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4    업데이트: 26-02-20 10:13

칼럼-8

❘이태수 칼럼❘ 이인주의 난해시를 읽으며
아트코리아 | 조회 0
❘이태수 칼럼❘
이인주의 난해시를 읽으며
경북신문 2026. 2. 20
 
 
미국의 시인 월리스 스티븐스는 ‘시인과 작가는 상상력의 힘으로 이 광활한 우주 공간 속에 새로운 행성 하나를 창조해 내고, 그 행성의 낯선 공간으로 독자들을 이주시키는 개척자’라고 했다. 몇 해 전에 돌연 세상을 떠난 이인주(1965~2021, 전 정화여고 교사)는 바로 그런 시인인 것 같다. 그의 시 중에서도 가장 난해하다고 할 수 있는 시 ‘여우를 위로함’을 새삼 찬찬히 읽으면서 낯선 행성(상상력)에 살다가 이젠 또 다른 행성에서 살고 있을 그의 상상 세계를 따라나서 본다.
‘여우’를 시의 중심에 두면서 파격적인 상상력, 자유분방한 연상(聯想)과 무의식의 떠올림 등을 통해 화자(시인)의 내면 풍경을 낯설게 빚어 보이는 이 시는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넘나들고 기존의 외적 질서를 뛰어넘어 환상과 새로운 내적 질서, 현실 너머의 세계를 지향하면서 특유의 추상적인 미지의 공간을 빚어 보인다.
이 시가 쉽게 다가갈 수 없이 난해하면서도 신선한 느낌과 경이감을 안겨 주는 까닭은 무엇일까. 비유(은유)나 상징 기법을 뛰어넘어 자동기술과 우연성, 전위와 오브제, 상상력과 그 변형 등 초현실주의 기법들이 끼어들기 때문으로 읽힌다.

‘여우가 죽었다 500년 동안 키워 온 황금빛 털을 자랑하던 여우가 죽었다 여우가 죽은 다음 날 아침 나는 덤덤히 밥을 먹으며 이제, 어떻게 하지? 그렇게도 윤기 넘치던 털을 만질 수 없게 되었는데, 아홉 개 달린 꼬리가 없어졌는데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중략> 문장이 맞지 않는 주문을 환상통처럼 앓고 있었다 여우가 죽지 않은 것처럼 행동할까 여우를 빼고는 대화가 안 되는 밀실에서 속내가 들키면 어떡하지? 그러면 그때 더욱 능수능란한 여우를, 한층 우아해진 여우를 불러낼까 <중략> 기실 여우를 키운 건 나였지만 묘기를 하나도 부릴 수 없는 족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여우가 죽었다니 너무하지 아니한가 산 주인인가 죽은 꼬리인가 사라진 여우를 붙들고 나는 여우가 되고 싶어 꺼억꺼억 울었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여우를 위해 이불도 밀쳐내고 얼음이 된 추억을 칼같이 갈았다 날 선 공기가 비릿하였다 내가 건너야 할 다리 앞에서 진실로 무구한 아이가 되어 이렇게 물어보았다 여우야 여우야 살았니? 죽었니?’ —이인주의 「여우를 위로함」 부분
 
“여우가 죽었다”는 단정으로 출발하는 이 시에서 ‘여우’는 500년 동안 살다 죽은 여우이면서 “모든 여우들이 시들해졌다”는 구절에서 읽게 되듯 많은 여우 중 한 마리이다. “여우를 빼고는 대화가 안 되는 밀실에서 속내가 들키면 어떡하지?”라는 구절에서처럼 실제의 여우가 아니라 화자의 내면 모습으로도 그려지고 있다. ‘여우’가 내면의 한 모습이라는 사실은 “더욱 능수능란한 여우를, 한층 우아해진 여우를 불러낼까”라거나 “기실 여우를 키운 건 나”라는 대목이 선명하게 받쳐준다.
이 시가 거느리는 의미망을 따라나서면 난감하고 난처해질 수밖에 없다. 화자는 다시 “나는 여우가 되고 싶어 꺼억꺼억 울었다”고 하는가 하면, “진실로 무구한 아이가 되어 이렇게 물어보았다 여우야 여우야 살았니? 죽었니?”라고도 묻는다.
이 시에서는 ‘여우’의 명명이 다르게 전용되는 명명으로 전이(轉移)되고, 그 전이에 의해 의미가 사뭇 다르게 바뀌고 확장된다. 언어와 언어는 물론 이미지와 이미지가 충돌하며, 비약과 반전 등으로 그 흐름이 전도(顚倒)되고 무화(無化)된다. 이 시는 말로 표현되는 세계와 이해할 수 있는 세계의 한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세계를 끌어내려고 하는 데 무게가 실려 있다. 언어와 이미지의 극단적인 비약이나 반전으로 야기되는 의미의 무화가 다시 새로운 의미로 변용되는 변신의 경이, 초월의 경이, 자아 해방의 경이 등이 낯선 은유나 상징 체계로 끌어올려지는 극단적인 주관적 세계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난해하면서도 어렵게 풀어볼 수 있는 이 시를 남긴 이인주 시인을 ‘상투적이고 넋두리와 다름없는 시들이 넘쳐나고 있는 요즘 시단’에서 상대적으로 볼 때 귀한 시인이라고 여긴다면 나도 낯선 행성의 사람이라고 할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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