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수 칼럼❘
원로시인 황동규
경북신문 2024. 8. 20
팔십대 후반의 원로시인 황동규가 근래에 열여덟 번째 시집 ‘봄비를 맞다’를 발간해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4년 전 시집 ‘오늘 하루만이라도’를 내면서 ‘시인의 말’(자서)에 “지난 몇 해는 마지막 시집을 쓴다면서 살았다.”면서 “앞으로도 시를 쓰겠지만 그 시들은 유고집에 들어갈 공산이 크다.”고 말한 바 있지만, 이번 시집의 ‘시인의 말’에서는 “시 태반이 늙음의 바닥을 짚고 일어나 다시 링 위에 서는 한 인간의 기록”이라고 쓰고 있다.
더구나 이번 시집을 내면서는 “코로나바이러스가 그렇게 놔두지 않았”고, “늙음이 코로나 글러브를 끼고 삶을 링 위에 눕혀”버렸다고도 고백하고 있으며, 표사(뒤표지 말)에서는 “지금도 아침에 해가 뜨고 아파트 발코니에선 꽃들이 피고 지고 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시, 물빛으로 환한 시간이”라고 밝히고 있어 시인의 시와 사람들을 향한 간절한 마음이 숙연하게 하기도 한다.
그는 2013년 시집 ‘사는 기쁨’을 발간할 때 ‘시인의 말’을 “죽어서도 꿈꾸고 싶다.”고 단 한 문장만 쓴 적이 있다. 또 표사에서는 “시를 쓰다가 시가 나를 쓰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곤 한다. 한밤중에 깨어 볼펜을 들 때가 특히 그렇다.”라며, “시를 좇아가다 보니 바야흐로 삶의 가을이다. 주위에 자신의 때깔로 단풍 들거나 들고 있는 사람들이 아름답다. 가득 찬 잔만큼 아직 남은 잔이 마음을 황홀케 한다. 벌레 문 자국 같이 조그맣고 가려운 이 ‘사는 기쁨’ 용서하시게.”라고도 썼다.
“늙마에 미국 가는 친구/이메일과 전화에 매달려 서울서처럼 살다가/자식 곁에서 죽겠다고 하지만/늦가을 비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 인사동에서 만나/따끈한 오뎅 안주로/천천히 한잔할 도리는 없겠구나.//허나 같이 살다 누가 먼저 세상 뜨는 것보다/서로의 추억이 반짝일 때 헤어지는 맛도 있겠다./잘 가거라./박테리아들도 둘로 갈라질 때 쾌락이 없다면/왜 힘들여 갈라지겠는가?/허허.” ―황동규 시 ‘이별 없는 시대’ 전문
시집 ‘사는 기쁨’에 실려 있는 시 중에서 가장 짧은 작품이다. 친구(재미 시인 마종기)와의 이별을 다룬 이 시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인생의 종점이라는 초조하고 각박한 시간대를 사는 자신을 푸근하고 넉넉하게 만들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시가 보여주는 이별은 아주 가까운 친구와 살아서 다시 만나기 어려운 고통스러운 이별을 담담한 어조로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 같은 힘든 상황을 발상의 전환을 통해 전복시킨다는 점에서 유난히 마음을 끈다. “허나 같이 살다 누가 먼저 세상을 뜨는 것보다/서로의 추억이 반짝일 때 헤어지는 맛도 있겠다.”는 생각을 함으로써, 박테리아가 “쾌락이 없다면/왜 힘들여” 둘로 갈라지겠느냐는 기발한 전복적 상상력을 펼침으로써 고통스러운 이별을 무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마지막 행의 “허허.”라는 웃음소리는 밝고 환한 목소리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분명히 고통스러운 신음의 상태는 벗어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인이 이렇게 발상의 전환을 통해 친구가 떠나고, 행동거지가 불편해지고, 생활반경이 좁아지는 상황 속에서 스스로를 위무하는 방식으로나마 나름대로 ‘사는 기쁨’을 획득한다고 볼 수 있으며, 노년에 접어든 정신적 현주소를 말해 주고 있는 것으로도 읽힌다.
“시작이 있을 뿐 끝이 없는 것을/꿈이라 불렀던가?//작은 강물/언제 바다에 닿았는지/저녁 안개 걷히고 그냥 빈 뻘/물새들의 형체 보이지 않고/소리만 들리는,/끝이 따로 없는,//누군가 조용히/풍경 속으로 들어온다/하늘가에 별이 하나 돋는다/별이 말하기 시작했다” ―황동규 시 ‘홀로움’ 전문
외로움의 존재론적 의미를 ‘홀로움’이라는 새로운 경지로 승화시킨 시라 할 수 있다. 내적 사유에 의해 그가 새로 만들어낸 말인 ‘홀로움’은 홀로 있는 것이 ‘외로움’만이 아니라 ‘환해진 외로움’이라는 깨달음의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이 때문에 그 적막 속의 홀로인 외로움으로는 그리움과 기다림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누군가 조용히 들어오고 하늘가에 하나 돋아난 별이 말을 걸어오는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홀로 있는 외로움이 환해지는 시인의 꿈(내면세계)은 아름답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