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니 등단 25년이 다 되었는데 ‘난 아직 신인이다’ 최면을 걸어 앞만 보고 달렸다. 시가 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대구문학 아카데미 시창작반에서, 도서관으로, 인터넷으로 전국적으로 시 강의를 한 것이 아득히 꿈만 같다. 덕분에 벽 속에 갇혀 단절되었던 내 삶의 폭이 넓어져 허영만의 만화 ‘식객’ 속에 ‘숯’이란 시가, 김재홍의 ‘시어사전’에 많은 사투리 시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지금도 정 숙 문학반, 본리도서관 ‘좋은 시 읽기와 쓰기’ 반의 회원들과 추억을 쌓고 있으니, 분명 시는 썩은 밧줄이 아니었다. 내게 숨을 쉴 수 있는 공간과 날개를 달아주었다.
사십대에 등단한 늦깎이라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종종해본다. 그래서 현대시 공부를 더 열심히 할 수 있었다. 한 때는 상징이나 기발한 묘사에 붙들려서 그게 시의 본 모습이라고 굳게 믿었지만 그 그림자 속엔 삶을 통한 깊은 통찰력으로 형이상적인 깨달음과 발견이, 시 전체를 아우르는 진정성이 감동을 준다. 물론 이 뒤엔 또 다른 얼굴이 숨어 있을 것이기에 앞으로 사물과 사유 그리고 상상력에 더욱 더 깊이 삽질을 해 볼 작정이다. 이 전의 시집 신처용가, 바람다비제, 유배시편 등은 시집 전체가 한 가지 주제를 다룬 연작시였다면 ‘청매화 그림자에 갇히다’ 시집은 색다른 시각의 사유와 내 삶의 여러 모습들을 다양하게 담아 보았다.
몇 년 전 팝핀 현준이 작은 의자를 들고 춤추는 것을 보며 ‘저것이 바로 인생이다!’ 며 눈물을 흘린 그 때부터 쓴 시들이 모여 청매화 그림자에 밟히다‘ 제 7 시집이 이루어졌다. 특히 지난겨울부터 봄까지 중환자 보호자실에서 겨울 감나무 가지 끝을 잡고 있는 홍시의 벼랑을 맛보았기에 시집살이와 다른 아픔들은 오히려 좋은 추억으로 여겨지기도 했었다.
또한 백 한 살의 친정어머님이 끝까지 맑은 정신으로 한 마리 새가 되어 날아가시는 모습 바라보며 다른 고통 없이 떠나가시는 죽음이 슬프지만 고맙고 어머니의 떠나시는 길 외롭지 않게 해드린 시인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그러니 내 시가 무거울 수밖에 없다. 가만히 있으면 가슴이 아프고 불안해 그림이 아닌 호작질을 시작했다. 그런 시공간 속에서 먹물과 붓질이 서로 스며드는 법을 배우기도 하면서
감사드립니다. 김선굉 회장님과 심사위원 여러분의 판단이 흐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드리도록 선명한 주제로 소통과 감동이 있는 시 한편을 찾아 더욱 더 노력하겠습니다. 대구시인 협회 상 수상 소식이 기쁘기도 하지만 저 자신을 위해 기도하면 욕심이라 며 누군가 해코지 할 것 같아 두려웠습니다. 많은 시인 분들이 추천서까지 써주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은 시인 여러분의 따스한 마음 씀씀이 눈물겹도록 고맙고 상 받지 않아도 해가 떠오르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청매화 그림자에 밟힌 피투성이 처용아내 다시 일어나 춤을 춥니다. 덩, 덩, 어얼쑤! ‘봄밤이라예!’ ‘봄밤이라예!’ 시든, 그림이든 오늘밤 또 호작질을 해야겠습니다. 그들이 피가 흐르고 살아 펄떡거려 가족과 주위 분들에게 에너지를 전달해주길 기원합니다.
폭설
하늘이 사라졌다
당장 길이 보이지 않는다
숨이 턱, 목구멍에 걸린다
달달한 그리움과 며칠 갇히고 싶다던 시는
참담한 사치
참사랑은 십자가에서 예수의 수치스런 부분
가리느라 바들바들 떨고 있는
남루, 성의聖衣라고
활짝 연꽃이 대낮에 관능경을 펼치는 환희불이다
갓 피어난 연이 누군가의 우렁각시 되고 싶어 한다
나불거린 여러 필설들 머리 조아린다
섬망譫妄에 갇힌 환자의 헛소리와 절규
저 핏빛 하늘, 뇌를 열어놓은 채
설벽에 갇힌 중환자의 보호자들
말문의 샛길 찾지 못해
경계선 바깥에서 꽁, 꽁 얼어가고 있다
밀서密書와 검은 비닐 봉다리
1.
어느 거대한 산이 비밀글을 보냈다
정수기, 그 여자 시인
이슬 같은 여자, 푼수 같은 여자
애교 많은 여자, 가슴 큰 여자, 못 말리는 여자,
솔직하면서 인색하지 않은 여자
눈물 같은 여자, 그러나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늘 행복해 하는 여자
쪼다 같은 여자 그래서 귀여운 여자
지상에서 가장 죄 없는 여자 일까[?]
내 눈치가 캄캄 비닐봉지 속에 들어있어서, 건드리면 악! 소란스레 터질 것 같아서, 만나보면 별 소득에 눈곱만 낀다는 뜻일까?
2.
샛바람소리의 벽이 얼마나 높았으면
어느 시인이 잔머리 묶어 놓지 말고
소주 몇 병 넣어 살짜기 밤에 찾아가라잉?
그렇게 상간녀上姦女가 되어야 잔칫상 받지!
그러고 보니 그 여자 시인 눈치코치 밥상도 받고 어느 행사장에서 꺼이꺼이 울기도 하더니, 이름이 잘 자라고 있는 남자 시인의 방 검은 봉다리 속 소주병에 드러눕는 것을 개 같이 질질 끌고 나오기도 했는데
3.
쪼다 같은 여자, 난 형체 없는 밀서 한 장 달랑 들고 시든 모란송이처럼 부시리 웃고만 있으니 화려한 한 상은 늘 물 건너가고 있고
애인 있어요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상이요
선물인 그
천사들이 털갈이 하는 겨울
깃털들이 얼어 하얗게 나부끼며 내려올 때
단풍잎이 시나브로 지며
시간의 잔해들을 수북이 쌓을 때
이른 봄 청매화 그림자에 밟혀 심연이 흔들리는
그 순간 마다 창 아래서 숨죽인 휘파람으로
글루미 선데이를 연주한다
많은 이들을 자살로 이끌었다는 선율로
자두나무 애간장까지 끓이다가, 창을 넘어 들어와
서로의 체온으로 시린 몸을 녹이기도 했으니
숙명이란 탯줄로 꽁꽁 묶인 사이
은밀한 색 밝히려면 귀한 접시를 깨뜨리고
지엄한 닻줄 다 끊어버려야 한다
찬란한 그늘이면서 고질병인
내 색의 골짜기에 숨겨둔 내연남, 그는
담쟁이가 미루나무 등걸에 살며시 발을 걸치는 때
느티나무가 달빛을 갈아입는 시간
또는 초승달이 서해로 안기는 그 순간에도
시시로 찾아와 달콤하거나 쓰리거나
뭔가 속삭여주길 나는 애 태운다
그 품엔 늘 투창이 이를 갈고 있는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