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수 칼럼❘
환한 깨달음의 경지
경북신문 2026. 6. 17
원로 시인 황동규(서울대 영문과 명예교수) 선생이 지난달 불편한 몸으로 나와 함께 하루를 보내기 위해 대구에 들르셨다.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면서도 형형한 눈빛은 그대로여서 마음 아렸다. 가장 근래의 시집 ‘봄비를 맞다’의 시편들과 ‘시인의 말’의 “이 시집의 태반이 바닥을 짚고 일어나 다시 링 위에 서는(다시 눕혀진들 어떠리!) 한 인간의 기록”이라는 구절이 새삼 떠오르기도 해서 더욱 그러했다.
자신의 요즘 삶을 여전히 삶과 현실의 현장에서 세상살이의 진정한 의미와 그 진실에 이르려는 마음가짐을 권투경기에 빗대면서도 “다시 눕혀진들 어떠리!”라는 대목이 시사하듯, 너그러운 마음의 여유는 우수의 그늘이나 자기 연민의 그림자를 넘어서 있으며, 환한 깨달음의 경지를 드러내 보인다.
“‘획획 돌아가는 계절의 회전 무대나/갑작스런 봄비 속을/제집처럼 드나들던 때는 벌써 지났네.’/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하자 마음이 말했다./‘이마를 짚어봐,’//듣는 체 마는 체 들으며 생각한다./어제 오후 산책길에 갑자기 가늘게 비가 내렸지./(중략)/지난 가을/성긴 잎 미리 다 내려놓고/꾸부정한 어깨로 남았던 나무/고사목으로 치부했던 나무가/바로 눈앞에서/연두색 잎을 터뜨리고 있었던 거야./이것 봐라. 죽은 나무가 산 잎을 내미네./(중략)/그래 맞다. 이 세상에/다 써버린 목숨 같은 건 없다!/정신이 싸아했지./머뭇대자 고목이 등 구부린 채 속삭였어./‘이런 일 다 집어치우고 싶지만/봄비가 속삭이듯 불러내자/미처 못 나간 것들이 마저 나가는데/어떻게 막겠나?/뭘 봬주려는 것 아니네.’//이마에 손 얹어보니/열이 있는 듯 없는 듯./감기도 봄비에 정신 내주고 왔나?/일어나 커피포트에 불을 넣는다.” ―‘봄비를 맞다’ 부분
‘시인’과 ‘시인의 마음’ 사이의 말 주고받기 형식으로 이어지거나 생각에 잠기는 독백(말 없는 말)으로도 이어지는 이 시는 ‘환한 깨달음’에 이르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은유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지는 ‘시인’과 ‘시인의 마음’뿐 아니라 ‘시인’과 ‘자연의 섭리’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시인의 그윽한 시심(詩心)의 암시와 투사라는 느낌으로도 다가온다. 이 같은 시인의 마음자리는 시집 뒤표지의 표사(시인의 짧은 산문)에도 다음과 같이 선연하게 떠올라 있다.
“늙음은 온갖 불편의 집합이다. 마지막으로 정리할 게 무엇인가 생각할 때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아침에 해가 뜨고 아파트 발코니에선 꽃들이 피고 지고 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시, 물빛으로 환한 시간이.”
1938년 서울에서 태어난 시인은 이제 구순을 바라본다. 여섯 해 전의 시집 ‘오늘 하루만이라도’를 내면서는 “지난 몇 해는 마지막 시집을 쓴다면서 살았다.”라며, “이즈음 몸이 속을 바꾸며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일들을 시로 변형시켜 가지고 가고 싶다. 가지고 가다니, 어디로? 그런 생각은 지난날의 욕심이 아닌가? 그래? 그렇다면 못 가지고 가는 시를 쓰자.”라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늙음이 온갖 불편의 집합’임에도 불구하고 한 권의 시집을 더 내는 열정을 여전히 유지한다. 더구나 자연의 섭리와 그 순리를 '관용과 깨달음'의 시선으로 받아들이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 한결같이 불 지피는가 하면, ‘물빛으로 환한 시간’을 여는 ‘시’에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그의 시 ‘홀로움’을 떠올리며 근래에 쓴 화답 시를 옮겨본다.
“시작이 있을 뿐 끝이 없는 것이/꿈인 것 같습니다/저물녘에 꾸는 꿈도 환해집니다/어디로 가는지는/알 수 없지만 길은 먼 듯합니다//선생님 따라 바닷가에 왔습니다/빈 뻘을 바라보며/안 보이는 물새 소리도 듣습니다/저녁 안개 걷히고/작은 강물이 흘러들고 있습니다//하늘가에 별이 하나 돋아납니다/별이 말을 걸어오고/끝이 따로 없는 풍경 속에 들어/선생님의 홀로움에/슬며시 다가가 끼어들어 봅니다” ―자작시 ‘홀로움―황동규 선생님께’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