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2    업데이트: 25-06-17 09:03

언론&평론

[대구일보]문향만리) 자루들 / 박지영
관리자 | 조회 25
김동원 시인·평론가

검은 자루 속에 몸을 담고/ 결혼식에 갔다가 장례식에도 갔다/ 시작하는 생과 끝나는 생이/ 코다리처럼 한 줄에 엮여 있는 날// 자루는 생을 꿰뚫고 다니느라 고단했는지/ 늘어지고 구겨져 못에 걸려 있다/ 자루 벗고 허드레자루 쓱 꿰고 앉아/ 구정물에 손 담그고 있는데/ 몸이 나를 끌고 가는 줄 알았더니 아니다/ 자루가 나를 걸치고 가는 나날이다// 빨간 자루는 얼굴 붉히던/ 노란 자루는 까르르 웃던/ 검은 자루는 몰래 눈물 찍어내던/ 각각의 자루만이 알고 있는 기억이 있다/ 먼 길 떠날 때 하나도 가져 갈 수 없는/ 수북하게 쌓인 저 허물들/ 옷장은 기억들로 부스럭거린다



『검은 맛』(2012, 만인사)박지영 시집 


그녀의 근원에 대한 애상은 고요를 통해 비애의 컴컴한 소리에 닿는다. 이런 시 세계는 자신 안에 웅크린 슬픈 짐승을 통해 드러나기도 하고, 둥근 무덤이 꽃처럼 피어나는 곡비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박지영(1956~, 경북 의성 출생)의 「자루들」은, 무의식에 감춰진 세계에 대한 응시이다. 시의 표층은 옷을 ‘자루’로 비유한 것이지만, 심층은 삶과 죽음에 대한 사유와 성찰이 번뜩인다. 「자루들」은 대구예술제 ‘문학, 공연과 만나다’란 무대에 퍼포먼스로 올려져 큰 주목을 받았다. 퍼포먼스란? 현장에서 행위예술가에 의해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몸의 예술이다. 연극이 무대 공연을 전제로 한다면, 퍼포먼스는 극의 틀을 파격한 무작위적 행위이다. 모든 행위 예술이 그렇듯, 퍼포먼스 또한 타인과의 소통을 몸짓의 기호로 표현한다. 박지영의 「자

루들」은 행위예술가 이유선에 의해, 시가 몸짓을 통해 어떻게 재해석 될 수 있는지 보여준 파격적 무대였다. 팽팽히 당겨진 검은색 천은 생과 죽음 사이에 놓인 인연을 형상화하였다. 무대 위의 허공에 ‘빨간 색종이’ ‘노란 색종이’ ‘검은 색종이’가 마구 뿌려진 것은, 옷이야말로 인간을 표상하는 허상의 ‘자루들’이며, 끝내 자루인 몸을 벗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자루는 생을 꿰뚫고 다니느라 고단했는지/늘어지고 구겨져 못에 걸려 있다”. 왠지 이 표현이 현대인의 고달픈 삶의 한 단면을 오려낸 듯하여 찡하다. 저마다의 삶의 고달픔을 구겨진 자루로 환유한 점은, 시인이 얼마나 인간을 연민의 눈길로 바라보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옷이야말로 현대인을 규정하는 상징체계다. 인간 삶의 궤적을 가장 함축하는 외면의 표지이기도 하다. 박지영은 ‘장례식-죽음-시체-자루’라는 시적 연상을 통해 시상의 외연을 확장한다. 옷장에 걸린 수많은 옷들은 결국 날마다 ‘입었다, 벗었다’ 하는 행위 예술이다. 하여, 인간은 이승의 아름답고, 서럽고, 슬픈 풍경들을 ‘허무’라는 무의식의 통로를 통해, 결국 ‘몸’을 벗는 죽음의 퍼포먼스를 한다.

김동원 시인·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