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83    업데이트: 26-01-28 10:30

언론 평론

물소리 안고 가는 적멸궁 한 채
아트코리아 | 조회 752
물소리 안고 가는 적멸궁 한 채
―이태수 스물네 번째 시집 『후창』(2026, 문학세계사)



 
박진임(문학평론가)
 
 
 
1. 삶이 잠깐 꾸는 꿈이라면 시는 그 꿈속의 꿈
 
시인은 이 지구를 떠나 머나먼 다른 행성에 사는 사람이리라. 언제나 꿈꾸는 존재이리라. 이태수 시인은 삶이 곧 꿈이고 시는 그 꿈속의 꿈이라는 것을 선명하게 깨우쳐주는 시인이다. 아침에 꿈에서 깨어나도 시인은 그 꿈이 연장된 공간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듯하다. 꿈에서처럼 세상을 보고 또 그 꿈의 장면들을 직접 다시 연출하듯 하루하루 살아가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태수 시인은 삶이 곧 한 편의 시라고 믿으며 시의 나라로 스스로 망명해 간 시인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미국 시인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는 말한 바 있다. 시인과 작가는 상상력을 제3의 행성으로 여기는 사람이라고. 그들은 상상력의 힘으로 이 광활한 우주 공간 속에 새로운 행성 하나를 창조해 내고 그 행성의 낯선 공간 속으로 독자들을 이주시키는 개척자라고 보았다. 스티븐스의 견해에 공감하면서 문학비평가 헬렌 벤들러Helen Vendler는 “상상력의 빛 속에서는 하나의 풍경도 또 다른 제3의 풍경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독자는 시인이 건설한 새로운 세상의 빛으로 사물을 보게 된다고 이른다.
스티븐스와 벤들러가 일컫는 상상력은 이태수 시인에게는 꿈이라는 단어로 다가온다. 시인은 꿈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왕국에 머물면서 독자를 손님으로 맞는다. 그의 시를 읽는 독자들만이 시인이 꾸는 꿈속 공간으로 초대받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마치도 정중한 옷차림을 한 신사가 마차에서 내려 흰 장갑 낀 손을 내밀면 귀부인이 그 손을 잡고 빛나는 황금 마차에 올라타고 함께 길을 떠나는 것과 같다. 시인이 꾸는 꿈이 휘황찬란한 궁전의 무도회라면 귀부인은 음악에 맞추어 그와 손잡고 황홀한 춤을 추게 된다. 밤 열두 시를 알리는 종이 울려도 무도회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 꿈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나고자 결심하기 전에는 꿈은 지속될 것이고 무도회도 그러할 것이다. 꿈보다 현실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아마도 마차에 올라타지 않을 것이며 오로지 꿈의 소중함을 아는 이들만이 그 고귀한 시간대를 향유할 것이다.
비평가 헤럴드 블룸Harold Bloom은 “시의 효용은 그 철저한 비효용성에 있다”고 이른 바 있다. 일상에서는 참으로 쓸모가 없는 것, 그러나 효용성을 챙기는 데에는 무심한 존재들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것, 그것이 시이리라. 그렇다면 시와 무도회는 효용성이 없다는 점에서 서로 무척 닮았다. 유희가 일만큼 소중하다고 여기는 이들, 혹은 일보다 유희가 더 값진 것일 수 있음을 믿는 이들만이 시를 읽고 춤을 추는 것 아니겠는가?
이태수 시인의 시어들이 펼쳐 보이는 시적 공간은 과연 꿈의 공간 그 자체이다. 시인은 아침이나 저녁이나 산책하고 배회하며 흘러간 시간의 기억을 쓰고 다가올 날에 대한 기대를 쓴다. 살펴보면 이태수 시인은 일관되게 제3의 행성에 머물러 온 시인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펴낸 시집의 제목들은 시인이 한결같이 꿈의 공간 속에 머물며 꿈속의 꿈을 그려왔음을 보여준다. 1979년의 『그림자의 그늘』부터 그러하다. 그림자도 꿈을 닮은 것이며 그 그림자의 그늘은 꿈속의 꿈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어진 『우울한 비상의 꿈』에서 시인은 비상이 지니는 상승의 기운을 노래하면서도 그 기운을 ‘우울한’이라는 수식어에 갇히게 만들면서 그의 외로운 꿈을 가늠할 수 있게 했다. 『물속의 푸른 방』에 담긴 심상도 외로운 꿈의 이미지를 연장하고 있다. ‘물속의 푸른 방’도 결국은 현실과 유리된 꿈의 공간을 지시하는 언어라 할 수 있다. 꿈은 종종 흐르는 물의 이미지로 드러나곤 하며 물속에 있는 방은 자신만의 꿈에 갇힌 시적 자아의 재현으로 읽을 수 있다.
『꿈속의 사닥다리』에서는 그가 꾸는 꿈의 성격이 한결 명료해진다. 꿈의 공간 안에서 초월과 상승을 지향하며 현실을 견디는 시적 화자의 목소리를 그 시집에서 찾아볼 수 있다. 『거울이 나를 본다』에 등장하는 거울 또한 꿈의 다른 이름으로 읽힌다. 현실에서의 거울은 사람의 모습을 반영하는 매체이지만 이태수 시인은 오히려 그 거울이 시인 자신을 응시한다고 노래했다. 그리하여 거울이라는 객체와 시적 화자인 주체의 자리가 뒤바뀌고 있는 공간을 형성해 냈다. 그 공간에서 거울은 무심한 대상이기를 멈추고 시인과 영혼의 대화를 나누는 인격체로 새롭게 태어난다. 사물이 숨을 쉬며 말을 걸어오는 나라, 그것도 바라보는 자의 모습을 그대로 솔직하게 보여주면서 긴밀한 대화를 소망하는 존재로 거울이 등장하고 있다.
최근의 시선집 『잠깐 꾸는 꿈같이』는 그의 꿈이 지니는 현재적 의미를 명료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삶이 꿈이고 꿈이 삶이며 시는 꿈을 꾸듯 삶을 살아가는 시인이 꿈속에서 다시 꾸는 꿈일 뿐, 그밖에 달리 무엇이겠는가 하고 시인은 묻고 있다. “잠깐 꾸는 꿈”이라는 구절은 그처럼 우리 삶의 유한성을 지시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진정 소중한 것은 그러한 삶의 한계 너머에 존재하는 꿈의 꿈이라고 이른다. 그러므로 꿈 혹은 꿈속의 꿈이라는 주제어는 그의 시 세계 전반을 설명하는 소중한 시어라 할 수 있다.
이번 시집에서도 이태수 시인의 꿈은 새롭게 모습을 바꾸어 나타난다. 시인은 꿈만이 고단한 우리의 삶을 견뎌 가게 하는 것이며 꿈꾸는 자만이 경직된 사유를 넘어서서 유연하게 넘나들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작은 꿈」은 하나의 꿈에서 또 하나의 꿈으로 이어지는 꿈의 세계가 이태수 시인이 거하는 나라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한다.
 
나는 이슬방울 같은 거겠지요
풀잎에 맺혔다가 때가 되면
기화하거나 흘러내리고 마는 이슬방울
 
나도 맑고 깨끗하게 글썽이려 꿈꾸다가
때가 되면 미련마저 버리고
여기에서 떠나야만 할 테지요
 
나는 꿈꾸는 이슬방울과 같고
이곳은 하나의 풀잎 같으니
이 풀잎은 단 한 번의 내 우주이겠지요
 
나는 작지만 명징하게 반짝이다 가는
한 방울 풀잎 위의 이슬방울
꿈꾸며 글썽이다 그 꿈에 드는,
―「작은 꿈」 전문
 
이 시에서 풀잎과 이슬은 곧 이태수 시인의 꿈의 자취이며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은 이 땅의 이름 없는 풀잎 하나를 “내 우주”라 부르고 그 풀잎 위에 잠시 머물면서 반짝이는 작은 이슬방울 하나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풀잎이 시인의 세계이며 이슬이 자신의 분신이라고 노래하는 것이다. 풀잎과 이슬이라는, 그토록 사소한 대상들이 세계와 자아의 상징이 되는 곳에 이태수 시인은 여전히, 오래도록 머물고 있다. 처음부터 그러했듯 여전히 “꿈꾸며 글썽이다 그 꿈에 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꿈에서 꿈으로 이어지는 꿈길의 궤도가 선연히 떠오른다. 「작은 꿈」에 이르러서 이태수 시인 고유의 꿈의 시학이 마침내 이른 곳을 찾아볼 수 있다.
 
2. 꿈 혹은 제3 행성의 시간과 역설의 미학
 
이태수 시인의 제3 행성에서는 시간의 전개 과정도 꿈의 구조를 닮아있다. 그 행성에서는 시간도 고유한 방식을 지닌 채 흐르면서 시인의 삶과 꿈을 매끈하게 봉합한다. 일반적인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의 순서로 흐르는 반면 꿈의 공간에서는 그러한 선조적 양상이 사라지고 서로 뒤섞이고 엉킨다. 마치도 피카소의 그림에서 보이는 조각난 형상들처럼 불연속적으로 연결된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시간 개념을 빌려 이야기의 정체를 규명한 바 있다. 그는 이야기의 시작은 그 이전이 없는 것이며 그 끝은 그 이후가 없는 것이라고 일렀다. 한편으로는 너무나 자명해 보이는 이치이지만 공간과 시간에 대한 설명이 아예 없었던 시절,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게 설명하며 이야기 혹은 문학이라는 텍스트를 현실 속의 무수한 발화들과 구분하였다. 문학 작품이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그처럼 시작 이전에 아무것도 없어야 하고 종결 이후에도 달리 남은 이야기가 없어야 하는 것이다. 선조적 형태로 진행되는 시간의 흐름을 분절하면서 텍스트의 완결성을 강조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관이 인류가 지닌 시학의 초기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문학 이론이 달리 존재하지 않던 시절인지라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과 시간의 관련 양상에 대해 그처럼 단순한 정의를 이루어내면서 문학 텍스트를 규명하고 그것으로써 하나의 이정표 역할을 하게 했다.
그러나 이태수 시인의 텍스트는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의 대척점에서 전개되고 있다. 시작도 끝도 특정하기 어려운 꿈의 시간대를 제시하면서, 그리하여 그처럼 선조적인 사유 방식에 적극적으로 의문을 보내면서 이태수 시인은 자신의 텍스트를 전개한다. 시작과 끝이 분절되지 않는 시간대와 선조적인 진행을 거부하고 역진하거나 순환하는 시간대가 그의 텍스트를 지배한다. 아마도 그런 불연속적 시간성이 가장 시적인 시간성이기 때문에 그러한지도 모를 일이다. 미국 시인 조리 그레이엄Jorie Graham의 말을 상기해 보면 불연속성과 모순성이야말로 시의 중추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시는 다른 서사가 줄 수 없는 것을 준다. 서사에서 나타나는 논리, 지속성, 설명의 투명성을 시는 요구하지 않는다. 꿈의 구조와도 유사한, 비논리성이 시의 본질이다”라고 그레이엄은 설명했다.
이태수 시인의 제3 행성에서 시간은 그처럼 단속적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바로 그 점이 이태수 텍스트의 고유성을 담보하는 요소들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오래된 탁상시계」는 이태수 시의 고유한 텍스트성, 그 공간과 시간의 미학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시편이라 할 수 있다.
 
책상 의자에 앉아 졸다가 깨다 하다가
 
탁상시계를 보니 가다가 말다가 한다
 
시간은 같은 걸음으로만 가겠지만
 
가다가 말다가 하고 졸다가 깨다가 하니
 
시간이 나의 것이 되는 것도 같다
 
탁상시계도 나와 보조를 맞추는 걸까
 
가도 그만 가지 않아도 그만인가 보다
―「오래된 탁상시계」 전문

실용과 효용이 지배하는 공간, 즉 선조적 시간대를 숭상하는 공간에는 오래된 시계를 위한 자리가 없다. 시계는 시간의 흐름을 정확하게 지시하는 것이 그 본질적 기능이다. 그러므로 오래되어 그 역할 수행을 할 수 없게 된 시계는 폐품이 되어 버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오래된 시계가 시인이 거주하는 특이한 공간, 이를테면 제3의 행성인 꿈의 공간에서는 매우 적절한 역할 수행을 한다. “탁상시계도 나와 보조를 맞추는 걸까”라고 시인이 노래하듯 “가도 그만 가지 않아도 그만”인 그런 시간대를 시인이 향유하면서 꿈꾸기를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가다가 말다가 하고 졸다가 깨다가 하니”라는 구절에서 보듯 그 시계는 시인의 꿈의 속도와 보조를 맞추면서 시인의 불연속적 시간성과 비선조적 시간대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장치로 변모해 있다.
그렇다면 오래된 시계는 시인의 꿈을 가장 잘 이해하고 그 꿈의 흔적을 존중하는, 시인의 충실하고 믿음직한 도제徒弟가 아니겠는가? 오래 묵은 포도주나 오래 사귄 친구처럼 오래도록 시인의 책상을 지켜온 탁상시계가 시인의 영혼을 가장 잘 지켜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시인 또한 시계의 존재 의미를 긍정하며 읊는다. “시간이 나의 것이 되는 것도 같다”고. 시인이 선조적 시간의 공식에 이끌리는 수동적 존재가 되기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꿈의 공간에 스스로를 유폐할 때, 오래된 시계가 그의 동반자가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오래된 시계는 기꺼이 시인이 지닌 삶의 소품들을 지게에 지고 먼저 길을 나서고 있다. 그리하여 시인이 지닌 고유한 꿈의 시간이 진정 그의 것이 될 수 있도록 돕는다.
충직한 동반자를 곁에 두고 걷고 있는 시인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인다. 현실에서는 버림받는 오래된 시계가 시인이 전유한 꿈의 시간대를 온전한 그의 시간으로 변화시키는 소중한 존재로 변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다 말다, 멈추었다가 다시 가곤 하는 시곗바늘이야말로, 현실과 몽상 사이, 길 떠남과 멈춤 사이, 경험과 추억 사이를 넘나들면서 가다가는 멈추고 멈추는가 하면 다시 가는 시적 화자의 불연속적 시간대를 그대로 지시하고 있다. 시계가 시인의 마음을 읽고 시침과 분침으로 알려주고 있으니 이태수 시인의 꿈의 나라는 앨리스가 사는 이상한 나라일지도 모른다. 규칙성을 지니고 질서정연하게 진행되는 시간관 앞에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서로 섞일 이유 없이 분절되고 대립한다. 그러므로 그런 균질적인 시간대는 이항 대립의 사유 방식을 그대로 반영할 수밖에 없다.
이태수 시인의 시 세계에서는 시간이 비선조성을 지닌 것이듯 공간도 이항 대립의 구조를 거부하는 공간이다. 상상력의 제3 행성은 역설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 나라에서는 어떤 대상도 견고하게 유지되거나 고착되어 있지 않고, 서로 열려 있으며 순환하고 흐른다. 그처럼 이태수 시인의 텍스트 내부를 구성하는 꿈의 시공간은 한편으로는 삶과 예술에 대한 그의 철학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앎과 모름 사이, 찰나와 영원 사이, 있음과 없음 사이의 경계가 그다지 견고하지 않음을 보여주면서 이태수 시인은 거뜬히 그 경계를 넘어서거나 그 분절점 위에 서는 텍스트를 제시하곤 한다.
이를테면 「아는 척에 대해」에서는 지知와 부지不知의 경계가 무너지고, 「지금 여기」에서는 찰나와 영원이 서로 어우러진다. 「겨울나기」에서는 존재와 부재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비움의 의미가 새롭게 드러난다. 「첫눈을 기다리며」에서는 침묵과 발화 사이의 구별이 흐려지면서 침묵과 발화의 의미가 다시 정의되기도 한다. 「빈 항아리」와 「속‧달항아리」에서는 비움과 채움이 서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성을 지닌 개념임을 천명하기도 한다. 비움과 채움이 서로 그러안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비어 있는 항아리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시인이 그려내는 대상들은 고체의 모습으로 재현되는 경우가 드물다. 흐르는 냇물이나 기화될 이슬방울처럼 액상으로 존재한다. 그리하여 조화와 생성의 과정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다. 「지금 여기」를 보자.
 
여기 지금은 언제나 한순간이다
 
여기 그대로 있어도 지금은 떠난다
지금 이대로 있어도 여기는 바뀌고 만다
 
지금은 영원 속의 찰나지만
이 찰나는 여기의 영원이다
 
여기는 영원 속 한순간만 머무는 데지만
영원이 찰나를 품어 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는 찰나이자 영원이다
―「지금 여기」 전문
 
「지금 여기」에서는 찰나가 영원이고 영원이 찰나가 되는 역설 아닌 역설을 발견할 수 있다. 영원과 찰나는 대립하는 개념어로 우리에게 인식된다. 그러므로 현실에서는 영원이 찰나이고 찰나가 영원이라는 말은 역설로 들린다. 하지만 그 역설은 역설 아닌 역설이며 역설 너머의 역설이라 할 수 있다. 찰나가 모여 영원이 되고 찰나 속에는 영원의 씨앗이 묻혀있는 것이므로 찰나가 영원이라는 말은 곧 그대로 진실이기도 한 것이다. 그처럼 찰나와 영원에 대한 명상, 즉 찰나에서 영원을 보고 영원에서 찰나를 다시 찾는 자세는 이태수 시인의 철학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태수 시인은 조화와 생성을 존중하며 물상들이 서로 기대고 어우러지는 모습에서 역동적인 역易의 힘을 찾는다. 이태수 시인의 그러한 사유는 노자老子나 신학자 매리 데일리Mary Daly의 사상을 연상하게 한다.
노자는 일찍이 말했다. “밝고 걸어갈 수 있는 도는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도가 아니다. 명명된 이름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이름이 아니다.” 매리 데일리 또한 궁극적 실재는 창조성이며 창조성은 부단히 변화하는 역동적 역易이라고 보았다. 모든 것은 서로 맞물려 있어 변하고 또 변하게 마련인 것이고 그래서 음이 곧 양이고 양이 곧 음이 되는 것이다. 「겨울나기」는 비움이 곧 채움이고 채움이 다시 비움이 되는, 변화의 역동적 역易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텍스트이다.
 
겨울이 깊어가는 길목에 서서
온갖 기억을 지우고 비운다
 
떨칠 것을 다 떨쳐버린 나무들 사이
금강송 한 그루 독야청청
몸도 마음도 바꾸지 않고 서 있다
나를 내려다보는 것 같고
잎새 떨친 나무를 둘러보는 것 같다

겨울나기의 마음 깊숙이에
금강송 한 그루 들이고 싶다

온갖 기억을 다 비우고 지우더라도
오랜 꿈은 초심같이 예 그대로
그러안은 채 가꾸고 싶다
찬바람이 불고 눈보라칠지라도
기억의 빈터에는 새 꿈을 돋우면서
―「겨울나기」 전문
 
새로운 꿈이 돋아나기 위해서는 빈터가 필요하다고 시인은 이른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겨울을 맞는 계절에 지우고 비우는 일과 떨칠 것을 떨치는 일을 기억한다. 잎을 다 떨어내고 홀로 서는 겨울나무로부터 그처럼 비움의 철학을 배운다. 그 빈 자리에서 새 꿈이 새롭게 돋아날 것임을 알기에 비우고서 다시 꿈꾸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첫눈을 기다리며」에서 시인은 발화와 침묵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넘어서며 침묵의 의미를 되새긴다. 침묵의 발화에 귀 기울이면서 침묵 속에 담긴 지혜를 헤아린다.
 
가을이 가면 눈을 기다립니다
침묵이 잉태하다가 내려오는
눈은 신성한 말들을 거느리고 옵니다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기보다
하늘을 받들어 안고 내립니다
 
세상을 희디희게 감싸 안으며
지울 건 죄다 지우는가 하면
말하지 않는 말에 귀를 열게 합니다
눈은 창밖에만 내리지 않고
내 마음 빈 곳에도 내립니다

창가에서 첫눈을 기다립니다
가는 길이 외지고 고달파도
풍진세상에 휩쓸리지 않으려 합니다
새롭게 채워질 신성한 말을
그러안으려 마음 추스릅니다
―「첫눈을 기다리며」 전문
 
첫눈이라는 대상에게서 이태수 시인은 ‘말을 뛰어넘는 신성한 말’의 이미지를 찾아낸다. 그 말은 “침묵이 잉태하다가 내려오는” 말이며 그러므로 침묵을 통하여 발화되는 말은 신성한 말이라고 일컫는다. 신성한 말로서의 눈은 “말하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하늘을 받들어 안고 내린다고 노래한다. 첫눈은 곧 하늘의 말이라는 의미이다. 말없이 고이 내려앉는 것으로 완성되는 뜻깊은 말, 말하지 않는 말에 귀 기울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마음 추스르는 것밖에는 달리 없는 것 같다. 침묵의 말, 혹은 말하지 않는 말의 함의는 다시 그림자가 제시하는 역설로 연장된다. 「그림자」 또한 소멸과 확장 사이에서 작동하는 역의 원리를 깨우쳐주고 있다.
 
석양 무렵 길어지다가 사라지는
 
나무그림자를 바라본다
 
길어지다가 사라지는 그림자가
 
어디 나무그림자뿐이랴
 
사라질 땐 대개 그러지 않았던가
―「그림자」 전문
 
이태수 시인은 나무그림자에서 하나의 우로보로스Uroboros를 찾고 있다. 뱀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엉기어 있는 형상처럼, 양이 음이 되고 음은 다시 양이 되는 것이 세상의 조화이고 원리임을 깨우쳐준다. 한껏 길어지는 것은 곧 사라질 것임을 예감하게 하고 모든 사라지는 것은 사라지기 전에 한껏 길어지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 역설을 나무그림자에서 발견한다는 데에 시인의 창조성이 놓여 있다. 모순과 역설로 가득 찬 세계는 겸손히 자세를 낮춘 자에게만 그 내밀한 사연을 들려준다. 자연을 섬세한 눈길로 관찰하고 그 자연의 호흡에 맞추어 들숨 날숨을 쉬는 이에게만 포착되는 것이 자연의 미묘한 이치이다. 이태수 시인은 자연을 숭상하면서 그 자연 속에 깃들여 꿈꾸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한결같이 보여왔다.
현실보다는 꿈을, 권력보다는 순응을, 선조적 진보의 시간대보다는 불연속적인 분산의 시간대를 숭상하는 시인이기에 이태수 시인은 자연을 노래하면서도 후창과 후렴이라는 음악의 형식을 시적 이미지로 선택한다. 「후창後唱」을 보자.
 
해종일 후렴만 부른 걸까
대자연의 노래를 새겨들으면서
마음에 아로새겨진 구절만 노래했던가
 
어제도 오늘도, 어쩌면 내일도
후창만 하게 될는지 몰라
 
자연은 언제나 나를 품어주고
한결같이 그윽한 노래를 들려주므로,
봄이 오면 꽃들이 피어오르고
 
새들이 날아와 꽃잎 위에
아름다운 노래를 포개 주지만
 
나는 그 후렴만 따라 부르고 있었던가
자연의 노래는 한량이 없으므로
후창만 해도 좋은 것일까
―「후창後唱」 전문
 
뉘는 자연을 정복하거나 이용하려 하고 또 뉘는 뭇 악기로 이루어진 악단을 지휘하려 한다. 그러나 자연을 앞에 두고 이태수 시인은 선창先唱 아닌 후창을 선택한 채 자연의 노래에 후렴으로 화답한다. 자연의 조화로움을 바라보면서 파괴하지 않고 거스르지 않는 것도 미덕이거니와 후렴으로 자연의 노래를 부추기는 일, 그것이야말로 꿈꾸는 시인이 맡아야 할 일이다. 현실에서는 무수한 사람들이 진보와 성취를 향해 달려가면서 자연에 생채기를 내고 있지만 시인은 그 무리에서 벗어나 소요하는 자이다. 자연 속 꽃 피는 모양이며 새 우는 소리를 따라가며 후창하는 것이야말로 꿈속에 거니는 시인에게 가장 어울리는 자세이리라.
 
3. 조화와 생성, 지와 부지, 역설과 화엄
 
이태수의 시 세계에서 드러나는 비선조적 시간성은 시간의 문제에 한정되지 않고 공간으로 확장되고 결국은 시인의 철학 전반을 설명하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빈 항아리가 드넓은 하늘을 품듯, 오래전 세상 떠난 아우가 꿈에 나타나서 시적 화자에게 현실을 설명해 주기도 한다. 고장 난 시계가 시적 화자가 통과하고 있는 불균질적인 시간대를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이태수 시인의 텍스트를 채우고 있는, 가역성을 내포한 대상들이 지니는 역동적 힘은 보다 확대되어 조화와 생성의 철학으로 연결되고 궁극적으로는 화엄의 사상에까지 이른다. 이태수 시인이 보여준 역설의 미학은 우주 전체에 산재해 있다. 먼저 「빈 항아리」는 역동적 역易의 의미를 가장 선명하게 구현하는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어 한편의 잘 빚어진 이미지즘의 시로 평가받을 수 있다.
 
담장 아래서 하늘을 품는 빈 항아리
 
비워 두었으므로 가득 차는 저 화엄
―「빈 항아리」 전문
 
이태수 시인은 한결같이 자신만의 빛으로 제3의 세계를 생성하고 그 세계 속에 자신이 발견한 오브제를 내려놓곤 한다. 「빈 항아리」에서는 빈 항아리를 스케치하면서 화엄의 세계를 그 화폭에 그려내는 것이다. 비어 있는 항아리만이 하늘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빈 항아리”의 ‘빈’은 “하늘을 품는”의 ‘품는’에 의하여 등장하면서 그 순간 바로 부정될 의미를 지닌다. 비워 둠과 가득 참이 그다음 행에 등장하면서 빈 항아리의 충만함이라는 역설의 의미를 더욱 확장한다. 그러므로 빈 항아리는 비어 있을 때만 창조성의 상징이 되고 스스로 궁극적 실재로까지 승화되게 된다. 비어 있으므로 하늘도 거기 머물고 흘러가는 구름도 쉬었다 가고 지나가는 바람 한 줄기도 그 안에 머물 수 있다. 텅 비어서 가장 충만해진다는 화엄의 진리를 그처럼 빈 항아리는 이미지로 드러내고 있다. 리파테르Michael Rifattere가 시는 “이것을 말하면서 저것을 가리키는 행위”라고 언급한 바 있듯이, 이태수 시인은 항아리를 형상화하면서 화엄 사상을 설법하고 있는 셈이다.
지와 부지 사이의 미묘한 변증법을 한 편의 텍스트로 승화하고 있는 「아는 척에 대해」를 보자. 논어는 제비가 따라 배워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하고 소리 내어 울고 맹자는 맹꽁이가 배워 “독낙락 여인낙락 숙락獨樂樂 與人樂樂 孰樂”이라 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 그리고 앎을 안다는 문제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일화이기도 하다.
 
모르는 게 아는 것보다
얼마나 더 많은지,
많다기보다 거의 대부분이란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기 때문에
아는 척하게 되지 않을지

적지 않은 사람이 적잖이
아는 것만 안다고 하지 않는 건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기보다는
모르면서 아는 척,
바로 알지 못해서이다
 
‘아는 걸 안다 하고
모르는 걸 모른다 하는 게
바로 아는 거다’*라고
일찍이 공자가 말하지 않았던가
 
소크라테스도 너 자신을 알라고
바로 알고 있는 것은
모르는 걸 아는 것이라고
일깨우지 않았던가
 
가까운 지기 중 한 사람은
언제나 아는 척하지만 아마도
모르는 걸 모르는 것 같다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논어』 위정편 17장)
―「아는 척에 대해」 전문

 
지와 부지 사이에서 이태수 시인은 말놀이 같은 시 한 편을 생성한다. 허공에 줄을 걸치고 그 위에 한 발로 걷는 광대가 되어 앎과 알지 못함 사이로 난 좁은 공간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한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서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이토록 쉽고 단순한 일이 왜 그다지도 실천되지 못하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렇게 앎과 모름 사이를 위태롭게 누비면서 이태수 시인은 텍스트 자체가 앎과 모름에 대해 되묻는 기제가 되도록 만든다. 둘째 연을 다시 읽어 보자.
 
적지 않은 사람이 적잖이
아는 것만 안다고 하지 않는 건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기보다는
모르면서 아는 척,
바로 알지 못해서이다

아는 것만 안다고 하기,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기, 모르면서 아는 척하기, 바로 알기, 바로 알지 못하기…텍스트 내부에서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 구부러진 공간이 여러 겹으로 형성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데리다Jacques Derrida가 “텍스트의 밖은 없다”, 즉 텍스트가 아닌 것은 없다고 말한 바 있듯이, 텍스트 자체가 앎과 모름에 대한 사색을 유도하는 거대한 질문으로 변모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텍스트를 구성하는 말들이 지닌 내부의 힘들은 함께 어우러져 역설의 미학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안다고 하는 것이 모른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귀착되고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앎이라는 것을 강조하게 된다. 공자 말씀으로 돌아가,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담백하게 말하는 것이 진정한 지자知者의 태도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만든다. 이태수 시인의 목소리에 공명하면서 에리히 프롬Erich Fromm도 또한 지와 부지 사이의 균형을 지적한 바 있다. 프롬이 논어를 읽고 공자의 가르침을 서구철학의 흐름 속에 녹여낸 것 같기도 하다. “도를 알고 있는 자는 도에 대해 말하려 하지 않고, 도에 대해 언제든지 말할 용의를 갖추고 있는 자는 도를 알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102면)
 
비우는 것이 곧 채움이라는 것을 알고, 고장 난 시계로 자신의 시간을 재며 길이 이끄는 대로 길을 나서는 삶, 그 발걸음마다 마주치게 되는 세상의 풍경과 물상들 속에서 때로는 겸손을, 때로는 허무를, 또 때로는 소중한 기억을 찾아내며 멈춤 없이 길을 가는 모습이 이태수 시인의 모습이다. 그 어떤 대상도 있는 그대로 고정되지 않으며 지각하고 감응하는 주체와의 상호 작용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는 까닭에 이태수 시인은 어떤 주제, 어떤 대상도 쉽게 단정하거나 규정하지 않는다. 동시적으로 반대 관계에 있는 존재도 한편으로는 내부적 힘의 균형과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보고 그것이 곧 우주의 운행 원리라고 보기에 이태수 시인은 계속하여 열려 있는 텍스트를 지향한다. 그의 텍스트에서 자주 역설의 미학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러므로 전혀 놀라울 일이 아니다. 오히려 지극히 자연스럽다.
 
4. 꿈과 서정, 맥문동꽃과 적멸궁 단풍
 
이태수 시인이 꿈의 시인이라면 그것은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서정시인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는 길이 이끄는 길을 나서며 꽃 피는 것 보고 새 우는 것 듣고 또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을 살피면서 이슬의 꿈을 다시 꾸고, 그 꿈속의 꿈을 필사하면서 더욱 깊은 꿈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시인이다. 그리고 그 꿈이 끝나는 자리를 자신의 소실점으로 삼고자 하는 시인이다.
「풍경, 늦가을 황혼」, 「맥문동꽃」, 그리고 「적멸궁 한 채」는 서정 시인으로서의 이태수 시인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 보여준다. 먼저, 꿈꾸면서 나이 들고 그렇게 순순히 적멸을 향해가는 여유로운 풍경을 그린 시편으로 「풍경, 늦가을 황혼」과 「적멸궁 한 채」를 들 수 있다. 「풍경, 늦가을 황혼」은 세월과 더불어 자연 속에 곱게 스며들기를 꿈꾸는 바람직한 노년의 고운 풍경화로 보인다.
 
홍단풍나무에 앉아 멧새들이 지저귄다
때마침 서녘 하늘에도 붉은 노을,
새 소리도 붉은빛을 보태는 것만 같다
 
장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노신사도
이 장면에 동참하고 있는 걸까
붉은 단풍과 서녘 하늘을 번갈아 바라본다
 
황혼 무렵의 아름답고 그윽한 풍경화 같다
어둠살이 느릿느릿 밀리어오고
저녁노을은 더욱 붉게 타오르고 있다
 
멧새는 단풍에 연신 노래를 끼얹는지
노을도 함께 예찬하고 있는 건지
더불어 노신사도 더욱 멋있어 보인다
―「풍경, 늦가을 황혼」 전문
 
황혼, 늦가을, 서녘 하늘, 어둠살, 저녁노을…늦가을이라는 계절의 아름다움이 황혼, 저녁노을, 그리고 서녘 하늘과 어울려 드러난다. 그리고 그 풍경에 동적인 이미지를 부여하면서 활력을 주는 것은 멧새의 노랫소리이다. 염천의 여름이 아닌 가을, 그것도 늦가을, 정오의 열정을 넘긴 황혼의 시간대, 거기 홍단풍조차 어울려 고요하게 드러난 풍경화의 구도는 노신사, 그것도 장의자에 기대앉은 노신사를 중심에 두면서 완성된다.
일찍이 예이츠W.B.Yeats가 「비잔티움으로의 항해Sailing to Byzantium」에서 노래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고. 노인은 “작대기에 걸친 낡은 코트” 같은 존재라고. 물고기며 가축이며 가금류며 모두 여름 내내 잉태하고 출생하고 죽어가는 일로 바쁘다(Fish, flesh, or fowl, commend all summer long, Whatever is begotten, born, and dies.)고, 그래서 이처럼 번잡한 속세를 벗어나 비잔티움의 문명 속으로 떠나가자고.
그러나 이 땅에서 이태수 시인은 노래한다. 자연의 노래를 후창하면서 노을과 서녘 하늘 우러르고 홍단풍에 경이로운 눈길을 던지면서 꿈속의 꿈을 찾아가는 노신사를 그려낸다. 그 노신사로 인하여 한결 조화롭게 완성되는 가을 저녁의 풍경화를 보여준다. 비잔티움으로의 머나먼 항해가 아니어도, 내가 사는 이 땅에서도 꿈꾸며 물 흐르듯 살다가 꿈속의 꿈을 향해 사위어 가는 삶은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음을 노래한다.
그처럼 고적하면서도 여유로운 노년의 모습이 가능한 것은 한편으로는 시인이 유년의 꿈을 잃지 않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가 무지개를 바라보면서 가슴 설렜듯 홍단풍과 멧새 소리에 무심하지 않고 언제나 새삼스레 다시 설레는 기운이 시인에게 그대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유년의 기억을 꿈속에서 다시 찾아 읊는 「맥문동꽃」을 보자. 「맥문동꽃」은 이태수 시 세계의 서정성을 언급할 때 먼저 내세워도 좋을 듯하다. 조촐한 듯하지만 결코 성기지 않은 은유의 시침질이 텍스트 전반을 채우고 있다.
 
허물어지고 없는 옛집 빈터에
 
맥문동 꽃대가 오종종
 
보랏빛 꽃들을 매달고 있다
 
응달에 오종종 앉아서
 
안 오시는 아버지를 기다리던
 
그 누이도 아우들마저
 
먼 세상으로 떠나가 버렸다
 
기다리던 그때 마음이
 
맥문동꽃들로 매달린 것 같다
―「맥문동꽃」 전문
 
민들레, 눈새기꽃, 노루귀, 나도바람꽃, 구절초, 그리고 할미꽃. 이 땅의 풀꽃들은 사연 없이 피는 일이 없다. 애절한 사연들을 꽃말마다 안은 채 꽃은 피어나고 또 그렇게 진다. 그래서 이 땅의 시인들은 그 작은 대상들에게 무수한 기억과 소원을 투영하곤 했다. 그러나 이태수 시인은 맥문동꽃으로 하여금 새로운 전설을 머금게 한다. 이반 볼랜드Eavan Boland에게는 사과꽃, 이영도에겐 진달래, 워즈워드에겐 수선화가 있듯이 이태수 시인이 폐허 위에 꽃 피우는 꽃의 사연은 맥문동꽃의 속말이다.
허물어진 옛 집터나 그 빈터에 꽃이 무수한 서글픔을 상기시키는 일이야 그다지 새로울 바가 없다. 그리고 그 꽃들이 제각각 피어나는 사연 또한 그다지 낯설지 않다. 그러나 이 텍스트를 잊을 수 없는 기억의 시편으로 승화시키는 요소는 알맞게 제자리를 찾은 이미지의 정합성에서 찾을 수 있다. “응달에 오종종 앉아서”라는 구절에 주목해 보자. 매우 구체적으로 기억을 드러내고 있는 까닭에 시인의 기억이 한결 새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 떠난 누이와 아우들에 대한 기억이 곱고도 선연하게 전달되는 것이다. 응달에 오종종 앉아서 기다리는 대상이 “오지 않는 아버지”라서 더욱 애달프고 그 애달픔으로 인하여 이 텍스트는 빼어난 서정시로 부상한다고 볼 수 있다.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기다린다. 그러나 이 텍스트에서는 그 기다림의 대상이 오지 않는 사람이며 어쩌면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존재이다. 그래서 기다림의 의미가 더욱 간절해진다. 양손에 선물 보따리를 지니고 미소 지으면서 돌아오실 아버지라면 그토록 애틋하겠는가? 양지바른 곳에 나란히 앉았다면 그토록 서글프겠는가? 돌아오지 않을 아버지를 기다린다. 오종종 앉아서 기다린다. 응달에 오종종 앉아서 그들은 기다린다. 누이와 동생들이다. 그 누이와 동생들은 이미 세상 떠나고 없고 그 집은 폐허 위의 빈집으로 남았다. 그리고 거기 오종종 매달려 맥문동꽃이 피어났다. 피어난 맥문동꽃의 모습에서 누이와 동생의 얼굴을 찾아본다. 그렇게 옛날을 그리워한다. 그 결과 한 편의 애틋하고 서글픈 꿈의 시편이 탄생한다. 꿈속의 꿈에서 보는 옛날의 꿈이…시 구절마다 “오종종” 매달려 피어 있다.
 
비우고 또 비우며 수긍하고 순응하면서 정처 없이 걷는 그의 길이 궁극적으로는 조촐하고도 고요한 적멸을 향해 난 길이라는 것을 믿는다. 냇물에 흘러가는 단풍잎 하나를 보고 적멸궁 한 채가 떠내려간다고 노래하는 것은 그렇다면 과장이 아니다. 적멸궁 한 채에는 스스로 한 잎 단풍잎 되어 흘러가는 시인의 모습, 그 그림자가 어려있다. 떠내려가면서 자신만의 꿈속으로 서서히 후퇴하는 시인의 뒷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단풍잎이 떠내려가 닿을 곳, 그곳에는 꿈의 궁전 한 채가 솟아 있을 것이다. 꿈의 꿈의 꿈속에 휘영청 달이 돋듯 솟아오른 궁궐 한 채가 보이는 듯도 하다.
 
소실된 고운사 인근 맑은 계곡물에
 
떠내려가는 단풍잎 하나
 
물소리 안고 가는 저 적멸궁 한 채
―「적멸궁 한 채」 전문
 
 
 
*참고한 책: 에리히 프롬, 임채영 역, 『사랑의 기술』 1992, 우레
 
 
 
박진임(문학평론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동 대학원 졸업. 미국 오리건주립대학교 비교문학과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 시카고대학교 박사후과정 연구원, 스탠포드대학교 풀브라이트 강의 교수, 남가주대학교 객원교수를 지냈다. 2004년 『문학사상』으로 평론계에 등단했다. 저서 Narrative of the Vietnam War by Korean and American Writers (2007, Peter Lang, New York), 『비교문학과 텍스트의 국적』(2018, 소명출판), 『두 겹의 언어』(2018, 고요아침), 『세이렌의 항해』(2019, 문학수첩), 『탄성의 시학』(2023, 황금알), 『시로부터의 초대』(2023, 문학수첩) 등이 있다. 편저 『꽃 그 달변의 유혹―박재두 시전집』 (2018, 고요아침), 『말 그 눈부신 빛깔―박재두 산문전집』 (2021, 고요아침) 등이 있다. 현재 평택대학교 국제지역학부 미국학 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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