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94    업데이트: 25-04-08 10:52

간절함은 늙지 않는다

시인동네 시인선 175 박지영 시집

시인의 말

일평생 나는 내 손님일 뿐이었다. 손님의 말을 받아 적은 기록을 여기에 남긴다. 2022년 5월 박지영

제1부

부사

사방 꽉 막힌 상자에 부사가 갇혀 있다 구를 수도 돌아누울 수도 없어 가만히 꼼짝 않고 있는 부사 조금씩 물기가 빠져나가는 부사 점점 미라가 되어가는 부사 사과이기를 거부하는 부사 너무 생각이 많은 부사 형용사는 버리고 동사로 누워 있는 부사

밤 까먹는 밤

사위가 어두워 깜깜한데 내가 아는 밤이 아니었다 밤은 도시의 열기마저 식혀 싸늘한 냉기만이 감돌았다 세상에 이런 밤도 있다니 너를 부를 수도 너에게 갈 수도 발 동동거리며 미래에 올 너를 기다리다 그 밤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거기에 왜 갔었는지 왜 자꾸 밤마다 그 먼 곳에 가서 밤을 까먹고 있는지 생각하고 생각하는 밤

말할 수 없네

깊은 밤 꿈에 그대 만나면 잠은 멀리 달아나 퍼 담아도 채워지지 않는 물항아리가 되네 달이 느리게 느리게 가시나무 울타리 밟고 가 가시에 찔려 이지러진 노란 달 아스라이 새벽하늘에 떠 있네 가지도 못하고 떠 있네 나도 가지 못하고 마음만 온종일 하늘에 떠 있네

눈 감아도 너무 멀다

― 동휘에게

너는 다섯 번의 겨울을 보았고 나는 예순 번의 겨울을 지나왔다 나의 겨울과 너의 겨울을 생각한다 댈러스의 겨울과 대구의 겨울, 지나온 수많은 겨울을 떠올린다 눈 덮인 알프스와 캐나다의 방하를 극지에서 극지로 쇄빙선으로 얼음을 깨고 가는 겨울을 이 겨울은 내가 알던 겨울도 네가 알던 겨울도 아니다 아직 겪어 보지 못한 새로운 겨울이다 내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눈이 네 키만큼 쌓여서도 아니며 살을 파고드는 한기 때문도 아니다 세계가 가까워졌다지만 얘야 내가 아는 겨울과 네가 아는 겨울이 너무 멀다 이 겨울은 내가 잃어버린 겨울이 아니다

구월의 책

구월의 저녁 펜의 주인들이 여기 모였다 이곳은 고유한 세계 무한해 그 끝을 알 수 없는 세계 이 세계는 지상의 것들이 통용되지 않는 세계 지상에서와 다르게 숨 쉬고 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산다 그렇다고 이 세계가 안전한 것은 아니다 이곳에서는 펜을 믿는다 어두운 세상을 찬란하고 반짝이게 할 수는 없지만 새날이 오리라 믿으며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불의와 싸우며 이 시대를 밝히는 등불이라 믿는다 구월의 공기가 가슴에 스며드는 저녁 말로는 다 할 수 없어 우리는 펜을 잡았다 꿈과 미래를 여는 시간 단어에 숨을 불어넣는 시간 꽤 근사한 구월의 저녁이다

단단한 벽

살면서 수많은 문을 드나들었지 그 많은 문과 문 사이를 드나들면서 몰랐다 문이 문이 아니라는 것을 문은 네 집인 걸 증명해 보란다 식탁 위에 먹다 남은 빵이 있고 화장대 위엔 올이 풀려 벗어던진 스타킹이 있고 읽다가 엎어놓은 시집이 있다 해도 암호를 기억해내란다 주문을 말하란다 급한 마음에 동동거리며 허둥거리다 연달아 잘못 눌러 도어록은 경고음을 울리더니 작동이 중지되었다 저 높고 단단한 벽

제2부

정신분석 세미나

정신분석 세미나에 갔어요 우리는 재미나실이라 불러요 모 두들 아픈데 어디가 아픈지 모르고 모두 안 아픈 척 근엄해 서 고개 숙이고 손으로 입을 가리고 쿡쿡 웃어요 언제부턴가 그들은 부끄러워하거나 입 가리고 웃지 않아요 아프다고 서 로 말하려고 해요 저요 저요 하며 자신의 구멍을 보여주려 해 요 언제가 나도 가슴의 구멍을 보여주었어요 숨기면 숨길수 록 더 커졌거든요 구멍의 깊이는 측정할 수 없이 깊었어요 그 때 마음이 빈 벌판에 서 있는 나무 같았어요 나만 그런 게 아 니었어요 그들도 가슴에 구멍 몇 개씩 가지고 꼼지락거리며 구멍을 다독거리고 있었어요 정신과 의사 선생도 재미나실에 오는데요 자기의 텅 빈 구멍 내보이며 처연하게 웃으며 좀 보 라 하네요 우리는 킥킥 웃기도 하고 같이 아프기도 해요 그렇 게 다들 무언가 말하고 싶어 재미나실에 오는데요 그 증상이 어쩜 모두 내 증상 같은지 모르겠어요

테이블

놈이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다 스위치를 켜면 그제야 관절을 펴고 구부린 등을 펴 품을 열 어준다 놈이 그녀에게 길들여졌는지 그녀가 놈에게 의지하는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아주 익숙하게 의자에 엉덩이를 깊숙이 밀어 넣고 팔을 놈의 등에 밀착해 서 하나가 된다 때때로 서로 겉돌기도 하지만 그녀는 그놈 앞에서만 한 줄 한 줄 벽을 쌓을 수 있다 위에서 아래로 벽을 쌓아간다 벽은 두꺼워야 했고 벽은 높아야 했다 벽은 어두워진 창밖의 별빛을 끌어 오고 창을 두들기는 빗소리도 불러오곤 했다 그녀가 벽을 포개놓고 나서 휴우 한숨을 내쉬면 그놈도 덩달아 사지의 근육을 풀었다 그녀에게 그놈은 유일한 위안이며 벽은 그녀가 숨기에 가장 안전한 곳이다

저 너머에서 빛이

아파트 옆 통로에서 하얀 시트에 싸여 누가 응급차에 실려 간다 내 방문을 여는데 책상 위에 꾸덕꾸덕 말라가는 미라가 길게 누워 있다 다가가 보니 나였다 놀랍지도 않았다 내가 죽었구나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그런 것보다 내 주검으로 인해 나를 잘 볼 수 있었다 스튜키 밑둥치가 물컹했다 손으로 잡으니 힘없이 뽑혔다 물 없이도 잘 자라는 것을 염려가 죽이고 말았다 이 세계와 저 세계 사이 투명한 막 너머에서 환한 빛이 사정없이 쏟아져 들어왔다

주름의 힘

광주리에 담긴 사과 새들새들 곯았다 더 작아져 쪼글쪼글해진 사과는 굳은살처럼 각질이 두터워 칼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쪼글쪼글해진다는 것은 팽팽히 잡고 있던 끈 놓치지 않고 더 깊어져 제 속으로 들어가 밑바닥에 닿아 보겠다는 것 아닌가 사람도 오래되면 내장에 구김이 지고 눈동자에도 주름이 잡힌다지 그 주름의 힘으로 비록 말라비틀어져도 더 깊이 생의 바닥에 닿을 수 있다지 새금새금 단내를 짙게 풍긴다지

제3부

튤립나무라 불러도 튤립이 되는 건 아니야

페르난두 페소아*는 이름에서 이름으로 순간을 살다 갔지만 그를 증명할 이름이 없어 어디까지가 그인지 모르겠어 백합나무를 노랑 포플러나 튤립나무라고도 부른다는데 그렇다고 포플러가 되거나 튤립이 되는 건 아니야 하지만 포플러나 튤립을 기웃거리게 되거든 어쩌면 페르난두 페소아를 호명하는 이름들이 백합나무 이름들과 별반 다를 게 없어 사실 이름은 이름일 뿐인데 달라지는 건 없는데 그는 너무나 많은 영혼을 가지고 있어 이 이름과 저 이름으로 서로 대화하며 외로운 영혼을 달래주었나 봐

*페르난두 페소아: 포르투갈의 시인이자 작가, 문학평론가, 번역가, 철학가. 그는 이름이 수없이 많았다고 한다.

미끼

종이 위에 강이라고 쓰자 물고기 한 마리가 힘차게 물살을 가르고 갑자기 물 위로 솟구쳐 오른다 고맙다는 듯 꼬리를 까닥이더니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다시 수면은 조용해지고 종이 위에서 숨죽이고 있던 글자들이 순서를 기다리다가 답답한지 고개를 들어 올리다 낚시꾼에게 걸려든다 종이 위에서도 생사가 갈린다 ‘아’라고 써야 할 것을 ‘어’라고 쓰는 바람에 다른 생각이 올라와 잡은 고기 놓아줄 때도 있다 종이 위에 강은 여전히 소리 없이 흐른다 앗! 물고기가 찌를 물었다 손맛이 짜릿하다 이 맛을 알아야 진짜 인생을 아는 거다

노래가 목걸이라면

한 노래가 있어 그 노래를 들으면 오래된 영혼도 젊어지네. 노래를 따라 낯선 회랑을 돌아가면 한 시절이 또렷해지네. 비를 맞고 더 선명해지듯 그 노래는 당신을 가장 빨리 떠올리게 하네. 당신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노래가 내 영혼을 기다리듯 천천히 흘러나오네. 외롭고 슬픈 노래에 기대 한 계절을 건너가네. 기억이라는 학교에선 노래 한 소절이 마음을 여는 열쇠가 되네. 입보다 먼저 몸이 끄덕끄덕 따라 부르네. 노래는 저절로 흥이 차올라 넘쳐흐르네. 표정 없던 얼굴이 환해지네. 노래 따라 기억 속으로 들어가네. 노래가 목걸이라면 당신 목에 매달아 주고 싶네.

문이라는 기호

형태도 같고 형식도 같은 문인데 한쪽은 남자 다른 쪽은 여자를 상징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M이라 쓴 곳에 여자가 들어가지 않고 W라고 쓴 곳에 남자가 들어가지 않는다 법으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정해놓은 규율은 더욱 아니다 그러나 어느 나라에서건 다들 그렇게 한다 이것은 문에 대한 은유이고 서로간의 약속이다 그런데 그 문에 창고라고 쓰여 있다면 왜 창고가 되었는지 아무도 열어 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창고라는 말을 믿고 그 말에 갇혀버린 것이다

내 삶을 묘지 위에 세우고 싶지 않았지만

아파트 분양하고 땅파기 공사 중에 청동기 시대 유물이 나왔다 석곽분 몇 기로 상동 청동기 마을이 조성되고 아파트는 청동기 마을의 든든한 배경이 되었다 소나무와 쥐똥나무, 라일락은 울타리를 자처했다 언제부터 여기에 사람이 살았을까 학자들은 그들 생활상의 비밀을 풀어보려고 토기 조각을 맞추고 뼛조각을 추려보지만 언어로 흔적을 짜 맞추는 것과 다름없다 볕 잘 드는 석곽분 주위를 서성거리다 풀벌레 소리에 굄돌을 손으로 쓸어보며 묘지 위에서의 삶을 생각해본다 사람은 가도 언어는 살아 영원할 것이다 묘지는 한 권의 책이니 세상은 묘지 위에서 태어나고 죽는다는 말이 여기서는 아주 자연스럽다

그리운 토리노*

생모리츠에서 기차를 타고 잔설이 남아 있는 알프스를 넘어 토리노엔 안 가고 티라노에 왔다 아니 안 간 게 아니라 못 갔다 토리노 토리노 당신이 살았던 토리노 사실 토리노가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당신을 만나러 토리노에 가고 싶었다 티라노에서 귀뚜라미 소리 들으며 토리노 토리노 불러만 보았다 내 구두 속에 들어 울어대던 귀뚜라미 곡진히 가슴을 후비다 새벽녘에 잠잠해졌다 토리노에 가지 않더라도 마음이 가닿으면 비로소 간 거다 오래된 카페에 앉은 당신을 보며 그 옛날처럼 당신 집 앞으로 마차가 굴러가는 소리도 들으며

*토리노: 니체가 머물렀던 이탈리아 남부 도시.

간절함은 늙지 않는다

어느 나라든 역은 붐빈다 이른 아침 룩셈부르크 역 앞 갓 구운 빵과 커피를 앞에 두고 카페에 앉아 있는데 창밖에서 한 노인이 안을 들여다본다 이쪽과 저쪽의 세상은 어디에서든 있다 아니 도처에 있다 어린애가 가게 앞에 달라붙어 있듯 노인은 계속 빵을 들여다보고 있다 노숙을 하고 막 일어났는지 부스스한 머리가 삐죽 솟아 있다 빵에 눈이 꽂혀 있다 간절한 눈빛에 이끌려 동전 몇 개 쥐어 주었다 노인의 얼굴에 환하게 불이 켜졌다 빵이 아니라 따뜻한 거피를 사들고 간다 손을 흔들며 뭐라 뭐라 하면서

나는 늘 나인데

삶이 점점 아파 나는 고개 쳐들고 외쳤어 키리에 키리에* 긴 밤 허공을 밀고 가다 보니 허공이 문 열고 들어서는 날도 있어

*kyrie eleison: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해설

언어, 기호, 그리고 우연적인 마주침

― 박지영 시집, 『간절함은 늙지 않는다』 고봉준(문학평론가) 일상은 수많은 마주침의 순간들로 채워진 패치워크(patch work)이다. 이 마주침의 사건들은 대개 우연의 지배를 받는다. 우연히 듣게 된 소리나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예상치 못한 사람과 마주치는 순간, 어떤 장면이나 풍경에 시선을 사로잡히는 순간, 무심코 읽은 문장에 마음을 빼앗겨 한동안 넋을 놓게 되는 순간……. 시인은 우연의 시간과 순간의 강렬함을 감각적인 사유로 연결하고, 내부에 그 강렬함의 흔적을 간직한 감각적 존재를 창조해냄으로써 일상의 시간을 예술로 바꿔낸다. 그런데 이 창조적 사건에는 종종 두 가지 오해가 따라다닌다. 하나는 이 우연한 마주침이 온전히 시인에 의해 주도되는 사건이라는 오해이고, 다른 하나는 그 마주침이 왜곡이나 잔여 없이 언어화될 수 있다는 그릇된 믿음이다. 이 우연한 마주침의 대부분은 동일한 질서의 반복으로 구성된 상 식의 세계를 뒤흔들면서 나타나는, 혹은 우리에게 도래하는 타자적인 것과의 조우로 시작된다. 따라서 이 마주침에서 시인의 역할/능력은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이 경우 시인에게 요청되는 능력은 이질적인 것, 낯선 것의 출현에 대해 외면하지 않는 것, 상식이라는 이름의 익숙함을 보존하기 위해 타자적인 것의 출현을 부정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개방성이다. 그런데 이러한 마주침은 경험의 가능 조건일 뿐 그 자체가 시(詩) 는 아니다. 시인에게는 이 마주침의 사건, 그 강렬함을 언어안에 담는 작업이 요구된다. 하지만 이 마주침의 대부분은 그자체로 강렬한 정서적 만남일 뿐 특정한 내용으로 경험되지 않는다. 이는 시에서의 언어 또한 강렬한 정서적 사건이 발생한 흔적일 뿐 마주침의 실체에 대한 기술이 아님을 의미한다. 시가 시인의 배타적인 독점물이 아니라 독자의 읽는 행위를 통해 완성되는 이유, 특히 그 읽기가 문해력이 아닌 행간 읽기라는 정서적 독법을 요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박지영의 시는 일상적 사건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언어화한 다. 언어와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 시적 대상을 정서적인 방식으로 재해석한 장면들, 삶에 대한 성찰적 태도, 자연과의 관계, 기후위기나 코로나 팬데믹 같은 현실적 문제들 등 다양한 주제들이 ‘시집’이라는 하나의 세계 안에서 공존하고 있다. 이주제들 가운데 단연 두드러지는 것은 언어와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이다. 종이 위에 강이라고 쓰자 물고기 한 마리가 힘차게 물살을 가르고 갑자기 물 위로 솟구쳐 오른다 고맙다는 듯 꼬리를 까닥이더니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다시 수면은 조용해지고 종이 위에서 숨죽이고 있던 글자들이 순서를 기다리다가 답답한지 고개를 들어 올리다 낚시꾼에게 걸려든다 종이 위에서도 생사가 갈린다 ‘아’라고 써야 할 것을 ‘어’라고 쓰는 바람에 다른 생각이 올라와 잡은 고기 놓아줄 때도 있다 종이 위에 강은 여전히 소리 없이 흐른다 앗! 물고기가 찌를 물었다 손맛이 짜릿하다 맛을 알아야 진짜 인생을 아는 거다 ― 「미끼」 전문 시집의 첫 페이지에 배치된 동음이의어(homonym)를 활용한 작품들은 이 ‘시집=세계’에 대한 이정표로 읽어도 좋을 듯하다. 품사의 하나인 ‘부사(副詞)’와 사과의 특정한 품종(品種)인 ‘부사(富士, ふじ)’의 동음 관계를 이용한 「부사」, ‘밤(night)’과 ‘밤[栗]’의 동음 관계를 이용한 「밤 까먹는 밤」이 그것들이다. 시인은 전자에서 사과 상자에 갇혀 말라가는 사과의 형상을 “형용사는 버리고/동사로 누워 있는 부사”(「부사」)라고 표 현함으로써 언어적 동음 관계 이상의 의미를 발견해내고 있고, 후자에서는 ‘밤’의 의미를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새로운 의미 형성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 이 사례들은 단순한 유희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알다시피 시는 ‘언어’ 예술이다. 하지만 이때의 ‘언어’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근간, 즉 정신분석학자들이 말하는 상징적 질서로서의 언어와 같은 것이 아니다. 상징 질서, 또는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인 기능적·도구적 언어가 문법과 의미를 중심으로 작동한다면, 시는 언어를 의미보다는 정서, 문법보다는 욕망의 질서에 따라 사용하는 예외적 방식의 일종이다. 현대시에서 동음이의어, 언어유희(pun) 등은 ‘유희’라는 단순한 기능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특정한 기호의 의미를 중층화함으로써 언어에 대한 익숙한 감각에 충격을 가하고, 이질적인 의미를 충돌시킴으로써 진술 자체를 불확정적인 것으로 경험하게 만들며, 그리하 여 자동화된 감각과 사고의 과정을 탈구시킴으로써 인지 과정 자체를 지연시킨다. 특히 동음이의어는 언어 기호가 의미로 환원되지 않도록, 동시에 음성적 물질성에 근거하여 우리 의 사고를 다른 세계로 도약시킨다는 점에서 중요한 시적 장치라고 말할 수 있다. ‘언어’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인용 시에서도 반복된다. 1연에서 화자는 종이 위에 ‘강’이라는 글자를 적으니 물고기 한 마리가 힘차게 물살을 가르고 솟구쳤다가 이내 물속으로 들어가 버렸다고 쓰고 있다. 이것은 시(詩)가 ‘언어’의 세계에서 발생한 사건, 즉 언어적 사건이라는 의미이다. 이때 ‘강’이라는 언어와 ‘물고기’의 출현은 동시적이다. 시에서 언어는 현실의 사건을 뒤늦게 언어로 표현한 것이 아니다. 문학작품에서 세 계는 발화되는 순간 탄생한다는 점에서 시의 언어는 창조 그자체이다. 근대미학, 특히 텍스트주의는 이러한 발상에 기초하여 텍스트의 안과 밖을 단절된 것으로, 그리하여 자율적인 세계로 간주했다. 2연에서 시인이 글쓰기를 “종이 위에서 숨죽이고 있던 글자들이/순서를 기다리다가/답답한지 고개를 들어 올리”는 행위로 형상화한 부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시인에게 글을 쓰는 일은 ‘종이=백지’에서 ‘글자’를 낚아 올리는 행위이다. “낚시꾼에게 걸려든다”라는 표현처럼 시인에게 있어서 ‘글’은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물고기와 그것을 낚아챈 시인의 행동이 결합되어 탄생하는 사건이다. 그렇다면 왜 시인은 작품의 제목을 ‘낚시’가 아니라 ‘미끼’라고 썼을까? 3연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소쉬르나 바르트 같은 구조언어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의 발화행위는 계열체(Paradigm)와 통합체(Syntagma)를 조합하는 행위이다. 여기에서 계열체는 적절한 기호를 선택하는 것이고, 통합체는 선택된 기호들을 연속적으로 배열하는 문법적인 것이다. 프랑스의 기호학자인 롤랑 바르트는 이러한 언어적 원리를 패션과 음식에 적용하여 ‘모드의 체계’라는 담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처럼 발화행위가 계열체와 통합체의 조합이라면 그 각각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어떤 전제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수많은 어휘 가운데 어떤 단어를 선택하기 위해서 는 이웃하고 있는 단어가 선행되어야 한다. 시인은 선행하는 단어를 ‘미끼’라고 부르는데, 이것으로 인해 “‘아’라고 써야 할 것을 ‘어’라고” 잘못 쓰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생각이 올라와 잡은 고기 놓아줄 때도 있”는 것이다. 형태도 같고 형식도 같은 문인데 한쪽은 남자 다른 쪽은 여자를 상징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M이라 쓴 곳에 여자가 들어가지 않고 W라고 쓴 곳에 남자가 들어가지 않는다 법으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정해놓은 규율은 더욱 아니다 그러나 어느 나라에서건 다들 그렇게 한다 이것은 문에 대한 은유이고 서로간의 약속이다 그런데 그 문에 창고라고 쓰여 있다면 왜 창고가 되었는지 아무도 열어 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창고라는 말을 믿고 그 말에 갇혀버린 것이다 ― 「문이라는 기호」 전문 이 작품은 프랑스의 정신분석가 자크 라캉이 소쉬르의 언어 이론을 전유할 때 사용한 유명한 화장실 사례를 차용한 메타시이다. 라캉은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에 기초하여 정신분석을 이론화하면서 기의의 우월성을 강조한 소쉬르와 달리 기표의 선차성을 강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인용 시에 등장하는 화장실 사례는 라캉이 소쉬르의 주장을 반박할 때 사용한 것이다. 두 개의 문이 있다. 우리의 경험이 증명하듯이 그것들 은 형태적인 차원에서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그런데도 하나는 남성용 화장실이고 다른 하나는 여성용 화장실이다. 라캉은 위의 사례, 그러니까 동일한 모양의 문(화장실)에 차이를 발생시키는 것, 즉 한쪽 문을 다른 쪽 문과 구별시키는 것은 문에 적혀 있는 기표라고 주장하면서 의미작용은 기의의 차원이 아니라 기표와 기표의 차이에서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라캉은 이 사례에 근거하여 “기표 아래로 기의가 끊임없이 미끄러진다.”라는 유명한 주장을 남겼다. 박지영의 이번 시집에는 ‘정신분석 세미나’라는 제목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으니 이 시는 그 세미나 경험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시인은 라캉의 사례를 다른 방식으로 비틀어 ‘언어’의 권력성을 환기한다. 이 지점에서 박지영의 시는 새롭게 시작된다. 라캉의 화장실 사례에 등장하는 문에 ‘창고’라는 기표가 적혀 있었다면 어떤 일이 발생했을까? 실제로 라캉의 저사례는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어 전혀 다른 논점을 제시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가령 남성과 여성, 혹은 M과 W라는 기표 옆에 ‘목욕탕’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으면 사람들은 그것에서 화장실이 아니라 목욕탕을 떠올릴 것이라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이 사레는 기표의 의미가 또 다른 기표들, 즉 이웃하고 있는 기표와의 놀이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런 의미작용은 기표만이 아니라 특정한 물질, 가령 ‘남자’와 ‘여자’라는 기표 옆에 옷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어도 발생한다. 옷들이 전시되어 있고 그 옆에 ‘남자’라는 기표가 적혀있는 문이 있을 때, 그것을 남성 탈의실로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시인은 이 지점에서 “창고라는 말을 믿고/그 말에 갇혀버린 것이다”라는 진술을 통해 기표와 기표, 즉 언어적 질서가 아니라 ‘언어’에 지배되는 우리의 선입견에 대해 환기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언어의 지배를 받는다. 여기서 말하는 ‘지배’는 문법적인 것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 너머를 알 수 없는 문 앞에 ‘창고’라는 기표가 쓰여 있으면 우리는 그곳이 ‘창고’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언어(기표)는 때로 사태나 실체를 왜곡하는 효과를 낳기도 하는 것이다. ‘쟁반같이 둥근달’이나 ‘내 마음은 호수요’ 같은 죽은 비유들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것들은 ‘달’이나 ‘호수’를 볼 때 우리의 경험 을 특정한 방향으로 틀 짓는다는 점에서 일종의 폭력이다. 시인들이 이미‐항상 새로운 언어, 새로운 표현방식에 골몰하는 까닭은 상투화된 언어가 우리의 경험을 왜곡시키는 폭력을 행하고 있으며, 시는 ‘언어’의 층위에서 이 폭력에 맞서 날것으로서의 경험을 포착하려는 불가능한 시도이기 때문이다. 살면서 수많은 문을 드나들었지 그 많은 문과 문 사이를 드나들면서 몰랐다 문이 문이 아니라는 것을 문은 네 집인 걸 증명해 보란다 식탁 위에 먹다 남은 빵이 있고 화장대 위엔 올이 풀려 벗어던진 스타킹이 있고 읽다가 엎어놓은 시집이 있다 해도 암호를 기억해내란다 주문을 말하란다 급한 마음에 동동거리며 허둥거리다 연달아 잘못 눌러 도어록은 경고음을 울리더니 작동이 중지되었다 저 높고 단단한 벽 ― 「단단한 벽」 전문 시인의 싸움은 ‘언어’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 앞에서 우리는 일상의 시간이 우연적인 마주침의 사건들로 만들어진 패치워크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 우연적인 마주침은 사물, 대상, 세계 등에 대한 새로운 감각으로 확장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익숙한 인식으로 환원되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시는 사유의 문제와 이어진다. ‘사유’는 도구적 이성에 의한 수행되는 계산은 물론이고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습관에 의지하여 내리는 판단과는 다르다. 데카르트 이후 인류는 오랫동안 인간이 생각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당위적인 것으로 이해해왔다. 하지만 일상의 순간들을 되돌아보면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가 ‘사유’라고 불릴 만한 행위를 수행하는 시간은 매우 드물다. 요컨대 사유는 일상에서 예외적인 순간에 발생하는 사건인 것이다. 길을 걸을 때, 전화 통화를 할 때, 운전할 때,텔레비전을 시청하거나 요리를 만들 때 우리는 대개 ‘사유’하지 않는다. 그 행동들은 대개 관성과 습관의 힘에 근거하여 행해진다. 정작 우리의 ‘사유’는 이러한 일상적 패턴이 중단되었을 때, 습관이나 관성에 따라 행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상한 결과가 발생하지 않을 때 시작된다. 우리는 일상의 질서가 깨지는 순간에 비로소 ‘사유’를 시작하는 것이다. 위의 인용 시를 참고하자면, 디지털 도어록(Door Lock)의 비밀번호가 기억나지 않을 때, 비밀번호를 제대로 눌렀음에도 불구하고 문이 열리지 않을 때 ‘사유’가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경우 우리는 도어록에 물리적인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혹시 배터리가 방전되지는 않았는지, 자신이 집을 잘못 찾은 것은 아닌지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사유’는 본질적으로 익숙한 상태에서 벗어났을 때, 낯선 상황에 직면했을 때 시작된다. 철학자 들뢰즈는 우리에게 사유를 강제하는 모든 것들을 ‘기호’라고 불렀는데, 이는 사유가 ‘기호’와의 마주침에서 시작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당연히 모든 마주침이 사유를 촉발하지는 않는다. 우리 는 낯선 것과 마주하는 대부분의 순간에 익숙한 것을 개입시켜 낯선 것이 초래하는 불편함을 없애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심리적 방어기제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뚫고 무언가가 도래하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사유’는 바로 그 순간에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은 동일한 대상을 이전과 전혀 다른 관점에서 인식하도록 만든다. 이 시에서 그것은 ‘문’이 ‘벽’으로 경험되는 순간이다. 인간의 물리적 위치와 상관없이 열리지 않는 ‘문’은 거대한 ‘벽’, 아니 감금 장치가 되기도 한다. 시인은 비밀번호를 잊어버려서 ‘문’이 벽처럼 느껴지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으나, 우리가 아파트 내부에 위치하고 있을 때 화재 등이 발생하여 문이 열리지 않으면 그 순간 ‘문’은 감금 장치로 기능하게 된다. 이처럼 시는 수많은 일상적 마주침을 통해 대상이나 사물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환기함으로써 일상적 질서로부터 우리를 잠시나마 해방시킨다. 놈이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다 스위치를 켜면 그제야 관절을 펴고 구부린 등을 펴 품을 열어준다 놈이 그녀에게 길들여졌는지 그녀가 놈에게 의지하는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아주 익숙하게 의자에 엉덩이를 깊숙이 밀어 넣고 팔을 놈의 등에 밀착 해서 하나가 된다 때때로 서로 겉돌기도 하지만 그녀는 그놈 앞에서만 한 줄 한 줄 벽을 쌓을 수 있다 위에서 아래로 벽을 쌓아간다 벽은 두꺼워야 했고 벽은 높아야 했다 벽은 어두워진 창밖의 별빛을 끌어 오고 창을 두들기는 빗소리도 불러오곤 했다 그녀가 벽을 포개놓고 나서 휴우 한숨을 내쉬면 그놈도 덩달아 사지의 근육을 풀었다 그녀에게 그놈은 유일한 위안이며 벽은 그녀가 숨기에 가장 안전한 곳이다 ― 「테이블」 전문 박지영의 시에는 ‘언어’만큼이나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이 드러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시인은 “내가 쓴 글들이 나를 빤히 올려다본다/어디를 가나 개미떼처럼 줄곧 따라다닌다”(「봉쇄」)처럼 자신이 쓴 글을 의식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사람은 가도/언어는 살아 영원할 것이다”(「내 삶을 묘지 위에 세우고 싶지 않았지만」)처럼 ‘언어’에 대한 신뢰를 표현하기도 한다. 시인 말라르메는 세계를 하나의 책에 비유했는데, 시인은 ‘묘지’를 한 권의 책으로 간주한다. 시인은 청동기 시대의 묘지를 발굴하여 “생활상의 비밀”을 캐는 작업이 “언어로 흔적을 짜 맞추는 것과 다름없다”라는 점에서 ‘발굴’과 ‘독서’를 동일한 층위에 놓는다. 이 등식 안에서 “묘지는 한 권의 책”으로 전환된다. 한편, 앞에서 우리는 시인이 글쓰기, 그러니까 글이 생산되는 과정을 언어를 낚아 올리는 행위에 비유한 장면을 목격했다. 그리고 지금, 인용 시에서 시인은 글을 쓰는 행위를 ‘벽’을 쌓는 일에 비유한다. ‘테이블’이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이 시는 글쓰기가 아니라 글을 쓰는 공간에 관한 작품이다. 그렇지만 이 시에는 글을 쓰는 행위에 대한 시인의 인식, 그리고 글을 쓰는 공간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함께 드러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연에서 ‘놈’으로 표현되는 대상은 시인이 글을 쓸 때 사용하는 테이블, 특히 의자를 포함한 테이블을 가리킨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놈’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그녀’는 시인 자신으로 읽어도 좋을 듯하다. 시인의 글쓰기는 이들의 만남, ‘그녀’가 “의자에 엉덩이를 깊숙이 밀어 넣고 팔을 놈의 등에 밀착해서 하나”가 됨으로써 시작된다. 하지만 우리의 경험이 증명하듯이 이 만남이 곧장 ‘글’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그럼에도 화자인 ‘그녀’는 오직 “그놈 앞에서만 한 줄 한 줄 벽을 쌓을 수 있다”라고 진술한다. 건축학적으로 말하자면 ‘벽’은 아래에서 위로 쌓는 것이다. 반면 화자는 ‘그녀’가 “위에서 아래로 벽을 쌓아간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이‘벽’이 계열체와 통합체가 직조되어 만들어지는 언어의 ‘벽’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왜 ‘벽’이 두껍거나 높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단단한 벽」에서 ‘벽/문’은 시인에게 한계로 경험되었으나 여기에서의 ‘벽’은 “그녀가 숨기에 가장 안전한 곳”으로 경험된다. 이 ‘안전’의 의미는 버지니아 울프가 이야기한 ‘자기만의 방’을 연상시킨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적이 있다. 시인에게는 ‘그놈=테이블’이 바로 그 ‘자기만의 방’인 셈이다. 이 테이블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으면 어두운 밤하늘에 별빛이 보이고 빗방울이 떨어지기도 한다. 시인에게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의 글쓰기는 일종의 ‘위안’인 셈이다. 가운데가 둥글게 패여 있는 돌 그 속에 애꾸눈 부처가 살고 코 뭉그러진 여인이 숨어 산다 눈 비비고 다시 보면 구름 사이로 해가 저녁밥 먹으러 가고 나지막한 안골 마을에서 피어나는 연기 낮게 강물처럼 엎드려 흐른다 다시 보면 이내 같고 구름에 가려진 보름달 같기도 하다 이렇게 눈은 보고 있어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눈은 지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다 보았다고 우기는 거다 사실 내 눈도 믿을 수 없다 하여튼 돌 속에 우렁각시 하나 숨어 산다 ― 「다 보았다고 우긴다」 전문 시를 쓴다는 것은 무대 위의 조명과 마찬가지로 대상에 ‘빛’을 비추는 행위이다. 조명은 특정한 대상을 밝게 비춤으로써 결과적으로 나머지 것들을 어둠의 상태로 남겨두는 선택과 배제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시는 모든 대상에 골고루 빛을 비출 수 없으며, 태양 이외에 만물에 골고루 ‘빛’을 비추는 조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의 시선이 결코 객관적이거나 공평하지 않다는 것, 그리하여 모든 시선에는 다른 각도와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잔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 하나의 돌이 있다. 그 돌의 가운데는 둥글게 패여 있는데, 자세히 보면 “애꾸눈 부처”나 “코 뭉그러진 여인”의 형상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눈을 비비고 다시 보면 그 형상들은 사라지고 대신 “구름 사이로 해가 저녁밥 먹으러 가고/나지막한 안골 마을에서 피어나는 연기” 같은 것들이 보인다. 그리고 또 한 번 눈을 비비고 쳐다보면 이번에는 돌은 “이내 같고/구름에 가려진 보름달” 같이도 보인다. 이 경험에서 화자가 돌에서 둥글게 패여 있는 부분에서 목격하는 장면들은 객관적인 형상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이 투사되어 만들어진 상상계의 풍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사태를 가리켜 시인은 “눈은 보고 있어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라고 쓰고 있다. 그런데 사실 눈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시선에도 맹점이 존재해서 우리는 눈을 뜨고서도 미처 보지 못하는 것들이 수없이 많다. 이는 인간의 감각기관이 ‘관심’의 유무에 따라 기능하기 때문이다. 감각기관의 불완전함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시인은 “하여튼 돌 속에 우렁각시 하나 숨어 산다”라는 단정적인 진술로 끝을 맺고 있다. 여기에서 ‘하여튼’은 모든 반대 주장을 물리치는 맹목적인 믿음을 드러내는 장치이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때로 과학적 진리나 객관적인 사실보다 맹목이나 믿음이 더 중요한 순간들이 존재한다. 실존적인 사랑이 그러하고, 종교, 우정 등의 관계가 그러하다. 이것들은 믿음의 산물이지 과학의 산물은 아니다. 따라서 이 시를 시선에 대한 성찰적 자세를 표현한 것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현상학적인 차원에서는 객관성의 층위를 넘어서는 순간 비로소 인간이 대상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물론 ‘다 보았다고 우긴다’라는 제목은 주관보다는 성찰에 가깝게 느껴지지만 시적 인식이 대상‐사물이 우리에게 개시(開示)하는 새로운 차원임을 고려하면 대상‐사물에 대한 새로운 각도, 즉 제대로 보지 않는 것이야말로 시의 진정한 출발선이라고 말할수도 있다.
덧글 0 개
덧글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