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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8

❘이태수 칼럼❘ 새해의 소망 _ 경북신문 2025. 1. 20
아트코리아 | 조회 25
❘이태수 칼럼❘
 
새해의 소망
경북신문 2025. 1. 20
 
 
  행복한 삶을 꿈꾸지 않는 사람은 없겠지만 사람마다 행복을 느끼는 정도가 다르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스스로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삶의 목적은 행복’이라고 설파한 뒤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견해를 펴왔지만, 그 견해는 각양각색이다. 행복은 주관적 감정이므로 규정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비관 층이 늘고 있다는 소리가 나오는지는 이미 오래됐다. 그러나 날로 그 정도가 심해져 우리 사회가 점점 더 희망을 잃어 간다면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행복에 대한 느낌은 지극히 주관적이더라도,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려 해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회라면 낭패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도연명의 ‘무릉도원’, 허균의 ‘율도국’은 영원한 행복을 꿈꾸는 이상향들이다. 인간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곳들이기도 하다. 행복은 눈높이나 시각에 따라 엄청나게 다르게 느껴질 수 있으며, 완전한 만족은 이상향에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희망이 보이는 사회는 최소한의 소망이다.
  새해를 맞았지만, 우리의 고유 명절인 설날도 다가오고 있어 요즘은 만나는 사람들마다 덕담(德談)을 주고받게 마련이다. 상투화된 감도 없지 않으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이 싫지 않은 건 들을 때도 좋지만, 그런 말을 할 때 기분도 고조되기 때문이다.
  일찍이 사학자 최남선은 덕담이란 단순히 “그렇게 되십시오”라는 데 그치지 않고, “이미 그렇게 되셨으니 고맙습니다”라는 언령관념(言靈觀念)이 배어 있다고 했다. ‘말이 씨가 된다’는 말도 있듯이, 분명 말에는 그렇게 되라고 하면 그렇게 되는 어떤 신비스런 힘이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새해 덕담 나누기는 지구촌의 공통적인 풍습이다. 민족이나 나라에 따라 그 뉘앙스만 다를 뿐이다. 미국에서는 “해피 뉴 이어”가 대변하듯 행복 추구가 주요 덕목이다. 중국 사람들에게는 ‘쿵시화차이(恭喜發財)’처럼 재물을 중시하는 가치관이 배어있으며, 일본에선 “새해가 시작되니 축하합니다”라는 인사가 주류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새해 덕담에 복을 많이 받으라는 말이 주류다. ‘복’이라는 말에는 재물, 출세, 자식, 배우자에 대한 복 등 많은 의미가 내포돼 있다. 게다가 ‘복’이라는 추상성 뒤에 구체적인 덕목이 보태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득남, 건강, 치부, 승진 등 상대방의 처지에 따라 그 빛깔이 달라진다.
  세태의 변화와 덕담이 맞물리기도 한다. 과거 한동안은 “부자 되세요”가 회자돼 물질적 풍요가 주요 미덕으로 자리매김하는 감이 없지 않았다. 이 가치관은 중산층이 무너지고 절대빈곤층이 계속 늘어나는 가운데 일부 계층에서 수백억대의 돈이 오가는 데서 오는 상실감이나 박탈감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이 덕담이 이젠 거의 꼬리를 감추고 있다. 이젠 그런 소망마저 시들해져 버린 것인지, 아예 포기해 버렸는지 알 수 없다.
  평소 우리 사회에는 악담(惡談)이 덕담을 뒤덮고 있는 형국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남을 속이고 해치고 아픔과 슬픔을 주는 말들, 실현 가능성과 동떨어진 허언(虛言)이나 구두선(口頭禪)들이 난무한다. 세 치 혀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그 폭력이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호 셰익스피어는 일찍이 “사람은 비수를 가시 돋친 말 속에 숨겨둘 수 있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다시 새겨보지 않을 수 없다.
  만성화된 실업, 끝이 보이지 않는 경기 불황과 정국 불안, 흔들리는 사회 안전망, 언제 닥칠지 모르는 재앙 등은 우리를 여전히 옥죄고 있다. 패거리 짓기에 눈이 어둡고 자신의 탓이 실종돼버린 듯한 정치권, 민생과 상생을 저버린 채 힘겨루기를 일삼는 정쟁, 갈등과 대립, 경제적 고통의 먹구름과 골이 깊이 파이기만 하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 개인이나 집단 간의 막무가내 이기주의…….
  그러나 이젠 달라져야만 한다. 힘 있고 가진 사람들부터 따뜻한 세상 만들기에 나서야 한다. 잘못은 ‘내 탓’, 잘되면 ‘남의 탓’인 너그러움을 회복하면서, 성실하고 정직하며 참되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새로운 기운을 낼 수 있는, 그런 사회가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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