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얼음이 칼바람을 물고 달려드는 밤
서울역 지하도에 웅크린 사람들
세상사 뭐든지 꿰매고 깁던 버릇 버리지 못해
긴장된 순간들을 모아 시간 조각보 박음질하네
가슴 속 미싱 바퀴를 돌리고 있네
침침한 바늘귀에 실을 꿰어
지쳐버린 손가락 마디 호고 감치네
끝내 바늘귀를 찾지 못하고
헛바퀴만 몇 바퀴 드르륵 돌리다가
무연히 드러눕는 사람들
찬 바닥 신문지 몇 장 깔고 누워
허공으로 둥둥 떠올라 지상의 가족들을 내려다보네
미안하다, 사랑한다, 틀바늘은
간간이 헛소리 하는 제 주인의 꿈 깨우지만
드르렁, 컹, 컹 코고는 우레 소리만
지하도의 밤을 울리며 지나가네
속절없이 무너진 가슴 속 지키며
세상을 돌리는 재봉틀
헛바퀴 돌리는 소리
그 신음 속 밤의 폐부를 가르는 바람소리
어느 누가 촘촘히 박음질해 이어줄 것인가
얼,시구! '굿거리장단'으로 놀고 자빠졌네
잡것이 섞이지 않은 시우쇠라고?
모조품 아닌 참옥이라고?
덩따다다다 꿍따다다다 덩따다다다 꿍따
지난겨울 살처분 당해 가죽도 뼈도 남기지 못한 소귀신들
내 어슬픈 장구놀림에 붙어 울분을 풀어놓는다
*"아으 다롱디리 어긔야 어강됴리
달하 노피곰 도다샤 머리곰 비취오시라"
2.
엉뚱한 곳에 분풀이가 아니라 수작이 모두 개수작, 내 살아생전 옴짝달싹 못하게 통 속에 가두어 항생제만 처먹이더니 뱃속에서 세상 구경 한번 못해본 내 새끼들만 마구 땅에 파묻어 놓고 금세 돌아앉아 고기 살점 불태워 먹으며 '오 바 마!'소주잔 부딪히는 게
음메~너희 인간들이여!
사람 짐승들이여! 시방, 음메~울어라, 울어
내 뱃가죽 살가죽 찢어지도록
더덩! 더덩! 덩! 덩!
덩더꿍! 덩!
*정철鄭澈- 송강 선생의 성명
*정철正鐵- 시우쇠, 잡것이 섞이지 않은 쇠.
*섭철鐵)- 무쇠, 정련되기 전의 거친 쇠.
*진옥眞玉- 참옥, 기생 이름.
*반옥半玉- 사람이 만든 모조 옥
*출전 :신웅순, 「시와 시인 이야기」 , 『월간서예』 (2009,3월호)
*정읍사 부분
2
세한도를 엿보다
-유배 시편 3 [디지털]
삶의 전쟁터에서 뒤처져버렸다
디지털 속도 따라잡지 못해
한 집안 맏이로서 마지막 보루인
양반 뼈대 지키기 위해 제 안에 담 쌓은
저, 늙은 소나무 하나
겨우 세평짜리 안방에서
제 면적조차 과분하다며
허옇게 이파리 떨어뜨린다
한 때 바람 따라
노란 송화 가루 뿌려대던 시절 말아
혓바닥에 돌돌 연기 동그라미
허공에 굴리는 저, 사내
천천히 남은 생의 뽕잎을 갉아먹고 있다
흐린 술 몇 잔으로
낡은 햇볕과 바람에게 감사 편지 쓰면서
늦가을 세한도 완성해가고 있다
3
세상의 설피를 벗겨주세요
-유배 시편 4 [딸에게]
1.
송곳니 햇귀를 갈고 있는 방울뱀
서릿발 치는 눈밭에서
젊은 날의 아버지 어머니 서 계십니다
'딸아
이 세상 사계절은 모두가 눈구덩이란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외줄타기 곡예를 해야 해
오로지 앞을 주시하면서
뒤 꼭지 순간적인 기후 변화를 감지할 수 있어야해
무엇보다 눈길에선 입과 눈, 귀의
설피 끈 단디 묶어야 해
본다고 듣는다고 다 말하는 게 아니란다'
2.
'어머니
그 말씀 지키며 사노라니 세상이 두려워요
꽃피는 시절 사랑한다, 미워한다 한 마디 말 못하고
한 생이 노을 속으로 미끄러져갔어요
어둠의 나이테에 갇혀 막막해서 흐느낄 수도 없으니'
'어리석구나! 딸아
사랑한다, 보고 싶다 그 말이
설령 네게 수치스런 치마 둘러 입힐 지라도
그 땐 단단히 묶은 설피 끈 풀어버려야지
차라리 맨발로 미끄러져라
설령 시든 고춧대에 코가 꿰이더라도
자꾸 미끄러지다 보면
그 상처 속에서 해어화 한 송이 쯤 피워내지 않겠니?'
3.
'네 조상 포은선생은 휘어질 줄 몰라 가문을 지켰지만
넌 히말라야의 삼목처럼 휘어지면서 사랑한다, 미안하다
한 여름 장맛비처럼 자주 속삭여라
그 용서의 빗줄기 타고 세상을 더 높이 멀리 바라보거라
딸아'
4
장생포에만 고래가 살고 있는 건 아니다
-유배 시편 5[ 아날로그 안테나]
어느 날 갑자기
세상사
다 부질없는 짓이라며 넓은 바다도 버리고
내 물결바다에 갇힌
저, 사내
날마다 나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다
침묵의 긴 꼬리 휘익, 휘이익 휘돌리며
제 성깔 작살에 찍히고
히스테리에 비늘 찢어진
한 귀신고래
무뎌진 아날로그 안테나 지붕 위 세워놓고
호반찻집으로, 회관 바람의 집으로
이리저리 방향 조절하느라
하루가 짧고도 길다
시어 금맥에 혈안인 마누라, 그 가물가물한
야래향의 체취와
엿가락 시간 얼기설기 엮어
뒷방 아이비 시든 줄기에 걸어두고
5
그는 이제 군불을 지피지 않는다
-유배지 시편 6[눈빛족쇄]
내 한숨, 눈물 그리고 웃음을 담는 그릇
저. 남자
환한 조명등 아래서
남의 시선에 지친 날 감싸주겠다는 선서까지 받았는데
그의 벽마다 달린 눈빛이
왜 겨울 달빛보다 더 싸늘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지
깊은 웅덩이 속 첼로 소리를 내고 있는지
삼십년이 지난 지금
자신의 심장 속 내 방에 군불을 지피지 않는다
불씨 꺼진 재만 바라보면서
엉뚱하게 참말로 아이러니하게
믹서 커피가 식어버린 이유에만 골몰하고 있다
결혼이란 또 다른 유배지에서
불씨마저 꺼뜨린다는 것은 큰 죄악 아니겠는가
핑계 아닌 핑계로 난
그의 녹슨 족쇄를 더 세게 조이고 있다
‘휘발유 떨어졌다 핑계대지 말고
고마, 그 깜깜한 등에 불 좀 켜 보이소!’
그럴 때마다 그는 맹한 눈빛족쇄로
겨우 내 심장에다 불만 화끈화끈 내지를 뿐
6
밤마다 색동 조각보를 꿈꾸다
-유배시편 7 [상사화]
내 생의 반짇고리 늘 비어 있었다
여자는 한 송이 상사화로 사는 게 당연하다며
흰 무명실로 직선 박음질만 하며 달려온
나의 한 생애
깡소주 한 잔에 취해 비틀 곡선 그으며
새길 낸다고 새발까치 뜨면서 강짜 부렸어야
그와 눈빛이라도 부딪힐 수 있었는데
범고래 한 마리 펄떡이는 바다의 품에 쓰러져
흐느끼는 척 내숭떨며
볼그스레 취한 눈빛으로 팔자 뜨기하며
그의 애간장 지글지글 태웠어야하는데
낙엽 지는 가로수 아래서 손 흔들며
가슴 속 굵은 바늘로 휘감치기 하는 그의 어설픈 미소
산 속 까치가 지친 외로움 시침질하느라
낙엽뼈대 콕 콕 찍어대는 소리
이 모든 감성의 조각들 손바느질로 공그르고
박음질하며 색색이 돋보이면서 서로 잘 어울리는
색동 꿈의 조각보 하나 완성했어야 하는데
7
골무굿거리 한 마당 펼치다
-유배 시편 8 [짜증바늘]
어허! 계남 1리 대구댁 저 대바늘들
날마다 골무의 가슴 한 귀퉁이 찔러댄다
뭐가 그리 다급한지 덩!덩! 꿍따꿍!
휘모리장단으로 몰아 부친다
학용품 학비 제 때 못 대주는 부모는
삶의 낙오자, 얼마나 중죄인인가
어미의 찔린 가슴은 덩따꿍따! 덩덩 덩 따따!
자진모리로 피 솟구쳐 오르고
‘뉘집 거지새끼야?’
한 마디 툭! 던지는 담임의 굵은 짜증 바늘에
숨 막힌 성혈바위 골무
그녀를 위로하는 듯 양철 지붕이 비를 때린다
덩, 덩기덕, 쿵기덕, 쿵따 쿵따 ,덩 따다다 쿵 따다다
어얼쑤! 굿거리장단 돌아간다
분노한 아버지의 꽹과리도 그랑 당, 그랑 당 깨갱 깨갱
폭풍을 휘몰아쳐오고
뒤란 감나무 놀란 가지들이 열 두발 상모 돌린다
불그리 취한 감잎들은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다시 춤을 추고
8
누가 저 짐승들의 비명 들은 적 있는가
-유배 시편 9[밍크에게]
밍크코트 한 벌에 밍크 쉰다섯 마리가 살처분당한다 고?
그렇다면 토끼 너구리 개 여우들은
평생 철창에 갇혀 있다가 죽어야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생목숨 산 나무에 묶고
핏물 뚝뚝 떨어지는 그 껍질 벗겨들고
히죽 웃으며'신선해 보이죠?'
돈 몇 푼에 수많은 목숨 위리안치 시켜야 하는
저 중국인들과 같이 자신도 모르게
그 무엇에 유배당한 우리 여인네들의 허영
‘신선하다!’ 는 한 마디에 짐승들의 피눈물 맺히고
비명이 얼어 상고대로 매달린다
그 말에 소름꽃 피어나는 내 몸이
또 그들 울음의 유배지가 된다
오늘도 빙하기로 팝콘수다 튀기기 위해
밍크들의 비명 숨죽이는 모피 걸치고 나선다
죄 없는 한 생의 그물 성글게 짜다만
굵은 바늘귀들이
툭, 부러진 채 벌겋게 젖어 흔들리고 있다
어쩔 수 없는 방관자 그 왕 버들
머리카락 산발한 채 울부짖고 있다
마침 동물의 왕국
독수리들의 날 세운 부리들이
죽은 사람의 골수를 콕 콕 찌르고 있다
9
그.것.은 바.로 시! 시였다
-----유배 시편 10[쪽지와 구멍]
'칠레 광부 33인이 700미터 지하 광산에 갇혔다 매몰된 지 한 달이 지났는데
그들은 애국가를 부르며 두려움을 견디고 있다 그 사이 딸아이 에스페란다가
탄생하고 그 가족들은 광산 위에서 힘내세요! 노래 부르고 광부들은 어둠속
에서 조국 칠레! 를 외치며 기적의 꽃이 피기를 기다리고 '
예상하고 있었다 밥줄이
저 밥줄, 언젠가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몸 가두어
끝내 제 목숨 거두어갈 것이라는 사실을
아슬아슬 외줄타기를 해야 했던 아득한 나날들
무너진 갱 속에서
오직 희망은 구겨진 쪽지 한 장뿐
‘살아있다’ 그 글귀 하나
애간장 다 태우며 기다리던 이들에게
살아있다! 기쁨을 안겨준 신의 목소리
단 몇 개의 낱말로 이루어진
그.것.은 바.로 시! 시였다
세상 사람들 울리고 가슴 설레게 한 명시 한 편
그런 명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선 낭떠러지
삶도 죽음도 곧 무너질지 모르는
그 유배의 공간에서
우정과 조국애가 꽃피어날 수 있었던 건
실오라기 구멍 하나 트여 있었던 까닭
글귀 한줄
고 작은 숨구멍이
하늘이었다, 시 그것
10
새우, 쉼표를 찍다
-유배지 시편 11[파도 페이지]
한 때 먼 바다까지 제 꼬리로 파도거품 일으키던
저, 남자
차라리 우울의 바다 속으로
첩첩이 쌓여오는 파도 페이지 뒤적이며
회오리바람 휘감으며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너, 죽고 싶도록 휘휘한 시간
아무리 거세게 휘몰아친들
새우의 등지느러미 함부로 짓밟아버리는
세상 미친 파도 바람만이야 하겠는가
그는 마침내 혼자 떨어져 앉아 섬이 된다
안방 바다 한 가운데 쉼표를 찍는다
그 동안 삼킨 바람파도 다 끌어안고
혼자 울부짖다가 웃으며 중얼거린다
거부하지 않으련다
밀려오너라 내 몸을 갉아먹어라
그래야 네 속 시원하다면 얼마든지
바람아
파도야
11
파장
-유배지 시편 12[빈병]
단물 다 빨린 뒤 안락의자에서
버림받은 빈 병 하나
생의 파도에 밀려나와 중얼중얼 바람에게 따진다
거미줄 치며 그 자리 오르느라
먹히다가 삼키다가
겨우 와이셔츠 깃 빳빳이 세울 수 있었는데
왜, 내가 수성장 장터 저녁 무렵의 폐휴지 신세냐?
가장의 어깨 짓누르는 저울 추 무게 어찌하나
한 순간 물너울이
외나무다리에 걸린 중년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다
남자의 뿔 재생시켜 줄 넝마주이들은
음험한 이 시간, 무궁화 자랑하며
어느 흑장미골목에서 헛기침만 하고 있는데
뒷짐 지고 빈 하늘만 바라고 있는데
바람은 물거품 한 가득 문 입으로
그의 담배꽁초 사르는 불길만 살짝 건드리고 사라진다
12
쉬잇, 폭주족
-유배지 시편 13[액세레이터]
본디 마음은 보이지도 않고 없다지만
뿌리칠 수 없는 이 감정의 욕심그릇
그의 엄명은 불꽃눈알 치뜨며
나의 시샘 액세레이터 밟고 또 밟는다
두메 달맞이꽃보다 더 빨리 꽃피워라!
남의 벌레 먹은 장미향이라도 무조건 빼앗아라!
네 빛깔 더 곱게, 향을 더 진하게, 재촉하다가
썩은 홍어냄새가 내 향을 톡, 톡 쏘는데
13
통조림, 그 한편의 시
-유배지 시편 14[꽁치]
작은 깡통에 유배당한 저, 꽁치
제 지느러미로 가시 칼날 다시
곧추세운다
쉽사리 잡히지 않으려 하늘 그림자에
피 말리며 매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잡혔다
지금 간절한 풍경이다
땡, 땡 하늘을 깨우다가
쨍그랑 유리잔을 깬다
절명의 한 순간 퍼뜩! 깨닫는다
산다는 것은 어차피 누구에게 먹이가 되는
길 찾는 일인 것을
이제 제 몸뚱아리 허공에 다 내주었다
저 한편의 시
맨가슴으로 읽으면 될 것이다
14
열아흐레 달빛 옷걸이
-유배 시편 15 [지구의 어깨]
1.
저 가녀린 어깨에 얼마나 큰 무게 실려 있었던가
초가을 별빛 줍느라 잠은 밤새 돌아오지 않는다
흰 바람벽에 멱살 잡힌 옷걸이 하나
싸늘하게 눈동자 깜박이는 달밤을 입어 더 핼쓱하다
한 쪽 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지는 지구의 어깨
낮엔 왜 보지 못했던 것일까
너덜너덜 껍질마저 벗겨진 채 깡통으로 찌그러져 있다
날마다 허영의 공깃돌 한 주먹씩 쥐었다가 흩어버리는 나의 낚시 바늘들
그 바늘이 물고 있는 그의 시간이, 돈다발이 그 살의 뼈 벗기며 끌고 다녔었지 한 때 내 배꼽열쇠가 그의 비밀금고 빗장을 열고 들어가거나 압력솥의
추 끓어오르다가, 뾰족 손톱이 그의 어깨 피 흐르도록 할퀴어대기도 했었지
2.
그 소리 요란하기만한 난바다 산 같은 파도 헤치며 몇 사람의 밥통 지키느라 짓눌렸을 저 가장의 무너져 내리는 어깨, 소설 몇 권치 삶의 태백산맥 짊어지고 불면으로 깊어가는 밤을 헤아리며 벽 못에 물려있다
뿌리 없는 내 허망의 귀틀집에 감금당한 저, 뼈 속까지 구멍 난 남자 이제 살집 두툼한 내 어깨에 찢어진 그의 날갯죽지 뼈대가 기대어야 할 때인가 저, 열아흐레 달빛은 은근히 그것을 내게 강요하고 있는데
15
풍력발전소, 세상을 돌리다
-유배 시편 16[미친바람]
불에 타버려 통제 불능 발전기
저 바람의 여자
제 몸 속 발정 난 기계들
아직 탈 없이 돌아가고 있다며
삐그덕 삐그덕
몸바람을 일으켜 세운다
그 열기, 그 숨결
가쁘도록 돌리고 또 돌려대지만
헛바람만 온 집안 들쑤시고 돌아다닌다
밤낮 휑한 빈집에 갇힌 찬밥덩어리
그 남자
노을 물들이는 그 미친바람의 발갈퀴가
날마다 으스스스 등골 찔러댄다며
부황봉화불이나 지피고 있다
16
안방 경마장, 세상 문 닫은
-유배 시편 17[풍랑]
마지막 경주
이제 다시 갈아 끼울 수 없다
목숨의 말발굽 편자 다 닳아빠져
한 때 우렁차던 발굽 소리
그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래도 가파른 산길 막무가내로 달려야 한다
이랴! 이랴! 쉰 소리 죽어라고 자신을 채찍질한다
세상 문 닫은 안방 경마장에서 그는
벌써 구 년째 이불 한 모서리 잡고
비록 세상 풍랑에 밀려나 갈기털 다 빠지고
발굽편자 다 닳아 쓰러지더라도
생의 숨길 마지막 멈추는 그날까지
허덕허덕 달려야만 한다며
그래야 사내다
최소한 싸나이 대접을 받는다며
식은땀으로 이불 푸욱 적시며
죽음과 맞서 싸우고 있다
17
넝마 아리랑
--유배지 시편 18[할머니]
일개미에게 공손히 절 하는가
90도로 허리 굽히는 한 할머니
빈 깡통 종이 박스에 담긴
헛바람, 헛꿈을 꾹꾹 눌러 단단히 묶는다
육신의 짐에 파묻혀 리어카를 밀고 가는
그 깜깜한 밤을 노을이 천천히 끌고 간다
시간 밥줄은 달동네 판잣집에서도
허리 제대로 펴지 못하고
끙, 끙 아리랑 고개 아라리오 넘어간다
어린 손자의 밥통 살리려 일평생 고된
그 일이, 버려진 목숨 거듭나게 하는
소중한 일인 것을
아흔이 다 되어도
굽은 허리의 숨은 그 힘 깨닫지 못한 채
넝마 아리랑 고개, 고개를 넘어간다
18
제비부부
--유배지 시편 19[선풍기 난로]
미처 날아가지 못했다
날개를 다치거나 마음이 상처 입은 것도 아니다
바람의 방향 따라 모두 잘도 둥지를 옮기고
따스한 둥지 지키기 위해
주머니 먼지 탈탈 털어가며 손 비비기도 잘하는데
한번 잘 살아보려고 아등바등 칼을 갈았지만
이 겨울 일거리도 없이
콘크리트 벽 한 귀퉁이에 겨우 세 들어 지은 둥지
처마 끝 바람가리개도 없어 흔들리고 있다
언제 떨어져 버릴지 모르는
나뭇잎처럼 점점 피 말라가고 있다
햇살 따라 미리 남녘으로 떠난 아들은
일자 소식도 없다
뜨신 밥 한 숟가락보다 꽃과 꽃송이
그 틈에 숨은 냉기를 녹이려 제 온 몸 뜨거워지며
목을 돌리고 있는 저 선풍기 난로
제 뒷덜미 벽까지 그 훈기 돌려주지 못해
딱, 딱 혀 차는 그런 훈기 그리워
서로의 깃털에 부리 꽂은 채 얼어가고 있다
19
씨앗화엄
-유배 시편 20[햇채물]
베란다 수채 구멍이 빨간 나팔꽃 한 송이 피웠다
인정사정없이 쓸며 내려가는 햇채물 감당하지 못하는
흙도 없는 그 구멍이
한 생명 뿌리 뻗도록, 흘러내리는 모래알 조금씩 모아 다독이면서
20
이슬
--유배 시편 21 [빛]
비로소 한 점 빛이 된다
몸을 버리고
생각을 깨뜨려야
그 순간 빛들이 모이고 고여
사라질 수 없는 보석이 된다
그 길 알긴 알지만 쉬 행하지 못하는
하루살이 보다
더 빠르게 몸도 마음도 지워버리는
이슬 한 방울 부처에서
저 빛나는 영원을 본다
21
안개꽃, 그 흰 그늘
-유배 시편 22 [페이지 터너]
조용히 악보만 넘기고 있는 그림자
연주자에게
조명과 찬사를 돌려주기 위해
있는 듯 없는 듯
너는 누구를 위한 페이지 터너인가
저 빛나는 주인공들을 위해
스스로 흰 그늘이 되어 떨고 있는 너
제 가슴 쓰다듬으며
영혼 깊은데서 두드리는 통증, 그 페이지를
밤마다 남몰래 몰래 넘긴다
22
별빛기도
--유배 시편 23[눈부처]
그 누군가의 등대가 될 수 있기에
별아, 너는
칠흑 어둠 속을 헤매느냐
세상의 작은 빛이 되고 싶어
해 뜨면 죽었다가
달뜨는 저녁이면 거듭 깨어나고
깨어났다가 다시 죽기를 되풀이하는 너
부싯돌처럼 순간과 순간 사이
삶과 죽음이 부딪히면서 발하는
그 발광의 연속, 별빛의 진실을 간구한다
그 눈부처엔 캄캄한 어둠을 살라먹는
별아, 새벽하늘의 별아
23
무단횡단 초대장
-유배 시편 24[4단 기어]
갑자기 4단 기어를 넣었는가
사월 아침 브레이크 밟고
민들레 차 한 잔 마시는 동안 화들짝 피어난다
김 경 옥 씨네 창밖 수박자두 꽃 몽우리들
봄바람 받아들이지 않으려 옷고름 꼭꼭 여미더니
갈 길이 왜 그리 급한가
겨울눈바람 느릿느릿 견디던 기억 급히 지워버리고
여름, 그 뜨거운 날이 그리 조바심나는가
봄날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인데
어둠의 초대장이라도 받았는가
곡차 한 상 차림도 없이 문 활짝 열어두고
막무가내 달아오르면 어쩌자는 말인가
하루 해 기울기도 전
그새 꽃 이파리 호르르 지면서
24
나팔꽃 우물
-유배 시편 25[눈물방울]
죽어가는 느티나무 고목 둥치 쓰다듬는 듯 감아 오르며 몇 송이 붉은 꽃 피워 두려운 그 마지막 길, 밝혀주는 걸 보면 나팔꽃은 또 다른 하늘이고 부처로 보이다가
눈 닦고 다시 꽃의 그 우물 속 바라보면 기세 좋게 다가서는 댕댕이 줄기 피해 허겁지겁 하늘로 오르다가 지친 한 연약한 목숨 눈물방울이 비치는구나!
25
프린터기
-유배 시편 26[사랑초]
한 번도 눈 부라릴 줄 모른다
햇살이 시키는 대로 꽃피우고
바람 부는 방향 따라 흔들릴 뿐
저 작은 꽃 이파리 속
침을 한 번도 일으켜 세우지 않는
사랑초처럼
시집이란 유배지 지키느라
제 꽃잎 다 시든 뒤 뜬눈으로 밤 지새우며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를 되풀이하다가
진짜 바보가 되어버린
죄 없는 죄 짊어진
너의 종
26
혜화동 예인선
---유배 시편 27[목걸이]
누구도 항구에 닿지 못하리
수십만 톤의 전함도 가랑잎 쪽배도
그가 없으면
시학 뜨락 감나무 연푸른 파도 아래 서서
시인들의
바다부두로 길 이끌어주려고
떨어지는 감꽃이
댓닢 빗방울이
하늘운판 쳐대는 소리에 귀기울이느라
시의 파도에 갇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그러나 세상이치를 실오리에 꿰어 목걸이 해주는
그 남자
어둔 세상 난바다의 예인선 같은
27
배달민족
---유배 시편 28[김배달]
달려라!
너, 김 배달
오늘도 오천년 배달민족의 바톤을 들고 달려야 한다
물려받은 씨앗 잘 갈무리하여
주춧돌인 두 아들에 살림밑천인 딸도 두었고
별 볼일 없는 간판의 회사지만
명문이라 우기며
아래 위 서류전달도 어지간히 해댔지만
이제 겨우 세상맛을 알만한 나이인데
밀려나
세월 오토바이를 탄다
부릉! 부르릉!
온 몸 솜털이 곤두서서 춤을 춘다
이 나이에 배달민족의 근성 확실히 보여주겠다고
잠시 죽었던 한 남자 다시 일어선다
그 고사목에 새 잎이 돋아난다
28
환희불, 관능경을 설하다
---유배지 시편 29[연꽃]
유등리 유호연지 연꽃들은
꼭 햇살 조명 아래서 제 꽃몸 열며 부르르 떤다
색소폰 흐느끼는 로라 음률의 석류꽃
그 빛 눈 시리다며
한쪽 눈 감은 바람과 비비춤을 추면서
순간의 틈새 노리는
고추잠자리들과 입맞춤하며
뒹굴기도 하면서
꽃잎 속 숨어 연밥 키우던 어둠 속 씨알들
그 사이 쏘옥 쏙 굵어지라고
저 환희불들
관능경 설법으로
연못의 여름 한낮을 뜨겁게 펼친다
29
다나킬 소금 카라반의 낙타처럼
-유배시편 30[촛농]
소금 짐이 무거워서가 아니다
가족을 위해
모래사막 위 껍질만 남긴 채 죽어가는 일 두렵지 않다
그런데도 사막에서 살아남는 길 박탈당한
대책 없는 한 낙타
풍차를 돌린다는 핑계로
아내가 불어대는 모래폭풍에 갇혀
다 녹아버린 초
그 촛농에 불붙이려 안간힘 쓰고 있다
심지는 이미 줏대를 잃어버리고
흐물흐물 쓰러져 있는데
30
새벽 별바라기
-유배 시편31 [요양원애서]
평생 하늘 땅만 바라보고 살아왔는데
어쩌다 이런 불모지에 밀려나있는가
보이는 건 흔들건들 링거병과 주사 바늘
악취는 에테르로 풀려나가는데
그 줄에 매달려 간병인의
폐휴지보다 못한 취급을 받아야하는가
제 손아귀에 늙은 아이들 목숨 줄 달려 있는 양
윽박지르는 소리
숨죽여 듣고 있어야 한다
아들과 손자들 그 목소리와 눈빛이
빛나는 별이었다는 걸 새삼 깨닫지만
그들은 끝내 별빛 한 번 보여주지 않는다
하루가 십년 같은 병상 동창생들
서로 침묵으로 눈길 피하며
레떼강 너머 세상을 애절히 기다린다
애타게 기다리는 척이라도 해야한다
31
가을비는 미싱을 밟으며 온다
----유배 시편 32 [정취암의 가을]
새벽 빗소리 홀로 듣는다
단절되어가는 세상 어둠
그것도 잠시, 어머니 밤새
품앗이 한복 박음질 얼마나 촘촘히 하시는지
램프불빛으로 싱가 미싱 돌리는 소리 촘,촘
실을 꿰는지 잠시 쉬다가 또 다시 촘,촘, 촘,촘
깻묵으로 간신히 허기 채우던 시절
지아비의 여자 웃음꼬리를 치마 말기에 감아
말없이 세상의 틈을 깁고 있다
그 미싱바늘 회초리에 떠밀려 밤새 책을 읽었다
공부하는 척 소공녀를 읽고
만화책 봉선이와 함께 울고 지샜다
거센 빗줄기 속에서도 그녀들은
밝게 콧노래 부르면서 꿋꿋이 일어나고
언젠가는 꽃 한 송이 피울 수 있다는
썩지 않는 꽃씨 몇알 심어 주었다
평생 잊혀지지 않도록 달음박질치는
어머니의 미싱소리
가을산에 들에 더 고운 옷 갈아입히려는지
재봉틀 돌리는 손길 점점 빨라지다가 느려진다
촘! 촘! 촘! 촘 ! 드르륵, 드르륵
32
연서, 유치해서 부칠 수 없는
-유배시편 33[손맛]
달빛 은근한 봄밤
암갈색 당신 눈동자 속 꿈 지키느라
촉촉이 젖은
눈부처나 되고 싶어요
수수꽃다리 향이 아무리 몸 비비꼬며 다가서도
눈길 돌리지 마셔요
줏대 없이 흔들리면 파문을 일으킬테니
그 호수 하도 그윽해
비바람도 파도눈 뜨게 할 수 없는 심연에서
낚싯대 종일 드리우고
밑 없이 가라앉은 흐놀함 속으로 빠져 들고 싶어요
뜨거운 눈길, 끌어당겼다가 놓았다가
바람의 손 맛 즐기면서
33
하나님만 늘100점인가
-유배시편 34[포옹]
젊은 유골 한 쌍이 반만년 동안
꼭꼭 숨어 있었다
에곤 쉴레의 '포옹'이란 그림처럼 전라의 남녀가
상반신 뜨겁게 끌어안고 있었다
누군가는 욕망의 분출이라고 하고
또 누구는 어떤 공허감을 표현했다고 하지만
근육질 남자와 에로틱 여자의 몸매에서는
금단의 향내 흘러내리고
온몸마음 달아오른 그들에겐
캄캄한 지하 밀실이 오히려 이상향이었을까
어쩜 하나님의 노여움 피해 숨어든
어느 천사들의 동굴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금기의 선을 밟아버릴 수 있는 용기를 가진
그들이 두려워 쫒아버린 것인가
어쨌든 전자 칩에 갇혀 사는 현대인보다
불꽃 꺼뜨리지 않고
영원히 젊게 사는 길 먼저 찾은 그들이 바로
100점 인생 아니겠는 가
34
못 삼키는 여자
-유배시편 35 [벽]
못 삼키다니요
집도 사람도 못이 박혀있어야
허세 유지하며
꽃을 붙잡고 제 하늘을 담아둘 수 있는데요
전 그 못을 삼키며 젖가슴 부풀리지요
속 할퀴는 말 한마디가
폐부를 찌르는 가시눈빛들이
살아야 할 힘을 불러일으키는
피눈물 밥이 되거든요
잘게 부수어 삼켜도
다시 삼켜도
언제나 팽팽 일어서는 못과
저 벽, 살못을 삼키는
벽속에 핀 꽃들
35
치타를 위한 변명
-유배시편 36 [뱃가죽]
달리기만 잘해서 무슨 소용 있으리
한 성깔 사납게 물어뜯을 줄 몰라
다 잡아 놓은 먹이도
사자나 하이에나 떼에게 빼앗기고 마는 걸
뱃가죽은 창자에 붙어버렸지만
그래도 또 뛰고 뛰어야 하리
나보다 어리거나 다리 절룩이는
사는 게 캄캄 절벽인
가련한 짐승들 향해
오늘도 새빠지게 달려야 하리
생의 사막은 갈수록 넓어만 가고
이정표도 사라졌으니
그냥 무작정 달려야 하루 해 넘길 수 있으리
36
터널 속에서
-유배시편37 [아버지]
1.
그 누구신가요?
끝 모를 그리움을 찾아 나서거나
한 끼 가족의 풀칠을 위해
가파른 팔조령 호랑고갯길 무작정 달려야 하는
눈에 불을 켠 저 배고픈
치타들에게
막힌 생 몸뚱아리 뚫어 지름길 내어주는
당신은
지상의 청정법신이신가요
2.
바삐 가던 길 멈추고 그 어둠 그늘에서
생의 뒤안길 되돌며 머뭇거리는 내게
밥 한 공기 땀방울 눈물방울 소리 없이 씹고 있던
지난 시절 어린 감꽃 꿰어
목덜미에 걸어주던
아버지
그 분이
바로 당신이신가요
37
세상에서 가장 큰 산을 지고 온 여자
-유배시편 38[어머니]
깊이도 넓이도 끝도 알 수 없는
세상 어둠산을 통 채로 이고지고
파도와 맞서 깨지고 자빠지느라
그래도 다시 일어서야 하느니
이 악물면서
당신 곪아터진 상처 돌아볼 겨를 없던
아흔 다섯 고사목 내 어머니
마지막 더 캄캄한 길도 당당히 걸어가겠다는
이 땅의 아줌마이길 고집하는
저 산 같은 여자
이.
봉.
화.
38
색파라치 파파라치
-유배시편 39[눈카메라]
살몃살몃 어깨살 내민다
안보는 듯 슬쩍 훔쳐보다 찰칵!
내 눈카메라 속 눈부처가 떠오른다
옅은 미색의 속살 솜털을 주춤주춤 비친다
목젖이 보일락말락
핼쓱하다
그럴수록 더 기다려야 한다
하루, 이틀 ,사흘
드디어 하반신 속살 열어놓고
야릇한 밤 향기 까지 솔솔 뿜어댄다
엔젤 트럼팻,
찰칵!
찰칵! 색의 역사는 그 꽃잎 속 암실에서 시작된다
내 시어의 심장이 옷을 벗는다
꽃은 철저한 저 스토커 시간을 끌어안아
제 몸빛에 입힌다
빛살 한 점에서 찰칵!
드디어 타오르는 어둠을 살려낸다
39
푸른 녹을 닦으며
-유배시편 40[밥그릇]
아파트 목요 장터에서 만난 생태 한 마리
내 허기계단 당당히 밟고 올라선다
때론 멸치 몇 마리가
한 줌의 풋나물이
수 십 년 내 목숨 계단을 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명이 내 구린 입안에서 씹혀야 했던가
돌이켜 보니 아슬아슬하다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한 끼 식사로
내 이끼 낀 이 눈물자리를 탐해
입방아 떡방아를 찧기도 했을 것인가
멀고 먼 시하늘이 단순한 계단이라기에
식은 죽 먹기라며 토끼 한 마리라도 잡으려
마구 오르다 보니
온 사방이 철조망이고 낭떠러지다
그 속임수 숨기느라 계단 모퉁이 마다 심은
장미꽃이 향기 품은 유두를 발기 중이다
하기사 남산 양지바른 곳이 모두 젖무덤인데
서로 먹고 물어뜯는 산 짐승들의
시발점도 종착역도 모두 무덤 없는 무덤일텐데
난 오늘도
하늘로 오르는 계단식당 문을 연다
밥그릇에 낀 푸른 녹을 닦고 또 닦는다
40
당신의 추가 무거울 때면
-유배시편41 [연장]
허구한 날 되풀이하는 일 뿐이라고
가장의 추가 무겁다고 떼버리지 마세요.
그 무게가 당신의 안방을 지키고
하늘과 땅을 받쳐주고
당신을 견디게 하는 힘의 원천이지요
그 연장이
시간의 맥박 재촉해서
내 자궁 속 썩히고 낡아가게 한다지만
그 떨림이 새싹을 이파리를 꽃을
화르르 피어나게 하는 힘대가리지요
시계추는 당신 몸 지구의 중심이지요
41
번개탄, 저 봄 햇살
-유배시편 42[산경표]
내 한 몸 불살라
겨울 나목들 암실숲에
얼어붙은 정담에 불붙일 수 있다면
그 불씨로
섬과 섬, 얼음벽 사이
푸성귀로 시장 난전을 연 할머니 굳은 어깨에
들불산불 일으켜
산경표 서 있는 길 태워버릴 수 있다면
꺼진 연탄에 불 붙여주던 번개탄처럼
해종일 제 발가락 촉수들 깨워 일으키느라
서산마루 땅거미 다가서는 소리 모르는
저, 느리게 피어나는
봄 햇살
42
새벽 청소부 1
-유배시편 43[공]
날마다 벽에 공 던진다
던진 만큼 되돌아오지 않아
뼈아픈 삶, 그 안타까움을 미쳐
자라지 못한 날감지, 파닥!
파닥거리다 누운
휘휘한 저 눈빛을 쓸어 담느라
지쳐버린 사람들
43
레미콘 저 남자
-유배시편 44[뿔]
울타리 안엔 두 황소뿔이 맞서고 있어
늘 티격태격 소란스럽다
손 갈고리에 걸리는 것은
무엇이든지 한 몸으로 붙여야 직성이 풀리는
붙임성아내
냉소적이면서 외톨이로 남으려는 모래알 습성
시어머니, 그 껄끄러운 며느리 틈에서
두 여자가 꽃으로 잎으로 잘 어울려야만
잠 편히 잘 수 있다면서
저 남자 오늘도 제 몸 천천히 돌리고 있다
서로의 뿔 깎아
바가지 가루의 비율 알맞도록 섞어
이웃으로 향기 번져나갈
어울림 꽃밭세상 가꿔보자고
44
가로등이 켜지면
-
-유배시편45 [중심論 1]
하루살이와 불나방들
자신이 하찮은 존재인 줄만 알았다가
죽어서야
제 기름으로 어둠 속 불 밝힌다는 걸 깨닫고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었다는 것과
산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
45
지하철
-유배시편 46[헛바람 남자]
날마다 헛바람 등에 지고 살아가는 저 근육질 사내
누구의 묵은 그리움 이어주려 저리 청석산을 뚫고 달려야 하는가
한 주먹꺼리도 안 되는 내 마음
그 허술한 세상 벽조차 관통해 볼 엄두도 못 내면서
46
콘트라베이스
-유배시편47 [지구]
저 몸집 큰 사내
퉁, 퉁, 퉁,
별의 은종소리 내지 않고도
몸 속 어딘가에 숨겨놓은 내 깊은 뿌리 뒤흔든다
생의 줄타기에 이미 무뎌진
제 몸뚱아리 어디서 그 떨림을 찾아내고 있는지
부푼 비눗방울 속에 든 눈알들
퉁, 퉁, 투둥, 퉁, 퉁, 마구 튕겨내고 있다
툭, 문득 지구를 깨뜨리는
일순의 정적
그 소리 행간에 못 하나 박으려
발등의 실핏줄 터지도록 떨고 서 있는가
47
모든 주검엔 날개가 있는가
-유배시편48 [화엄이치]
날개 없어도
날지 않아도
하늘 날아가는 길 찾고 있는 것일까
비둘기 한 마리 차도를 걷고 있다
천천히 아주 느릿느릿
모든 주검엔 날개가 있다는 걸
늦게나마 알아차린 것인지
다급한 차량 경고음 아랑곳없이
갸웃갸웃 세상 화엄이치를 재고 있다
48
도마, 어느 날 깨닫다
-유배시편 49[맏이]
자신이 당나귀였다는 것을
어느 날 문득 깨달은 것이다
부모라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칼질과 채찍질에
웃으면서 짐을 실어 나르던
맏아들이란
멍에 자랑스럽게 걸고 찔락거리던
그가
몸, 마음
상처투성이에 독주로 소독하면서
때론 자해하면서
49
그림자를 위한 파르마콘*
-유배시편 50[빛그늘]
먹물처럼 속 깊은
음흉스런 저 그림자
다소곳이 따르는 그늘인 척
제 색깔 절대 드러내지 않고
안으로만 몰래 주인의 빛깔 다 빨아들이면서
시시로 산란하는 시들, 여름 한 낮 연꽃이 누드로 일어서는 낯 뜨거운 늦바람 그림들, 제 주인의 혼신을 모두 내면으로 받아들이다가 어느 순간 세상을 향해 고자질하기도 하면서
흡수한 그 인생 제 피로 정제해 단단한 꽃소금덩이로 살리려면, 그 주인은 청산가리 같은 외로움에 떠는 가슴 달래줄 시와 그림을 찾아 흰 소의 울음으로 살려야 하리 그러기 위해 들꽃 폐차 안으로 별들이 빛 굴리는 소리 들으며 그들의 고단함을 달래주어야 하리
어둠 속 달빛과 햇살 머금은 씨알들 다 줘버린
그 껍질은 끝내 죽어버리지만
생의 흔적인 그림자의 빛그늘
그는 결코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살아남을 것이므로
*그리스어로 원래 약물이자 독이라는
50
치열한 삶에 대한 명상
--유배시편 51[프리다 칼로]
[버스 손잡이 쇠파이프가 청춘의 한복판을 관통했다.
옆 가슴을 뚫고 들어와 골반을 통해 질을 뚫고 허벅지로 나왔다.
세 군데의 요추 골절, 쇄골 골절, 제3, 4 늑골 골절,
세 군데의 골반 골절, 어깨뼈 탈구,
12군데나 골절된 오른쪽 다리와 비틀리고 짓이겨진 오른발
평생 32번 수술, 유산 세 번, 남편 디에고는 처제와 사랑놀이에 빠지고]
왜,
운명의 신은
프리다 칼로*의 몸에서 퍼즐놀이를 해야만했는가
성냥 한 개비의 불꽃이
사람들 가슴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도록
그녀가 오직 자화상에서만 모르핀과 자유의 날개 찾도록
온 몸 대못이 짜 맞추도록 망가뜨려야했는가
그 흔한 아이도 사랑도 다 빼앗아야했는가
끝내 자살만이 화려한 외출이 되도록
눈곱만한 자존심마저 짓이겨 밟아 버리고
* 맥시코 여성화가
51
기둥에 바치는 시 [문정희에게 ]
-유배시편52 [대들보]
1.
사마천 당신, 대들보기둥을 자르고* 천년만년을 살아남겠다니요
2.
한 사십을 살아도 토룡탕도 고아먹으며
아들 딸 낳고 지지고 볶고 살아야지요
그래도 힘이 넘치면 울 넘어 능소화도 힐끗힐끗
눈요기 슬쩍 꺾기도 하고
그렇게 한 세월
꿀맛 단맛 삼키는 것이 세상사는 맛이지요
죽으면 썩어질 몸이라 했던가요
아낀다고 누군가의 가슴 따뜻이 데워줄
참나무 숯이라도 될 수 있나요
하물며 수채 구멍으로 흘러가는
물도 기둥을 세워야 흘러 내려간다는데
*문정희 시인의 ‘사랑하는 사마천 당신에게’서
52
깨진 접시는 [ 목월에게]
--유배시편 53[사랑]
냉엄한 사랑이다
구부러진 등뼈 바로 잡으려는
회초리
그래서 갓 구운 질그릇들을
망치는 거침없이 깨어버리는가
받드는 것은 한번은 가루가* 된다던가
서로의 믿음 싸늘히 부서지면서
미소 뒤 숨겨진
아버지의 칼바람
때론 피투성이 되기도 하지만
황토 흙 야무지게 치대어
청자, 한 점
새로 빚는 일
그걸 누가 사랑이라 하던가
,*오세영의 시 ‘그릇’에서 *박목월의 ‘砂礫質‘에서
53
숟가락엔 어느 노가다의 탄식이 남아있는가
--유배시편 54[섬]
사람의
섬과 섬 사이에서
메마른 영혼의 물기 마르지 않게
기꺼이 메아리가 되어주는
범종의 파문처럼
숟가락 달그락거리는 소리 들으면
삶과 죽음
몸과 몸 사이의 생존을 위해
평생 밥을 실어 나르는
하늘님의 고단한 노동이 보인다
54
팽이
--유배시편 55[시집]
시집이란 살얼음판에서
말씀으로, 눈총으로 두드려 맞고 꼬집히느라
잘도 뱅글뱅글 돌아가더니
그는 화장 짙은 씨앗이 아닌
횡설수설, 술각시 얻어 응급실에서 딴 살림 차리고
그 회초리
홧병에 맥 놓고 누워있으라며 자꾸 쓰러뜨린다
그 여자
그래도 퍼뜩 일어나 눈알 빠지도록 돌면서
지친 고목 떠받들고 서 있다
봄, 여름 지나간 줄 모른 채
이제 겨우 단풍 옷 갈아입으려는데
잎은 떨어지고 찬바람이 뼈골을 들쑤신다
그래도 그 걸음, 멈추지 않으려
뱅글뱅글 새빠지게 제 몸을 돌린다
55
인생
--유배시편 56[경계선]
어둠이 빛이라는 걸 깨닫는
그 순간
시작과 끝 경계선이 사라진다
비로소 훨훨 날아오를 수 있다
56
내 생은 언제나 직선으로만 박음질 했다
-유배시편 57[깡소주]
그래서 우린 만날 수 없었다
깡소주 한 잔에라도 취해 비틀비틀 곡선 그으며
강짜 부렸어야 눈빛 부딪힐 수 있었는데
그 넓은 품에 쓰러져 흐느끼는 척 내숭떨며
볼그스름 취한 눈빛
그의 애간장 지글지글 태웠어야했는데
낙엽지면서 흔들리는 슬픈 미소
외로움에 지친 산 속 까치
낙엽을 콕 콕 찍어대는 소리
그의 뇌리에 매매 박음질했어야 했는데
57
그.것.은 바.로 시! 시였다
-----유배 시편 58[쪽지와 구멍]
'칠레 광부 33인이 700미터 지하 광산에 갇혔다 매몰된 지 한 달이 지났는데
그들은 애국가를 부르며 두려움을 견디고 있다 그 사이 딸아이 에스페란다가
탄생하고 그 가족들은 광산 위에서 힘내세요! 노래 부르고 광부들은 어둠속
에서 조국 칠레! 를 외치며 기적의 꽃이 피기를 기다리고 '
예상하고 있었다 밥줄이
저 밥줄, 언젠가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몸 가두어
끝내 제 목숨 거두어갈 것이라는 사실을
아슬아슬 외줄타기를 해야 했던 아득한 나날들
무너진 갱 속에서
오직 희망은 구겨진 쪽지 한 장뿐
‘살아있다’ 그 글귀 하나
애간장 다 태우며 기다리던 이들에게
살아있다! 기쁨을 안겨준 신의 목소리
단 몇 개의 낱말로 이루어진
그.것.은 바.로 시! 시였다
세상 사람들 울리고 가슴 설레게 한 명시 한 편
그런 명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선 낭떠러지
삶도 죽음도 곧 무너질지 모르는
그 유배의 공간에서
우정과 조국애가 꽃피어날 수 있었던 건
실오라기 구멍 하나 트여 있었던 까닭
글귀 한줄
고 작은 숨구멍이
하늘이었다, 시 그것
58
누가 저 짐승들의 비명 들은 적 있는가
-유배 시편 59[밍크에게]
밍크코트 한 벌에 밍크 쉰다섯 마리가 살처분당한다 고?
그렇다면 토끼 너구리 개 여우들은
평생 철창에 갇혀 있다가 죽어야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생목숨 산 나무에 묶고
핏물 뚝뚝 떨어지는 그 껍질 벗겨들고
히죽 웃으며'신선해 보이죠?'
돈 몇 푼에 수많은 목숨 위리안치 시켜야 하는
중국인들과 같이 자신도 모르게
그 무엇에 유배당한 여인네들의 허영
‘신선하다!’ 는 한 마디에 짐승들의 피눈물 맺히고
비명이 얼어 상고대로 매달린다
그 말에 소름꽃 피어나는 내 몸이
또 그들 울음의 유배지가 된다
오늘도 빙하기로 팝콘수다 튀기기 위해
밍크들의 비명 숨죽이는 모피 걸치고 나선다
죄 없는 한 생의 그물 성글게 짜다만
굵은 바늘귀들이
툭, 부러진 채 벌겋게 젖어 흔들리고 있다
어쩔 수 없는 방관자 그 왕 버들
머리카락 산발한 채 울부짖고 있다
마침 동물의 왕국
독수리들의 날 세운 부리들이
죽은 사람의 골수를 콕 콕 찌르고 있다
59
골무굿거리 한 마당 펼치다
-유배 시편60 [짜증바늘]
어허! 계남리 경주댁 저 대바늘들
날마다 골무의 가슴 한 귀퉁이 찔러댄다
뭐가 그리 다급한지 덩!덩! 꿍따꿍!
휘모리장단으로 몰아부친다
학용품 학비 제 때 못 대주는 부모는
삶의 낙오자, 얼마나 중죄인인가
어미의 찔린 가슴은 덩따꿍따! 덩덩 덩 따따!
자진모리로 피 솟구쳐오르고
‘뉘집 거지새끼야?’
한 마디 툭! 던지는 담임의 굵은 짜증 바늘에
숨 막힌 성혈바위 골무
그녀를 위로하는 듯 양철 지붕이 비를 때린다
덩, 덩기덕, 쿵기덕, 쿵따 쿵따 ,덩 따다다 쿵 따다다
어얼쑤! 굿거리장단 돌아간다
분노한 아버지의 꽹과리도 그랑 당, 그랑 당 깨갱 깨갱
폭풍을 휘몰아쳐오고
뒤란 감나무 놀란 가지들이 열 두발 상모 돌린다
불그리 취한 감잎들은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다시 춤을 추고
60
핏줄감옥
-유배시편 61[어느 무용수]
‘아들아, 나는 네 두 팔을 잘라냈단다 네 애비는 울 수도 없는 죄인이다‘
'아버지, 제 팔은 제 마음 속에 있어요 발가락으로 실을 꿰어 바느질까지 할 수 있는 걸요 새싹에 물주며 그 생명들과 교감하는 춤으로 무용수가 되었는 걸요'
목숨을 살리기 위해
아들의 썩어가는 두 팔을 잘라낸
중국 어느 아버지의 피눈물, 핏줄이란
서로를 옭아매는 쇠사슬감옥 같은 것인가
지체장애자끼리 각자 퍼즐조각들 서로 맞추어
무대에서 완전한 작품이 된다
한 알의 모래알이나 유리 조각일 뿐이었던 몸
서로 바라보면 피눈물 나는 그 시간을 갈고 닦아
영롱한 유리공예품으로 다시 태어난
세상 빛이 된 황양광, 그를 보면
탱자 가시 유배지가 오히려 빛발전소로 여겨진다
거기서 생산된 빛은 태양보다 몇 배 더 밝고 따뜻할 것이므로
61
벚꽃 그늘 아래서 자장면을 먹다
-유배 시편 62 [표절]
붕,붕, 붕 벌나비 꽃들의 봄교성
막 수정을 끝낸 꽃잎들 하르르하르르
짜장 묻은 내 나무젓가락에 내려앉는다
제 한 생이 지는 걸 도무지 두려워하지 않는다
절정 뒤 취한 여인의 눈빛으로 서로 한 몸이 되어 날아오르는 꽃잎, 꽃잎 시인들 모두 자리 깔고 무릎장단 맞춘다 얼~쑤! 더덩, 덩, 덩더꿍
'어와, 내 병이야 내 님의 탓이로다'
정철의 한 구절 표절하다 벌떡 일어난다
사월 햇살 봄사타구니 더듬더듬
도대체 나의님은 어디 위리안치되었는가
어절시구~ 남은 짜장에 붉은 포도주를 부어 휘젓는다 명자꽃접시에 담긴 하늘이 검붉은 장막 걷고 지상을 엿본다 바람과 꽃잎 까르르 밀고 당기는 소리에 기우뚱! 지구가 흔들린다
62
왜? 봄비는
---유배 시편 63[핵에너지]
누가 인간을 조롱하는가
왜, 애써 뇌 썩힌 숫자골머리 핵에너지를
방사능비로 되돌려주는가
제 꾀에 속아 넘어가는 인간들이여!
너희들이 진짜 괴물 아닌가!
해초멸치의 그 바닷속 내장 곪아 썩어문드러지게 하면서
투덜투덜 누가 누굴 향해 연초록깃발 흔들고 있는가
63
천안함은 바다로 귀환하시오!
-유배시편64[2010년3월26일21시22분경,천안함은서해백령도남쪽1.5km부근에서경비임무를수행하던도중함미에원인을알수없는충격을받고침수가발생한후침몰하였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여기 서해 연평도 바다 속은 너무 차갑습니다
이빨 딱, 딱 마주쳐 부러질 정도로
온 몸 꽁꽁 얼어붙고 있습니다.
다 부서진 천안함 껍질이라도 지금
내려 보내 주십시오
제발
덜, 덜, 덜 추워요!
그래도 귀신이라도 때려잡는
대한민국 국군 해병용사이기에 참아야합니다
두 주먹 불끈 쥐고 참겠습니다
이대로 여기서 나라를 지키겠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걱정하시지 마십시오”
64
단봉낙타는 어떤 사막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유배 시편 65 [곱추 난장이]
1.
이젠 사하라 사막도 그 어떤 사막도 두렵지 않다
어차피 곱추난장이라는 황량한 모래벌판에서
나는 태어났으니
날마다 휘몰아치는 모래 폭풍도 견뎌낼만하다
미역국 한 숟갈 먹기도 송구스런
어미의 가슴, 캄캄한 지하 갱도에 비하면
전갈들이 비웃으며 득실대는 인간 사막
기껏 일 미터 단신의 발뒤꿈치 깨물어도
까잇거! 하하 웃으리
2.
물어뜯어라
네 서슬 푸른 독기 단봉에 모아
모아서 인생처럼 짊어지고
오늘도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아 나선다
터덜터덜 땡비 사막을 걸어가는 동안
사람 전갈의 독은
빗장 걸어버린 벽 안에서
나 스스로 나를 만들고 있다는 걸
혼자 깨닫는 게 된다
세상 유배의 오지를 찾아다니는 한비야
3초마다 한 아이가 굶주려 죽어간다는
말의 뼉따귀 씹다보면
풀 한 포기 버틸 수 없는 모래벌판이 오아시스로
가끔은 신기루로 보이기도 한다
65
바람넝쿨장미
-유배 시편 66 [낙동강]
1.
아흔 여섯 해, 근 한 세기를 순응하다 흔들리며 분노하며 용서하며
살아온 강물 오늘도 삐그덕 삐그덕 자신의 낡은 풍차를 돌리고 있다
'너거 아부지는 마실에 숨어있고 혼자 아아들 셋 데리고 고 외딴 과수원에서 자는 한 밤중 총칼 든 빨갱이들이 우루루 몰려와 총구 들이밀며 돈을 요구했지 빨갱이는 아주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가까운 동네 아는 사람이었어 나중엔 총구 내리며 돈을 요구했지 얼마 전 홍수에 떠내려간 세간 살 돈인데 이것뿐이라며 그 당시 큰돈이었는데 오백원 내 놓으니 모두 고맙다며 돌아가더군
2.
그 이튿날 옆집에 그들이 나타났을 때 주인이 엉덩이 밑에 돈 깔고 앉아 주지 않았더니 불을 질러버렸지 하는 수 없이 과수원을 버리고 마실로 이사했는데 그 집지킴이 구렁이들이 따라 들어온 걸 삽으로 대가리 몽창 몽창 다 잘라 불에 태워버리더니 그 집이 폭삭 망해버리더라 난 나중 경찰한테 당당하게 말했어 돈을 주지 않으면 내가 내 자식이 죽는데 어쩔 수 없었다고 후유! 까딱 잘못하면 빨갱이 도왔다고 총살당할 수도 있었는데 그래도 운이 좋았지 좋았어'
한 깊은 강물의 피맺힌 한숨을 오지랖 넓은 오월 바람이 넝쿨장미 가지마다 붉게 핏빛으로 토해 놓는다
66
씹는다, 씹어 세상의 질긴 것들을
-유배 시편 67 [숨바꼭질]
1.
살결 야들야들 연하다 가끔 씹히는 힘줄 오히려 반갑다
모처럼 친정에서 뜯어온 상추쌈에 쇠고기 부채살 한 점 넣어
씹는다 씹을수록 살맛이 참기름과 섞여 달큰 고소하다 그런데
육즙은 쩝쩝거리며 왜 내 모습 비춰주는가 어른들께 그에게
또는 가까운 이들에게 이처럼 온 몸 다 바쳐 내 단맛 내어준
적 있는가 가끔 거칠게 씹히도록 성깔 맛 한번 보여준 적 있는가
은근히 따져 물으며
2.
물에 물 탄 듯 뻣뻣하고 싱겁기만 했던 나를 야무지게 씹는다
늘 적당히 구렁이 담 넘어 가기만 기다리던 거울 속 내 비겁을
쨍! 째쟁! 깨뜨린다
그러나 눈치만 키운 그는 결코 혼자 죽지 않는다 얼른 세포
분열하면서 제 몸 조각들 양심 뒷면에 꼭, 꼭 숨겨두고 떠난다
언제 끝날 것인가 숨 막히는 이 세상살이 숨바꼭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