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0    업데이트: 25-04-21 09:22

언론&평론

대구신문- [좋은 시를 찾아서] 사랑
관리자 | 조회 26


박지영

세면대 밑이 젖어 있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모르겠다

밸브는 옥죄었을 거고 안간힘을 쓰고

삐져나오려는 수압을 감당하지 못해

밸브는 그만 자신을 놓아버렸다

똑똑 한 방울씩 떨어지며

흘러가는 것이 본성이라고

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바닥에 물길을 내고 있다

◇박지영= 1957년 경북 의성 출생. ‘심상’등단. 시집 ‘서랍 속의 여자’ ‘귀갑문 유리컵’ ‘검은 맛’ ‘사적인 너무나 사적인 순간들’ ‘간절함은 늙지 않는다’ 평론집 ‘욕망의 꼬리는 길다’/산문집 ‘꿈이 보내온 편지’/‘대구문학상’ ‘금복문화상’수상.

<해설> 시인이, 생각에 첫 발짝을 내려놓게 하는 사건의 발단은 세면대 밑이 젖어 있다는 것이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모르겠다는” 세면대의 생각인지 물의 생각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건 시인의 독백이니까? 자신 그리고 또 다른 무엇의 생각일 수도 있다. 단지 2연에서의 관계는 밸브를 물고 있는 관과 관 속을 관통하는 물(수압)이다. 여기에서 수압 때문에 자신을 놓아버린 밸브는 밸브일까? 아닐까? 다시 첫 연으로 돌아가 보면 세면대 밑이 젖은 것도 흘러가려는 본성 때문이다. 비록 처음엔 똑똑 떨자지지만, 사랑이라는 것도, 한 방울씩 새기 시작하지만 결국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바닥에 물길을 내고 마는 것 아니던가.

-박윤배(시인)-

출처 : 대구신문(https://www.idaeg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