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12    업데이트: 25-04-21 10:46

사적인 너무나 사적인 순간들

시인동네 시인선 102 박지영 시집

시인의 말

시에 대해 알아갈수록 시집을 묶어낼수록 고개가 숙여진다. 내 것이 아닌 것들에 이름표를 달고 내 것이라 우기며 살았다. 2018년 12월 박지영

반 고흐에게

이별에올줄몰랐지 엄마 뱃속에서 이별하고 나와 수많은 이별을 보고 들어 수두룩하게 이별 연습을 한 줄 알았어 이 별에서 이별은 늘 두렵고 서툴러 몇백 광년 떨어져 아득히 먼 줄 알았지 우리는 사다리를 걸쳐놓고 한 계단 한 계단 걸어서 저 별로 별을 세며 가는 중이야 저 별에서는 다들 한식구가 되지 오라 부르지 않아도 우리는 혼자서 타박타박 저 별에 가야 해 이 별은 그렇게 지나가는 거야

달의 혼인

어둠이 왔어 내가 찾아간 것이 아니라 어둠이 내게로 왔어 한 발 물러나면 어둠은 두 발 다가왔어 어둠이 어둠 위에서 실눈을 뜨고 검은 아마포를 펼쳐 들고 오는데 저불안, 불안 두려움을 이해하면 두려움이 사라질까 걱정을 이해하면 걱정이 사라질까 올까 정말 올까 왈칵 왈칵 겁이 났어 허공을 물어뜯고 싶었어 나는 이슬 머금은 첫새벽과 그믐달의 혼인식에 가야 하는데 어둠에도 그늘이 있어 그 깊은 심연에 발이 빠져 아, 길을 가로막고 있어

토마토가 익을 동안

검은 토마토가 배달되었다 밤은 결코 혼자 오지 않는다 한 세포가 다른 세포를 흔들어 깨우듯 어미의 유전인자가 자식에게 대물림되듯이 집요하게 온다 나는 밤에 태어나 밤의 지배를 받으면서 자랐다 나를 먹이고 키운 밤 그렇게 나를 어둠에 심어놓은 밤 그렇다고 밤을 엄마라 불러야 하나 끊임없이 발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밤은 둥글게 부풀어 오른다 어떤 영혼은 별빛을 가지고 있어 영혼의 갈피에 그 별빛을 끼워 넣으면 서로 부딪혀 방울 소리를 낸다 나는 별의 말을 번역하는 자 밤의 말을 전하는 자 또 하나의 밤이 익어가는 순간 토마토가 익을 동안 침묵하기로 하자

사적인 너무나 사적인 순간들

괴로움도 싹이 트고 잎이 나는가 꽃피기 전에 이 괴로움 징검다리 건너 보낼 수 있다면 빗물에 씻어버릴 수 있다면 이 괴로움 손탁탁털고제갈길갈텐데 정작 괴로움은 어디서 오는지 어떻게 꽃피는지 제 안에서 제 살을 깎아 먹고 자라는 저것들 때문에 오래 어두워 비명을 내지르기도 했는데 봄볕에 내어놓고 얼굴 씻어주고 옷깃 여며줄 수 있다면 괴로움이 극진하게 안으로 차오를 때면 그게 기쁨인지 슬픔인지 슬픔인지 기쁨인지 정말 모르겠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괴로워하는지 괴로움을 괴로워하는지

자꾸 생각나는 것들

자잘한 것들이 바닥에 흩어져 뒹구는데 두리번거리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도입부에 반짝이는 유리조각이었어 안약 안경 집게 지우개 깨진 컵 연필 만년필 마우스 주섬주섬 책상 위에 올려놓고 벽 속에 얼굴 디밀고 스위치를 켜니 “귀찮아”가 다음 문장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아섰어 오늘 이상하네 왜 그러지 하니 빤히 쳐다보는 거 있지 이때는 한 행을 건너뛰는 게 최선이야 가을에 대한 것이나 두메양귀비에 대해서나 쇠똥구리에 대해 쓰더라도 다 위험해 좌든 우든 말할 것도 없어 어떤 글이든 글에 배후가 있나봐 글은 암호이고 신호이고 저항인지도 몰라 다음 행을 쓰기 전에 내부로 들어가는 길을 탐색 중이야 그런데 내부가 어디 있지

궁금했어요

샘에 물 길러 갔었어요 그속에꽃배암두마리 서로 엉켜 제 집처럼 들어앉았지 뭐예요 다음날 배암은 없고 나뭇잎만 물 위에 떠 있었어요 아무도 그 샘물 퍼가지 않았어요 점점 샘은 마르고 한 그루 나무가 자라났어요 그 나무에서 눈이 큰 아이가 조로조롱 달려 있었어요 한 아이가 웃으면 같이 웃고 울면 같이 울었어요 아르고스의 눈 같아서 아무도 나무를 건드리지 못했어요 어느 날 휘파람새가 와서 노래하자 아이가 하나 둘 잠들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다투어 아이를 따다가 집 마당에다 몰래 심었어요 까만 눈이 커다란 아이를 주렁주렁 매달고 넝쿨이 지붕을 타고 올라갔어요 그 후 어찌되었는지 모르겠어요

검은 말들

밤은 미루나무 가지 끝에 걸려 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환상으로 가득 찬 여린 새순들은 세찬 바람에 뚝뚝 고개 떨구었다 웅성거리던 미루나무 영혼에서 비릿한 밤의 냄새가 났다 밤이 검게 물들어 밤의 얼굴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검은색이 손에 묻어났다 안 보려 해도 까맣게 똬리 틀고 있는 깊은 수렁 보고 말았다 밑바닥에서 허우적거리다 겨우 어둠을 헤집어 돌아 나왔다 검은 피로 얼룩진 날들이 지나가고 향기도 없고 생기도 없는 말들이 부끄러워 나는 말들을 하나하나 지워버렸다 타오르지 못한 검은 말들이 연기를 내뿜었다 달빛 머금은 말에서 향기가 났다

어떻게 살았을까

—페넬로페의 변명 누가 제 이야기를 좀 들어주실래요 베틀 앞에만 앉아 있었더니 오늘은 말하고 싶어요 말도 짜는 거지요 천 짜는 거나 별 차이 없어 보이지만 말엔 놀라운 맛이 있어요 사실 몸을 파고드는 베틀 소리는 짐승의 울음 같아 고통스러워요 손 놓고 가만있으면 더 견디기 어려워요 저를 불안하게 해요 그래 손을 재바르게 놀려요 천이 잘 짜였는지 아닌지 제 손이 먼저알아요 한번 만져보세요 이 천의 감촉을요 손맛이 살아나요 사랑의 맛이 이럴까요 제가 오늘 말을 많이 했지요 이제 당신이 제 이야기 좀 해주실래요 베 짜는 저를 정숙한 여자라고 한다면서요 창밖의 저 눈들 무서워요 저는 베틀 밖 세상은 알고 싶지 않아요 누가 제 이야기를 좀 해주었으면 해요 제가 왜 천을 짜고 있는지 말예요 당신이 글을 쓰면 나는 당신 것이 될 거예요 제게 베틀이 없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요

난 괜찮아

—테이레시아스*

네 젖가슴 훔쳐보았다고 내 눈을 뽑아버리다니 난 괜찮아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본 네 젖가슴 눈에 아른거려 아테네, 너는 이미 알고 있었지 눈을 감아야 네가 더 잘 보인다는 걸 그러니 난 괜찮아

혀끝에서 맴도는 말

—카산드라* 아버지 어머니 말 좀 들어보세요 제발 귀 좀 기울이세요 제 말은 제 말이 아니에요 나무가 새의 발끝에서 전해들은 말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며 하는 말이에요 혀끝에서 맴도는 말에서 달아날 수가 없어요 미래가 벌써 저기 와 있으니까요 저는 모든 걸 보았어요 어둠도 보았고 꺼지지 않는 불빛도 보았어요 아버지 어머니 저는 할 말이 너무 많은데 아무도 제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아요 제 말은 그물 밖으로 다 빠져나가 비눗방울처럼 허공으로 사라져요 고운 모래먼지 같아 바람에 날려요 아버지 어머니 차라리 제 입에서 개구리가 튀어나왔다면 믿으실래요? 전 사실 카산드라란 이름 때문에 아무도 사랑할 수 없었다니까요

*카산드라는 아폴론에게서 예언의 능력을 받았으나 아폴론의 사랑을 거절한 벌로 예언을 말할 때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게 되었다.

화양

그 화양이 이 화양인가 나 어린 고모는 니 엄마 화양 장터에 있다며 놀렸다 정말 엄마가 거기 있기나 한 듯 울다 울다 지쳐 잠들면 한없이 낯선 골목 헤매는 꿈을 꿨다 그런 날은 꿈도 몹시 고단했는지 이불에 지도를 그리곤 했다 엄마의 매운 눈초리에 바가지 들고 키 쓰고 대문 밖에 쪼그리고 앉아 남쪽 어딘가에 있다는 화양을 떠올렸다 혼자 몰래 빨아먹는 박하사탕처럼 화하고 달콤했던 화양 청도 가다 이서 지나다 본 화양 엄마 몰래 사탕 훔쳐 먹다 들킨 것처럼 화들짝 브레이크에 발이 가던 화양

모든 열매는 둥글다

하늘 한번 쳐다보지 못하고 밤하늘 별 한번 세어보지 못하고 네모 방에서 일어나 네모 빵을 먹고 네모 대문을 열고 네모 엘리베이터를 타고 네모 버스를 타고 네모 지하철을 갈아타 고 네모 회사 건물에 들어가 네모 책상에 앉아 회의를 하고 네모 컴퓨터를 보고 네모 스마트폰을 들고 네모 책을 보며 허공에 네모를 쌓아 올리다가 해가 지면 네모를 타고 네모 집 에 돌아와 네모 침대에서 네모 꿈을 꾸며 서서히 네모가 되어 간다 이 시대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포스트모더니즘은 사각사각 각을 세우는데 그러나 모든 열매는 둥글다

고독도 꽃이 피나

굳이 말하자면, 꽃 그것은 흔적 방 문고리에 잡혀 있는 네손의온기같은 푸른 저녁들의 시간이면 심야 버스를 타고 자정에 대해 절망에 대해 말하고 싶었어 존재를 넘어 쓸모없음의 저편에서 뿔도마뱀의 슬픔이 꼼지락꼼지락 내 유년의 그늘에 아, 거기누가있어 계속 허공을 맴도는 말로 귓속에 사원을 세웠어 사월에 어설프게 내리는 눈처럼 점점 말은 길어지고 딸꾹질은 멈추지 않고 사랑 없는 곳에서 싹튼 고독은 꽃피는 걸 잊었어

애별(愛別)*

참 이상한 일이다 도로표지판에서 분명히 보았는데 어디에도 없다 지도에도 없다 낮에 본 애별에 마음 베이고 몸은 벌써 애별에 들어 애별을 앓고 있는데 참 이상한 일이다 애별은 추억을 안고 애처롭게 울던 새끼 고양이 애별은 가물어 바닥 드러낸 저수지 애별은 내가 아는 애별도 네가 아는 애별도 아니다 해 뜨고 바람 불고 산꼭대기 흰 눈 위로 애절하게 노을 지는 동안 애별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시계가 작동하는 것 같았다 시간이 평상시와 달리 밀가루 반죽처럼 말랑거리고 끈적거리며 달라붙었다 이스트 넣은 반죽처럼 부풀기도 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애별은 어떤 물질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외로움을 확보하는 순간 힘이 났다 별의별 생각을 다하며 애 별을 낳다가 애별을 놓쳤다

*일본 홋카이도에 있는 마을 이름

누가 내 어깨를 툭 쳤어

차를 마시고 있을 땐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땐가 뭔 흰빛이 홀연히 스쳐 꿈이었나 눈을 의심했다니까 한번두번 그 빛은 차츰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순간에 또 문득 왔다 가곤 했어 작은 물방울 같고 진주 같은 그빛, 어제 저녁에도 오고 오늘 아침에도 왔어 한 영혼이 어둠의 강을 건너가기 전 마지막 보내는 눈인사라 믿었어 꿈의 틈으로 내다본 또 다른 꿈 영혼아 삭막한 이 도시의 사막이나 어두운 뒷골목 떠돌지 말고 가던 길이나 가 그런데 영혼아 정말 갈곳이있기나한거니

밥經

엄마 하면 밥하던 생각밖에 안 난다 그 흔한 바깥 음식에 눈길 안 주고 빨래하다 김치 담그다 부뚜막에 쪼그리고 앉아 남몰래 울다 밥하던 엄마 밥이 보약이라며 사람은 밥심으로 산다고 밥 한 톨이라도 버리면 죄라며 날마다 밥을 숭배하며 밥만 하던 엄마 평생 한 밥 쌓아놓으면 산 하나가 될 텐데 갈 때는 밥 한 술 못 뜨고 가셨다 병실에서도 아버지 밥걱정만 하던 엄마 이건 밥에 대한 외경이다 순전한 순교다

그걸 찾다

바하리아 사막 거기는 하늘과 땅이 맞닿아 하늘이 커다란 휘장을 둘러놓은 것 같고 하늘이 둥근 뚜껑을 덮어놓은 것 같다 해 뜰 때와 해 질 때 하늘과 땅의 이음새가 더 선명하다 간절히 찾던 것을 아주 멀리 와서야 알았다 어디서나 내가 있는 자리가 우주의 중심인 것을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느라 그너머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몰랐다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 모래알갱이 하나도 놓인 그 자리가 바로 중심인 것을 그걸 찾아 한평생 헤맸다

사랑

세면대 밑이 젖어 있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모르겠다 밸브는 옥죄었을 거고, 안간힘 쓰고 삐져나오려는 수압을 감당하지 못해 밸브는 그만 자신을 놓아버렸다 똑똑 한 방울씩 떨어지며 흘러가는 것이 본성이라고 물은 꼬리에 꼬리를 달고 바닥에 물길을 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