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나는 오랫동안 징의 재울음 같은 한국적인 정서의 한이 녹아들어 진한 감동을 주거나 아니면 풍자와 해학으로 재미라도 있어야 한다는 고집을 버릴 수 없다. 그러려면 내 안에 숨어있는, 아니면 가까이 있는 진정한 징의 고수와 징채를 찾아 모셔야 한다. 늘 감사한 마음가짐으로 신중히 그 깻단들을 털고 있다. 8시집 『가설무대 커튼콜』에서 나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구름이 하늘에 멋들어지게 꽃 피우듯 한 순간 바람의 깃털에 찔려 숲 속으로 쿵, 넘어지는 설해목 여린 등걸을 쓰담, 쓰담 어루만져 주는> 손이 되고 싶었다. 102
신생의 시간
1
내 시의 고향은 경북 경산군 자인면 계남동 까막새 외딴 과수원집이다. 1남 4녀 중 셋째 딸인 나는 아버지의 사랑 듬뿍 받으며 어린 시절 보냈다. 아버진 머리맡에 사냥총 세워놓고 밤을 지켰으며, 큰 개를 앞세워 아침산보 겸 사냥을 나서기도 하셨다. 어린 난 아버지 따라 들길 돌아다녔던 시간들이 내겐 새벽이슬 함초롬히 머금은 들꽃과 얘기 나누는 신생의 시간이었다. 사과나무들 살구나무들과 많은 얘길 나누며 사유라는 꿈의 비눗방울을 마구 불어댔다고 할까?
탱자 울타리 따라 찔레꽃 향기 피어나던 과수원집 앞 갱분, 키 큰 귀리들 서걱대면서 포플러 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노래와 화음을 맞추고 홍수 지나간 뒤 여름날에는 노을이 물드는 저녁 답이면 피리낚시와 헤엄치기, 여름밤에는 솜뭉치에 휘발유 묻혀 불치기하여 잡은 물고기로 매운탕 끓여 먹었던 시절, 코스모스가 냇물 따라 흐드러지고 그 추억의 보석함이 제 1부 [까막새 연정]의 동백, 목화솜, 까막새 연정 등의 시편을 낳았다.
2
아버진 여자는 예뻐야 한다면서 어린 딸들에게 루즈를 발라주고 고대기 화롯불에 데워 머리카락을 곱슬곱슬 말아주시기도 하셨다. 어려운 시대 아들만 대학교육 시키기도 힘든 때였지만 아버지는 네 딸을 모두 대학시켰으니 생각할수록 감사한 마음뿐이다. 대학 3학년 겨울, 아버지와 처음 서울 고모님 댁에 가는 날 눈이 펑펑 쏟아졌었다.
그 때 아버진 여자는 착하기도 해야 하지만 고종사촌 언니처럼 대차고 씩식한 면도 있어야 한다고 은근히 일러 주셨다. 딸이 바보스러워 속도 많이 상하셨던 것이다. 그 말씀이 평생 잊혀 지지 않는다. 내가 국문학과를 다니기 전부터 특히 장덕조 같은 소설가가 되라시며 집안일을 시키지 않으셨다. 능소화 폭포, 흰나비 시간 풀무질, 등 시편들을 보면 시가 스토리텔링 이라며 시를 소설처럼 쓰고 싶었다. 그래서 그런지 시집들이 대체로 연작시이기도 하다.
겉절이 같은 내 풋사랑
하얀 백합으로 피어나나 싶더니
아버지, 한 마리 용으로 날아올라
화르르, 화르르르 불 내뿜던
첫사랑 무너져 내리던
그 날 화들짝 피어난 저 불꽃 뒤
내 눈물폭포 숨어 흐느끼는 소리 소리들
김광석 거리 높은 벽 위에서
흘러내리고 있네
-능소화 폭포 전문
세월이 후딱 지나서 나는 소설가 대신 시인이 되었다. 나에게 아버지는 절대 권력자로 전지전능한 분으로 믿었는데 만년에 편찮으실 때는 아버지를 나 자신이 살려야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타계하신지 어언 이 십여 년이 지났지만 살다가 힘들 때 마다 나를 지탱해주는 분이 부모님이란 사실 새삼 깨닫는다.
3
드디어 밥을 자신다! 하루 한 끼 생식만 드시던 그가 1997년
외환위기 시작될 때 쯤 세상낌새 이상하다며 잘하던 사업
미리 접어버렸다. 주민등록증과 도장까지 내게 맡기고 십년 째 누워 막걸리 소주만 고집하던 그가, 어느 날 거울 속에서 실험실의 모형처럼 뼈만 덜컥거리는 맨몸에 스스로 놀라 거짓말처럼 밥맛에 길을 들였다.
공황장애로 가족들의 애간장 그리 태울 때 나는
내 길 찾는다며 등단을 하고 , 첫시집 ‘ 신처용가’를 펴내었다. 그리하여 처용아내란 전매특허 닉네임을 얻었다. 또한 ‘봄날은 간다 1’(신처용가) ‘봄날은 간다 2’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극 극본 연출 연기를 했다. ‘신처용가’ 첫 시집으로 시극으로 나의 길 택한 한 수가 통했던가! 그는 드디어 목숨 줄인 밥을 자시기 시작했다.
안동김씨의 맏이 김 배달 씨, 그는 자신이 처용이라며 손수 밥 맛있게 지었다.
쌀 뽀드득 야무지게 씻으며 서울 행사에 간 내게 몇 시에 오느냐 밥 먹고
오느냐 확인 전화부터 한다. 대구 계산 성당 쪽 출신인 김남조 선생님이 저녁 시간이 되면 처용씨가 전화 할 때 되었다며 서울역까지 태워주기도 하셨다. ‘처용씨 한테 뮈라 얘기하고 왔느냐 조곤조곤 물으시면 나는 ‘메뚜기도 한 철이라’ 하고 왔다고. 반농조로 답하곤 하였다. 졸시 처용아내, 해갈에서는 처용아내보다 처용의 여자가 되고 싶다고 넋두리하기도 했다. 누워서 십년 보낸 그가 느지막이 설거지 까지 뽀드득 잘하며, 선후배 모임에서 밤새 화투까지 그리, 또 한 십년 잘 보내고 2021년 자기 생일인 초파일 새벽 칠십 칠년의 가설무대를 떠나갔다. 덤으로 받은 시간 잘 마무리하고 물 삼키는 것, 목소리까지 다 반납하고 갔으니...졸시 ‘2021 초파일’, ‘화투치는 밤’, ‘가설무대’ 연작시에서 갑자기 떠나버린 그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을 만날 수 있다. 그립다거나 슬프다는 말 전혀 없이 표현을 하고 있다.
4
난 오랫동안 시를 기둥서방으로 삼았다.
암 세포와도 잘 싸웠으니 유월의 나무들이 저마다 짙푸른 빛 날개를
펴고, 바람이 상상력 속 헤집고 다니며 입김을 불어넣느라 제 옷깃이
연둣빛으로 흠뻑 물들어 곧 날아오를 것 같았다. 두근거리는 가슴
달래어 ‘가을허공’은 빈 공간이나 공허가 아니라 엄마의 기도처라며 승무와 처용무를 그리기 시작한다. 나의 샤머니즘이기도 한 바람의 징채에 흠씬 두드려 맞으며, 스스로 징을 치면서 무당보살처럼 풋울음 아닌 재울음 찾고 있었다. 입 발린 소리로 ‘재울음 기다리며’ ‘별똥별에 관한 보고서’, ‘맹신도’, ‘뒷모습’등[가설무대] 연작시를 쓰며 기적은 그냥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걸 견딘 시간들이 또 신생의 기적인 것을 깨달았다.
5
점점 모든 사물들이 날 세운 가시로 바람의 간이 짠지 싱거운지 빗물의 체온도 재어 맛보고 햇살의 심장 뜨거운 부분을 찔러 깊은 통증에 나른하게 젖어도 본다. 투정도 하며 붉은 꽃송이 피워 색으로 향기로 품었다 뱉었다가 색정증 굴레 벗어나지 못하는 시인은 미, 투의 달인이 되어야만 하는 숙명인가? 내 가슴에 떨어진 별똥별, 십년이 지나니 그 사실도 아름다운 추억이 된다. 내 가설무대에서 물러나란 뜻인 줄 알고 받아들이려 했지만 분명 커튼콜이 있었는지 아직 살아 시를 쓰고 있다. 이제 주어진 가설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빙하 혹은 커튼콜’에서 기후환경 잔소리도 좀하고 고마운 분들에게 미리 인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말씀으로 눈빛으로 괴롭힌 이도 많았지만 응원해준 분들이 더 많았다. 양면의 그런 분들 덕분에 세상 참 화려하게 살았던 것 같다. 그것은 이를 갈 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시 공부하는 제자들에게 자주 하는 말 ‘이를 갈아라’ ‘사유의 삽질 더 깊이 하라’닥달한다. 그것이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징에 대한 시편들이 많은 것은 나의 샤머니즘에 대한 경험이 바탕이 되어 있기도 하다. 어느 날 가슴에 떨어진 그 별똥별 때문에 살려고 발버둥 치며 쓴 시와 처용무 그림은 호작질이기도 하지만 요양병원에서나 집에서나 나의 처절한 기도문이기도 하다.
6
‘한여름 밤의 광시곡’이란 졸시는 라흐마니노프 작곡을 아야의 피아노 연주 들으며 그 연주 처음부터 끝까지 난 손가락으로 폰 자판기 두드리며 미친 듯 헛소리 마구 뱉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난 ‘카루소’를 좋아한다. 파바로티의 카루소엔 사랑하다 죽어버리고 싶은 늙은 소년열망이 피를 토한다. 어린 소녀와의 사랑이 마약이라지만 아무리 몸부림쳐도 사라사테가 바이올린 선율에 그린 집시의 달을 따라갈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정 바다의 파도 다 끌어안으려는 낡은 소녀의 터질 듯 가슴 고동을 이길 수 없지 않겠는가! 큰 소리로 뻗대 보지만 카루소가 부럽다. 사실은 그런 사랑보다 감동이 있는 시 한 편 쓰고 싶어 이렇게 진정한 깨달음과 발견의 순간 기다리며 시에 미치고 있는 것이다 .남은 가설무대에서 일류 연기자가 되어 기립박수를 받아야하는데 한 번 더 커튼콜을 받아야하는데..., 무엇보다 원시의 파도 소리에 잠들 수 있는 외계인들의 동굴호텔부터 가야겠다. 어찌되었건 가설무대에서 내려가려는 찰나 커튼콜 박수 받았다는 것은 실로 기적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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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할머니부터 4대가 한 집에서 거의 11식구가 사는 적산가옥 백서른 평 맏며느리는 핑계이기도 하겠지만 어쨌거나 그런 틈에서 나의 버팀목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주지 못해 늘 미안한 민아, 정현, 승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자라준 1녀 2남의 부부와 손녀 손자들 같이 있어도 그립기만 하다. 특히 곁에서 건강을 챙겨주는 맏며느리에 감사하고 딸 덕분에 올 여름에도 가족이 속초에서 같이 파도소리 즐길 수 있어 너무 든든하고 고맙다. 사랑한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엄마의 마음과 눈은 항상 너희들 쪽으로 머물고 있다는 사실 잊지 말아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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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가설무대 커튼콜]을 준비하며 나 자신의 진정한 모습 보여주고 싶었다.서구적인 묘사도 중요하지만 징의 재울음 같은 한국적인 정서의 한이 녹아들어 진한 감동을 주거나 아니면 풍자 해학으로 재미라도 있어야 한다는 고집 버릴 수 없다. 그러려면 내 안에 숨어있는 아니면 가까이 있는 진정한 징의 고수와 징채를 찾아 모셔야 한다. 늘 감사한 마음가짐으로 신중히 깻단들을 털고 있다.
<구름이 하늘에 멋들어지게 꽃 피우듯 한 순간 바람의 깃털에 찔려 숲 속으로 쿵, 넘어지는 설해목 여린 등걸을 쓰담, 쓰담 어루만져 주는> 손이 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