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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평론

교수신문 2024. 5. 9 먼 여로 이태수 지음│문학세계사│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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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   2024. 5. 9   먼 여로 이태수 지음│문학세계사│148쪽


197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태수 시인이 등단 50주년을 맞아 스물한 번째 시집 『먼 여로』를 냈다. 지난해 낸 시집 『유리벽 안팎』 이후의 시 「홍방울새를 기다리며」, 「먼 그대」, 「풍경風磬 물고기」, 「나무 물고기」, 「달빛 소나타」, 「초승달」, 「길과 나 5」, 「물의 길」, 「짧은 꿈」 등 77편을 실었다. 먼 곳에 대한 명상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시집은 꿈의 매트릭스가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고상한 기품과 소박하고 그윽한 음률이 깊은 감동을 준다. 끝없는 길 찾음과 길 걸음의 순환적 반복을 통한 환각의 창조가 그의 최근 시 쓰기의 동력이며,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통합해 현재로 내재화하는 욕망이 그 꿈꾸기의 본질이다.
 
과거와 미래를 통합하여 현재로 내재화
먼 곳의 길 찾기 명상과 꿈의 매트릭스
 
이태수의 시는 먼 곳에 대한 명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먼 곳을 향하여 길을 걷는 시인이고 목적지가 보이지 않아도 진행을 멈추지 않는 시인이다. 그는 절대 포기하지 않으며, 멀더라도 가야만 하고, 갈 수 없으면 기다리는 시인이다. 이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까지 그의 시 작업이 이런 방향으로 줄기차게 진행되어 온 것을 그의 이력이 증명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먼 곳을 향해 가겠다는 시인의 육성은 그만큼 간절하다.
 
그 음성은 고상한 기품을 유지하고 있어서, 울림은 크지 않으나 소박하고 그윽한 음률이 깊은 감동을 준다. 가고자 하는 원심적 운동은 순수의 자세를 유지하겠다는 구심적 의지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가고 싶은 욕망, 기다림의 정동, 환각의 창조는 시의 내면에서 순환 구조를 이룬다. 기다림이 환각을 창조하고 환각은 다시 기다림을 촉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꿈의 매트릭스가 이태수 시의 중심을 이룬다고 말해도 좋다. 환각의 창조는 이태수 시의 동력으로 작용한다.
 
홍방울새들이 언제 돌아오려나
구름이 흘러가는 먼 하늘,
마음은 구름 따라 흐르고
나뭇잎들이 우수수 지고 있다

창가에 앉아 비발디의 플루트 협주곡
‘홍방울새’를 듣고 있으면
무리 지어 파도처럼 날아오는 홍방울새들이
간밤 꿈속이듯 날고 있다
날아들면서 일제히 D장조로 지저귄다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떠도는 마음은
흐르는 강물 같아서일까
멀리 떠났다가 눈 내릴 무렵에야 되돌아오는
홍방울새 떼를 기다리는
마음의 빈 뜨락에도 첫눈이 내리려나
 
예이츠의 홍방울새들 날갯짓도
다가오듯 보이지 않지만
창가에 우두커니 앉아서
돌아올 홍방울새들을 기다린다
―「홍방울새를 기다리며」 전문
 
시 「홍방울새를 기다리며」는 ‘먼 여로’로 표상되는 이태수 시의 정신적 흐름을 잘 보여준다. ‘홍방울새’는 예이츠의 유명한 시 「호수 섬 이니스프리(The Lake Isle of Innisfree)」에 등장하는 새다. 이태수 시인은 이 새를 비발디의 플루트 협주곡 3번 「홍방울새」와 연결하여 회상의 강도를 높였다. 시와 음악으로 조성된 회상의 정조는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어떤 이상의 경지를 소환한다. 그리움과 기다림이 환각을 창조한 것이다. 이 환각은 다시 기다림을 촉진한다.
 
이 시의 연속 편인 「꿈속의 홍방울새」에서도 홍방울새 떼의 지저귀는 장면을 묘사한 후 “눈을 뜨고 나니 꿈이었어요”라고 고백하면서 “예이츠와 비발디가 불러 준 환상이/이다지도 홍방울새를 기다리게 하는지요”라고 자신의 마음을 토로하고 있다.
 
그는 「짧은 꿈」에서 그가 몽상에 잠기는 순간을 시로 표현했다. 한낮에 의자에 앉아 잠깐 조는 사이에 새가 되어 하늘로 나는 꿈을 꾼 것이다. 새가 되어 날개를 펴고 세상을 한눈에 내려다보며 커다란 날개를 힘차게 퍼덕였다고 했다. 참으로 장엄한 장면이다. 이 장면을 통해 그가 가고 싶어 하는 이상적 공간의 모습을 조금 드러냈다. 세상이 거꾸로 돌기에 미지의 아름다움을 꿈꾸며 이상의 공간으로 가기를 희구한다. “마차가 말을 끌던” 비정상적인 시절은 지나갔지만, 아직도 마차가 삐걱거리는 온전치 못한 상태에 있음을 안타까워하며 세상의 바른 이치가 회복되기를 바란 것이다.
 
그가 그리움의 대상을 비교적 명확히 드러내는 경우는 고향과 혈육의 모습을 그리워할 때이다. 옛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들에 대한 정겨운 친숙감과 그리움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시간여행」은 고향 마을로의 시간여행을 소재로 했다. 이것은 몽상이 아니라 실제의 사실이고 그래서 눈길과 마음으로 직접 접촉한 내용이다. 고향의 정경을 통해 과거의 시간이 현재의 상황으로 육박해 온 것이다.
「옛사람들」은 현실 공간에 바탕을 둔 그리움이 아니라 몽상의 영역에서 이루어진 그리움의 전개다. 희유한 조우를 통해 시인은 환각의 중요성을 새롭게 부각했다. 옛사람이 옛 모습을 그대로 지닌 것은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이 마음 때문”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시인은 몽상 속에서 자신을 스쳐 간 모든 인연들을 떠올리며 그 만남의 의미를 반추하고자 한다. 좋은 인연이든 그렇지 못한 인연이든 그 사람들을 다 그리워하고 자기 정신의 울타리 안에 포용하려고 한다. 여기 그의 진심이 나타난다. 참으로 아름다운 회감懷感이다. 시인은 영원한 현재라는 서정의 시간 속에 과거의 추억을 불러들이고 그들과 하나가 되어 이대로 머물고 싶은 것이다.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통합하여 현재로 내재화하려는 욕망. 이것이 이태수 시인이 기획하는 꿈꾸기의 본질이다.
 
그의 시는 길의 모티프로 가득 차 있다. 보이는 길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길, 일종의 미로를 걷고 있다. 미지의 세계가 여전히 자신의 마음을 잡아끄니 걸음을 멈출 수 없다. 갈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그의 마음을 더 자극하고, 가고 싶어 하는 간절한 마음에 미지의 세계는 더 아득하게 느껴진다. 시인은 여전히 미로를 걷고 또 걸을 뿐이다.
 
시인은 이러한 미로를 걷는 것이 일종의 업보業報라고 생각한다. 날이 저물면 걷던 길이 저만큼 물러나고 날이 밝으면 또 길이 펼쳐진다. 해 진 다음의 시간은 명상과 자성의 시간이다. 아무리 자기를 찾아도 “나는 여전히 먼 데 있나 봅니다”라고 했다. 자신의 실체를 찾아 사방을 헤매어도 본모습을 만나지 못하고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 운명이다. 미로의 앞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없는 길을 만들며 가기도”(「길과 나 4」) 한다. 길을 찾으려는 그의 노력은 세상의 순리를 새롭게 확인하는 단계에 이른다.
 
간밤에 눈이 내려 은빛 세상입니다
잠시라도 붙들어 앉히고 싶습니다
길들이 지워져 안 보이지만
바라보며 이대로 머물고 싶습니다
길들도 다 눌러 앉히면 좋겠습니다
 
간밤 꿈에는 지나온 길도
가고 있던 길도 거둬들이고 있었습니다
길이 남김없이 지워지고
나는 우두커니 서 있는 소나무였습니다
제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햇빛이 다시 맨발로 뛰어내립니다
가면을 벗듯 세상은 느리지 않게
민얼굴을 드러내고 있지만
나는 은빛 세상을 붙들어 앉히며
그 안에서 갈 길을 찾고 싶습니다
―「길과 나 5」 전문
 
눈이 내리면 그나마 보이던 길도 보이지 않게 된다. 「길과 나 5」는 그러한 백지상태의 새길 찾기를 주제로 내세웠다. 들판을 바라보며 이대로 머물고 싶다고도 했고 길들도 다 눌러 앉히면 좋겠다고 했다. 길 찾기와 길 위를 걷기는 그에게 주어진 숙명적 업보다. 그는 길을 걸어야 하는 필연의 존재자다. 시인은 길이 지워진 자리에 서 있는 소나무로 자신을 비유했다. 여기서 시인은 다음 장면을 보여주며 길 찾기의 의지를 조심스럽게 드러낸다.
 
햇빛이 비치면 눈이 녹고 서서히 세상은 제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 눈으로 덮인 세상의 환한 모습은 실상이 아니라 순간의 가상이다. 환한 은빛 세상은 지속성이 약한 가상의 공간일 뿐이다. 은빛 세상이 유지되든 어떻든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은 길 찾기뿐이다. 어떻든 그는 길을 걸어 원하는 미지의 세계에 가야 그의 소명이 완성된다. 장자의 ‘소요유’에 나오는 무한 허공으로의 무한 도약, 무한 비상이 그의 지향이고 꿈이다.
 
「물의 길」은 나무를 통해 순리의 발견에 이르는 마음의 행로를 보여준다. 시인은 강가에 서서 내려갈 길을 떠올리다 계단 앞에 이르러선 오르는 길을 찾는다. 계단에 올라 강물을 내려다보니 아래로 흐르는 물의 길이 보인다. 하늘을 향해 팔 뻗고 서 있는 강둑의 나무들도 물의 길을 들여다보고 있다. 나무는 하늘을 우러러 살고 있지만 강물은 끝없이 내려가는 모습만 보여준다. 세상에는 끝없이 내려가는 길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세상에는 그런 순리가 있다는 사실을 강물이 일깨워 준다.
 
그러니 하늘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강물을 보고 끝없이 내려가는 길의 움직임도 배워야 한다. 나무는 하늘과 강을 종합한 중요한 가르침을 시인에게 전한다.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으면서/하늘 우러러 물길을 따르는 게 도리”라는 가르침을 나무가 나직이 들려준다. 시인은 나무를 통해 새로운 길 찾기의 자세를 배운 것이다.
 
그는 「눈길」에서 자신의 마음을 다시 분명히 세워서 눈 위에 새길을 찾아 걷겠다는 뜻을 밝혔다. 눈길을 걸으면 발자국들이 따라오다 지워진다. 뒤돌아보면 지나온 길이 지워지고 가려는 길도 지워져 보이지 않는다. 모든 길이 사라졌지만, 시인은 여전히 “새길을 걷고 싶게 하는” 충동을 일으킨다. 시인의 태도는 매우 담백하다. “눈이 그치고 나서 지워진 길을 나서면/발자국들이 새길을 내면서 따라옵니다”라고 했다. 그에게 지워진 길은 없다. 사라진 길 위로 새로 걸으면 새길이 저절로 생기기 때문이다. 끝없는 길 찾음과 길 걸음의 순환적 반복, 그것을 위한 환각의 창조. 이것이 그의 최근 시 쓰기의 동력이다.
 
눈길의 표상과 강물의 표상이 시인에게 지혜의 문을 열어주었듯이 시인은 암자의 풍경風磬과 나무 물고기 모형을 통해 지혜의 탐색을 벌인다. 암자의 고요함은 시인의 마음을 끌기에 적합하다. 고요의 깊이가 고향 같은 아늑함을 안겨주고 미지의 세계로 가는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꽁지 마을’이 고향의 정경을 떠오르게 해서 친근하게 다가오듯이 암자의 모습도 고향과 같은 친숙감을 일으킨다.
 
늦여름 오후, 더위가 한물간 솔숲 그늘에 멧새들 노랫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인근 암자 풍경 소리가 포개져 들린다. 시인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멧새의 울음소리보다 풍경 소리를 통해 무언가 얻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귀를 열고 풍경 소리를 따라 암자 앞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암자에 이르러 풍경을 보고 풍경 끝에 매달린 물고기를 본다.
 
풍경이 울리고 풍경 추 아래의
물고기가 그 소리 따라 유영합니다
 
풍경 소리는 면 옥빛 하늘 아래
넘실거리는 망망대해를 흔들어 깨우고
깨어 있는 물고기에게는
길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절집의 처마는 바다의 한가운데이면서
세상 깨우는 요람입니다
깨어서도 잠을 자면서도
눈 뜨는 물고기는 깨우침의 화신인 듯
죽으면서도 눈을 감지 않습니다
 
풍경 소리에 물고기가 유영합니다
물고기는 깨침의 길을 엽니다
―「풍경風磬 물고기」 전문
 
「풍경風磬 물고기」에는 바람이 불어 풍경이 흔들리면 그 아래 매달린 물고기도 헤엄치듯 움직인다. 여기서 시인의 상상이 펼쳐진다. 저 물고기를 보니 먼 망망대해에서 왔을 것 같다. 아니면 먼 망망대해로 가고자 하는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물고기의 지향은 시인의 꿈과 겹친다. 시인이 풍경 끝 물고기에 관심을 가진 것은 물고기의 가고자 하는 소망을 상상했기 때문이다.
 
물고기를 자신의 분신으로 상상한 것이다. 시인의 상상 속에서 풍경 소리는 먼 옥빛 하늘 아래 넘실거리는 망망대해를 흔들어 깨우며 그곳으로 가고자 하는 물고기에게 길을 열어주고 있다. 길이 열리는 것은 시인도 간절히 바라는 바다. 암자 추녀 밑의 풍경 끝 물고기가 망망대해로 이끈다면 절집의 처마가 바다 한가운데와 통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처마는 세상을 깨우는 요람이 될 것이다.
 
풍경 끝의 물고기는 하루 종일 눈을 뜨고 있다. 잠을 자면서도 눈을 뜨고 있는 물고기는 깨달은 존재의 표상 같다. 어떻게 하면 구도의 자세가 잠까지 이어져 자면서도 눈을 감지 않는가. 그러한 불변의 항구적 내력을 시인도 본받고 싶다. 풍경 소리를 통해 풍경 끝 물고기가 바다와 통한다면, 풍경 소리가 울릴 때마다 물고기가 헤엄치는 처마 아래 이곳이 바로 망망대해가 된다.
 
물고기는 망망대해를 유유히 유영하며 깨침의 길을 열고 있다. 그렇게 보면 물고기는 참으로 깊은 선지식이요 자비 보살의 거룩한 형상이다. 시인은 그 행로를 본받고 싶은 것이다. 「나무 물고기」 역시 유사한 주제를 드러냈다. 이 시는 풍경 끝의 물고기가 아니라 절집의 목어木魚를 대상으로 했다. 「나무 물고기」 역시 유사한 주제를 드러냈다. 이 시는 풍경 끝의 물고기가 아니라 절집의 목어木魚를 대상으로 했다.
 
나무 물고기는 절집에 삽니다
바다가 아니라 허공에 매달려 삽니다
나무 물고기에게는 허공이 바다입니다
 
허공처럼 텅 빈 뱃속을
나무막대로 두들겨 맞으며 나아갑니다
맞아야 내는 그 소리가
퍼져나가면서 무명을 흔들어 깨웁니다
한결같이 눈을 뜬 채로
 
언제나 깨어 있으라고 나무 물고기는
세상을 배 울림으로 일깨워 줍니다
허공을 환히 밝히고 있습니다
―「나무 물고기」 전문
 
이 시의 요체 역시 허공 바다를 헤엄치는 나무 물고기에 있다. 허공을 헤엄치는 나무 물고기가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허공에서도 유영하며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이 부럽다. 목어는 저절로 움직이는 일이 없고 두들겨야 소리가 난다. 그래서 시인은 “허공처럼 텅 빈 뱃속을/나무막대로 두들겨 맞으며 나아갑니다”라고 썼다. 두들겨 맞으면서도 자신의 길을 간다는 사실이 부럽고 그것을 본받고 싶다.
 
세속의 중생을 깨우는 목어 역시 늘 눈을 뜨고 있다. 시인의 관심사는 늘 깨어 있다는 점, 세상의 무명을 깨우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는 점, 자기 몸을 때려서 내는 소리로 세상의 허공을 환히 밝힌다는 점이다. 시인도 이처럼 자신의 길을 계속 걸어 세상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은 것이다. 여기에 길 찾기와 길 걸음의 의미가 있다.
 
그 의미를 명확히 제시하지 않는 것은 시인의 겸허함 때문이기도 하고 길의 의미를 분명히 깨우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떠한 경우든 시인도 목어처럼 자신을 울려 세상을 밝히는 일을 하고 싶다. 풍경 물고기도 그렇고 나무 물고기도 그렇고 이 두 사물의 의미는 시인의 길 찾기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염원의 지향은 돌탑을 소재로 한 「어떤 나툼」으로 전환 표현된다. 시인은 돌탑의 돌에 자신의 염원, 보이지 않던 길, 목마르게 찾아 헤매던 그 무엇이 나타난다고 조심스럽게 암시한다. 이 조심스러움은 시인의 겸허함에서 온다. 그래서 자신을 한껏 낮추어 “꿈결이듯 헛보이듯이 나투어지고 있다”라고 했다. 그는 하심下心의 수련을 거친 시인이다.
 
마음의 변화를 포착한다는 점에서 「포쇄曝曬」는 깊이 음미해야 할 작품이다. 장마가 끝나면 서고에 있던 책을 밖으로 옮겨 습기를 없애는 작업을 한다. 시인은 책을 포쇄하듯이 “응달에 그대로 뒀던 마음을 햇살에 넌다”라고 했다. 이것은 참으로 유용한 일이다. 응달에 축축하게 젖었던 마음을 맑은 햇살에 말리면 마음의 올과 결이 얼마나 부드러워지겠는가? 따스한 햇볕, 눈부신 햇빛, 몇 자락 비단결 같은 바람이 다가와 마음의 살결을 쓰다듬는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아름답다.
 
이렇게 마음을 햇살에 말릴 때 베란다 화분에 핀 빨간 샐비어도 바람에 말릴 수 있다. 그 장면을 두고 시인은 “햇빛과 햇볕과 햇살에 생기를 포개고 있다”라고 썼다. 햇빛, 햇볕, 햇살의 차이를 감지하고 그 차이에 따라 꽃송이가 씻기는 장면, 바람이 마음의 결을 쓰다듬는 장면을 상상한 것이다. 햇빛이 비치고 햇볕에 쏘이고 햇살이 비추는 각각의 장면에 따라 붉은 꽃봉오리의 색감이 변하고 마음의 질감도 변할 것이다.
 
이것은 시인이 마음의 탐구에 섬세하게 임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제 시인은 육체의 발걸음을 좇는 길 찾기가 아니라 마음의 행로를 따르는 내면의 길 찾기를 행할 태세를 갖춘 것이다. 그래서 그의 마음이 남천처럼 붉어지기도 하고 단풍처럼 변하기도 하면서 꿈속의 미로를 걷게 된다.
 
그 보행의 과정은 순탄하지 않다. 덧없는 면벽의 나날을 보내는 것 같은 막막함이 시인의 마음을 어둡게 한다. 하루 몇 번씩 마음을 고쳐먹어도 “마음 강산의 속절없는 이 허방”에서 오는 허전함은 가시지 않는다. “벽을 마주하던 나도 그만 벽이” 돼버린 듯한 폐쇄감을 느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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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절없는 면벽의 세월에서 오는 허전함, 허망함, 막막함은 시인에게 고통을 준다. 흘러가는 세월을 붙들어 염장鹽藏하고 싶지만, 염장되는 것은 세월이 아니라 허당뿐이다. 순간을 붙들어 염장하고 싶지만 그렇게 마음먹는 사이 그 순간은 지나가 버린다. 다시 마음을 바로잡으면 다른 순간이 다가온다. 끝없이 사라지는 순간들, 마음의 끝없이 이어지는 형상들.
 
「비 내리는 날」에서 비는 빗소리를 안고 내리고 물은 빗소리를 업고 흐른다. 비와 물은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 마음도 비 따라 내려가고 물 따라 흘러간다. 안 내려가려 해도 내려가고 안 흐르려고 해도 흘러간다. 내려가고 흘러가는 비와 강물에 잡다한 세상사를 모두 맡기려는 자세도 취해 본다. 이제 시인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러나 어느 순간에도 구원은 있다. 묘하게도 구원은 가을의 충만한 달밤의 정경에서 온다. 「달빛 소나타」의 음률을 따라 시인의 걸음이 율동감 있게 옮겨진다.
 
늦가을 이른 저녁 달빛 따라 걷는다
 
풀벌레 소리가 따라오고
 
발치에는 우수수 나뭇잎들이 떨어진다
 
별들이 내려와 뜨고 있는 호수를 지나
 
달빛이 밝혀 주는 길로 걸어간다
 
(쓸쓸하면서도 왠지 따스해진다)
 
산모롱이를 돌아 한참 가다 보면
 
달빛이 내려가는 길을 더 환히 비춘다
 
발길을 돌려 다시 달빛을 따라 걷는다
 
풀벌레 소리가 따라오고
 
가까워지는 마을에도 달빛이 환하다
—「달빛 소나타」 전문
 
「달빛 소나타」에서 시인은 늦가을 이른 저녁 달빛 따라 걷는다고 했다. 풀벌레 소리가 따라오고 발치에는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가을의 정경이다. 별들이 내려와 떠 있는 호수를 지나 달빛이 밝혀 주는 길로 들어선다. 이러한 행로에 대해 시인은 스스로 “쓸쓸하면서도 왠지 따스해진다”라고 썼다.
 
쓸쓸하면서도 아름답고 쓸쓸하면서도 따스한 이 감도야말로 시인을 허방의 염장에서 구원해 주는 정겨운 손길이다. 산모롱이를 돌아 한참 가다 보니 “달빛이 내려가는 길을 더 환히 비춘다”고 했다. 이제 그는 막막한 면벽의 세월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달빛 소나타의 아름다운 음률을 좇아 그가 원하는 먼 곳, 홍방울새 날갯소리 울리는 그 이상의 공간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발길을 돌려 다시 걸으니 풀벌레 소리가 따라오고 가까워지는 마을에 달빛이 환하다고 했다. 서광이 비친다. 여기 구원의 길이 있다.
 
그가 한번 이 아름다운 길의 광채에 접했으니 설사 또다시 허방의 궁지에 부딪는다 해도 쓸쓸하면서도 따스한 촉감의 기억이 본능의 힘을 이끌어 달빛 소나타의 길로 다시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믿는다. 77세를 한자漢字 모양을 응용하여 희수喜壽라고 하는데 희수에는 기쁠 희喜 자가 들어간다. 희수를 맞는 이태수 시인의 앞길에 달빛 소나타의 은은한 광채가 널리 퍼지기를 소망한다.
 
그 환한 빛은 그의 시의 앞길을 비추는 것만이 아니고 한국 시의 길을 비추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펼쳐온 시력詩歷 50년, 21권 시집의 온축은 한국 시의 역사이기도 하다. 50년 창작의 공력을 발판으로 그의 시가 또 다른 경작의 길로 힘차게 나아가기를 소망한다. 이 발원은 나의 소망이자 시인의 소망이고 한국 시단의 소망이기도 할 것이다.
 
상사화가 피어날 때는 꽃무릇이 떠오르고
꽃무릇을 바라보면 상사화 생각이 난다
 
헤어진 뒤 만날 수 없는 그대가 꽃이고
그대를 그리워하는 내가 잎인지
내가 꽃이고 그대가 잎인지도 생각해 본다
 
꽃이 지고 나서 잎이 돋아나고
잎이 져야만 꽃이 피는 운명이
우리 사이와 다른 게 무엇일꺄
 
지난여름에는 상사화 보면서 가슴 아팠고
이 가을에는 꽃무릇을 바라보며
그대 생각에 남모르게 애간장 태운다

상사화 피면 그대는 꽃을 그리워하고
꽃무릇 지면서야 나도 잎으로 돋아날까
—「먼 그대」 전문
 
늦장마 물러나고 청잣빛 아득히 높은 하늘
서재 구석에 방치한 책을 꺼내 말리듯
응달에 그대로 뒀던 마음을 햇살에 넌다
 
따스한 햇볕, 눈부신 햇빛,
몇 자락 비단결 같은 바람
 
양지바른 베란다 화분의 몇 포기 샐비어
빨간 꽃송이들도 바람 따라 날갯짓하듯
햇빛과 햇볕과 햇살에 생기를 포개고 있다
—「포쇄曝曬」 전문
 
한낮, 의자에 앉아 잠깐 조는 사이
나는 새가 되어 하늘로 날고 있더군요
 
무슨 새인지는 알 수 없어도
한눈에 드는 세상을 내려다보며
커다란 날개를 힘차게 퍼덕이더군요
 
세상은 꿈 밖에서나 꿈속에서나
마찬가지로 거꾸로 돌아가고 있어도
높은 데서 내려다보니 다르더군요
 
달라질 기미가 보이기 때문이지요
세상 바로잡으려는 사람들을 따르는
군중이 구름 떼같이 몰리더군요
 
졸다 깨고 나니 짧게 꾼 꿈이었어요
얼마나 간절했길래 새가 되어서
달라진 세상을 보았겠어요
 
마차가 말을 끌던 시절은 지나갔지만
아직 마차가 삐걱거려 안타깝군요
—「짧은 꿈」 전문
 
밤하늘에 떠 있는 초승달은
사람마다 다른 모습으로 보이는가 봐요
어떤 사람은 입술 같다고 하는데
눈썹 같다고 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누군가는 나뭇잎 한 장 같다는데
깎아서 버린 손톱 같다는 사람도 있고
빈 접시 같다는 이도 있어요
 
허기진 사람에게는 빈 접시,
버림받은 사람에게는 손톱 같은 걸까요
외로운 사람에게는 나뭇잎 한 장,
미모지상주의자에게는 눈썹 같지만
실연한 이는 입술로 보이나 봐요
초승달은 사람에 따라 다른 달이더군요
마음이 거울이라 그럴는지요
 
초승달을 바라보면 왠지 나는
비워낸 마음이 다시 차오르는 것 같고
내려놓은 것들을 떠오르게도 해요
지나온 길과 갈 길을 들여다보게 하고
나를 일으켜 세워주기도 해요
—「초승달」 전문
 
꽁지 마을에 첫눈이 내린다
야트막한 지붕들이 어깨 겯듯 다정히
눈송이를 맞아들이고 있다
 
잎들 진 감나무에는 까치밥 두어 개,
까치들은 보이지 않고
몇 마리 참새가 감나무에 모여 앉아
어둠살을 쪼아대는 중일까
골목길에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데
집마다 따스한 불이 켜진다
 
낮은 굴뚝들이 피워 올리는
저녁연기 너머로 따스하고 포근하게
번지는 무반주 첼로 선율,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꿈속에 드는 것 같다
아득한 옛날에 꿈꾸던 동화의 나라,
 
꽁지 마을에 내리는 눈은
그 먼 나라에서 내려오는 요정 같다
첼로 선율에 포갠 복음 같다
—「꽁지 마을, 첫눈」 전문
 
작가 소개 이태수
 
197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그림자의 그늘’, ‘우울한 비상의 꿈’, ‘물속의 푸른 방’, ‘안 보이는 너의 손바닥 위에’, ‘꿈속의 사닥다리’, ‘그의 집은 둥글다’, ‘안동 시편’, ‘내 마음의 풍란’, ‘이슬방울 또는 얼음꽃’, ‘회화나무 그늘’, ‘침묵의 푸른 이랑’, ‘침묵의 결’, ‘따뜻한 적막’, ‘거울이 나를 본다’, ‘내가 나에게’, ‘유리창 이쪽’, ‘꿈꾸는 나라로’, ‘담박하게 정갈하게’, ‘나를 찾아가다’, ‘유리벽 안팎’ , 시선집 ‘먼 불빛’, ‘잠깐 꾸는 꿈같이’, 육필시집 ‘유등 연지’, 시론집 ‘대구 현대시의 지형도』’, ‘여성시의 표정’, ‘성찰과 동경’, ‘응시와 관조’, ‘현실과 초월’, ‘예지와 관용’ 등을 냈다. 대구시문화상(문학), 동서문학상, 한국가톨릭문학상, 천상병시문학상, 대구예술대상, 상화시인상, 한국시인협회상 등을 수상했으며, 대구 매일신문 논설주간, 대구한의대 겸임교수,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최승우 기자 kantmani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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