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향만리) 허공의 휘파람 소리 / 이태수
길을 걷다가 또 가야 할 길을 잃는다. /상한 마음 아무 데나 부려놓고/ 누가 이 한낮, 우두커니 길가에 서서/ 휘파람이나 불고 있는지./ 세월 저 너머의 강물 소리도/ 뒤섞여 귓전을 흔든다.// 그래, 이젠 알 수 있을 것도 같아./ 사실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가고 있는 저 구름, 바람과/ 물이 가는 소리 따라나서며/ 나뭇잎들이 흩날린다.// 길을 잃고 어깨 떨어뜨린 내 발길에/ 채이는 돌부리들. 상해서 부려놨던 마음/ 다시 뒤집어 안은 채 걷고 또 걷는다./ 이 한낮, 가야 할 길은 안 보이지만// 허공에 뜬 누군가의 저 쓸쓸한/ 휘파람 소리. 지난 세월이 아니라/ 다가서는 시간의 어둠 속을/ 징검다리 건너듯 후들거리는 발걸음을/ 내디디면서, 강물 소리에 귀 모으고/ 목이나 태우면서, 마음은 정처도 없이.
『이슬방울 또는 얼음꽃』(2004년, 문학과지성사)
이태수 시집 『이슬방울 또는 얼음꽃』(2004년, 문학과지성사). 교보문고 갈무리.
세계는 “허공”속에 핀 불안한 꽃이다. 그것은 “길을” ”잃은 자에게만 보이는 무위법(無爲法)이다. 존재는 외부로부터 몰락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함몰한다. '길'이 그렇듯, 허공은 스스로 문을 열고 닫는다. 그의 시는 늘 흔들리면서 흔들리지 않는 어떤 슬픈 아름다움이 있다. 길을 걷다 문득, 아득함을 느낀 자의 서성거림이 있다. 그의 성찰은 말을 넘어선 메타포이자 흔들린 실존이다. 외롭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사라지기 때문에 인간은 흔들린다. 이태수(1947~, 의성 출생)의 「허공의 휘파람 소리」는, 사르트르(프랑스, 1905~1980)의 유명한 명구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를 연상시킨다. 고립된 개체의 갈등과 엄혹한 경계 위에 서 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절박한 물음이다. “한낮”에 “우두커니 길가에 서서 휘파람”을 불고 있는 외로움이 보인다. 하여, ‘왜, 이 세계에 나왔는가?’하고 고인 슬픔으로 질문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절실함이, 오히려 시의 어떤 기미(機微)와 기색, 기척을 적확하게 느끼게 하다. 하강 이미지와 상승에 대한 시적 욕구는, 초월로서의 새길 찾기의 한 방법이다. 현실의 비속함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완강한 몸부림이자, 무의식이 의식을 뚫고 올라온 표징이다. 그것은 존재의 우울이며 우연히 마주친 ‘낯선 일상'의 은유다. 이런 자아의 본질 탐구와 형이상학적 추구의 변주는, 이태수 시학의 일관된 시선이다. 이 시 속엔 주목할 두 가지의 길이 나온다. 소리의 빛과 어둠의 그림자다. 「허공의 휘파람 소리」는, 시각을 청각화한 공감각의 세계로 안내한다. 한 인간의 외로운 실존뿐 아니라, 길 잃은 현대인의 허무가 보인다. ‘길’은 늘 그에게 과정이며, ‘술’은 그 길에서의 동반자로 등장한다. 아마 그 까닭은 시인의 ‘길 찾기’ 역시, 그만큼 고해(苦海)로 덮여있기 때문이리라.
김동원 시인·평론가
출처 : 대구일보(https://www.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