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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석경 이원동전
2023/03/06 | 아트코리아 | 조회 22608 | 댓글 0
2023년 석경 이원동 전
2023년 37일(화) ~ 317일(금)


갤러리 더블루


 

맑고 향기롭게, 석경(石鏡) 이원동의 난죽화
 
청(淸) _맑게

 
지필묵을 다루는 창작자에게 주어지는 최상의 평가 중 하나는 “작품이 맑다”는 것이다. ‘맑을 청(淸)’ 한 글자의 함의를 글씨와 그림의 조형으로 구현하는 것이 서예가와 사군자화가가 바라는 바일 것이다. 그러나 이 ‘맑음’이라는 가치는 작품에서 받는 총체적 느낌이자 분위기, 인상이기 때문에 작가가 어떤 의도나 직접적 노력으로 작품에 부여할 수 있는 성 질의 것이 아니다. 작품은 작가가 손에 쥔 붓에서 나오지만 그의 머리와 가슴, 팔다리가 함께 작용하는 것이고, 그 작가의 전 인생을 담보로 해서 탄생하는 것이다.
 
청(淸)의 반대는 ‘흐릴 탁(濁)’이다. 더러운 짓, 흐리멍텅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맑음에 이르는 길이다. 청탁불문은 주도(酒道)에서는 가능하고 또 권장되 기도 한다지만 지필묵을 다루는 작가의 삶의 방식에서, 작가로서의 태도에 있어서는 안 될 말이다. 그것이 문인화의 핵심인 이른바 ‘정신성’이다.
 
스스로의 맑음만 추구해서는 남의 도움으로 인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는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법정스님은 시주의 은혜로 살아온 출가사문으로 “생전 밥값은 하고 가야겠기에 이 일 한가지만은 꼭 하고 싶다.”며 ‘맑고 향기롭게’라는 캐치프레이즈로 1994년 시민운동을 시작했다.
맑고 향기롭게 살아간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고 인생을 수행자의 자세로 대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경지다. 나 자신을, 세상을, 자연을 맑고 향기롭 게 해야 하는 책무가 우리 모두에게 있고, 우리의 감수성과 인간다움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은 예술가에게는 더욱 그렇다.
 
이번이 30회째 개인전이지만 이제 이원동은 횟수를 내세우지 않는다. 오십여 년간 수행하듯 붓을 잡으며 작품을 내어놓고, 작품의 통로인 신체를 최선의 상태로 가다듬고, 마음을 오로지 문인화 한군데로 모으며 살아왔다. 사람의 가치와 예술의 가치가 다르지 않고, 삶의 목표와 작품의 목표는 별개가 아니다. 이원동 작가는 그 경지를 온 몸으로, 온 작품으로 구현하려 한다. 이원동 난화, 죽화의 깔끔하고 꼿꼿함은 그런 수행의 결과물이다.



 

202301, 70x138cm

202311, 700x204cm
 

202302 _ 45×60㎝
 

202303 _ 45×60㎝
 

202304 _ 45×60㎝
 

202305 _ 45×60㎝
 

난죽(蘭竹) _소신으로
 
난죽은 난화와 죽화 두 분야 그림을 한꺼번에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고, 난초와 대나무가 함께 한 화폭에 그려진 그림을 말하기도 한다. 중국에서 묵죽은 11세기 부터, 묵란은 13세기부터 그려졌으나 사군자라는 개념은 17세기에 나타났다. 사 군자화의 역사는 그리 오래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18세기의 대가 표암 강세황이 처음 사군자를 한 벌로 그렸다.

매난국죽은 사군자로 묶여 함께 그려지지만 넷 중에서 난죽이 중심이다. 매화는 미인인 홍매를 그린 19세기의 대가 조희룡에 의해 그 상징성이 군자를 넘어 확장 되었고, 국화는 은일(隱逸)이라는 인생관이자 처세관을 실천하며 주옥같은 문학을 남긴 워낙 강력한 캐릭터인 도연명과 연결되며 군자로 여겨졌지만 그림으로는 난죽 과 결이 같지 않다.

사군자의 핵심은 난죽이다. ‘획(劃)의 회화’인 난죽화의 오랜 역사 중에서도 많 은 사람들이 애호한 것은 묵죽이고, 조선의 문인들이 감정을 이입한 것은 묵란이다. 그래서 추사란, 석파란, 운미란, 소호란, 석재란이 나왔다. 죽화는 힘차게 뻗어내는 죽간과 활발한 죽엽의 동적인 그림이고, 난화는 부드럽고 유연한 난엽 과 새침한 난화(蘭花)의 정적인 그림이다.

죽화는 세상의 비바람과 눈서리에도 꿋꿋하고 푸르게 버티는 풍죽, 우죽, 설죽의 굳셈으로 그려지고, 난화는 고요히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향 기를 잃지않는 유향(幽香)의 그윽함으로 그려진다. 난죽화에는 강유(剛柔), 동정(動靜),문무(文武),음양(陰陽)의이치가들어있다.

이원동 작가의 이번 30회 개인전 주요 작품은 죽화, 난화와 난죽이 어울린 난죽화다. 난죽화는 화의(畵意)에 있어서는 군자를 지향하는 소신을 드러내는 그림이고, 화법(畵法)에 있어서는 획의 조형적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그림이다. 한 작가가 지닌 유일무이한 본연적 개성 그 자체의 순수한 발현인 획이 지니는 궁극적 예술성이 바로 청나라 석도(石濤)가 말한 ‘일획(一劃)’이고, 획의 특성이 극대화된 예술이 난죽화다. 난죽화는 이해하기 쉽지 않고, 구현하기란 더욱 어렵다.

그것을 김정희는 <불이선란(不二禪蘭)>에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 수 있을 것이며, 어찌 좋아할 수 있겠는가”, “세인(世人) 나득지(那得知) 나득호지야(那得 好之也)”라고 써 놓았다.





  • 202306 _ 13×60㎝

  • 202307 _ 13×60㎝

  • 202308 _ 13×60㎝

  • 202309 _ 13×60㎝

202313 _ 45×60㎝
 

202314 _ 138×70㎝
 

202315 _ 45×60㎝
 

능대능소(能大能小) _치열하게
 
이원동은 35세때 첫 개인전을 열었다. 고등학교 1학년때 운이 좋게도 스승을 만났다. 일찍이 인생의 방향을 정했고, 미술대학을 나와 착실히 공부해 온 것에 비해 작가로서는 상당히 늦은출발이다. 고전을 눈에 익힌 안고수비(眼高手卑)를 고뇌하며 자신의 눈높이에 자신의 손이 심수쌍창(心手雙暢)할 때까지 오랫동안 절차탁마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설정한 기준에 대한작가로서의 당연하고 마땅한 야망이다. 고심한 만큼 대작이 즐비한 웅장한 첫 개인전이었고 그만큼 반향도 컸다.
두보는“어불경인사불휴(語不警人死不休)”,“말이 사람을 놀래킬만 하지 않으면 죽어도 그치지 않았노라” 라고 자신의 시를 자부했다.

첫 발을 내디딜 때 간직한 ‘사불휴’의 초심(初心)은 이후 조금도 녹슬거나 스러지지 않았다. 이원동은 과감한 대작을 개인전 마다 발표했고, 깐깐하고 섬세한 소품 또한 빠트리지 않았다.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은대로 치열하게 작품에 임했다. 이원동은 크든 작든 최선을 다한다.
 
이번 개인전의 대작은 다섯 개의 대형 판넬을 붙인높이 2미터폭 7미터의 <대죽(大竹)>이다. 붓을 쥔채 10시간을 꼬박 몰두하며 중봉(中鋒)으로정면 승부한 거작이다. “왕대밭에 왕대난다”는 속담이 있어 상서롭게여겨지는 죽간이 굵은 대나무로 흔히 왕죽, 통죽으로 부른다.
이번 전시의 소품은 71×18㎝의 길쭉한 그림 100점이다. 맑은 선의 난죽도, 아름다운 채색의 사군자도, 고향마을의 정겨운 풍경도 있다. 대중소로 나누어 구성한 작품들은 모두 이원동의 치열한 작가 정신의 소산이다.




 

202315 _ 45×60㎝
 

202316 _ 60×45㎝
 

202316 _ 60×45㎝
 

202317 _ 70×138㎝


  • 71x18cm

  • 71x18cm

  • 71x18cm

  • 71x18cm

  • 71x18cm

  • 71x18cm

  • 71x18cm

  • 71x18cm

202310 _ 138×70㎝

202312 _ 13×60㎝

천석(千石) _ 스승 박근술처럼
 
 
이원동은 스승 천석 박근술(1937~1993)의 작가정신을 잘 배웠다. 박근술은 석재서 병오, 죽농 서동균을 이은 20세기 대구문인화 3세대다. 진사출신인 서병오는 교양으로 갖추었던 시서화를시대의 변화에 따라 예술가로서 행사했고, 서동균은 그림과 글씨를 넘나든 서화가였으나, 박근술은 묵란에서 부터 시작해 출발이 문인화이고 정체성이 문인화였다.

박근술은 육상선수출신 문인화가라는 특이한 이력을 지녔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석사학위를 마치고 여러편의 문인화 논문을 쓰며 이론을 겸비했다. 대학에 다닐 때 서동균의 문하에 입문해1961년 25세의 젊은 나이로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 입선해 ‘국전작가’가 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엄중했던 박근술은 순간적인 속필의 긴장감과 강렬한 기운의 군더더기 없이 맑고 소산(蕭散)한 난죽화 를남겼다. 2023년 올해는 박근술의 30주기되는 해다.

1970년부터 10여년간 박근술은 대구고등학교미술교사로 재직하며 미술반을 지도했다. 이원동을 비롯해 그의 영향을 받은 많은 문인화가가 나왔다. 붓을 잡아주며 그림을 가르친 자상한 선생은 아니었지만 박근술이 자신의 존재자체로서 보여준 작가상이 많은 후배세대들에게 본보기가 되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런 롤모델이야말로 선생의 진정한 역할일지 모르겠다. “용생용(龍生龍)봉생봉(鳳生鳳)”으로 이어져온 대구문인화의 전통은 더 멋진 모습으로 계속 되어야한다.

 
2023년2월이인숙|미술사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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