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5    업데이트: 16-03-14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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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 대규모 개인전 여는 서양화가 박남희 / 대구문화 / 2015년 3월(352호)
아트코리아 | 조회 1,331

영혼이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이 바로 그림
대규모 개인전 여는 서양화가 박남희


서양화가 박남희(64, 경북대 미술대학 교수) 씨의 연구실 벽시계는 10분 정도 빠르다. 항상 빠른 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해 종종 걸어가던 그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그는 매일같이 빽빽한 스케줄을 소화해 왔다. 서양화가, 미술대 학장, 경북대 미술관 관장, 여성 단체 활동, 문화 예술 관련 사회 활동 등 그의 이력을조금 훑어만 봐도 그의 삶이 어땠을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오는 8월 대학 정년퇴임을 앞두고 대규모 개인전을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준비한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초등학교 시절 작품에서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 세계 전반을 총망라한 전시회다. “전시를 앞두고 지난 활동들을 정리하다보니 아쉬움도 큽니다. 너무 많은 일을 하며 바쁘게만 살다보니 정작 챙기고 정리해야할 부분을 놓치며 살아온 것 같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지난 제 활동들이 모두 ‘박남희’ 그 자체이기 때문에 어느 한 부분 빼놓을 건 없습니다.”

 

 

작업실을 겸하고 있는 연구실에는 빈틈이 없을 정도로 자료들이 꽂혀있다. 문 앞 작은 공간에는 포장된 작품들이 가득 차 있다. 연구실 안 대형 화이트보드에는 한 달 스케줄이 빽빽하게 적혀있다. 그는 “지난해 말 대청소를 겸해 자료를 정리해서 이 정도 모습을 갖춘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제 조금은 느린 걸음으로 주변을 돌아보고 있다.

 


박남희 교수는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4년간의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와서 1982년 경북대 미술대학 교수가 됐다. 젊은 나이에 대학 교수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지만 내딛는 걸음마다 차별과 편견에 부딪혀야했다. “‘여교수’에 대한 차별도 컸고 ‘예술 전공자’들은 학문과 거리가 멀다는 사회적 통념이 있었어요. 어린 시절의 스승님조차 제가 ‘예술대학’ 교수라서 안타깝다고 하셨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 고정관념을 바꾸려 애썼습니다.”

 


전국 여교수연합회 회장도 맡았고 남들보다 더 빨리 새로운 학문과 기술을 익혔다. 1990년대 후반 포토샵을 배웠고 수업도 IT기술과 연관해 진행했다. 제자들에게도 파워포인트를 활용한 프리젠테이션 기법을 강의하는 등 말과 글로도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쳤다. 작품에서 선보인 새로운 기법과 교수이자 사회인으로서의 활동들은 작가이기 이전에 스승으로서 제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인지 경북대 미술대학을 졸업한 사람들 가운데는 작가이면서 이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유독 많다.

 


학교와 화단, 예술계, 학계 등 사회 어디를 가든 내딛는 걸음마다 차이보다는 차별이 느껴졌고 할 일이 눈에 보였다. 양성 평등, 학제 개편, 장르 간 융·복합 시도 등 일거리를 만들어 나갔다. 자신이 개척하는 길들이 곧 제자들이 설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이라는 확신도 있었다. 2006년에는 학교 내 가장 좋은 위치에 경북대학교미술관을 만들었고 이곳을 대구시 공공 미술관 1호로 등록했다. 2013년까지는 자정을 훌쩍 넘겨 퇴근하기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러다 정년을 앞둔 지난해부터는 주변을 서서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 마지막 설 자리는 학교와 화단(畵壇)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바쁜 삶 가운데도 내가 내 자신에 대해 포기할 수 없던 부분이 바로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작품이 가장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예술교육으로 인해 길러진 창의력


 그는 자신이 ‘미술 교육에 의해 만들어진’ 사람이라고 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초등 2학년 때 유네스코 세계 아동미술전에 출품해 특선을 받았다. 한국화에 능했던 어머니, 그리고 외삼촌 서양화가 문곤 화백, 그리고 3학년 때 담임이었던 박휘락 미술 선생님의 영향을 가장 큰 것으로 꼽았다. 그는 서석규 화백이 운영했던 대구미술연구소를 다녔고 초등학교 4학년 때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제가 좋아했던 색감과 형상은 초등학교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지난해 열린 서석규 선생의 회고전 작품들을 보니 제 작품의 뿌리가 연결되어 보이더군요.” 어린 시절의 예술교육으로 인한 창의력과 에너지가 남과 다를 수 있었던 힘이 됐다.

 

  

  그의 이번 개인전은 미술이 재능인가 교육인가라는 가설에 ‘교육’이라는 답을 찾는 전시이다. 제1전시실에서는 1959년 초등 3학년부터 5학년 사이에 그린 그림 100여 점 가운데 80여 점을 가려 전시한다. 어린 시절 자신을 지도한 미술 선생님, 외삼촌 문곤 화백, 서석규 화백 미술연구소, 김신현 화백의 지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제2전시실에서는 1970년대의 작품과 1980년대에 제작한 작품들을 전시한다. 서울대 미술대학 시절 작품들과 대학원 졸업 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기 직전까지 대구에서 작업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대체로 두터운 질감의 유화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또 1982년 제1회 개인전부터 한국 최초로 캔버스에 LED를 부착한 작품을 비롯해 1986년까지 LED 회로를 결합해 제작한 ‘빛과 색채를 일체화한’ 추상화 작품들을 전시한다. 그의 LED를 활용한 작품들은 미술 작품에 최첨단 기술의 ‘융·복합’을 시도한 첫 사례다. “제 작품 활동을 본 제자들이 어느 정도는 영향을 받았으리라 생각해요. 작가 이전에 교수로서의 사회적 책임인 거죠.”

 


제3전시실에서는 1980년대에 제작한 ‘현대인 시리즈’와 ‘삼국시대’ 시리즈를 전시한다. ‘현대인 시리즈’는 1980년대 민주화 과정을 거치며 사회적 리얼리티에 어린 시절부터 꿈꿔온 우주적인 환상을 접합한 작품들이다. 300호 대작 위주로 30여 점을 선보인다.

 


  제4전시실에서는 ‘삼국시대’와 콜라주 작품을 선별해 선보인다. 그는 1996년 베를린 개인전을 준비하며 국제 무대에서 표현할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한국의 전통 미술에서 찾았다고 한다. 신라, 고구려, 백제 미술의 고유한 특성을 소재로 융합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대륙 문화의 적극성과 기백을 고구려 벽화에서 찾고 백제의 온화하고 부드러운 선의 아름다움과 신라의 정신을 융합한 작품들 20여 점과 1990년대 후반의 콜라주 작품들을 선보인다. 이 시기 그는 남편의 정치 활동과 그에 따른 사회봉사 활동으로 작업실이 아닌 집의 거실에서 작업할 수밖에 없었다. 전통적 실크와 한지의 조합에 기하학적인 우드락의 형태가 조합된 작품들이다. 그는 “이 시절의 콜라주 작품들이 지금의 디지털 프린팅 작품과 일맥상통한다.”고 했다. 현재의 미디어 아트를 접목한 작품을 시도하기까지의 과정을 역사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마지막 전시실인 제5전시실에서는 미술교육자로서의 자신에 초점을 맞춰 그가 직접 교육한, 그의 영향을 받은 제자들의 작품 30여 점을 전시할 계획이다.

 


  “학문과 예술의 순수성은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지금까지 정말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돈과 권력보다는 내가 생각하는 예술 세계, 바로 휴머니즘을 위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양심에 어긋남 없이 살아왔고 돈과 타협하지 않고 물질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대구 미술사에 대한 책도 하나 못 쓴 것 같아 후회스럽지만, 퇴임 이후 더 많은 저서를 남긴 선학들을 사례를 본받아 이제 제2의 인생을 설계해보려 합니다.” 그의 개인전은 이달 24일부터 29일까지 대구문화예술회관 1~5전시실에서 열린다.

청라언덕(1960)

 

도시인(1994)

 

 

•섬유 도큐멘트, 영혼(2009)

 
글·사진|임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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