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일은 마음에 희망의 씨를 잉태하는 일이다.
그리고 화가란 그 잉태한 씨에 색을 덧붙여 자신을 표현해 내는 사람이다.
사물, 인물 또는 풍경속에 존재하는 자아는 결국 색채의 표현으로 완성된다.
나는 주변 풍경속에서 본영의 나의 모습을 찾으려 애쓴다.
캔바스 속에 온통 쏱아놓은 나 자신을 누군가 면밀히 관찰하고
공감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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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장정희는 색에 대한 끊이멊는 향일성을 지녔다.
그의 그림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그럼에도 애잔한 섬세함이 베어 있는데, 때로는 그 섬세함이 처연함으로 비추어 지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산길, 호수, 꽃, 나무 등 비교적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화폭에서의 느낌은 두고온 샹그리아처럼 아련합을 준다.
아마도 그 대상 속에 숨어있는 본연의 신비로움을 잘 포착해 색으로 승화 시켰기 때문이리라.
또 그의 그림들은 편안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머리로 정리한 후 비로소 전해지는 그림이 아니라 한 순간 가슴으로 스며드는 따스함이 있는데
그것은 작가 시선과의 교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설명과 이해가 필요한, 그래서 난해한 그림에서 오는 이질감 을 버리고 아늣한 기분으로 상념에
잠길 수 있다는 점 이 참으로 인상 깊다.
지금껏 그래 왔지만, 앞으로의 그림에 대한 작가의 끊임없는 추구가 기대된다.
박정아
여기 노란색에 푹 빠진 한 화가가 있다.
매섭고 긴 겨울의 통로를 힘들게 빠져나와 마치 광란의 몸짓으로 꽃망울을 터뜨린 노란 산수유꽃의 빛깔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 작가, 봄의 광기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안달하는 작가가 있다.
난 그의 그림을 보면서 역설적이게도 불꽃같은 정열을 캔바스에 쏟아 내었던 피카소의(청색시대)를 떠올린다.
그 그림들의 푸른색 색조는 슬픔의 늪 같은 이미지였다.
하지만 장정희가 펼쳐놓은 노란 산수유꽃의 광란은
그와는 전혀 다른 환상의 이미지다. (bule) 와 (yellow) 의 차이는 슬픔과 기쁨의 차이만큼 표정을 달리한다.
하지만 왠지 이 대비되는 두 색을 바라보면서 무언가 서로 중첩되는 정서의 동질감이 숨어있지 않나 나는
자꾸만 의심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봄 의 광기를 통해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기쁨과 환희의 너울거림이 아니라, 자신도 그처럼 폭발해보고 싶다는 숨겨진 내면의 욕방, 다시 말해 자신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암울한 슬픔을 위로받고자 하는 애절한 몸짓일 지도 모른다.
장정희가 붓이 아닌 나이프로 그림을 그리는 이유 또한 나이프의 터치가 만들어 내는 거친 마티에르글 통해
해소치 못한 욕망을 분출하려는 의도가 짙으며 나름대로 쾌감의 방식이 되고 있음도 분명하다.
작품 (고목) 을 보면 검은빛의 나무둥치가 캔바스의 가운데를 무겁게 분할하고 있다. 그 대담하고 힘찬 검은 나무둥치가
장정희의 내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장정희는 기실 꽃 에 마음을 빼앗기는 듯 포즈를 취했지만 사실은 늙은 나무에 더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검은 나무둥치로 상징되는 내면의 슬픔을 그대로 다 들어내 놓기에는 용기가 부족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꽃으로 위장하고 꽃의 화사함 속으로 자신을 숨기려 했던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장정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숨기고 싶어 했던 자신의 내면을 이미 그림을 통해 다 들켜버리고 만다.
그래서 난 장정희의 이번 작품들을 보며 (그림이 말하기 시작했다) 고 감히 말하는 것이다
이미 말하기 시작한 장정희의 그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자심감 있는 힘찬 목소리로 자신의 내면을 쏟아내게 될 것이다.
그러한 작업의 성과는 작가 장정희에게 있어 또 하나의 새로운 회화세계를 만들어 가는 물꼬로 작용할 것 이 분명하다.
다만 밝음과 어둠 그리고 가벼움과 무거움의 절묘한 조화를 어떤 방식으로 이룩해 내는가 하는 것은 장정희가 추구해야 할 목표점
이기도 하며 동시에 풀어야 할 숙제로 남게 될 것이다.
시인 김 호 진
홈페이지 : www.artko.kr/jangjung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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