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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평론

등단 반세기를 되돌아보다 ―김춘수, 황동규, 나의 시 - ‘아카데미아 후마나’ 계명대 행소박물관 강당에서 개최한 초청 토요 특강 요지
아트코리아 | 조회 461
이 글은 대구의 지성인들(주로 계명대 교수 출신)의 학술․예술 연구 단체인 ‘아카데미아 후마나’(회장 신일희 계명대 총장)가 2024년 6월 15일 오후(4시~6시) 계명대 행소박물관 강당에서 개최한 초청 토요 특강 요지이다.
 


등단 반세기를 되돌아보다
―김춘수, 황동규, 나의 시
 
 
이 태 수<시인, 전 매일신문 논설주간>

 
  오늘 이 시간에는 제 시에 대한 이야기만 하려다가 쑥스럽기도 하고, 재미도 없을 것 같아 제가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 이야기를 먼저 좀 하려 합니다. 저는 박목월 선생과 조지훈 선생을 우러르며 시에 눈을 떴습니다. 조지훈 선생의 의젓한 신비(지사) 같은 풍모, 박목월 선생의 빼어난 언어 감각과 감성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후 대학 시절부터는 김춘수 선생과 황동규 선생의 시를 각별하게 좋아했으며, 가까이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김춘수 선생과 황동규 선생의 시 몇 편을 먼저 감상하고, 제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ⅰ) 널리 애송되는 김춘수의 「꽃」은 존재에 대한 인식의 세계를 아름답게 떠올리고 있는 시입니다. 언제 읽어도 아름답습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사물 그 자체와 함께 존재의 심연에 이르려는 몸짓을 보여줍니다. 스스로 ‘사물화’됨으로써 상식의 차원을 넘어선 형이상학적 인식의 공간을 열어 보인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잊히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의 「꽃」 전문
 
  ‘나’와 ‘너’ 사이에 의미 있는 ‘관계’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꽃’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이 시는 그러므로 ‘너’와 ‘나’의 관계에 대한 추구가 그 명제이며, 그 관계는 대상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줄 때 형성된다는 깨달음의 세계를 떠올립니다.
  시인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고 첫 연에서 말하는가 하면, 둘째 연에서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어서 ‘나’와 ‘너’의 만남은 대상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줄 때 가능하다는 인식의 눈을 뜨면서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 달라고 하면서 그런 소망을 간절하게 토로하기에 이릅니다.
  김춘수의 ‘꽃’은 마지막 두 줄에서 그 의미를 드러냅니다. 그가 되고 싶은 ‘꽃’은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잊히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라는 구절에서 느끼게 되듯 ‘잊혀지지(잊히지) 않는 하나의 눈짓’으로 풀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를 제대로 읽으려면 존재론적 소망을 담고 있는 마지막 연의 “우리는 모두 / 무엇이 되고 싶다”는 구절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이 되고 싶다”는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내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풀이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는 인식론이라는 철학적 명제를 끌어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춘수는 이 초기 시와는 달리 그 이후에는 은유와 상징 기법을 적극적으로 구사하면서 ‘무의미시’를 지향하기도 했습니다. ‘무의미시’로 이행하는 과정의 은유와 상징 기법의 시를 조금 들여다보겠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하나(느)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김춘수의 「나의 하나(느)님」 부분
 
  김춘수는 이 시에서 기존의 관념을 완전히 뛰어넘고 있습니다. 성스럽고 절대적인 존재인 ‘하느님’을 ‘늙은 비애’로 규정하다가 ‘푸줏간에 걸린 커다람 살점’으로 비약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독자는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어집니다. 하지만 시인은 바로 그 점을 노리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유사성이 아니라 아주 이질적인 것과의 결합을 시도하는 은유 기법을 구사한 경우입니다. 이 때문에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결합이 처음 이루어지고, 이 둘 사이에는 유추의 거리도 엄청나게 멀어집니다. ‘하느님’과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의 만남은 충격적이고 경이감을 동반함으로써 ‘살아 있는 은유’나 ‘창조적인 은유’가 되고 있는 셈입니다.
  리처즈는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이질적 결합에서 오는 탄력감을 ‘긴장(tension)’이라고 명명하면서 이 둘 사이의 거리가 멀수록 그 ‘긴장’은 커진다고 했습니다. 김춘수는 바로 그런 시도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표면 진술과 내면 진술 사이의 관계 설정은 은유와 상징의 공통점이지만, 은유는 그 관계 설정의 토대가 두 대상 사이의 유사성에 주어지며, 상징은 비유사성을 통한 심상과 관념과의 내면적 토대에 의해 이루어지는 점이 다릅니다.
  이 때문에 상징은 ‘반투명성’, ‘감춤’과 ‘드러냄’의 양면성을 지니기도 합니다. 상징은 또한 객관적 실체가 아닌 의사 실체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은유는 낱말 사이의 교차에 의해 이루어지고, 상징은 사물과 관념 사이의 교차에 의해 이루어진다’(Wheeler)고 합니다.
  김춘수는 상징 기법 중에서도 ‘개인적 상징’을 즐겨 구사합니다. 어떤 하나의 작품 속에만 있는 ‘단일한 상징’이나 자기의 여러 작품에서 ‘특수한 의미’로 즐겨 사용하는 상징을 빈번하게 구사하기 때문입니다. ‘개인적 상징’의 예를 보겠습니다.
 
눈보다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가 가라앉고
바다가 있던 자리에
군함이 한 척 닻을 내리고 있었다
<중략>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없는 해안선을
한 사나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
        —김춘수의 「처용단장」 부분
 
  이 시에서 ‘바다’는 김춘수가 많이 쓰는 이미지입니다. 이 ‘바다’는 실제 바다가 아닌 시인만의 바다입니다. “바다가 없는 해안선”을 따라 한 사나이가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라는 대목에서 볼 수 있듯, 아주 이질적인 ‘바다’가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의미의 배경을 형성합니다. 그러므로 김춘수의 ‘바다’는 ‘병’이고 ‘죽음’이며 ‘회복, 부활’이자 ‘그의 유년’ 등으로 시인이 개인적으로 특수한 의미를 부여한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기법을 알고 보면 김춘수는 그만의 개성적인 은유나 상징을 구사하고 있으며, ‘긴장된 언어유희’를 통해 언어의 절대성을 추구하면서 새로운 언어미학을 구축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ⅱ) 황동규의 시는 또 다른 묘미를 안겨줍니다. 그의 열다섯 번째 시집 『사는 기쁨』 맨 앞에 실려 있고, 이 시집에서 가장 짧은 시 「이별 없는 시대」를 읽어보기에 앞서 이 시집의 ‘시인의 말’과 표사를 먼저 들여다보겠습니다.
  황동규는 ‘시인의 말’에서 “죽어서도 꿈꾸고 싶다.”고 단 한 문장의 짧은 말만 쓰고 있습니다. 또 표사(뒤표지 글)에서는 “시를 쓰다가 시가 나를 쓰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곤 한다. 한밤중에 깨어 볼펜을 들 때가 특히 그렇다.”라고 쓰고, 이어 “시를 좇아가다 보니 바야흐로 삶의 가을이다. 주위에 자신의 때깔로 단풍 들거나 들고 있는 사람들이 아름답다. 가득 찬 잔만큼 아직 남은 잔이 마음을 황홀케 한다. 벌레 문 자국 같이 조그맣고 가려운 이 ‘사는 기쁨’ 용서하시게.”라는 말로 끝맺고 있습니다.
  이 같은 시인의 말을 떠올리면서 시 「이별 없는 시대」를 읽으면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늙마에 미국 가는 친구
이메일과 전화에 매달려 서울서처럼 살다가
자식 곁에서 죽겠다고 하지만
늦가을 비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 인사동에서 만나
따끈한 오뎅 안주로
천천히 한잔할 도리는 없겠구나.
 
허나 같이 살다 누가 먼저 세상 뜨는 것보다
서로의 추억이 반짝일 때 헤어지는 맛도 있겠다.
잘 가거라.
박테리아들도 둘로 갈라질 때 쾌락이 없다면
왜 힘들여 갈라지겠는가?
허허.
                ―황동규의 「이별 없는 시대」 전문
 
  친구(재미 시인 마종기)와의 이별을 다룬 이 시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인생의 종점이라는 초조하고 각박한 시간대를 사는 자신을 푸근하고 넉넉하게 만들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시가 보여주는 이별은 아주 가까운 친구와 살아서 다시 만나기 어려운 고통스러운 이별을 담담한 어조로 풀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 같은 힘든 상황을 발상의 전환을 통해 전복시키고 있다는 점에 마음이 끌립니다. “허나 같이 살다 누가 먼저 세상을 뜨는 것보다 / 서로의 추억이 반짝일 때 헤어지는 맛도 있겠다,”는 생각을 함으로써, 박테리아가 “쾌락이 없다면 / 왜 힘들여” 둘로 갈라지겠느냐는 기발한 전복적 상상력을 펼침으로써 고통스러운 이별을 무화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지막 행의 “허허.”라는 웃음소리는 밝고 환한 목소리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분명히 고통스러운 신음의 상태는 벗어나 있습니다.
  이 시의 화자가 이렇게 발상의 전환을 통해 친구가 떠나고, 행동거지가 불편해지고, 생활반경이 좁아지는 상황 속에서 스스로를 위무하는 방식으로나마 나름대로 ‘사는 기쁨’을 획득합니다. 이 시는 이제 노년에 접어든 시인의 정신적 현주소를 말해 주고 있는 것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황동규의 시 한 편을 더 보겠습니다.
 
시작이 있을 뿐 끝이 없는 것을
꿈이라 불렀던가?
 
작은 강물
언제 바다에 닿았는지
저녁 안개 걷히고 그냥 빈 뻘
물새들의 형체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리는,
끝이 따로 없는,
 
누군가 조용히
풍경 속으로 들어온다
하늘가에 별이 하나 돋는다
별이 말하기 시작했다
            ―황동규의 「홀로움」 전문
 
  외로움의 존재론적 의미를 ‘홀로움’이라는 새로운 경지로 승화시킨 시입니다. 내적 사유에 의해 그가 새로 만들어낸 말인 ‘홀로움’은 홀로 있는 것이 ‘외로움’만이 아니라 ‘환해진 외로움’이라는 깨달음의 시선으로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그 적막 속의 홀로인 외로움으로는 그리움과 기다림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누군가 조용히 들어오고 하늘가에 하나 돋아난 별이 말을 걸어오는지도 모릅니다. 그야말로 홀로 있는 외로움이 환해지는 시인의 꿈(내면세계)은 그윽하게 아름답습니다.
  1938년에 태어난 황동규 시인은 그 이후 시집 『연옥의 봄』, 『오늘 하루만이라도』를 냈으며, 최근 열여덟 번째 시집 『봄비를 맞다』를 냈습니다. 이젠 연로한 탓이겠지만 『오늘 하루만이라도』의 ‘시인의 말’에서 “지난 몇 해는 마지막 시집을 쓴다면서 살았다.”며 “마지막 시집이라고 쓰려다 만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4년 뒤인 최근 『봄비를 맞다』의 ‘시인의 말’에서는 “늙음이 코로나 글러브를 끼고 삶을 링 위에 눕혀”버렸다며, “이 시집의 시 태반이 늙음의 바닥을 짚고 일어나 다시 링 서는 한 인간의 기록”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또 표사에서는 “지금도 아침에 해가 뜨고 아파트 발코니에선 꽃들이 피고 지고 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시, 물빛으로 환한 시간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사족을 달지 않겠습니다만, 황동규 시인의 이 말을 깊이 새겨보시기 바랍니다.
 
  ⅲ) 이제 제가 가장 잘 아는 제 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오래된 아홉 번째 시집 『이슬방울 또는 얼음꽃』에 실려 있는 소품 한 편을 함께 들여다보겠습니다.
 
풀잎에 맺혀 글썽이는 이슬방울
위에 뛰어내리는 햇살
위에 포개어지는 새소리, 위에
아득한 허공.
 
그 아래 구겨지는 구름 몇 조각
아래 몸을 비트는 소나무들
아래 무덤덤 앉아 있는 바위, 아래
자꾸만 작아지는 나.
 
허공에 떠도는 구름과
소나무 가지에 매달리는 새소리,
햇살이 곤두박질하는 바위 위 풀잎에
내가 글썽이며 맺혀 있는 이슬방울.
                            —「이슬방울」 전문
 
  자신의 시에 대해 사족을 달기보다는 비평가의 평 한 부분을 소개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문학평론가 이광호(문학과지성사 대표)가 풀이한 글을 그대로 읽어보겠습니다.
 
  “이태수는 이 시에서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작지만 아름다운 세계를 빚어 보인다. 종래의 시에도 빈번하게 등장하던 물방울이나 이슬방울이 여기서는 더욱 애틋하고 투명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거의 동시에 쓰인 다른 시「낮에 꾸는 꿈」에서는 서정적 자아가 한없이 작고 낮아진 상태에서 물방울 속으로 들어갔을 때, 그 둥글고 빈곳에서 투명해지는 말들을 만나는 세계를 떠올리면서 그 신성한 언어를 노래하고 있지만, 이 시에서는 그 신성한 언어의 발견이 삶의 비애와 마주치는 아픔을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맺혀서 글썽이기 때문에 더욱 아름다운 이슬방울은 최상의 상태를 스스로 만들고 있으면서도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는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 그래서 새벽빛을 머금고 있는 이슬은 종교적인 성스러움과 생의 덧없음이라는 상징성을 동시에 부여받기도 한다. 더구나 자연의 사물들이 상호 조응하는 세계 안에서 글썽이며 맺혀 있는 이슬방울은 이 시인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의 그 ‘둥글음’의 다른 상징으로 읽을 수도 있게 한다.
  그러나 이 시에서 이슬방울과 ‘내’가 하나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불과할 따름이라는데 그 비애는 커질 수 있다. 첫 연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처럼 이슬방울은 그 위에 햇살이 뛰어내리고 새소리가 포개어지며, 위에는 또 아득한 허공이 있다.
  말하자면 ‘이슬방울―햇살―새소리―허공’이라는 사물과 그 무엇들이 ‘상승’의 체계를 이루고 있으며, 이들은 깊은 함수관계를 가진다. 그 관계 속에서 이슬방울은 어쩌면 하잘것없는 존재라 할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그 다음 연에서는 그 허공 아래 구겨지는 구름 조각이 있고, 몸을 비트는 소나무들과 무덤덤 앉아 있는 바위가 있으며, 그 아래 작아지기만 하는 ‘나’가 자리 잡고 있다. 이를테면 ‘구름 몇 조각-나무들-바위―나’는 ‘하강’의 질서를 만들면서 역시 상호 깊은 함수관계를 유지한다.
  나아가 이 두 가지 종류의 사물의 수직적인 연계는 마지막 연에서 다시 ‘허공―구름’ ‘소나무―새소리’ ‘햇살―바위’ ‘나―이슬방울’의 수평적인 접속으로 완성되고 있으며, 여기에는 ‘자연 만물들의 상생적인 관계가 응축’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시인이 궁극적으로 마주치고 있는 것은 맑고 투명하지만 작게 맺혀 글썽이는 이슬방울이며, 그와 같은(어쩌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나’다.
  이 시의 마지막 행, “내가 글썽이며 맺혀 있는 이슬방울”에서의 ‘나’와 ‘이슬방울’은 하나가 되며, 시인도 그런 상태를 꿈꾸고 있음도 분명하다. 이 순간에 ‘이슬’은 마침내 이 시의 대상이 아니라, 진정한 주체로 변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이슬방울은 소멸 앞에 놓인 운명을 피할 수는 없다.
  시인은 이 시에서 그 아름다움의 절정의 순간이 품고 있는 비애를 아프게 노래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설령 이 세상에서 가장 지고지순하다고 하더라도, 절정의 순간은 바로 소멸 앞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이 시는 그 찬연한 순간을 깊이 끌어안으면서도 그 유한성을 아프게 일깨우기도 한다.”
 
  시 「이슬방울」에 대해 오래전에 조선일보에 쓴 문학평론가 이광호(문학과지성사 대표, 전 서울예대 교수)의 평을 읽어봤습니다만, 제가 의도한 바를 꿰뚫어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제 시를 이야기하기보다 이광호의 시 풀이를 인용해 보았습니다.
  저의 이 무렵의 시에는 줄기차게 천착해온 서정적 자아의 본질 탐구, 초월적 존재에 가까운 ‘그’에게로 다가가려는 간절한 몸짓, 그러나 거기에 가 닿지 못한 속세의 범부가 겪는 실존적인 불안과 우울 등이 주된 흐름을 이루고 있습니다.
  혼탁한 ‘세상살이의 길’과 그 가운데서 꿈꾸어보는 ‘초월에의 길’ 사이에서 서정적인 자아는 비틀거렸지만, 어둡게 주저앉아 있는 현실에 대한 반발의 정신을 잊지는 않았습니다. 자연과 대상 앞에서 한없이 자세를 낮춰 겸손해진 시적 자아가 텅 비운 마음속을 ‘현재의 탁류를 거슬러 올라 맑은 물이 흐르는 시원에 이르고자 하는 강력한 욕망’으로 채우면서 생명력 있는 서정시를 추구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주제도 두 가지로 요약 할 수 있습니다. 혼탁한 세상살이에서의 ‘일상적인 길’과 그 혼탁한 세상살이 가운데서 꿈꾸어보는 ‘초월적인 길’이 그것입니다. 이 두 길 중 비본질적인 길이라 할 수 있는 ‘일상적인 길’을 벗어나고 뛰어넘어 본질적이고 이상적인 ‘초월의 길’을 추구하려 했습니다.
  이 두 가지 상반된 길 사이의 이항 대립적 구도가 긴장의 중심축으로 떠올라 있을 뿐 아니라 시적 구조의 핵을 이루고 있는 셈입니다. 서정적 자아가 한없이 작고 낮아진 상태에서 맑고 투명하게 반짝이는가 하면, 새로운 길이 열리고, 신성성이 부여되는 건 그런 추구의 소산이었습니다.
  상승 이미지와 하강 이미지, 수직 구도와 수평 구도, 그것을 아우르면서 대상(이슬방울)과 나(자아)를 하나로 아우르며, 작고 미미한 존재지만 맑고 투명하며 아름다움을 함축하고 있는 세계에의 꿈을 그린 시라고 할 수 있다. 짧은 시지만 다양한 시적 장치가 들어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홉 번째 시집에 실린 시 한 편에 대한 이야기만 해보았습니다만, 그 이후에도 열두 권의 시집을 내면서 완만한 변모를 거듭해오기도 했습니다. 형이상학적인 관념에서 구체적인 삶의 현장으로 돌아와 자기성찰에 무게를 실은 시집 『회화나무 그늘』은 시적 행로가 주로 내면의 어둠에서 자연의 그늘로 나오는 과정과 경위를 표출했습니다.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이 무렵의 시는 내면적인 자아가 자연에 놓이는 자아로 이행하는 사유의 변주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집의 ‘밑그림’은 자기 낮추기와 작아지기를 통해 불순하고 뒤틀린 세계를 뛰어넘으려는 초월에의 꿈과 오래 열망해온 ‘그’에게 다가서려는 몸짓은 낮으면서도 완강한 빛깔들이기도 합니다.
  시집 『침묵의 푸른 이랑』과 『침묵의 결』은 ‘침묵’에 들기와 떠받들기를 중심으로 ‘비우기’와 ‘지우기’, ‘내려놓기’를 화두로 쓴 ‘침묵’ 주제의 시편들을 담고 있습니다. 문학평론가 오생근(서울대 명예교수)은 “이태수는 언어를 통해서 언어를 넘어선 침묵의 세계를 동경하거나 성스러운 침묵의 언어를 탐구한다. 물론 그의 탐구는 절대적인 ‘무’와 초월의 세계에 이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속적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시의 언어를 떠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시의 언어로 귀환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풀이했습니다.
  한편 시집 『침묵의 결』에 대해 문학평론가 김주연(숙명여대 명에교수)은 “신과 자연, 인간의 언어와 비인간의 언어 등 이 세계의 본질과 현상에 대한 많은 문제들을 불러 놓는다”며 “시인의 소망은 ‘신성한 말’”이라고 보는가 하면, “자연/신성/침묵의 포괄항은 때로 시끄러운 인간 세상마저 뒤덮으면서 신성성의 세계를 준다.”며 “말을 잃었으나 자연 속의 신성을 기웃거리는 모습은 새로운 소망을 예감케 한다.”라고도 했습니다.
  저는 이 시집 표사에서 “진정한 말이 눈뜨는 미지의 세계를 품고 있는 침묵은 그 속에 끌어안고 있는 사물들에 신성한 힘을 부여하며, 그 존재성이 침묵 속에서 강화되게 마련이다. 침묵은 늘 제자리에 그대로 있지만, 말은 침묵 없이 홀로 있을 수 없고, 그 배경 없이 깊이를 가질 수도 없다. 말은 침묵에서 나와 다시 침묵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침묵은 언제나 절대적인 말을 잉태한다. 시 쓰기란 그 절대적인 말, 신성한 말을 찾아 나서는 일, 침묵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그런 말들을 끌어안고 나오는 몸짓이 아닐는지…….”라고 쓴 바 있습니다.
  시집 『따뜻한 적막』, 『거울이 나를 본다』, 『내가 나에게』는 ‘적막 너머 따뜻한 풍경 끌어안기’, ‘자아와 세계의 대립과 분별을 넘어선 조화로운 세계 꿈꾸기’, ‘순수한 인간 정신의 불멸성 추구’에 무게를 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뜻한 적막』은 자연과 어우러진 심상 풍경들을 겸허하고 신성한 언어로 감싸 안고, 적막한 현실 너머의 따스한 풍경에 다가가거나 그 풍경들을 끌어당겨 깊이 그러안으려는 형이상학적인 꿈의 무게를 실어보았습니다.
  역시 기본 명제(화두)가 ‘초월에의 꿈꾸기’인 『거울이 나를 본다』는 완만한 역설의 자기성찰로 자연과 내면을 넘나들면서 빚어지는 심상 풍경들을 떠올리는 한편, 때로는 파토스와 에토스들을 비켜서지 않고 내비치는 빛깔을 띠고 있습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는 투명하면서도 완강한 ‘벽’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거울을 보는 게 아니라 거울이 나를 본다는 전도된 진술을 통해서 즉자-대자의 위치를 바꾸어 보려 했기 때문입니다.
시집 『내가 나에게』는 『거울이 나를 본다』의 연장선상에서 자신을 들여다본 자아 성찰에 무게중심이 주어져 있으며, 기본 명제이자 중심화두는 역시 더 나은 삶을 향한 초월에의 꿈꾸기였습니다. 외부세계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경우도 없지 않으나, 궁극적으로는 외부세계를 통해서도 자신으로 귀결되는 말 건넴이자 응답들입니다. 이 시집의 구문의 형식은 『따뜻한 적막』과 『거울이 나를 본다』에서보다 더 음악에서 따오거나 대칭구조 등 회화(시각)적 효과를 끌어들이려 했습니다.
  근래에는 외로움이나 쓸쓸함, 허무와 무명마저도 따뜻하게 끌어안아 착색해보려는 시도를 거듭하고 있습니다만, 지난 이태가 넘는 동안은 코로나 팬데믹 시대였고, 그 이후에도 그런 아픔과 무거움에서 자유롭지 않아 시에도 그 그림자들이 드리워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유리창 이쪽』, 『꿈꾸는 나라로』, 『담박하게 정갈하게』라는 시집 제목들이 이미 어느 정도 암시하고 있기도 하지만, 이 세 시집에는 근래의 제 미음의 그림들이 진솔하게 담겨 있습니다. 『유리창 이쪽』은 내적 성찰을 바탕으로 자아와 세계의 조화를 꿈꾸고, 삶의 이상적 경지를 추구하며 초월에 다다르는 길과 우주의 신성성에 다가가 보려는 자기성찰에 무게중심이 주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자아의 참모습 회복, 그 초극의 길은 멀기만 할 뿐 현실은 언제나 ‘무명의 길 걷기’에 다름 없었습니다.
 
산 넘으면 산이,
강을 건너면 강이 기다린다
안개마을 지나면 또 안개마을이,
악몽 벗어나면 또 다른 악몽이
 
내 앞을 가로막는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리듯이
잠자도 깨어나도 산 첩첩 물 중중,
아무리 가도 제자리걸음이다
 
눈을 들면 먼 허공,
 
그래도 산을 넘고 강을 건넌다
안개 헤치며 마을을 지나 마을로
악몽을 떨치면서 걸어간다
무명 길을 간다
                   —「무명無明 길」 전문
 
  그래서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으며 「잠깐 꾸는 꿈같이」와 같은 시도 썼던 것 같습니다. 사족이 별로 필요 없을 것 같아 음미하시면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담담해지고 싶다
 
말은 담박하게 삭이고
물 흐르듯이 걸어가고 싶다
 
지나가는 건 지나가게 두고
떠나가는 것들은 그냥 떠나보내고
 
이 괴로움도, 외로움도, 그리움도
두 팔로 오롯이 그러안으며
 
모두 다독여 앉혀놓고 싶다
이슬처럼, 물방울처럼
 
잠깐 꾸는 꿈같이
—「잠깐 꾸는 꿈같이」 전문

  『꿈꾸는 나라로』는 코로나 팬데믹 시대의 아픔과 정신적 방황, 영혼의 상처와 소외감, 비판과 용서, 관용과 초월 의지 등에 천착하면서 삭막한 현실을 벗어나 참된 자아를 찾으려는 열망과 초월 의지에 불을 지피고 새롭게 투사하며 껴안는 꿈의 현상학에 무게중심을 두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시 ‘실존, 현실, 초월’이 기본 명제인 『담박하게 정갈하게』와 『나를 찾아가다』는 거친 세태 속의 ‘길-흐름-비움’, ‘상처-자연-꿈’, ‘지상적 그리움-영적 그리움-구원’이라는 의미망을 구축하면서 담박하고 정갈하게 존재론적 구원의 길을 추구해 보려 했습니다. 이 지향은 이성에서 영성으로, 지상적 삶에서 천상적 가치로 자아를 투영하며, 존재의 부름에 응답하려는 빛깔을 띠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시집 『담박하게 정갈하게』의 맨 앞에 실린 시 한 편을 읽어보겠습니다.
 
밤에는 꿈을 꿀까 두렵지만

낮엔 안간힘으로 꿈을 불러들입니다
 
더 나은 삶을 향한 꿈꾸기와
 
가위누르는 꿈이 밤낮으로 길항합니다
 
이 길항은 어제오늘뿐 아니라
 
오랜 세월의 트라우마이기도 합니다
 
그 그늘에서 말들이 빚어지고
 
가혹하게 지워지고 밀려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그늘에서 언제나
 
더 나은 세계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이젠 밤낮없이 꿈을 꿉니다
                                   —「나의 카르마」 전문
 
  지난해 낸 시집 『유리벽 안팎』과 올해 낸 시집 『먼 여로』는 가장 최근의 심경을 노래했습니다. 시집 제목이 암시하듯이 유리창은 투명하지만 안과 밖을 연결해 주면서도 단절시키는 벽이 되기도 합니다. 『유리벽 안팎』은 내가 놓여 있는 현실과 이상적인 세계의 화해를 꿈꾸는 데 주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해설을 통해 시인 조창환(아주대 명예교수)은 “명상과 관조, 정화와 화해를 읊고 있는 그의 시는 자아의 내적 성찰을 바탕으로 멀리 있는 다른 세상을 향한 꿈을 펼쳐 보이는 지성적 관조자의 모습을 띠고 있다.”고 풀이하기도 했는데 공감입니다.
 
마음 비운 자리에 꽃 한 송이 핀다
 
생명의 절정인 꽃,
 
비워서 차오르는 저 절정의 찰나를
 
처음이듯, 마지막이듯
 
깊이, 더 깊이 끌어당겨 그러안는다
 
이 찰나가 영원이듯,
 
영원이 바로 이 찰나이듯, 피어나는
 
절정의 꽃 한 송이
 
마음 내려놓은 자리에 그 꽃이 핀다
                                    —「꽃 한 송이」 전문

짧은 시 한 편을 읽어 보았습니다만, 꽃은 생명의 절정이면서 그 절정은 찰나에 지나지 않아 그 찰나와 영원을 아우르며 찰나를 영원으로 승화시키려 했습니다. 그런 정신적인 꽃은 비움과 낮춤의 겸허한 미덕 위에 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낸 스물한 번째 시집 『먼 여로』에 대해서는 문학평론가 이숭원(서울여대 명예교수)이 해설에서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통합하여 현재로 내재화하는 욕망, 끝없는 길 찾음과 길 걸음의 순환적 반복, 그것을 위한 환각의 창조, 이것이 그의 최근 시 쓰기의 동력이다.”라고 평했습니다. 이상 세계를 꿈꾸고 추구하는 머나먼 여정을 여러 빛깔과 무늬로 그려 담은 시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방향만 서정적인 언어로 시사하고 있는 맨 앞에 시 한 편을 읽어 보겠습니다.
 
홍방울새들이 언제 돌아오려나
구름이 흘러가는 먼 하늘,
마음은 구름 따라 흐르고
나뭇잎들이 우수수 지고 있다

창가에 앉아 비발디의 플루트 협주곡
‘홍방울새’를 듣고 있으면
무리 지어 파도처럼 날아오는 홍방울새들이
간밤 꿈속이듯 날고 있다
날아들면서 일제히 D장조로 지저귄다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떠도는 마음은
흐르는 강물 같아서일까
멀리 떠났다가 눈 내릴 무렵에야 되돌아오는
홍방울새 떼를 기다리는
마음의 빈 뜨락에도 첫눈이 내리려나
 
예이츠의 홍방울새들 날갯짓도
다가오듯 보이지 않지만
창가에 우두커니 앉아서
돌아올 홍방울새들을 기다린다
                         —「홍방울새를 기다리며」 전문

  근년 들어서는 해마다 시집을 내기 때문에 시집을 너무 자주 낸다고, 시를 그렇게 쓰면 되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지난 2022년에는 두 권의 신작 시집을 내기도 했습니다. 등단 50주년을 맞은 올해는 스물한 번째 시집 『먼 여로』와 두 번 째 시선집 『잠깐 꾸는 꿈같이』, 여섯 번째 시론집 『예지와 관용』도 같은 발행 날짜로 펴냈습니다.
  시는 더 나은 삶, 온전하고 따뜻한 세계를 향한 꿈꾸기라는 믿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즈음은 어떤 감정이든 담박하게 변용시켜 끌어안으며, 자연과 우주의 질서에 순응하고 그 신비에 다가가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순수와 본래성이 손상되지 않은 꿈의 세계는 그러므로 언제나 동경의 대상입니다. 자기성찰을 통한 참된 자아 회복과 그 실현은 언젠가는 이루어야 할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숙제를 풀기 위해 갈 수 있는 데까지는 가보려 합니다.
  요즘 제 심경을 진솔하게 담은 시 「나는 나와 논다」를 읽으면서 오늘 제 이야기를 이쯤에서 마칠까 합니다.
 
나는 요즘 나와 더불어 논다
잘 안 보이면 만날 때까지 찾아서 논다
언제나 내가 홀로 오지는 않는다
앞뜰의 작은 새들과 더불어 오고
새들이 지저귀는 나무들도 데리고 온다
나는 나무와 놀고 새와 논다
 
황혼 무렵에 술 생각이 나면
홀로 술잔을 기울일 때도 없지 않지만
술상을 떠났던 지기 몇몇이 오고
이태백이 달을 따서 오기도 한다
아득히 가버린 지난날들이 되돌아와서
술잔을 연신 기울이게 한다
 
그런 기억들과 한참 놀다가
가려 하면 가는 대로 놓아주기도 한다
홀로 왔다 홀로 가야 하는 길에
생각의 고삐 느슨하게 풀어놓고
둥근 달에 구름 가듯 가는 듯 마는 듯
나는 요즘 나와 더불어 논다
                          —「나는 나와 논다」 전문
 
  이 태 수(李太洙) tspoet@naver.com
  1947년 경북 의성에서 출생, 1974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 『그림자의 그늘』(1979, 심상사), 『우울한 비상의 꿈』(1982, 문학과지성사), 『물속의 푸른 방』(1986, 문학과지성사), 『안 보이는 너의 손바닥 위에』(1990, 문학과지성사), 『꿈속의 사닥다리』(1993, 문학과지성사), 『그의 집은 둥글다』(1995, 문학과지성사), 『안동 시편』(1997, 문학과지성사), 『내 마음의 풍란』(1999, 문학과지성사), 『이슬방울 또는 얼음꽃』(2004, 문학과지성사), 『회화나무 그늘』(2008, 문학과지성사), 『침묵의 푸른 이랑』(2012, 민음사), 『침묵의 결』(2014, 문학과지성사), 『따뜻한 적막』(2016, 문학세계사), 『거울이 나를 본다』(2018, 문학세계사), 『내가 나에게』(2019, 문학세계사), 『유리창 이쪽』(2020, 문학세계사), 『꿈꾸는 나라로』(2021, 문학세계사), 『담박하게 정갈하게』(2022, 문학세계사), 『나를 찾아가다』(2022, 문학세계사), 『유리벽 안팎』(2023, 문학세계사), 『먼 여로』(2024, 문학세계사), 시선집 『먼 불빛』(2018, 문학세계사), 시선집 2 『잠깐 꾸는 꿈같이』(2024, 그루), 육필시집 『유등 연지』(2012, 지식을 만드는 지식), 시론집 『여성시의 표정』(2016, 그루), 『대구 현대시의 지형도』(2016, 만인사), 『성찰과 동경』(2017, 그루), 『응시와 관조』(2019, 그루), 『현실과 초월』(2021, 그루), 『예지와 관용』(2024, 그루) 등을 냈다. 대구시문화상(문학, 1986), 동서문학상(1996), 한국가톨릭문학상(2000), 천상병시문학상(2005), 대구예술대상(2008), 대구미술메세나상(2018), 상화시인상(2020), 한국시인협회상(2021), 예술가곡대상(2022) 등을 수상했으며, 대통령 표창(2004), 대구시장 표창(2008)도 받았다. 매일신문 논설주간, 대구한의대 겸임교수, 대구시인협회 회장, 대구예술가곡회 회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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