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5    업데이트: 25-04-10 13:55

칼럼

[여성칼럼] 책과의 씨름
관리자 | 조회 17
이사하면서 책 정리
서재를 갖고 싶은 꿈
이루어졌지만 책이 짐
책은 바라보고 불러내야
책으로서의 본분 다해



열흘 전에 이사를 했다. 이사를 할 때면 이것저것 챙길 것도 많고 신경 써야 할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글쟁이에게 가장 큰 문제는 책이다. 나날이 늘어만 가는 책이 가장 큰 이삿짐이다. 이삿짐센터 아저씨도 이사비용 견적을 내려고 방문해서 “아! 책밖에 없네요. 책은 무거운데요” 하며 반기지 않았다.

나는 학창시절 작은 꿈이 있었다. 사방이 책으로 꾸며진 서재를 갖고 싶었다. 그 소원은 쉬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내가 글을 쓰면서 골방 하나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골방에 책이 넘쳐나니 점점 큰 방을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책꽂이에 들여놓지 못한 책들은 바닥에 두기 마련이다. 얼마 안 가 방바닥 여기저기 책이 쌓여간다. 집안 식구들의 따가운 눈총을 견뎌야 한다. 남편은 “어이구, 이 방은 쓰레기통이네” 한다. 그렇게 사방이 책으로 꾸며진 방을 원했건만 쌓아놓은 책들이 발에 채이고 쏟아져 발등을 찧기도 한다.

평소에 책 정리 하려고 책을 들고 앉으면 이 책도 저 책도 버릴 수 없어 도로 책을 주섬주섬 쌓아 놓는다. 요즈음은 도서관에서도 기증도서를 잘 받지 않는다. 그래서 퇴직하는 교수님들도 책이 문제라고 한다. 하루에도 수없이 출판되어 쏟아지는 책 때문에 대학교 도서관들도 책을 보관할 서고가 부족해 10년이 넘는 책들은 학생들에게 무료로 나누어주기도 하고, 가져가지 않은 책들은 폐기처분한다고 한다.

한 권 한 권 사들인 책들을 쓰레기 분리수거장에 가서 버리려고 하면 손이 오그라들고 만다. 버리러 갔다가 어떨 때는 남이 버린 책까지 주워 가지고 올 때도 있다. 그러나 책을 내다 버리려고 하면 내 책도 누군가가 이렇게 버리겠구나 싶어서 함부로 버릴 수 없다. 그래서 끌어안고 참을 만큼 참고 버티다가 이번에 이사를 빌미로 과감하게 정리를 했다.

아파트에 책을 둘 곳이 만만치 않아서다. 포개 놓기도 하고 책꽂이에 책을 이중으로 꽃아 놓기도 하지만 턱없이 부족하다. 이제 책을 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신간 서적이 나오면 책을 주문한다. 책을 보관하는 것에도 변화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책을 읽고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보관해야겠다. 또 책을 읽고 다른 이에게 주어 돌려 보는 것이다. 책도 순환하고 재생해야 한다.

일본의 오카자키 다케시라는 장서가가 ‘장서의 괴로움’이란 책을 냈다. 장서를 관리하는 방법, 장서가의 즐거움과 남모르는 고충을 써내려갔다. 고사성어에 한우충동(汗牛充棟)이란 말이 있다. 책을 가득 실은 수레를 끄는 소가 땀을 흘리고, 집의 대들보까지 책으로 가득한 것을 이른 말이다. 풀어보면 책이 많아 쌓아두지만 쓸모없는 책이 많다는 의미다. 내 서재에 꽂혀있는 많은 책 중에 쓸모 있는 책은 몇 권이나 될까. 먼지가 쌓이고 색이 바래 누런 책을 펼치면 책벌레가 꼬물거리고 기어 다니는 걸 볼 때도 있다. 인쇄물에서 나오는 약품 냄새가 호흡기를 자극해 잔기침이 날 때도 있다. 미래의 에너지이고 영원한 꿈인 책이 이렇게 골칫거리가 될 줄은 몰랐다. 그래도 나는 책이 좋다. 책 속에 파묻혀 살고 싶다.

깊어가는 가을, 은행잎이 뚝뚝 떨어지는데 시린 가슴을 안고 만날 친구가 별로 없다. 비 오는 날 질척거리는 마음을 달래줄 친구도 별로 없다. 허전한 마음에 책을 펴 들고 있으면 마음에 온기가 차오른다. 책은 나를 다스리는 최선의 효과를 가져다준다. 집안의 책은 내가 바라보고 불러내 주어야 책으로서의 본분을 다한다. 책꽂이에 꽃아 두고 바라보지 않으면 먼지 덮어쓰고 놓여 있는 사물일 뿐이다. 독서삼여(讀書三餘)란 책 읽기 좋은 때를 이르는데 겨울에, 밤에, 그리고 비 오는 날이다.
박지영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