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여행에서 사막을
보면서 많은 생각 들어
척박한 곳에서 살아가는
생명을 보면서 인간의
나약함과 자연의 순리 느껴
얼마 전에 미국여행을 했다. 우리나라는 미세먼지와 황사로 인해 맑고 투명한 하늘 고유의 빛깔을 연중 내내 제대로 보기 어렵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파란 하늘을 보고 놀랐다. 쪽빛 하늘은 우리나라 고유의 색인 줄 알고 있었는데, 그곳 하늘빛은 하늘빛 그대로였다.
여행을 하다보면 ‘여기 다시 올 수 있을까? 다시 볼 수 있을까?’하는 생각보다 내가 보았던 풍경이나 걸었던 길을 ‘언제까지 기억할 수 있을까?’하는 염려 아닌 걱정이 종종 든다. 그래서인지 발길 닿는 곳이 아주 소중하게 여겨진다. 사진작가가 풍경을 사진으로 기록하듯이 나는 눈에 담아보려고 애쓴다. 그러나 보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논리를 말하지 않더라도 사물의 길이나 넓이, 깊이를 눈으로 정확히 측량하지 못하고 마음의 잣대로 ‘크다. 넓다. 깊다’하니 말이다.
미국 유타주 모하브사막은 가도 가도 구릉과 협곡과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있다. 이십억 년 전에 붉은 사암 퇴적층으로 형성된 지층이다. 사막하면 모래만 버석거리는 모래땅을 생각했는데 비가 오지 않아 메말라 건조한 땅, 식물이 자랄 수 없는 땅, 인간이 살아갈 수 없는 불모지가 모두 사막이다. 광활하고 황폐한 땅에 납작 엎드린 키 낮은 풀과 볼품없는 조슈아나무가 게딱지처럼 땅에 붙어 있었다. 너무나 거대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아득하기만 한 붉은 땅, 척박하고 척박해서 생명체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버려진 땅에 수천의 돌무더기가 인간 군상처럼 늘어서 있었다.
자연의 풍화작용으로 빚어진 수많은 돌들이 하나하나가 조각품 같다. 사막 한가운데서 이러한 풍경을 만나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풍화작용에 의한 것이라 여기기에는 예사롭지 않다.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홍수에 떠밀려가다가 돌로 굳어버린 것 아닌가 착각할 정도다. “나를 따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 듯, 돌이 된 사람들이 일제히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대자연 앞에서, 수 만년에 걸쳐 자연의 풍화작용이 만들어낸 돌덩이 앞에서 숙연해지고 겸허해진다. 누가 이곳에서 이 군상들을 만들 수 있겠는가. 붉은 돌의 군상뿐 아니라 도처에서 신의 손길이 느껴졌다.
또한 사막 한가운데 있는 앤텔로프 동굴에서는 바람과 물이 빚어낸 자연의 신비를 보았다. 동굴을 비추는 태양빛이 붉은 사암층에 반사되면서 신비한 빛의 조화를 이루어냈다. 그 빛들은 수만년 갇혀 있던 영혼을 깨워내는 마력 같았다. 사진 속의 형상을 보고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육안으로는 안 보이던 것이 사진 속에서 기괴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사진 속의 형상은 이십억 년 전의 영혼이 건네는 무언의 말인 듯했다.
이 광활한 사막에서 나는 사막 여우나 도마뱀보다 못한 것 같았다. 척박한 이곳에서 저것들은 살아갈 수 있지만 나는 여기서 몇 시간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손길이라고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자연 그대로의 광야를 보며 마모되었던 영혼에 태엽을 감는 것 같았다. 복잡한 일상을 멀리서 두고 바라보니 단순해져 보인다. 거대한 땅덩이 앞에서 난 동방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을 떠올려 본다. 여행을 하다보면 저절로 애국자가 된다.
한편 ‘저 풍경들을 얼마나 내 눈에 담아 둘 수 있을까. 얼마나 기억할 수 있을까’를 걱정했는데, 그런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생각인가를 알았다. 태초에 이 땅이 만들어졌을 때 이십억 년 후를 생각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여행은 아주 단순한 진리를 깨닫기 위해 멀리 갔다 오고,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순리를 느껴 보는 시간이다.
박지영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