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5    업데이트: 25-04-10 13:55

칼럼

[여성칼럼] 이름을 불러주세요
관리자 | 조회 20
이름 모를 새나 꽃은 없어
김춘수 시인의 시처럼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에게로 와 꽃이 되는 것
이것은 사랑, 관심의 표현



얼마 전 제주도에 다녀왔습니다. 제주도에 사는 친구가 주택으로 이사했다며 친구들을 불러 모았거든요. 마당이 넓은 집은 온통 초록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담장 밖 멀구슬나무 꽃이 바람에 실려 오니 집안 곳곳 꽃향기가 감돌았습니다.

다음날 친구는 우리를 ‘거문오름’으로 데려갔어요. 원래 ‘검은오름’인데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하면서 소리 나는 대로 썼다고 하네요. 거문오름은 다른 곳과 달리 상산나무가 많아 숲의 냄새가 달랐지요. 저는 숲길을 가면 나무나 꽃의 이름을 불러줍니다. 그날도 “산수국, 산나리, 산딸기” 하면서요. 그러면 일행이 어떻게 식물이름을 잘 아냐고 묻지요. “얘들도 이름 불러주면 좋아해요”하며 웃지요.

사실 시를 습작할 때였습니다. “이름 모를 들꽃이 바람에 흔들렸다”거나 “이름 모를 새가”라고 썼지요. 누군가 “세상에 이름 없는 것들이 어디 있어요. 이름을 불러 주면 좋지 않겠어요”하는 말에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몰라요. 시의 묘미는 절제된 언어 표현과 리듬감으로 이미지를 살려내는 것이지만, 짧은 글에서는 사물의 이름 하나만으로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거든요. 그게 꽃이라면 어느 계절인지, 모양이나 색깔을 통해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유추해 낼 수 있어요. 이름 하나가 의미를 확장해 나가기도 하고 중요한 상징이 되기도 하니까요. 글은 무엇보다 정확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또한 시에서는 사실 어떠한 시적 오류도 허용하지 않아요. 많은 사람이 즐겨 부르는 가요 중에‘찔레꽃’이 있지요. “찔레꽃 붉게 피는 내 고향~”에서 찔레꽃은 붉은 색이 아니라 흰색이라는 거 아시죠. 이런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고 저는 도감도 펼쳐보고 사전도 찾아보곤 해요. 그러다 보니 자연히 들풀이나 나무 이름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요. 은사시나무, 뽕나무 하고 이름을 불러주면 가는 길이 지루하지 않거든요.

저는 나무 중에서 목백합과 메타세쿼이아를 좋아해요. 이 나무들은 키가 훌쩍 커서 건물 7~8층 높이로 자라고 전체적인 형태는 삼각형의 모습을 하고 있어요. 목백합은 이맘때 엷은 노란 꽃을 피우는데 꼭 천개의 손이 천개의 촛불을 켜 들고 있는 것 같아요. 목백합은 일명 튤립나무라고도 한답니다. 꽃이 튤립 같아 붙인 이름이지요. 백합나무는 수억 년 동안 빙하기를 거쳐서 살아남은 세 종류의 나무 중에 하나랍니다. 메타세쿼이아, 은행나무, 백합나무가 바로 그 나무들이지요.

들풀이나 나무의 이름을 불러줄 때, 그것들은 내게로 조용히 다가옵니다. 그냥 스치고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들이 그 이름으로 하여 추억의 장소까지 세세하게 떠오르게 하지요. 이렇게 쓰고 보니 김춘수 시인의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라는 ‘꽃’이라는 시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내 입이 당신을 부르면/그 벽은 허물어지리라/아무 소리도 없이”라고 노래한 구절이 연상되는군요. 또한 릴케는 “이름은 빛처럼 강하게 이마에 새겨져 있다”고 했습니다.

어느 교장 선생님은 전교생의 이름을 다 외웠다고 합니다. 학생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는 것은 한 존재로 존중한다는 의미이고, 관심의 표현이며, 좋은 관계의 시작이 되지요. 무릇 이름이란 이와 같이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아프리카에서 영장류를 연구하는 어느 박사는 연구대상인 영장류에게 이름을 하나씩 붙여주었다고 합니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바로 관심과 사랑의 표현 아닐까요?
박지영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