기 2―――58
별밤 1―――59
별밤 2―――60
첫새벽―――61
정념情念―――62
그림자―――63
길을 달리면서―――64
그리움 저편에서―――66
Ⅲ
만남, 나와 나―――70
작은 꿈―――72
빈 항아리―――73
이상향―――74
먼 나라―――75
정적靜寂―――76
부활절 아침―――77
노트르담의 청동 수탉―――78
반가사유상―――79
절벽 위의 부처―――80
열암곡 부처―――81
서출지書出池 까마귀―――82
숲속의 나무―――84
앞뜰의 소나무―――85
후창後唱―――86
오래된 탁상시계―――87
우주와 나 2―――88
우주와 나 3―――89
착각, 환상―――90
방하착放下著―――91
Ⅳ
산수유마을―――94
막내아우―――96
한겨울 바람-누이 영주에게―――98
이수 형―――100
옛 술친구―――101
술친구 생각 1―――102
술친구 생각 2―――103
뜬구름 1―――104
뜬구름 2―――105
뜬구름 3―――106
맥문동꽃―――107
그녀의 눈물방울―――108
미묵眉墨―――109
명태―――110
아는 척에 대해―――112
나의 언덕―――114
시를 쓰면서―――115
나의 시법詩法―――116
|해설| 박진임(문학평론가)
물소리 안고 가는 적멸궁 한 채---119
Ⅰ
함월산含月山
산은 달을 품고 나는 달빛을 품는다
이른 저녁 함월산을 내려오면서
나뭇가지에 매달려 흔들리는 한 잎의
나뭇잎같이 달빛을 끌어당겨 품는다
산이 그윽하게 품어 안은 달은
어둠살에 묻히고 있는 나무와 풀들,
그 그늘들까지 은밀하게 다독이면서
무명無明을 흔들어 깨우는 걸까
산이 왜 달을 품는지도 알 것 같다
오후 느지막이 함월산을 오를 때는
나도 달을 품어보고 싶었으나
달을 품고 있는 산이 나를 품을 뿐
먼먼 옛적 기파랑*도 스쳐 지나갔다
그가 꿈꾸던 아름다운 세상이
달빛 너머로 보일 듯 말 듯도 했다
산이 품어 안은 달이 나무와 풀들,
내 마음도 일깨우는 것 같아
달빛을 품으며 느릿느릿 하산한다
*신라 때의 화랑
속‧달항아리
어둠이 밀리어오는 저녁 무렵에
남쪽 앞산 위에 보름달이 떠오릅니다
내 마음엔 달항아리가 뜹니다
창가에 앉아 달빛을 그러안고 있으면
빈 항아리 같은 마음이 환해집니다
비워두기를 잘한 것 같습니다
보름간 달이 차오르는 동안에는
마음을 비워내려고 안간힘 썼습니다
비우면 차도 밀어내고 비워냈습니다
하루에도 열두 번은 흔들렸지만
흔들리며 중심을 잡았습니다
기다려왔던 보름달이 내려다보면서
기다린 만큼 환한 빛을 비추어줍니다
차오르는 마음의 항아리 비우며
오랜 세월 달항아리를 동경했습니다
그 항아리를 그러안아 봅니다
달 판타지아
물결 잔잔한 호수에 달이 뜹니다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고
이태백이 따려던 그 달을 봅니다
술잔을 기울이다가 문득
조금 덜 찬 달에 마음이 다가갑니다
술잔을 한차례 비우면서
절반 남은 술병에 눈길이 닿아서
아껴 마시려 마음먹습니다
호수에 뜬 달이 아름다워 그렇고
이태백이 떠올라서도 그러합니다
혼자서 유유자적 노닐자니
먼 데 떠난 술친구가 그립습니다
그의 얼굴도 어른댑니다
풍류를 즐기던 시절이 눈에 선합니다
가버린 날들이 아쉬워서
술병을 비우고 나서도 우두커니
호숫가에 앉아있는 나를
이태백이 지켜보는 듯도 합니다
주월사住月寺*
고향마을을 내려다보는 불출산佛出山은
부처가 솟아올랐다고 붙인 이름이라네요
이 산의 중턱에는 오래된 절이 있고
달이 머물렀다고 절 이름이 주월사랍니다
아득한 옛일이지만 의상대사가 창건한
이 신라 고찰의 뒤편 암벽에는
누가 새겨놓았는지 몽선대, 취하암,
월영폭포라는 암각들이 보입니다
부처가 솟아오른 산중의 달이 머무는 절에
노을에 취한 바위와 몽선대가 있고
달빛 옷 입는 폭포가 있었다니 선경이지요
하지만, 폭포는 사라지고 없어요
취하암도 몽선대도 꿈속에 든 건지,
저녁노을 속으로 들어간 건지,
초저녁 달빛만 환하게 내리고 있습니다
늦가을 보름날 다가오는 초저녁의 주월사,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면서
무심히 내리는 달빛을 그러안아 봅니다
달을 스치는 구름도 어딘가로 갑니다
*경북 의성군 사곡면 양지리 뒷산의 절
초승달, 그믐달
새로운 시작을 말해주는 초승달은
왜 해가 지고 난 이른 저녁
서쪽 하늘에 뜨는지요
해 뜨기 전의 새벽녘
동쪽 하늘에 뜨는 그믐달은
왜 끝내기를 의미하는 것일는지요
마무리 잘해야 빛을 받을 수 있고
새출발은 빛을 못 받을 때
해야 한다는 뜻인지요
해 진 뒤 서쪽 하늘과
동쪽 하늘을 번갈아 보면서
끝내기와 시작에 대해 새겨봅니다
청잣빛 하늘
유난히 무덥던 여름 내내
청잣빛 하늘의 가을을 기다렸다
헤어지면 그립고 만나보면 시들하다는
옛 노래의 한 소절이 생각나기는 해도
기다림은 설렘을 대동하게 마련
그 설렘을 지그시 누른다
오늘 아침엔 서늘한 바람
가을의 발소리가 다가오는 것도 같다
하지만 귀를 열다 말고 하늘을 바라본다
맑게 갠 하늘에 새들이 날아오른다
귀를 닫고 있으려 해도 들려오는 새들의
가을 전주곡이 바람에 실려 다가온다
나는 그 소리에 들어선다
새들이 합창으로 받들고 있는 듯한
하늘이 차츰 청잣빛을 머금고 있다
가을 나무
대문을 나서면서 맞이하는
가을 아침 햇살과 바람이 삽상하다
유리알 같은 하늘에서 뛰어내리는
햇빛을 끌어안는 나무들,
잎사귀들을 애써 붙잡는 듯하지만
단풍이 봄꽃보다도 마음 끄는 것은
느긋해진 마음자리 탓일까
나무들 발치에 불타오르듯
제때 절정의 생명력을 내뿜고 있는
샐비어들은 옛 시절을 불러오는지
잠깐 눈을 감게도 한다
하지만 이내 눈뜨고 바라보노라면
때를 아는 나무들 지혜가 다가온다
머잖아 단풍잎도 떨쳐버릴
풍경, 늦가을 황혼
홍단풍나무에 앉아 멧새들이 지저귄다
때마침 서녘 하늘에도 붉은 노을,
새 소리도 붉은빛을 보태는 것만 같다
장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노신사도
이 장면에 동참하고 있는 걸까
붉은 단풍과 서녘 하늘을 번갈아 바라본다
황혼 무렵의 아름답고 그윽한 풍경화 같다
어둠살이 느릿느릿 밀리어오고
저녁노을은 더욱 붉게 타오르고 있다
멧새는 단풍에 연신 노래를 끼얹는지
노을도 함께 예찬하고 있는 건지
더불어 노신사도 더욱 멋있어 보인다
적멸궁 한 채
소실된 고운사 인근 맑은 계곡물에
떠내려가는 단풍잎 하나
물소리 안고 가는 저 적멸궁 한 채
청단풍 한 잎
청단풍 한 잎이 말을 건넨다
나뭇가지를 떠나면서
언제까지나 마음만은
푸르다는 말을 온몸으로 한다
까치밥 하나
감나무 꼭대기에 까치밥 하나
까치들도 배려하는 마음 없지 않아
마지막 하나는 남겨 놓았을까
첫눈을 기다리며
가을이 가면 눈을 기다립니다
침묵이 잉태하다가 내려오는
눈은 신성한 말들을 거느리고 옵니다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기보다
하늘을 받들어 안고 내립니다
세상을 희디희게 감싸 안으며
지울 건 죄다 지우는가 하면
말하지 않는 말에 귀를 열게 합니다
눈은 창밖에만 내리지 않고
내 마음 빈 곳에도 내립니다
창가에서 첫눈을 기다립니다
가는 길이 외지고 고달파도
풍진세상에 휩쓸리지 않으려 합니다
새롭게 채워질 신성한 말을
그러안으려 마음 추스릅니다
나무의 겨울나기
겨울이 다가서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떨어지는 나뭇잎들과
외투 입은 사람이 시야에 들어온다
나무는 옷을 벗기 시작하고
사람은 옷을 껴입기 시작하는 계절이다
이 대조적인 겨울맞이 모습이
시선을 안으로 돌려보게 한다
비우려는 자세와 보태려는 자세 탓이다
사람은 자꾸 보태려 하지만
나무는 다시 보태기 위해 비운다면
비운다는 미덕에 대해
새삼 시선을 돌려보지 않을 수 없다
겨울나기를 하려면 옷을 껴입더라도
마음은 덜어내거나 비워야만
새로이 차오를 수 있게 마련이다
겨울을 맞이하면서 새삼스레
나무의 지혜에 마음 가져가 본다
보태기와 비워내기의 미덕을
나무는 은밀히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겨울나기
겨울이 깊어가는 길목에 서서
온갖 기억을 지우고 비운다
떨칠 것을 다 떨쳐버린 나무들 사이
금강송 한 그루 독야청청
몸도 마음도 바꾸지 않고 서 있다
나를 내려다보는 것 같고
잎새 떨친 나무를 둘러보는 것 같다
겨울나기의 마음 깊숙이에
금강송 한 그루 들이고 싶다
온갖 기억을 다 비우고 지우더라도
오랜 꿈은 초심같이 예 그대로
그러안은 채 가꾸고 싶다
찬바람이 불고 눈보라칠지라도
기억의 빈터에는 새 꿈을 돋우면서
크리스마스 무렵
크리스마스가 가까이 다가오자
남천 열매가 더 붉어 보인다
그 옆 화분의 포인세티아 잎들도 한가지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캐럴
창을 여니 바로 옆집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창 너머 빈 몸인 산딸나무가
멈췄다 내리는 눈을 맞고 있다
눈을 맞으면서 무덤덤 서 있는 산딸나무,
베란다의 포인세티아와 남천 열매에
자꾸만 눈길이 가고 마음이 따라가 머문다
옆집 가족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며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포인세티아
마음의 꽃을 마음에 들게 못 피워
안타까운 날은 포인세티아를 바라봅니다
한겨울이면 꽃보다 아름다운
붉은 잎사귀들이 마음을 데워 줍니다
창밖엔 눈보라 흩날리는데도
마음의 잎사귀들이 따뜻해지는 듯합니다
포인세티아는 겨울 천사 같습니다
남천 울타리
남천 울타리는 눈을 기다렸을까요
빨갛게 익은 한겨울의 열매들이
눈을 맞으면서 한껏 자태를 뽐냅니다
눈송이와 어우러지는 잎사귀들도
후렴이라도 부르는 듯 더 붉어집니다
베란다의 남천들은 눈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면서 부러워하는지도 모릅니다
이럴 때는 성당 종소리가 울리면
금상첨화일 거라는 생각도 드는군요
이런 환상은 남천 몫이 아니고
순전히 우리 몫이기도 할 테지요
겨울 화살나무
화살나무들이 화살을 다 쏘았는지
헐렁한 모습으로 서 있다
일말의 미련이 남아 그러는 건지
그런 마음이 맺혀서 저러는 건지
아주 작지만 빨간 열매를
군데군데 띄엄띄엄 달고 서 있다
대를 이으며 화살을 날려 보내려고
저러고 있기도 하겠지만
화살을 어디로 쏘았는지
화살을 날릴 데가 얼마나 남았는지도
물어보고 싶어지게 한다
세상이 하도 수상하니까
화살나무에 마음 포개어 바라본다
한겨울 망중한
이따금 멍때리듯 창밖을 바라본다
이즈음은 마음 내려놓은 채
이러고 있을 때가 편안하다
머잖은 산 너머로 구름이 넘어가고
빈 나뭇가지에 새들이 지저귀다 날아간다
한 젊은이가 잰걸음으로 가고
눈이 내릴 듯 말 듯 흐리다가 갠다
한 노인은 지팡이에 의지하듯
가다가 서다가 느릿느릿 지나가기도 한다
새들이 다시 돌아와 한참 지저귄다
대한이 가까이 다가오는데
남천과 쥐똥나무 열매들은
찬바람과 맞서는지 유난히 빨갛다
한겨울 어느 날
새들도 구름도 보이지 않는
한겨울 야트막한 언덕에
따로이듯 함께이듯 두 나무가
잎을 다 떨치고 서 있다
갤 듯도 말 듯도 한 하늘
얼음장 밑으로는 물이 흘러간다
우연히 만난 지기도 나도
함께이듯 따로이듯 서서
말없이 두 나무를 올려다본다
바람이 옷자락을 흔들고
나무는 우리를 내려다본다
Ⅱ
어느 날 아침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어디로 가야 할지 한참 망설인다
새 한 마리가 내 앞을 가로질러 날아간다
다급하게 갈 데가 있는가 보다
눈을 들어 바라보면 하늘엔 떠 있는 구름
어디로 가는지 느리게 가고 있다
바람이 옷자락을 흔들어댄다
빈 몸인 채 서 있는 나무들이 나를 굽어본다
회화나무, 계수나무,
그 아래의 쥐똥나무들은 올려다보는 것 같다
내가 딱해 보이는지,
굽어보고 올려다보는 나무들 가까이 가 본다
바람이 옷자락을 흔들어댄다
묵묵부답인 나무들과도 갈라서서
간밤 꿈속에 가 본 길을 더듬으며 나선다
하지만 그 길도 역시 오리무중,
가긴 가야 하지만 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
기왕 나선지라 길이 부르는 데로
가 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기억이 나를 들여다본다
거울과 가까이 마주 앉아
거울 밖 먼 옛날의 나를 데려온다
거울에 비친 나와 옛날 내가
포개어져 보이다가 말다가 한다
지금 여기와 먼 옛날 거기가
뒤섞여서 비치다가 말다가 한다
창 너머 구름과 바람 소리도
나를 들여다보듯 슬며시 끼어든다
그러나 잠깐 사이다
가면 돌아오지 않는
시간은 한결같이 꼭 같은 걸음으로
뒤돌아보지 않고 나아간다
옛날과 그때의 나를 데려와도
거울은 잠깐 비추다 말 뿐
지금의 나만 이쪽을 바라본다
옛 시절이 못내 그리운 건
그때의 나를 잃어버렸기 때문일까
그 나와 하나 되고 싶다
왜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그리운 마음만 간절할 뿐, 넌지시
기억이 나를 들여다본다
반반
왜 언제나 반반일까
절반과 절반이 만나 하나가 되고
다시 하나가 절반씩으로 나뉘는 걸까
왜 어디든 반반일까
하나가 절반씩으로 나뉘어졌다가
다시 하나로 어우러지기 때문인 걸까
슬픔과 기쁨도 원래 한 몸이었던가
이 세상은 원래 그런 곳일까
채우려고 안간힘을 써보아도
차면 기울고 비워야 차오르게 마련
차오르는가 하면 오래잖아 사위어가고
사위었다가는 오래잖아 차오르는
달은 말없이 말한다
겨울이 가면 어김없이 여름이 오듯이
밤이 지나면 낮이 되돌아오듯이
반반은 하나가 된다
나는 기다린다
나는 기다린다
날이 밝고 꽃이 피기를 기다린다
집을 나서 신호등 앞에서 기다리고
꿈꾸던 날을 길 위에서 기다린다
만나기로 한 사람을 기다리고
안 돌아오는 날들도 기다린다
세상이 제발 바로서기를 기다리고
서재에서는 길에서 마주치고 떠오른
생각들이 시로 쓰이기를 기다린다
해가 지면 술친구도 기다리고
창밖에 뜨는 별들을 기다린다
기다리다가 보면 하루가 떠나간다
한밤에는 오지 않는 잠을 기다리고
붙들어도 멀어지는 꿈을 꾸려고도
나는 기다린다
수수꽃다리 엽흔葉痕
수수꽃다리 잎자국을 들여다보다가
바로 옆의 잎눈에 눈이 간다
봉긋한 꽃눈도 눈에 들어온다
새봄을 맞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잎자국에 눈이 가는 것은 왜일까
새잎과 꽃이 피고 돋으려 하는 데보다
잎 진 자리에 눈이 먼저 가는 건
마음자리에 남아 있는 상흔 때문일까
봄이 다시 돌아온 길목에 서면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그립다
그 마음이 꽃향기보다도 더 진하다
잎눈, 꽃눈
잎눈이 돋고 꽃눈이 돋는다
기다리던 봄이 다가오면
나무들의 눈뜨는 방법은 제각각이다
잎을 틔우기 전에 꽃을 피우거나
꽃을 피우기 전에 잎을 내민다
어느 쪽이든 새봄을 맞기 위해
눈을 틔우는 것은 같은 방법이다
기다림은 마음에 자리를 잡고 있지만
기다리다가 맞이할 때는
새로 눈떠야 한다는 뜻일까
겨우내 기다리며 꿈을 꿨듯이
새봄에는 새롭게 눈뜨고 싶다
수선화 필 무렵
봄이 오기를 기다린다
봄이 오면 안 오는 사람을 기다리고
오지 못할 사람도 기다린다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기다리고
오지 못하더라도 기다린다
떠나간 사람들이 잊히지 않아서
차례로 그 이름을 불러본다
그 모습들이 선연하게 줄지어 다가온다
지난날을 데리고 온다
오늘은 수선화가 피고
수선화가 피어나기를 기다리던 날들도
꽃잎에 향기이듯 어른댄다
제 모습에 반해서 죽었으면서도
꽃으로 돌아온 나르시스
그의 짙은 향기가 번져 흐른다
나르시시즘에 빠져든 건지
그 증상이 그리움인지도 생각해본다
이토록 지난날이 그립다
꽃무릇
아파트 앞뜰의 꽃무릇 한 송이
진홍빛 불을 지피고 있다
누구를 향한 마음 저리도 뜨겁게
열어 보이려 하고 있는지
누가 제 마음을 드러내 보이려고
언제 옮겨 심어 놓았는지
그를 만나 사연을 들어보고 싶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저 꽃무릇 운명과 같은 것일까
잎이 지고 꽃 피는 상사화와는
반대라 더 애틋해 보일까
붉은 속마음을 드러내 보이다가
속절없이 홀로 지고 마는
저 꽃은 슬픈 사랑의 화신 같다
옛날 이웃집 예쁜 누이의
애절한 사연도 꽃잎에 어른댄다
예쁜 저 꽃무릇 한 송이는
아픈 사랑의 진홍빛 변신 같다
어제
어제는 가고 없는 날
아무리 되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날
붙잡아두고 싶은 날이었지만
그러지 못해 못내 아쉬운 날
언제 어제 같은 날이 올는지
어제는 어제뿐
오래 기다렸던 날 같아서
오늘이 어제를 본다
오늘
아침에 눈을 뜨니 새날이다
처음 만나는 날이지만
헤어져야 할 날이다
헤어져야 새날이 온다
만나면 헤어지고 해어져야
또다시 새날이 오지만
가버린 날들은 영영
또다시 오지는 않는다
오늘은 가고 마는 날이다
어제 오늘 내일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까
이즈음은 밤낮이 가듯 말 듯
오듯 말 듯 오가기만 한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리듯이
안갯속 같은 무명 길이 나를 이끄는지
어제도 오늘도 마냥 가지만
가는 데도 모르면서 간다
내일도 가던 길을 나서거나
길이 되레 나를 데려갈는지도 모른다
나는 여기 남고
또 하루가 저문다
가서 돌아오지 못하는 것들을
죄다 데리고 간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아야 한다
보지 않으려 해도
허공 저 먼 데로 사라지는 길,
그 뒤태만 보인다
바라보다 돌아오게 되고 마는
나는 여기 남는다
가서 돌아오지 못하는 것들이
나를 여기 남긴다
지금 여기 2
여기 지금은 언제나 한순간이다
여기 그대로 있어도 지금은 떠난다
지금 이대로 있어도 여기는 바뀌고 만다
지금은 영원 속의 찰나지만
이 찰나는 여기의 영원이다
여기는 영원 속 한순간만 머무는 데지만
영원이 찰나를 품어 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는 찰나이자 영원이다
별밤 1
먼 하늘은 우러를수록 멀어진다
멀어지기 때문에 더 간절히
가까이 불러오고 싶어지는 걸까
가버린 사람들과 가버린 지난날들이
돌아오지 못하는 줄 알면서도
왜 자꾸만 먼 하늘을 바라보게 되는지
왜 날이 갈수록 더욱 불러오고 싶은지
날 저물고 밤이 되자 하늘이 다가온다
어둠 속의 별들을 데리고 가까이 온다
그리운 사람들과 그 옛날들이
별이 되어 먼 하늘에 머물렀던 건지
그래서 별들이 숨어있는 하늘을
간절히 우러르게 됐던 걸까
별밤엔 먼 지난날로 되돌아간다
별밤 2
너를 찾듯이 별 하나 찾는다
어느 별이 너의 별인지
밤 깊도록 어깨에 잠을 떠메고 찾는다
무수한 별이 내려다보는데
내려다보고 있을 너는 어느 별인지
이 지상의 어둠 속에서
너 만나고 싶어 하늘을 우러르건만
마냥 내려다보고만 있는지
언젠가 별이 되고 싶다고 하던 그 말이
왜 이리 잊히지 않는지
별밤엔 너의 별을 찾곤 한다
첫새벽
창가에 앉아서 별들을 바라봅니다
어둠이 어둠을 껴입을수록
밤이 깊으면 깊어질수록
영롱한 별 하나를 품어 안게 됩니다
밤이 깊으면 깊어질수록
어둠이 어둠을 껴입을수록
이 꿈도 첫새벽으로 다가갑니다
첫새벽은 언제나 설레게 합니다
어제도 그제도 그러했지만
꿈은 꿈으로만 남았어도
이 밤에도 그 설렘으로 나아갑니다
꿈은 꿈으로 남을지라도
또 첫새벽을 끌어당깁니다
창밖의 별빛도 끌어당겨 안습니다
정념情念
우두커니 앉아 정념의 끈을 푼다
마냥 흐르는 물을 따라가듯이
마음마저 바람에 맞기듯이
나를 풀어놓고 싶다
둥글게 항아리같이 비워진
마음을 만나보고 싶기도 해서
내 속으로 비몽사몽 들어가 본다
하지만 정념들이 돌아온 건지
항아리가 차츰 채워지듯이
차오르는 정념들이
물길을 거스르며 흐르듯이
바람과 길항하듯이 가는 건지
마음은 또 정념과 손을 맞잡는지
그림자
석양 무렵 길어지다가 사라지는
나무그림자를 바라본다
길어지다가 사라지는 그림자가
어디 나무그림자뿐이랴
사라질 땐 대개 그러지 않았던가
길을 달리면서
갈 데도 정하지 않고 달린다
자동차로 눈 앞에 펼쳐지는 길을 따라
길이 부르고 끄는 대로 달린다
차선과 교통신호를 제대로 지키지만
갈 데를 안 정해 되레 설레고
어디까지 갈지도 몰라 더욱 그런 걸까
갈 데를 정하고 달리려 하다
가 보았자 그냥 되돌아올 것만 같아서
마음 바꾸기를 잘한 것 같다
한 치 앞도 모르면서 살아가는 우리가
교통질서를 잘 지켜야 하듯이
세상 질서에 따르는 게 순리 아닐까
가는 데가 어딘지도 모르는 채
지금도 달리고 있지만 멈춰야 할 데를
길이 가르쳐 줄는지도 모른다
그리움 저편에서
지난날들이 그리움 너머로 온다
잊은 줄 알았던 날들도
그리운 얼굴들과 함께 되돌아온다
떠나간 가족들이 차례로 돌아오고
짧았던 인연도 그리움 저편에서 온다
저물 무렵 강가에서 하늘을 바라보면
어둠살 짙어질수록 빛나는 별같이
지난날은 멀리서 점점 가까워진다
저문다는 사실 때문일까
모든 건 지나가고 떠나가서일까
강물이 흐르듯이 구름이 가듯이
머물지 않는 이 질서를
오롯이 그러안을 수밖에 없겠지만
마음은 그리움의 공간이라 이럴까
비우고 지워도 이내 차오르는 그리움
저녁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돌아오지 못하는 시절의 사람들이
마지막 모습 그대로 되돌아오듯이
별처럼 반짝이며 다가오고
지난날들도 한동안 머물고 있다
Ⅲ
만남, 나와 나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을 때
나는 나를 만난다
이른 아침부터 밤 이슥토록
오로지 나는 나를 만나려 한다
안 보이면 부르고 찾아와 만나고
숨거나 가려 해도 붙들어 앉힌다
나는 언제나 홀로 오지 않는다
가버린 날들을 데리고 오며
안 보이는 세계의
새와 나무, 산과 강과 하늘과
함께 오기도 한다
아무도 만날 사람 없을 때는
만나고 싶던 미련도 지워 낸다
나를 부르고 찾아와 나와 만난다
찾고 불러온 나는 잃었던 나이며
내가 꿈꾸고 있는 나이기도 해
숨거나 떠나가게 마련이지만
그런 나를 붙든다
붙들어 놓으려 안간힘을 쓴다
작은 꿈
나는 이슬방울 같은 거겠지요
풀잎에 맺혔다가 때가 되면
기화하거나 흘러내리고 마는 이슬방울
나도 맑고 깨끗하게 글썽이려 꿈꾸다가
때가 되면 미련마저 버리고
여기에서 떠나야만 할 테지요
나는 꿈꾸는 이슬방울과 같고
이곳은 하나의 풀잎 같으니
이 풀잎은 단 한 번의 내 우주이겠지요
나는 작지만 명징하게 반짝이다 가는
한 방울 풀잎 위의 이슬방울
꿈꾸며 글썽이다 그 꿈에 드는,
빈 항아리
담장 아래서 하늘을 품는 빈 항아리
비워 두었으므로 가득 차는 저 화엄
이상향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을
이상향이라고 하는 걸까요
그곳으로 가보려고 아무리 애써도
언제나 꿈속에만 머무는 곳이라서
목마르게 꿈을 좇아 그 먼 나라에
다다르고 싶어지는 걸까요
그제도 오늘도 마찬가지나
못 가더라도 가보려고 나서봅니다
그런 꿈이라도 좇아가지 않는다면
벼랑 아래로 굴러내리고 말는지요
나의 한갓된 이 꿈꾸기는
시시포스의 형벌 같은 걸까요
먼 나라
오래 동경해 마지않던 먼 나라 같았다
잠깐만 존 것 같은데
그새 그 나라에 가 볼 수 있었다니
졸음 불러 잠깐이라도 다시 가보고 싶다
하지만 가고 싶다고 갈 수 있으랴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을 끌어당겨 안아봐도 그 꿈은 꿈일 뿐
지금도 여기 있어
꿈결에라도 갈 수 있었던 그 나라,
오래 동경해 마지않던 머나먼 그 나라에
가 본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 먼 나라를 동경해 마지않을 것이다
정적靜寂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9번
마지막 악장을 듣는다
누군가 느릿느릿 걷다가
걸음을 멈췄는지 어디로 갔는지
발소리도 사라져 버린다
그래도 귀를 기울인다
그 뒷모습이 흐리게 떠오른다
부활절 아침
그분이 그리워서
말러의 교향곡 2번을 듣는다
간밤 꿈속에서도 만난 그분을
이 지상에서는 만날 수 없어
그 꿈속에라도 되돌아가 보고 싶어서다
눈을 감은 채 교향악을 듣고 있는 동안
그분이 떠나시던 날에 이어
지난날들이 선연히 다가온다
창 너머엔 새들도 합창하는
부활절 아침이다
노트르담*의 청동 수탉
왜관 베네딕트수도원의 청동 수탉을
두 손을 모으며 바라본다
눈을 감으면 오래전 파리 여행길에
쳐다보던 노트르담대성당 첨탑의
그 청동 수탉이 날아드는 것 같다
악마를 물리치며 늘 깨어있으라고
눈뜨든 눈을 감고 있든 한결같이
말보다 높은 묵언으로 말하는 걸까
화마 이기고 첨탑에 다시
날아오른 노트르담 수탉을 떠올린다
*‘성모 마리아’를 이르는 말
반가사유상
파리의 로댕미술관에서
생각하는 사람 조각을 바라보는데
오래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본
반가사유상이 슬며시 겹쳐 보인다
지옥문에 이를까 우려가 앞서선지
지치고 힘들어 찾아간 반가사유상이
안겨주던 느낌 때문인지 모르겠다
로댕미술관을 나서다가 멈춰 서니
웬일인지 반가사유상이 다가와
마음속에 반가부좌로 앉는 것 같다
내가 중생이기 때문일까
절벽 위의 부처
절벽 위의 부처는 서천을 우러른다
강가의 절벽에 가부좌 틀고 앉아 왜
두 눈을 빼가고 코를 떼가 버려도
오른손을 들고 왼손 드리운 채
눈코 없이 마음으로만 내려다보고 있을까
코도 눈도 다 가져간 중생들을
서천으로 인도하려고 저러는 걸까
끝없이 흐르는 강물 소리 깔고 앉아
절벽 위의 부처는 서천만 우러른다
열암곡* 부처
신라를 품고 땅속에 엎드려 있던
열암곡 부처는 유난히 귀가 크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땅속에 엎드린 채
온갖 세상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오로지 묵언수행,
머나먼 불국정토를 꿈꾸어왔을까
이제야 중생들 모여 입불을 기도하니
그 염원에 귀 기울여 헤아리면서
새천년 새 세상 환히 밝히시려나
*경주 남산의 계곡
서출지書出池* 까마귀
옛 전설 떠올리며 새기고 있는데
서출지로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든다
쥐와 함께 위태로운 나라를 구했다는
전설 속 그 까마귀 후예가 아닐는지
그 옛일을 되새기며 바라보니
쥐를 만나러 가기라도 하는 건지
이내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
이 못에서 나온 편지를 전해줬다는
전설 속 노인도 어른대는 것만 같다
아득한 하늘을 한참 바라보고 있으니
서출지로 까마귀가 다시 날아온다
*신라 소지왕이 행차 때 까마귀와 쥐가 까마귀 날아가는 곳을 따라가 보라고 알려줘 장수가 따라가다가 놓쳤으나 그때 한 노인이 못에서 나온 봉투를 전해줘 편지 내용대로 왕이 거문고 갑을 활로 쏘자 왕비와 모의해 왕을 헤치려던 승려가 죽었다는 사금갑射琴匣 전설이 전하는데 그 글(편지)이 나온 못이라고 붙여진 이름.
숲속의 나무
숲속의 나무는 높이 가지를 뻗는다
하늘을 향해서 올곧게 자라난다
서로 햇빛을 많이 차지하려
안간힘으로 발돋움하기 때문이다
홀로 크는 나무는 제멋대로 자란다
하늘과 햇빛의 소중함도 잘 모른다
세상사도 별반 다르지 않다
어우러져 서로가 크기 위해
치열하게 각축해야 모두 크게 된다
홀로 자족하면 높이 자라지 못하며
하늘도 받들 줄 모르게 마련이다
다만 함께 살려고 해야 한다
상대의 파멸도 내게로 돌아온다
숲속의 나무는 그 이치를 말해준다
앞뜰의 소나무
앞뜰의 소나무가 하늘을 받들고 있다
어제도 오늘도 계절이 바뀌어도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
한결같은 자세와 빛깔 그대로다
그 옆으로 다가가서 하늘을 우러른다
후창後唱
해종일 후렴만 부른 걸까
대자연의 노래를 새겨들으면서
마음에 아로새겨진 구절만 노래했던가
어제도 오늘도, 어쩌면 내일도
후창만 하게 될는지 몰라
자연은 언제나 나를 품어주고
한결같이 그윽한 노래를 들려주므로,
봄이 오면 꽃들이 피어오르고
새들이 날아와 꽃잎 위에
아름다운 노래를 포개 주지만
나는 그 후렴만 따라 부르고 있었던가
자연의 노래는 한량이 없으므로
후창만 해도 좋은 것일까
오래된 탁상시계
책상 의자에 앉아 졸다가 깨다 하다가
탁상시계를 보니 가다가 말다가 한다
시간은 같은 걸음으로만 가겠지만
가다가 말다가 하고 졸다가 깨다가 하니
시간이 나의 것이 되는 것도 같다
탁상시계도 나와 보조를 맞추는 걸까
가도 그만 가지 않아도 그만인가 보다
우주와 나 2
나를 들여다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작아지다 커지다가 작아진다
안 보이다 보이다 말다가 한다
나를 찾아 헤맨 지난 세월이
멀어지다 가까워지다 말다 한다
나는 점 같고 티끌 하나같다
숲속의 한 잎 나뭇잎 같기도 하고
허공에 흘러가는 뜬구름이다
내가 그런 나를 들여다봐야 하고
바라볼 수밖에 없기도 하다
하지만 우주는 나를 품어 준다
나도 우주를 품으려고 하고
우주를 내가 품어 안는 것도 같다
우주와 나 3
눈감으면 내가 안 보인다
눈떠도 내가 안 보인다
눈뜨니 우주 안에 있다
눈감아도 우주 안에 있다
착각, 환상
눈부시면 착각할 때가 있다
양지쪽 사금파리가 되쏘는 빛에
현혹될 때도 있었다
겉치레가 눈부신 사람에게 속아
낭패 본 적도 있다
착각이라 할지라도
되쏘는 빛에 이끌리어 붙잡힌다
아침 강물의 윤슬과
밤바다에 뜨는 은파가 그러하다
이 잔물결들은 마음 붙든다
착각하면 낭패 보기 일쑤더라도
마냥 붙들려 있고 싶을 때도 있다
아름다운 환상에 젖고 싶어서다
방하착放下著
내가 어디로 가려 하는지
무엇을 얻으려는지
어디에 가서 무얼 채우려 하며
무얼 채운 뒤 돌아오려 하는지
내가 아닌 그 나를
내려놓아야만 하는 것을
Ⅳ
산수유마을
지금쯤 산수유 열매가 빨갛게 익고 있겠지요
앞뜰의 남천 열매들을 바라보다
불현듯 마음은 숲실마을*로 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대개 마을을 떠나고
살고 있는 사람보다 훨씬 많은 산수유나무가
예같이 개울가에 줄지어 서서
빨간 속마음을 가지마다 매달고 있겠지요
고향마을에서 오리 고개 넘던
까마득한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건 왜인지요
예순 해 넘도록 소식을 모르는
뺨이 빨간 소녀도 보고 싶기 때문일까요
어느 하늘 아래서 살고 있는지
다른 세상으로 떠나버렸는지도 알 수 없지만
오래된 기억들이 잊히지 않아요
고향마을 지나 오리 고갯길을 넘어갑니다
빨간 남천 열매들이 추억 아련한
그 시절의 산수유마을로 마음을 데리고 갑니다
*경북 의성군 사곡면 산수유군락지
막내아우
간밤 꿈이 눈앞에 어른대고 있어요
세상을 떠난 지 스무 해나 된 막내아우가
내 서재에 앉아 글을 쓰고 있더군요
내 시에 대한 평론을 쓰는 것 같았지요
생전에 한 번도 쓰지 않아서일까요
옛모습 그대로여서 두 남매 이야기로
운을 떼자 멋쩍은 듯한 표정이더니
아들은 영화 연출가이며 딸은 판사라고
스무 해 이쪽도 훤히 보고 있더군요
그 순간 잠을 깼지만 생생한 장면이었지요
너무 선명해 간밤 꿈 같질 않아요
막내아우를 영원히 만날 수 없겠지만
꿈속에서 가끔 만나요
아버지, 어머니, 바로 밑의 동생,
누나와 누이보다 자주 만나요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더러는
막내아우가 생전 모습 그대로
서재나 잠자리로 찾아오곤 해요
방황 기질이 다분해서
저승에서도 안주하지 못해 그럴는지요
한겨울 바람
―누이 영주에게
한겨울 바람이 왜 이다지 차가울까
모처럼 고향 들르니 옛 생각 하염없건만
그 옛날은 세월 저편에 다 묻혀버렸네
온돌방 아랫목 그리운 옛집도 사라지고
가버린 가족들 얼굴 차례로 다가와서는
지난날을 아프게 돌아보게 하네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자라면서
병치레가 잦던 너는 내리사랑 결핍증과
성취 불만으로 헤맨 걸 나는 알고 있어
(네가 갓난아기였을 때 아버지는
한겨울 어느 날 세상 떠나셨지)
하나 남은 동생에게 무심하다는 네 말
옛집 빈터를 바라보니 왜 이리 아릴까
어린 네 모습이 자꾸만 떠오르네
앞만 바라보면서 걷던 지난 세월,
앞뒤, 옆도 보며 걸으려는 지금까지도
네게 무심하다면 마음 고쳐 새길 거야
너나 나나 옛날같이 살지는 않는데도
가버린 옛날이 어른대는 옛집 빈터에선
한겨울 바람이 왜 이다지 차가울까
이수 형*
마지막 본 형 뒷모습이 눈에 선하네
오늘은 모처럼 영도 형과 함께
셋이 산책하던 산자락을 걷고 있어
낙엽이 자꾸만 발치에 떨어지고
멧새들이 차례로 지저귀다 날아가네
형 생각하면 저승도 먼 곳이 아닌가 봐
다음에 만나기로 한 약속 날보다
며칠이나 먼저 홀연 그렇게 떠나가다니
산모롱이를 돌다 보니 꿈결과도 같이
형 앞모습도 선연히 다가오더군
이젠 다 나았다고 환하게 웃던 얼굴
손을 잡던 그 따스한 마음까지,
부디 하늘나라에선 아프지 않길 빌어
*갑자기 세상을 떠난 재종형
옛 술친구
오랜만에 옛 술친구가 전화를 했다
아직 술을 안 끊었는지 궁금한 모양이다
예전 같진 않아도 술이 나를 찾는다니
만나면 술판 벌이자던 그의 목소리가
풀 죽은 듯 기어드는 것 같았다
옛날처럼 몸이 마음 같지 않아
술을 못 마시는 지 오래됐단다
지난날이 그림 같아서 아쉽다며
산수傘壽 맞으니 사는 게 뜬구름 같고
달에 구름이 가듯이 가는 것도 같단다
그는 술시면 마음만 술잔을 든다고 한다
술잔을 들려던 참이라 마음 아리다
술친구 생각 1
발치에 나뭇잎이 떨어진다
발길을 멈추고 발치를 내려다본다
나뭇잎이 바람에 날려간다
때마침 휴대전화가 진동해
확인하니 가깝던 술친구 부음이다
나뭇잎 하나 눈앞에 떨어진다
―그와 함께 술 마실 수 없어지다니
바람이 나뭇잎을 데리고 간다
바람을 따라 어디까지 날아갔는지
안 보이는 곳으로 간 걸까
그 친구도 멀리 바람 따라
안 보이는 나라로 가버린 것 같다
거기도 술친구가 있으려나
술친구 생각 2
그 술친구와 마주 앉았던 빈자리에
적막이 앉아 있다
그 빈자리보다도 더 적막한 것은
바라보는 내 마음이다
오랫동안 서로 술잔을 채워주었지만
술만 나누기보다 마음을 주고받았다
술은 우리를 이어주고
하나로 묶어주는 마중물이었으며
윤활유이기도 했다
그의 빈자리에 내 마음이 앉아 있다
뜬구름 1
지나온 길이 희미하다
되돌아보면 저만큼 사라져간다
갈 길은 더더욱 희미하다
흘러가는 구름이 나를 내려다본다
나도 저 뜬구름 같기 때문일까
나는 흘러가는 구름을 올려다본다
나는 저와 무엇이 다를까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 간다
하늘엔 구름이 떠간다
뜬구름 2
발도 없는 구름이 간다
안 보이는 바퀴도 없이 간다
허공에 떠서 허공 길을 간다
내 마음아, 너도 구름처럼 간다
발이 없이도 무명 길을 간다
속절없이 가듯 말 듯이 간다
가지 않으려 해도 간다
뜬구름 3
고향에 가니 옛집이 사라지고 없다
빈터에 우거진 잡초들
우리가 떠난 뒤 살던 사람들도 떠나고
퇴락한 채 남아 있었는데
한 해 사이 잡초들 세상이 되어버렸다
고향에 가면 가장 먼저 들르던 빈집이
옛날을 데려다줘 바라보기라도 했는데
이젠 잡초들이 먼 하늘을
올려다보게 할 뿐 뜬구름이 흘러간다
고향도 옛날도 옛집도
무심한 세월의 뜬구름 같아 보인다
맥문동꽃
허물어지고 없는 옛집 빈터에
맥문동 꽃대가 오종종
보랏빛 꽃들을 매달고 있다
응달에 오종종 앉아서
안 오시는 아버지를 기다리던
그 누이도 아우들마저
먼 세상으로 떠나가 버렸다
기다리던 그때 마음이
맥문동꽃들로 매달린 것 같다
그녀의 눈물방울
그녀 얼굴에 맺혀있는 눈물방울은
흘러내리지 않는다
한순간이 투명하게 멈춰버린 걸까
마치 만 레이* 사진 속의 유리 눈물 같다
눈물과 눈물 같은 건 분명히 다르더라도
눈물 같은 게 눈물보다 눈물 같다
그녀의 눈물방울은
유리 눈물처럼 미라화된 슬픔일까
*미국의 초현실주의 사진작가(1890~1976)
미묵眉墨
옛날 미인도의 여인 눈썹이 예쁘다
숯가루를 기름에 풀어 만든 먹을
눈썹벼루에 갈아서 가는 붓으로 그렸겠지
예뻐 보이고 싶어 하는 여자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한가지이겠지만
미묵을 만들어준 사람은 누구였을까
눈썹벼루와 함께 남자가 만들어줬던 걸까
여자는 남자에게 예뻐 뵈려 하고
남자들은 예쁜 여자들을 좋아하니까
명태
남이 제 이름을 지어준 사람들은
남의 이름 짓기를 좋아하는가 봐요
이름은 바로 존재 그 자체라 그런지요
북어라고도 하는 명태는 대표적인 경우지요
이름이 너무 많아서 어지러울 정도니까요
명천의 어부 태 씨가 낯선 고기를 잡아서
지명 앞 자와 성을 따서 명태라 했다는데
봄에 잡히면 춘태, 가을에 잡히면 추태라고
하다가도 값이 비싸지면 금태라 한다지요
그물로 잡으면 망태, 낚시로 낚으면 조태,
생물 그대로는 생태, 얼리면 동태라 하고
말리면 구태지만 햇볕에 말리면 햇태라네요
잘 말리면 건태, 오래 말리면 먹태, 흑태,
소금에 절여서 말리면 염태라고 부르지요
껍질을 벗겨내고 말리면 백태라고 하지만
반으로 갈라서 말리면 짝태라고도 하네요
신선한 명태를 바로 가공한 걸 선태라 하며
겨울바람에 얼었다 녹았다가 건조된 것은
황태라고 부르는데 거칠게 건조되면 파태,
너무 딱딱하게 마르면 깡태라고 한다나요
대가리를 없애고 말리면 무두태라고 하나
대가리가 없어도 반쪽만 말리면 코다리지요
명태알들을 소금에 절여서 만든 명란젓과
창자로 담근 창난젓 반찬을 좋아하시나요
맥주 마실 때 명태 새끼를 말린 노가리를,
해장할 때는 북어국도 즐기지 않으시는지요
그러나 명태가 너무 가련하지 않으세요
그 이름만큼이나 각양각색의 수모도
제 본위의 사람들이 떠안기니까요
아는 척에 대해
모르는 게 아는 것보다
얼마나 더 많은지,
많다기보다 거의 대부분이란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기 때문에
아는 척하게 되지 않을지
적지 않은 사람이 적잖이
아는 것만 안다고 하지 않는 건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기보다는
모르면서 아는 척,
바로 알지 못해서이다
‘아는 걸 안다 하고
모르는 걸 모른다 하는 게
바로 아는 거다’*라고
일찍이 공자가 말하지 않았던가
소크라테스도 너 자신을 알라고
바로 알고 있는 것은
모르는 걸 아는 것이라고
일깨우지 않았던가
가까운 지기 중 한 사람은
언제나 아는 척하지만 아마도
모르는 걸 모르는 것 같다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논어』 위정편 17장)
나의 언덕
요즘은 기댈 언덕이 시라고 해야 할지
해종일 헤매다 돌아와서는
나를 찾지 못한 내가
그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
시를 쓰고 그 언덕에 기대보는 일이니
시를 쓰면서
새 옷을 입으니 마음도 새로워진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던가
겉치레에 자주 마음이 가는 것은
형식이 내용의 그릇이 되어주기 때문일까
시를 쓸 때 겉모습에 신경 쓰이는 건
내용을 가지런하게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건 마음가짐이겠지만
담아내는 그릇도 제격이어야
날개를 달게 되기도 하지 않을는지
나의 시법詩法
일종의 편집증일는지도 모르겠어요
시의 행과 연이 가지런하지 않으면
마음에 차지 않아 고치는 버릇이 생겨서요
2010년대 중반 무렵부터 한결같이
음악의 A-B-A 형식을 기본으로
A-B-A-C, A-B-C, A-A 형식으로
행과 연의 배열이 변형되기도 해요
게다가 시각적인 효과를 내려고
연과 행이 대칭되도록 배열하지요
그래야만 시가 가지런하고 정갈해지거든요
자수율과 음수율을 안 지키는 대신
미술과 음악의 요소를 끌어왔지요
이즈음의 제 시를 보세요
예외가 거의 없을 거에요
어떤 시인은 이를 포멀리즘이라 하고
또 어떤 시인은 댄디즘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이 버릇을 고치고 싶진 않아요
세태 탓인지도 모르겠으나
너무 분방하거나 무질서하면 싫거든요
술맛도 술에 어울리는 술잔이 제격이죠
형식이 내용의 품격을 높여주니까요
<해설>
물소리 안고 가는 적멸궁 한 채
박진임(문학평론가, 평택대 교수)
1. 삶이 잠깐 꾸는 꿈이라면 시는 그 꿈속의 꿈
시인은 이 지구를 떠나 머나먼 다른 행성에 사는 사람이리라. 언제나 꿈꾸는 존재이리라. 이태수 시인은 삶이 곧 꿈이고 시는 그 꿈속의 꿈이라는 것을 선명하게 깨우쳐주는 시인이다. 아침에 꿈에서 깨어나도 시인은 그 꿈이 연장된 공간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듯하다. 꿈에서처럼 세상을 보고 또 그 꿈의 장면들을 직접 다시 연출하듯 하루하루 살아가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태수 시인은 삶이 곧 한 편의 시라고 믿으며 시의 나라로 스스로 망명해 간 시인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미국 시인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는 말한 바 있다. 시인과 작가는 상상력을 제3의 행성으로 여기는 사람이라고. 그들은 상상력의 힘으로 이 광활한 우주 공간 속에 새로운 행성 하나를 창조해 내고 그 행성의 낯선 공간 속으로 독자들을 이주시키는 개척자라고 보았다. 스티븐스의 견해에 공감하면서 문학비평가 헬렌 벤들러Helen Vendler는 “상상력의 빛 속에서는 하나의 풍경도 또 다른 제3의 풍경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독자는 시인이 건설한 새로운 세상의 빛으로 사물을 보게 된다고 이른다.
스티븐스와 벤들러가 일컫는 상상력은 이태수 시인에게는 꿈이라는 단어로 다가온다. 시인은 꿈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왕국에 머물면서 독자를 손님으로 맞는다. 그의 시를 읽는 독자들만이 시인이 꾸는 꿈속 공간으로 초대받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마치도 정중한 옷차림을 한 신사가 마차에서 내려 흰 장갑 낀 손을 내밀면 귀부인이 그 손을 잡고 빛나는 황금 마차에 올라타고 함께 길을 떠나는 것과 같다. 시인이 꾸는 꿈이 휘황찬란한 궁전의 무도회라면 귀부인은 음악에 맞추어 그와 손잡고 황홀한 춤을 추게 된다. 밤 열두 시를 알리는 종이 울려도 무도회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 꿈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나고자 결심하기 전에는 꿈은 지속될 것이고 무도회도 그러할 것이다. 꿈보다 현실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아마도 마차에 올라타지 않을 것이며 오로지 꿈의 소중함을 아는 이들만이 그 고귀한 시간대를 향유할 것이다.
비평가 헤럴드 블룸Harold Bloom은 “시의 효용은 그 철저한 비효용성에 있다”고 이른 바 있다. 일상에서는 참으로 쓸모가 없는 것, 그러나 효용성을 챙기는 데에는 무심한 존재들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것, 그것이 시이리라. 그렇다면 시와 무도회는 효용성이 없다는 점에서 서로 무척 닮았다. 유희가 일만큼 소중하다고 여기는 이들, 혹은 일보다 유희가 더 값진 것일 수 있음을 믿는 이들만이 시를 읽고 춤을 추는 것 아니겠는가?
이태수 시인의 시어들이 펼쳐 보이는 시적 공간은 과연 꿈의 공간 그 자체이다. 시인은 아침이나 저녁이나 산책하고 배회하며 흘러간 시간의 기억을 쓰고 다가올 날에 대한 기대를 쓴다. 살펴보면 이태수 시인은 일관되게 제3의 행성에 머물러 온 시인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펴낸 시집의 제목들은 시인이 한결같이 꿈의 공간 속에 머물며 꿈속의 꿈을 그려왔음을 보여준다. 1979년의 『그림자의 그늘』부터 그러하다. 그림자도 꿈을 닮은 것이며 그 그림자의 그늘은 꿈속의 꿈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어진 『우울한 비상의 꿈』에서 시인은 비상이 지니는 상승의 기운을 노래하면서도 그 기운을 ‘우울한’이라는 수식어에 갇히게 만들면서 그의 외로운 꿈을 가늠할 수 있게 했다. 『물속의 푸른 방』에 담긴 심상도 외로운 꿈의 이미지를 연장하고 있다. ‘물속의 푸른 방’도 결국은 현실과 유리된 꿈의 공간을 지시하는 언어라 할 수 있다. 꿈은 종종 흐르는 물의 이미지로 드러나곤 하며 물속에 있는 방은 자신만의 꿈에 갇힌 시적 자아의 재현으로 읽을 수 있다.
『꿈속의 사닥다리』에서는 그가 꾸는 꿈의 성격이 한결 명료해진다. 꿈의 공간 안에서 초월과 상승을 지향하며 현실을 견디는 시적 화자의 목소리를 그 시집에서 찾아볼 수 있다. 『거울이 나를 본다』에 등장하는 거울 또한 꿈의 다른 이름으로 읽힌다. 현실에서의 거울은 사람의 모습을 반영하는 매체이지만 이태수 시인은 오히려 그 거울이 시인 자신을 응시한다고 노래했다. 그리하여 거울이라는 객체와 시적 화자인 주체의 자리가 뒤바뀌고 있는 공간을 형성해 냈다. 그 공간에서 거울은 무심한 대상이기를 멈추고 시인과 영혼의 대화를 나누는 인격체로 새롭게 태어난다. 사물이 숨을 쉬며 말을 걸어오는 나라, 그것도 바라보는 자의 모습을 그대로 솔직하게 보여주면서 긴밀한 대화를 소망하는 존재로 거울이 등장하고 있다.
최근의 시선집 『잠깐 꾸는 꿈같이』는 그의 꿈이 지니는 현재적 의미를 명료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삶이 꿈이고 꿈이 삶이며 시는 꿈을 꾸듯 삶을 살아가는 시인이 꿈속에서 다시 꾸는 꿈일 뿐, 그밖에 달리 무엇이겠는가 하고 시인은 묻고 있다. “잠깐 꾸는 꿈” 구절은 그처럼 우리 삶의 유한성을 지시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진정 소중한 것은 그러한 삶의 한계 너머에 존재하는 꿈의 꿈이라고 이른다. 그러므로 꿈 혹은 꿈속의 꿈이라는 주제어는 그의 시 세계 전반을 설명하는 소중한 시어라 할 수 있다.
이번 시집에서도 이태수 시인의 꿈은 새롭게 모습을 바꾸어 나타난다. 시인은 꿈만이 고단한 우리의 삶을 견뎌 가게 하는 것이며 꿈꾸는 자만이 경직된 사유를 넘어서서 유연하게 넘나들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작은 꿈」은 하나의 꿈에서 또 하나의 꿈으로 이어지는 꿈의 세계가 이태수 시인이 거하는 나라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한다.
나는 이슬방울 같은 거겠지요
풀잎에 맺혔다가 때가 되면
기화하거나 흘러내리고 마는 이슬방울
나도 맑고 깨끗하게 글썽이려 꿈꾸다가
때가 되면 미련마저 버리고
여기에서 떠나야만 할 테지요
나는 꿈꾸는 이슬방울과 같고
이곳은 하나의 풀잎 같으니
이 풀잎은 단 한 번의 내 우주이겠지요
나는 작지만 명징하게 반짝이다 가는
한 방울 풀잎 위의 이슬방울
꿈꾸며 글썽이다 그 꿈에 드는,
―「작은 꿈」 전문
이 시에서 풀잎과 이슬은 곧 이태수 시인의 꿈의 자취이며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은 이 땅의 이름 없는 풀잎 하나를 “내 우주”라 부르고 그 풀잎 위에 잠시 머물면서 반짝이는 작은 이슬방울 하나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풀잎이 시인의 세계이며 이슬이 자신의 분신이라고 노래하는 것이다. 풀잎과 이슬이라는, 그토록 사소한 대상들이 세계와 자아의 상징이 되는 곳에 이태수 시인은 여전히, 오래도록 머물고 있다. 처음부터 그러했듯 여전히 “꿈꾸며 글썽이다 그 꿈에 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꿈에서 꿈으로 이어지는 꿈길의 궤도가 선연히 떠오른다. 「작은 꿈」에 이르러서 이태수 시인 고유의 꿈의 시학이 마침내 이른 곳을 찾아볼 수 있다.
2. 꿈 혹은 제3 행성의 시간과 역설의 미학
이태수 시인의 제3 행성에서는 시간의 전개 과정도 꿈의 구조를 닮아있다. 그 행성에서는 시간도 고유한 방식을 지닌 채 흐르면서 시인의 삶과 꿈을 매끈하게 봉합한다. 일반적인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의 순서로 흐르는 반면 꿈의 공간에서는 그러한 선조적 양상이 사라지고 서로 뒤섞이고 엉킨다. 마치도 피카소의 그림에서 보이는 조각난 형상들처럼 불연속적으로 연결된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시간 개념을 빌려 이야기의 정체를 규명한 바 있다. 그는 이야기의 시작은 그 이전이 없는 것이며 그 끝은 그 이후가 없는 것이라고 일렀다. 한편으로는 너무나 자명해 보이는 이치이지만 공간과 시간에 대한 설명이 아예 없었던 시절,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게 설명하며 이야기 혹은 문학이라는 텍스트를 현실 속의 무수한 발화들과 구분하였다. 문학 작품이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그처럼 시작 이전에 아무것도 없어야 하고 종결 이후에도 달리 남은 이야기가 없어야 하는 것이다. 선조적 형태로 진행되는 시간의 흐름을 분절하면서 텍스트의 완결성을 강조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관이 인류가 지닌 시학의 초기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문학 이론이 달리 존재하지 않던 시절인지라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과 시간의 관련 양상에 대해 그처럼 단순한 정의를 이루어내면서 문학 텍스트를 규명하고 그것으로써 하나의 이정표 역할을 하게 했다.
그러나 이태수 시인의 텍스트는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의 대척점에서 전개되고 있다. 시작도 끝도 특정하기 어려운 꿈의 시간대를 제시하면서, 그리하여 그처럼 선조적인 사유 방식에 적극적으로 의문을 보내면서 이태수 시인은 자신의 텍스트를 전개한다. 시작과 끝이 분절되지 않는 시간대와 선조적인 진행을 거부하고 역진하거나 순환하는 시간대가 그의 텍스트를 지배한다. 아마도 그런 불연속적 시간성이 가장 시적인 시간성이기 때문에 그러한지도 모를 일이다. 미국 시인 조리 그레이엄Jorie Graham의 말을 상기해 보면 불연속성과 모순성이야말로 시의 중추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시는 다른 서사가 줄 수 없는 것을 준다. 서사에서 나타나는 논리, 지속성, 설명의 투명성을 시는 요구하지 않는다. 꿈의 구조와도 유사한, 비논리성이 시의 본질이다”라고 그레이엄은 설명했다.
이태수 시인의 제3 행성에서 시간은 그처럼 단속적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바로 그 점이 이태수 텍스트의 고유성을 담보하는 요소들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오래된 탁상시계」는 이태수 시의 고유한 텍스트성, 그 공간과 시간의 미학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시편이라 할 수 있다.
책상 의자에 앉아 졸다가 깨다 하다가
탁상시계를 보니 가다가 말다가 한다
시간은 같은 걸음으로만 가겠지만
가다가 말다가 하고 졸다가 깨다가 하니
시간이 나의 것이 되는 것도 같다
탁상시계도 나와 보조를 맞추는 걸까
가도 그만 가지 않아도 그만인가 보다
―「오래된 탁상시계」 전문
실용과 효용이 지배하는 공간, 즉 선조적 시간대를 숭상하는 공간에는 오래된 시계를 위한 자리가 없다. 시계는 시간의 흐름을 정확하게 지시하는 것이 그 본질적 기능이다. 그러므로 오래되어 그 역할 수행을 할 수 없게 된 시계는 폐품이 되어 버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오래된 시계가 시인이 거주하는 특이한 공간, 이를테면 제3의 행성인 꿈의 공간에서는 매우 적절한 역할 수행을 한다. “탁상시계도 나와 보조를 맞추는 걸까”라고 시인이 노래하듯 “가도 그만 가지 않아도 그만”인 그런 시간대를 시인이 향유하면서 꿈꾸기를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가다가 말다가 하고 졸다가 깨다가 하니”라는 구절에서 보듯 그 시계는 시인의 꿈의 속도와 보조를 맞추면서 시인의 불연속적 시간성과 비선조적 시간대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장치로 변모해 있다.
그렇다면 오래된 시계는 시인의 꿈을 가장 잘 이해하고 그 꿈의 흔적을 존중하는, 시인의 충실하고 믿음직한 도제徒弟가 아니겠는가? 오래 묵은 포도주나 오래 사귄 친구처럼 오래도록 시인의 책상을 지켜온 탁상시계가 시인의 영혼을 가장 잘 지켜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시인 또한 시계의 존재 의미를 긍정하며 읊는다. “시간이 나의 것이 되는 것도 같다”고. 시인이 선조적 시간의 공식에 이끌리는 수동적 존재가 되기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꿈의 공간에 스스로를 유폐할 때, 오래된 시계가 그의 동반자가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오래된 시계는 기꺼이 시인이 지닌 삶의 소품들을 지게에 지고 먼저 길을 나서고 있다. 그리하여 시인이 지닌 고유한 꿈의 시간이 진정 그의 것이 될 수 있도록 돕는다.
충직한 동반자를 곁에 두고 걷고 있는 시인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인다. 현실에서는 버림받는 오래된 시계가 시인이 전유한 꿈의 시간대를 온전한 그의 시간으로 변화시키는 소중한 존재로 변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다 말다, 멈추었다가 다시 가곤 하는 시곗바늘이야말로, 현실과 몽상 사이, 길 떠남과 멈춤 사이, 경험과 추억 사이를 넘나들면서 가다가는 멈추고 멈추는가 하면 다시 가는 시적 화자의 불연속적 시간대를 그대로 지시하고 있다. 시계가 시인의 마음을 읽고 시침과 분침으로 알려주고 있으니 이태수 시인의 꿈의 나라는 앨리스가 사는 이상한 나라일지도 모른다. 규칙성을 지니고 질서정연하게 진행되는 시간관 앞에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서로 섞일 이유 없이 분절되고 대립한다. 그러므로 그런 균질적인 시간대는 이항 대립의 사유 방식을 그대로 반영할 수밖에 없다.
이태수 시인의 시 세계에서는 시간이 비선조성을 지닌 것이듯 공간도 이항 대립의 구조를 거부하는 공간이다. 상상력의 제3 행성은 역설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 나라에서는 어떤 대상도 견고하게 유지되거나 고착되어 있지 않고, 서로 열려 있으며 순환하고 흐른다. 그처럼 이태수 시인의 텍스트 내부를 구성하는 꿈의 시공간은 한편으로는 삶과 예술에 대한 그의 철학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앎과 모름 사이, 찰나와 영원 사이, 있음과 없음 사이의 경계가 그다지 견고하지 않음을 보여주면서 이태수 시인은 거뜬히 그 경계를 넘어서거나 그 분절점 위에 서는 텍스트를 제시하곤 한다.
이를테면 「아는 척에 대해」에서는 지知와 부지不知의 경계가 무너지고, 「지금 여기」에서는 찰나와 영원이 서로 어우러진다. 「겨울나기」에서는 존재와 부재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비움의 의미가 새롭게 드러난다. 「첫눈을 기다리며」에서는 침묵과 발화 사이의 구별이 흐려지면서 침묵과 발화의 의미가 다시 정의되기도 한다. 「빈 항아리」와 「속‧달항아리」에서는 비움과 채움이 서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성을 지닌 개념임을 천명하기도 한다. 비움과 채움이 서로 그러안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비어 있는 항아리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시인이 그려내는 대상들은 고체의 모습으로 재현되는 경우가 드물다. 흐르는 냇물이나 기화될 이슬방울처럼 액상으로 존재한다. 그리하여 조화와 생성의 과정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다. 「지금 여기 2」를 보자.
여기 지금은 언제나 한순간이다
여기 그대로 있어도 지금은 떠난다
지금 이대로 있어도 여기는 바뀌고 만다
지금은 영원 속의 찰나지만
이 찰나는 여기의 영원이다
여기는 영원 속 한순간만 머무는 데지만
영원이 찰나를 품어 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는 찰나이자 영원이다
―「지금 여기 2」 전문
「지금 여기 2」에서는 찰나가 영원이고 영원이 찰나가 되는 역설 아닌 역설을 발견할 수 있다. 영원과 찰나는 대립하는 개념어로 우리에게 인식된다. 그러므로 현실에서는 영원이 찰나이고 찰나가 영원이라는 말은 역설로 들린다. 하지만 그 역설은 역설 아닌 역설이며 역설 너머의 역설이라 할 수 있다. 찰나가 모여 영원이 되고 찰나 속에는 영원의 씨앗이 묻혀있는 것이므로 찰나가 영원이라는 말은 곧 그대로 진실이기도 한 것이다. 그처럼 찰나와 영원에 대한 시인의 명상, 즉 찰나에서 영원을 보고 영원에서 찰나를 다시 찾는 자세는 이태수 시인의 철학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태수 시인은 조화와 생성을 존중하며 물상들이 서로 기대고 어우러지는 모습에서 역동적인 역易의 힘을 찾는다. 이태수 시인의 그러한 사유는 노자老子나 신학자 매리 데일리Mary Daly의 사상을 연상하게 한다.
노자는 일찍이 말했다. “밝고 걸어갈 수 있는 도는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도가 아니다. 명명된 이름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이름이 아니다.” 매리 데일리 또한 궁극적 실재는 창조성이며 창조성은 부단히 변화하는 역동적 역易이라고 보았다. 모든 것은 서로 맞물려 있어 변하고 또 변하게 마련인 것이고 그래서 음이 곧 양이고 양이 곧 음이 되는 것이다. 「겨울나기」는 비움이 곧 채움이고 채움이 다시 비움이 되는, 변화의 역동적 역易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텍스트이다.
겨울이 깊어가는 길목에 서서
온갖 기억을 지우고 비운다
떨칠 것을 다 떨쳐버린 나무들 사이
금강송 한 그루 독야청청
몸도 마음도 바꾸지 않고 서 있다
나를 내려다보는 것 같고
잎새 떨친 나무를 둘러보는 것 같다
겨울나기의 마음 깊숙이에
금강송 한 그루 들이고 싶다
온갖 기억을 다 비우고 지우더라도
오랜 꿈은 초심같이 예 그대로
그러안은 채 가꾸고 싶다
찬바람이 불고 눈보라칠지라도
기억의 빈터에는 새 꿈을 돋우면서
―「겨울나기」 전문
새로운 꿈이 돋아나기 위해서는 빈터가 필요하다고 시인은 이른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겨울을 맞는 계절에 지우고 비우는 일과 떨칠 것을 떨치는 일을 기억한다. 잎을 다 떨어내고 홀로 서는 겨울나무로부터 그처럼 비움의 철학을 배운다. 그 빈 자리에서 새 꿈이 새롭게 돋아날 것임을 알기에 비우고서 다시 꿈꾸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첫눈을 기다리며」에서 시인은 발화와 침묵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넘어서며 침묵의 의미를 되새긴다. 침묵의 발화에 귀 기울이면서 침묵 속에 담긴 지혜를 헤아린다.
가을이 가면 눈을 기다립니다
침묵이 잉태하다가 내려오는
눈은 신성한 말들을 거느리고 옵니다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기보다
하늘을 받들어 안고 내립니다
세상을 희디희게 감싸 안으며
지울 건 죄다 지우는가 하면
말하지 않는 말에 귀를 열게 합니다
눈은 창밖에만 내리지 않고
내 마음 빈 곳에도 내립니다
창가에서 첫눈을 기다립니다
가는 길이 외지고 고달파도
풍진세상에 휩쓸리지 않으려 합니다
새롭게 채워질 신성한 말을
그러안으려 마음 추스릅니다
―「첫눈을 기다리며」 전문
첫눈이라는 대상에게서 이태수 시인은 ‘말을 뛰어넘는 신성한 말’의 이미지를 찾아낸다. 그 말은 “침묵이 잉태하다가 내려오는” 말이며 그러므로 침묵을 통하여 발화되는 말은 신성한 말이라고 일컫는다. 신성한 말로서의 눈은 “말하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하늘을 받들어 안고 내린다고 노래한다. 첫눈은 곧 하늘의 말이라는 의미이다. 말없이 고이 내려앉는 것으로 완성되는 뜻깊은 말, 말하지 않는 말에 귀 기울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마음 추스르는 것밖에는 달리 없는 것 같다. 침묵의 말, 혹은 말하지 않는 말의 함의는 다시 그림자가 제시하는 역설로 연장된다. 「그림자」 또한 소멸과 확장 사이에서 작동하는 역의 원리를 깨우쳐주고 있다.
석양 무렵 길어지다가 사라지는
나무그림자를 바라본다
길어지다가 사라지는 그림자가
어디 나무그림자뿐이랴
사라질 땐 대개 그러지 않았던가
―「그림자」 전문
이태수 시인은 나무그림자에서 하나의 우로보로스Uroboros를 찾고 있다. 뱀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엉기어 있는 형상처럼, 양이 음이 되고 음은 다시 양이 되는 것이 세상의 조화이고 원리임을 깨우쳐준다. 한껏 길어지는 것은 곧 사라질 것임을 예감하게 하고 모든 사라지는 것은 사라지기 전에 한껏 길어지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 역설을 나무그림자에서 발견한다는 데에 시인의 창조성이 놓여 있다. 모순과 역설로 가득 찬 세계는 겸손히 자세를 낮춘 자에게만 그 내밀한 사연을 들려준다. 자연을 섬세한 눈길로 관찰하고 그 자연의 호흡에 맞추어 들숨 날숨을 쉬는 이에게만 포착되는 것이 자연의 미묘한 이치이다. 이태수 시인은 자연을 숭상하면서 그 자연 속에 깃들여 꿈꾸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한결같이 보여왔다.
현실보다는 꿈을, 권력보다는 순응을, 선조적 진보의 시간대보다는 불연속적인 분산의 시간대를 숭상하는 시인이기에 이태수 시인은 자연을 노래하면서도 후창과 후렴이라는 음악의 형식을 시적 이미지로 선택한다. 「후창後唱」을 보자.
해종일 후렴만 부른 걸까
대자연의 노래를 새겨들으면서
마음에 아로새겨진 구절만 노래했던가
어제도 오늘도, 어쩌면 내일도
후창만 하게 될는지 몰라
자연은 언제나 나를 품어주고
한결같이 그윽한 노래를 들려주므로,
봄이 오면 꽃들이 피어오르고
새들이 날아와 꽃잎 위에
아름다운 노래를 포개 주지만
나는 그 후렴만 따라 부르고 있었던가
자연의 노래는 한량이 없으므로
후창만 해도 좋은 것일까
―「후창後唱」 전문
뉘는 자연을 정복하거나 이용하려 하고 또 뉘는 뭇 악기로 이루어진 악단을 지휘하려 한다. 그러나 자연을 앞에 두고 이태수 시인은 선창先唱 아닌 후창을 선택한 채 자연의 노래에 후렴으로 화답한다. 자연의 조화로움을 바라보면서 파괴하지 않고 거스르지 않는 것도 미덕이거니와 후렴으로 자연의 노래를 부추기는 일, 그것이야말로 꿈꾸는 시인이 맡아야 할 일이다. 현실에서는 무수한 사람들이 진보와 성취를 향해 달려가면서 자연에 생채기를 내고 있지만 시인은 그 무리에서 벗어나 소요하는 자이다. 자연 속 꽃 피는 모양이며 새 우는 소리를 따라가며 후창하는 것이야말로 꿈속에 거니는 시인에게 가장 어울리는 자세이리라.
3. 조화와 생성, 지와 부지, 역설과 화엄
이태수의 시 세계에서 드러나는 비선조적 시간성은 시간의 문제에 한정되지 않고 공간으로 확장되고 결국은 시인의 철학 전반을 설명하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빈 항아리가 드넓은 하늘을 품듯, 오래전 세상 떠난 아우가 꿈에 나타나서 시적 화자에게 현실을 설명해 주기도 한다. 고장 난 시계가 시적 화자가 통과하고 있는 불균질적인 시간대를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이태수 시인의 텍스트를 채우고 있는, 가역성을 내포한 대상들이 지니는 역동적 힘은 보다 확대되어 조화와 생성의 철학으로 연결되고 궁극적으로는 화엄의 사상에까지 이른다. 이태수 시인이 보여준 역설의 미학은 우주 전체에 산재해 있다. 먼저 「빈 항아리」는 역동적 역易의 의미를 가장 선명하게 구현하는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어 한편의 잘 빚어진 이미지즘의 시로 평가받을 수 있다.
담장 아래서 하늘을 품는 빈 항아리
비워 두었으므로 가득 차는 저 화엄
―「빈 항아리」 전문
이태수 시인은 한결같이 자신만의 빛으로 제3의 세계를 생성하고 그 세계 속에 자신이 발견한 오브제를 내려놓곤 한다. 「빈 항아리」에서는 빈 항아리를 스케치하면서 화엄의 세계를 그 화폭에 그려내는 것이다. 비어 있는 항아리만이 하늘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빈 항아리”의 ‘빈’은 “하늘을 품는”의 ‘품는’에 의하여 등장하면서 그 순간 바로 부정될 의미를 지닌다. 비워 둠과 가득 참이 그다음 행에 등장하면서 빈 항아리의 충만함이라는 역설의 의미를 더욱 확장한다. 그러므로 빈 항아리는 비어 있을 때만 창조성의 상징이 되고 스스로 궁극적 실재로까지 승화되게 된다. 비어 있으므로 하늘도 거기 머물고 흘러가는 구름도 쉬었다 가고 지나가는 바람 한 줄기도 그 안에 머물 수 있다. 텅 비어서 가장 충만해진다는 화엄의 진리를 그처럼 빈 항아리는 이미지로 드러내고 있다. 리파테르Michael Rifattere가 시는 “이것을 말하면서 저것을 가리키는 행위”라고 언급한 바 있듯이, 이태수 시인은 항아리를 형상화하면서 화엄 사상을 설법하고 있는 셈이다.
지와 부지 사이의 미묘한 변증법을 한 편의 텍스트로 승화하고 있는 「아는 척에 대해」를 보자. 논어는 제비가 따라 배워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하고 소리 내어 울고 맹자는 맹꽁이가 배워 “독낙락 여인낙락 숙락獨樂樂 與人樂樂 孰樂”이라 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 그리고 앎을 안다는 문제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일화이기도 하다.
모르는 게 아는 것보다
얼마나 더 많은지,
많다기보다 거의 대부분이란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기 때문에
아는 척하게 되지 않을지
적지 않은 사람이 적잖이
아는 것만 안다고 하지 않는 건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기보다는
모르면서 아는 척,
바로 알지 못해서이다
‘아는 걸 안다 하고
모르는 걸 모른다 하는 게
바로 아는 거다’*라고
일찍이 공자가 말하지 않았던가
소크라테스도 너 자신을 알라고
바로 알고 있는 것은
모르는 걸 아는 것이라고
일깨우지 않았던가
가까운 지기 중 한 사람은
언제나 아는 척하지만 아마도
모르는 걸 모르는 것 같다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논어』 위정편 17장)
―「아는 척에 대해」 전문
지와 부지 사이에서 이태수 시인은 말놀이 같은 시 한 편을 생성한다. 허공에 줄을 걸치고 그 위에 한 발로 걷는 광대가 되어 앎과 알지 못함 사이로 난 좁은 공간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한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서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이토록 쉽고 단순한 일이 왜 그다지도 실천되지 못하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렇게 앎과 모름 사이를 위태롭게 누비면서 이태수 시인은 텍스트 자체가 앎과 모름에 대해 되묻는 기제가 되도록 만든다. 둘째 연을 다시 읽어 보자.
적지 않은 사람이 적잖이
아는 것만 안다고 하지 않는 건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기보다는
모르면서 아는 척,
바로 알지 못해서이다
아는 것만 안다고 하기,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기, 모르면서 아는 척하기, 바로 알기, 바로 알지 못하기…텍스트 내부에서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 구부러진 공간이 여러 겹으로 형성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데리다Jacques Derrida가 “텍스트의 밖은 없다”, 즉 텍스트가 아닌 것은 없다고 말한 바 있듯이, 텍스트 자체가 앎과 모름에 대한 사색을 유도하는 거대한 질문으로 변모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텍스트를 구성하는 말들이 지닌 내부의 힘들은 함께 어우러져 역설의 미학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안다고 하는 것이 모른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귀착되고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앎이라는 것을 강조하게 된다. 공자 말씀으로 돌아가,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담백하게 말하는 것이 진정한 지자知者의 태도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만든다. 이태수 시인의 목소리에 공명하면서 에리히 프롬Erich Fromm도 또한 지와 부지 사이의 균형을 지적한 바 있다. 프롬이 논어를 읽고 공자의 가르침을 서구철학의 흐름 속에 녹여낸 것 같기도 하다. “도를 알고 있는 자는 도에 대해 말하려 하지 않고, 도에 대해 언제든지 말할 용의를 갖추고 있는 자는 도를 알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102면)
비우는 것이 곧 채움이라는 것을 알고, 고장 난 시계로 자신의 시간을 재며 길이 이끄는 대로 길을 나서는 삶, 그 발걸음마다 마주치게 되는 세상의 풍경과 물상들 속에서 때로는 겸손을, 때로는 허무를, 또 때로는 소중한 기억을 찾아내며 멈춤 없이 길을 가는 모습이 이태수 시인의 모습이다. 그 어떤 대상도 있는 그대로 고정되지 않으며 지각하고 감응하는 주체와의 상호 작용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는 까닭에 이태수 시인은 어떤 주제, 어떤 대상도 쉽게 단정하거나 규정하지 않는다. 동시적으로 반대 관계에 있는 존재도 한편으로는 내부적 힘의 균형과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보고 그것이 곧 우주의 운행 원리라고 보기에 이태수 시인은 계속하여 열려 있는 텍스트를 지향한다. 그의 텍스트에서 자주 역설의 미학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러므로 전혀 놀라울 일이 아니다. 오히려 지극히 자연스럽다.
4. 꿈과 서정, 맥문동꽃과 적멸궁 단풍
이태수 시인이 꿈의 시인이라면 그것은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서정시인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는 길이 이끄는 길을 나서며 꽃 피는 것 보고 새 우는 것 듣고 또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을 살피면서 이슬의 꿈을 다시 꾸고, 그 꿈속의 꿈을 필사하면서 더욱 깊은 꿈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시인이다. 그리고 그 꿈이 끝나는 자리를 자신의 소실점으로 삼고자 하는 시인이다.
「풍경, 늦가을 황혼」, 「맥문동꽃」, 그리고 「적멸궁 한 채」는 서정 시인으로서의 이태수 시인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 보여준다. 먼저, 꿈꾸면서 나이 들고 그렇게 순순히 적멸을 향해가는 여유로운 풍경을 그린 시편으로 「풍경, 늦가을 황혼」과 「적멸궁 한 채」를 들 수 있다. 「풍경, 늦가을 황혼」은 세월과 더불어 자연 속에 곱게 스며들기를 꿈꾸는 바람직한 노년의 고운 풍경화로 보인다.
홍단풍나무에 앉아 멧새들이 지저귄다
때마침 서녘 하늘에도 붉은 노을,
새 소리도 붉은빛을 보태는 것만 같다
장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노신사도
이 장면에 동참하고 있는 걸까
붉은 단풍과 서녘 하늘을 번갈아 바라본다
황혼 무렵의 아름답고 그윽한 풍경화 같다
어둠살이 느릿느릿 밀리어오고
저녁노을은 더욱 붉게 타오르고 있다
멧새는 단풍에 연신 노래를 끼얹는지
노을도 함께 예찬하고 있는 건지
더불어 노신사도 더욱 멋있어 보인다
―「풍경, 늦가을 황혼」 전문
황혼, 늦가을, 서녘 하늘, 어둠살, 저녁노을…늦가을이라는 계절의 아름다움이 황혼, 저녁노을, 그리고 서녘 하늘과 어울려 드러난다. 그리고 그 풍경에 동적인 이미지를 부여하면서 활력을 주는 것은 멧새의 노랫소리이다. 염천의 여름이 아닌 가을, 그것도 늦가을, 정오의 열정을 넘긴 황혼의 시간대, 거기 홍단풍조차 어울려 고요하게 드러난 풍경화의 구도는 노신사, 그것도 장의자에 기대앉은 노신사를 중심에 두면서 완성된다.
일찍이 예이츠W.B.Yeats가 「비잔티움으로의 항해Sailing to Byzantium」에서 노래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고. 노인은 “작대기에 걸친 낡은 코트” 같은 존재라고. 물고기며 가축이며 가금류며 모두 여름 내내 잉태하고 출생하고 죽어가는 일로 바쁘다(Fish, flesh, or fowl, commend all summer long, Whatever is begotten, born, and dies.)고, 그래서 이처럼 번잡한 속세를 벗어나 비잔티움의 문명 속으로 떠나가자고.
그러나 이 땅에서 이태수 시인은 노래한다. 자연의 노래를 후창하면서 노을과 서녘 하늘 우러르고 홍단풍에 경이로운 눈길을 던지면서 꿈속의 꿈을 찾아가는 노신사를 그려낸다. 그 노신사로 인하여 한결 조화롭게 완성되는 가을 저녁의 풍경화를 보여준다. 비잔티움으로의 머나먼 항해가 아니어도, 내가 사는 이 땅에서도 꿈꾸며 물 흐르듯 살다가 꿈속의 꿈을 향해 사위어 가는 삶은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음을 노래한다.
그처럼 고적하면서도 여유로운 노년의 모습이 가능한 것은 한편으로는 시인이 유년의 꿈을 잃지 않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가 무지개를 바라보면서 가슴 설렜듯 홍단풍과 멧새 소리에 무심하지 않고 언제나 새삼스레 다시 설레는 기운이 시인에게 그대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유년의 기억을 꿈속에서 다시 찾아 읊는 「맥문동꽃」을 보자. 「맥문동꽃」은 이태수 시 세계의 서정성을 언급할 때 먼저 내세워도 좋을 듯하다. 조촐한 듯하지만 결코 성기지 않은 은유의 시침질이 텍스트 전반을 채우고 있다.
허물어지고 없는 옛집 빈터에
맥문동 꽃대가 오종종
보랏빛 꽃들을 매달고 있다
응달에 오종종 앉아서
안 오시는 아버지를 기다리던
그 누이도 아우들마저
먼 세상으로 떠나가 버렸다
기다리던 그때 마음이
맥문동꽃들로 매달린 것 같다
―「맥문동꽃」 전문
민들레, 눈새기꽃, 노루귀, 나도바람꽃, 구절초, 그리고 할미꽃. 이 땅의 풀꽃들은 사연 없이 피는 일이 없다. 애절한 사연들을 꽃말마다 안은 채 꽃은 피어나고 또 그렇게 진다. 그래서 이 땅의 시인들은 그 작은 대상들에게 무수한 기억과 소원을 투영하곤 했다. 그러나 이태수 시인은 맥문동꽃으로 하여금 새로운 전설을 머금게 한다. 이반 볼랜드Eavan Boland에게는 사과꽃, 이영도에겐 진달래, 워즈워드에겐 수선화가 있듯이 이태수 시인이 폐허 위에 꽃 피우는 꽃의 사연은 맥문동꽃의 속말이다.
허물어진 옛 집터나 그 빈터에 꽃이 무수한 서글픔을 상기시키는 일이야 그다지 새로울 바가 없다. 그리고 그 꽃들이 제각각 피어나는 사연 또한 그다지 낯설지 않다. 그러나 이 텍스트를 잊을 수 없는 기억의 시편으로 승화시키는 요소는 알맞게 제자리를 찾은 이미지의 정합성에서 찾을 수 있다. “응달에 오종종 앉아서”라는 구절에 주목해 보자. 매우 구체적으로 기억을 드러내고 있는 까닭에 시인의 기억이 한결 새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 떠난 누이와 아우들에 대한 기억이 곱고도 선연하게 전달되는 것이다. 응달에 오종종 앉아서 기다리는 대상이 “오지 않는 아버지”라서 더욱 애달프고 그 애달픔으로 인하여 이 텍스트는 빼어난 서정시로 부상한다고 볼 수 있다.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기다린다. 그러나 이 텍스트에서는 그 기다림의 대상이 오지 않는 사람이며 어쩌면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존재이다. 그래서 기다림의 의미가 더욱 간절해진다. 양손에 선물 보따리를 지니고 미소 지으면서 돌아오실 아버지라면 그토록 애틋하겠는가? 양지바른 곳에 나란히 앉았다면 그토록 서글프겠는가? 돌아오지 않을 아버지를 기다린다. 오종종 앉아서 기다린다. 응달에 오종종 앉아서 그들은 기다린다. 누이와 동생들이다. 그 누이와 동생들은 이미 세상 떠나고 없고 그 집은 폐허 위의 빈집으로 남았다. 그리고 거기 오종종 매달려 맥문동꽃이 피어났다. 피어난 맥문동꽃의 모습에서 누이와 동생의 얼굴을 찾아본다. 그렇게 옛날을 그리워한다. 그 결과 한 편의 애틋하고 서글픈 꿈의 시편이 탄생한다. 꿈속의 꿈에서 보는 옛날의 꿈이…시 구절마다 “오종종” 매달려 피어 있다.
비우고 또 비우며 수긍하고 순응하면서 정처 없이 걷는 그의 길이 궁극적으로는 조촐하고도 고요한 적멸을 향해 난 길이라는 것을 믿는다. 냇물에 흘러가는 단풍잎 하나를 보고 적멸궁 한 채가 떠내려간다고 노래하는 것은 그렇다면 과장이 아니다. 적멸궁 한 채에는 스스로 한 잎 단풍잎 되어 흘러가는 시인의 모습, 그 그림자가 어려있다. 떠내려가면서 자신만의 꿈속으로 서서히 후퇴하는 시인의 뒷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단풍잎이 떠내려가 닿을 곳, 그곳에는 꿈의 궁전 한 채가 솟아 있을 것이다. 꿈의 꿈의 꿈속에 휘영청 달이 돋듯 솟아오른 궁궐 한 채가 보이는 듯도 하다.
소실된 고운사 인근 맑은 계곡물에
떠내려가는 단풍잎 하나
물소리 안고 가는 저 적멸궁 한 채
―「적멸궁 한 채」 전문
*참고한 책: 에리히 프롬, 임채영 역, 『사랑의 기술』 1992, 우레
<뒤표지 글(표사)>
시는 꿈속의 꿈-찰나와 영원에 대한 명상
비움이 채움이라고 깨우치는 역설의 화엄
이태수 시인은 삶이 곧 꿈이고 시는 그 꿈속의 꿈이라는 것을 선명하게 깨우쳐주는 시인이다. 꿈만이 고단한 우리의 삶을 견뎌 가게 하며, 꿈꾸는 자만이 경직된 사유를 넘어서서 유연하게 넘나들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시인의 제3 행성에서는 시간도 고유한 방식을 지닌 채 흐르면서 시인의 삶과 꿈을 매끈하게 봉합한다. 시인의 텍스트 내부를 구성하는 꿈의 시공간은 한편으로는 삶과 예술에 대한 그의 철학을 반영한다. 찰나와 영원에 대한 명상, 즉 찰나에서 영원을 보고 영원에서 찰나를 다시 찾는 자세로 조화와 생성을 존중하며 물상들이 서로 기대고 어우러지는 모습에서 역동적인 역易의 힘을 찾는다. 시인의 텍스트를 채우고 있는, 가역성을 내포한 대상들이 지니는 역동적 힘은 보다 확대되어 조화와 생성의 철학으로 연결되고 궁극적으로는 화엄의 사상에까지 이른다. 비움이 곧 채움이라는 것을 알고, 길이 이끄는 길을 나서는 삶, 그 발걸음마다 마주치게 되는 세상의 풍경과 물상들 속에서 때로는 겸손을, 때로는 허무를, 또 때로는 소중한 기억을 찾아내며 멈춤 없이 길을 가는 모습이 이태수 시인의 모습이다. ―박진임(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