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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정 숙, ] (jungsook48@hanmail.net)
경산 자인 출생
경북대 문리대 국어 국문학과 졸업
경주 월성 중학교 전직 국어교사
1991년 등단
1993년 계간지<시와시학>으로 신인상 수상.
<신처용가> <위기의 꽃> <불의 눈빛> <영상시집><바람다비제> <유배시편>시집과 [DVD] 출간 시극극본 [봄날은 간다] [처용아내와 손톱 칼] <시선집-돛대도 아니 달고> 제7시집<청매화 그림자에 밟히다>
2010, 1월 만해 ‘님’ 시인 작품상 수상
2015년 12월 23일 대구 시인 협회상 수상
포엠토피아. 시마을 , 서부도서관, 청도도서관, 북부도서관 시강의
지금 본리도서관, 대구문학아카데미 현대시 창작반 강의
시와시학시인회 회장
문헉청춘 봄호에서 집중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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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여왕과 여인의 향기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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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진평왕의 뜻을 받들어 신라삼국통일의 주춧돌을 세운 선덕여왕, 진덕여왕과 그리고 진평왕의 셋째딸로 백제 무왕의 사랑을 받아 국경을 초월한 사랑을 이룬 선화공주님과 그리고 흥덕왕의 사랑을 받아 사후 왕과 합장을 한 흥덕왕과 장화부인의 사랑, 헌강왕 때 처용의 바람기를 이겨낸 고독한 처용아내의 향기를 찾아봅니다. 신라 멸망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야유까지 한 몸에 받고 있는 통일신라 말기의 진성여왕 그러기 전 선덕과 진덕의 아버지인 진평왕의 가계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에 걸린 여인의 힘을 되짚어보는 소중한 기회일 것입니다. 그들의 진평왕 능과 선덕여왕 능, 흥덕왕릉을 찾아보고 가는 길에 황성공원 건너편 법흥왕 때 이차돈의 목이 떨어진 백율사와 금강산 굴불사지의 사면불에서 신라의 불교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보람 있는 일일 것입니다.
통일신라 때 그 영토가 강원도 까지 진흥왕의 순수비가 있다는 것은 신라 시대의 통일 염원이 얼마나 컸으며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고 밤을 세웠을까요. 그 위대한 신념이 있었기에 신라 천년이라는 역사를 이룩한 것입니다. 또한 그 거대한 노력이 멸망으로 가는 길을 되짚어보는 일도 좋은 공부가 될 것입니다.
왕릉 중에서도 진평왕릉과 흥덕왕릉이 가장 아름답다고 합니다.
진평왕
진평왕(眞平王,
565년? ~
632년, 재위
579년 ~
632년)은
신라의 제26대
임금이다. 성은 김(金),
휘는 백정(伯淨, 白淨, 白丁), 중국측 사서에는 진평(眞平)
[1]으로 기록되어있다.
진흥왕의 장손으로 아버지는 진흥왕의 장남인
동륜태자, 어머니는
갈문왕(葛文王)
김립종(金立宗)의 딸
만호부인(萬呼夫人)이고, 왕비는 복승갈문왕(福勝葛文王)의 딸
마야왕후(摩耶夫人)이다.
[2]
불교식 이름을 사용하여 자신의 이름은 백정이라 하고, 왕비는
석가모니의 모친의 이름을 따서
마야부인이라 하였다. 진평은 그의 시호로 알려져있으나
구당서에는 김진평이라 하여 그의 이름처럼 사용한 기록도 있다.
진흥왕의 장손이고
진지왕의 조카였다.
579년 7월부터
632년 1월까지 재위하는 동안
579년 7월부터
584년까지 조모(할머니)인
사도태후 박씨가
섭정(
수렴청정)하였고
584년부터
632년 1월 붕어할 때까지 친정을 하였다.
생애[
편집]
초기 삶[
편집]
아버지는
진흥왕의 아들 동륜태자이고, 어머니는
입종 갈문왕의 딸 만호부인이다. 만호부인은 다른 사람의 딸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통설인 입종 갈문왕의 딸이라는 설을 따르게 되면 그의 부친과 모친은 고모-조카뻘이 된다.
신라 진평왕 김백정은 태어나면서부터 얼굴이 기이하고 몸이 장대하였으며, 의지가 깊고 식견이 명철하였다.
[3]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장이 11척에 달했다 한다.
법흥왕이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신라 왕족의 이름에 불교적인 요소, 의미를 포함하여 짓게 되었는데, 진평왕 김백정의 이름은
석가모니의 아버지 백정,
마야 부인의 이름은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 부인, 또는 마하마야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진평왕 김백정의 동생들 역시
석가모니의 숙부인
백반·
국반의 이름을 그대로 본따 지었다.
579년 진지왕이 폐위되자
[4] 화백 회의를 비롯한 조정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며
579년부터
584년까지 조모(할머니)인
사도왕후 박씨가
섭정을 맡았다. 치세 초기부터 자신의 동생들을 비롯 측근들을 요직에 앉히고, 제도 개혁에 힘쓰는 한편, 수, 당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중반 이후에는
백제,
고구려와의 전쟁이 격화되어 백성들이 자녀를 내다파는 일 등이 벌어졌다. 말년에는
칠숙의 반란을 겪었다.
삼국사기는 정확한 사망 연대에 대해서
칠숙의 난이 일어난
631년과 이듬해인
632년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 )은 《삼국유사》에, 폐위된 진지왕(眞智王)이 사량부의 미인 도화녀(桃花女)와 사통하여 낳은 자식으로 소개되어 있다. 진평왕은 비형랑을 불러 궁중에서 살게 하고 관직을 주었지만, 비형랑은 밤마다 궁궐을 빠져나가 귀신들을 데리고 황천(荒川) 위에서 놀았다. 비형랑은 귀신들을 거느리며 왕명에 따라 강에 다리를 놓기도 하고, 길달(吉達)이라는 귀신을 관직에 추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길달이 자신의 일을 저버리고 여우로 변해 도망치자, 비형랑은 귀신을 시켜 길달을 잡아 죽였다. 이후로 귀신들은 비형랑을 두려워하여 모두 달아났다고 한다.
경주선덕여왕릉
동의어 선덕여왕릉 다른 표기 언어 慶州善德女王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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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고대/삼국 |
성격 |
왕릉 |
유형 |
유적 |
크기 |
지름 23.6m, 높이 6.8m |
별칭 |
선덕여왕릉 |
지정 (지정일) |
사적 제182호 (1969년 8월 27일) |
건립시기 |
신라시대 |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산79-2 |
분야 |
역사/선사문화 |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에 있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의 능.
[내용]
사적 제182호. 지정면적은 사적 제163호로 지정된 경주 낭산(狼山)의 전체 면적 82만 7,848㎡에 포함되어 있다. 무덤의 지름은 23.6m, 높이는 6.8m이다.
선덕여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덕만(德曼)이다. 제26대 진평왕의 맏딸로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이며, 진평왕이 아들없이 승하하자 추대로 왕이 되었다.
632년 왕이 되어 647년에 승하할 때까지 15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치고, 분황사(芬皇寺)를 창건하고, 특히 첨성대(瞻星臺)ㆍ황룡사9층탑을 건립하는 등 문화발전에 힘썼으며, 김유신ㆍ김춘추 등의 보필로 선정을 베풀었다. 죽은 뒤 낭산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에 의해 지금의 위치에 비정하고 있다.
선덕여왕은 죽거든 도리천(忉利天)에 묻어 달라고 했는데 신하들은 도리천이 하늘 위에 있는 산이기 때문에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왕은 도리천은 낭산의 산정이라고 알려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곳 낭산의 신유림(神遊林) 정상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문무왕 때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고 삼국을 통일한 후 신유림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건립하고 호국신(護國神)인 사천왕을 모셨다. 이후 비로소 선덕여왕의 유언을 이해하게 되었다. 사천왕이 있는 곳을 사왕천(四王天)이라 하고 그 위에 있는 부처님 나라를 도리천이라 한다. 이로써 낭산 정상이 도리천이라는 뜻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무덤의 외부모습은 흙으로 덮은 둥근 봉토분이다. 밑둘레에는 길이 30∼60㎝ 크기의 자연석을 사용해 2, 3단 쌓아올려 무덤의 보호석렬(石列)을 마련하였다.
* 선덕여왕 의 지기삼사
선덕여왕의 지혜로움에 얽힌 설화. 신이담(神異談) 에 속한다.
<<삼국유사 三國遺事>> 권1 기이편(奇異編) 에 수록되어 있으며, 세 가지 설화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첫째는 향기없는 모란꽃 이야기로, 당나라 태종이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세 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의 그림과 그 씨 석 되를 함께 신라에 보내왔다. 여왕은 그 꽃그림을 보고서 그 꽃이 향기가 없음을 예언하였는데, 이듬해 핀 그 모란은 과연 향기가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둘째는 몰래 침략한 적군을 미리 알아 섬멸한 이야기로, 영묘사(靈廟寺)근처 옥문지(玉門池)에는 겨울인데도 많은 개구리가 떼지어 울어 신하가 이 사실을 여왕에게 알리니 왕은 장병을 여근곡(女根谷)에 보내어 적을 섬멸하도록 하였다. 군사가 서교(西郊) 에 가니 과연 여근곡이 있고 적군 5백여명이 매복하고 있으므로 이를 섬멸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셋째는 왕이 자신의 죽을 날을 미리 안 이야기로, 왕은 생전에 자신의 죽을 날을 예언하며 도리천(도利川) 에 장사지내달라고 일렀다.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딘가를 물으니 왕이 대답하기를 낭산(狼山) 남쪽이라고만 하였다. 왕은 과연 예언한 날에 세상을 떠나고 신하들이 낭산 남쪽에 장사를 지냈다. 그로부터 10년 뒤 문무왕(文武王)이 사천왕사(四天王寺) 를 무덤 아래 세웠다.
불경에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 하였으니 신하들도 그제야 예언이 적중함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신하들이 세 가지 지혜의 해답을 물어보았는데 왕이 대답하기를, 모란꽃을 그리되 나비가 없으니 향기가 없음을 알았고, 노란 개구리는 병사의 형상이며, 옥문은 여자의 상징으로 음(陰) 이며, 백색은 서쪽을 가리키므로 적군의 사방 매복을 알았고, 양은 음속에 들어가면 죽게되어 있으니 무난히 진압할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이 설화는 선덕여왕이 불경이나 주역에 조예가 깊었음을 알려주는 설화이다. 일연(一然)은 삼색 모란꽃은 신라에 선덕(善德). 진덕(眞德). 진성(眞聖) 의 세 여왕이 있을 것임을 당제(唐帝) 가 헤아려 맞춘 것이라고 하여 당제의 지혜와 선덕여왕의 지혜를 함께 설명하고 있다.
경주 시가지 동쪽 분황사를 지나서 보문단지가는 길가에 오른편 멀리 왕릉이 보이고, 입구에는 진평왕릉이라 적혀있는 곳으로가면 신라통일의 기틀을 잡은 진평왕릉이 있고, 그 근처에는 설총의 묘도 있다.
진평왕의 천사옥대 설화는 삼국유사에 전한다.
그의 딸 선덕과 진덕여왕을 거쳐, 무열왕과 김유신. 그리고 문무왕이 등장하니 가히 신라 천년역사의 대 전환점에 있는 사람들이라 하겠다.
그 후 신문왕은 문무왕의 뒤를 이어 통일 신라를 반석위에 올렸고....
대구와 가까운 곳. 의성 고운사. 가창 남지장사. 와촌 불굴사가 신문왕 때 불교를 흥왕시키면서 지은 절이라한다.
선덕여왕 |
황룡사 9층 목탑 건립 / 첨성대 건립 / 김춘추가 당으로 원병 요청하러 감 |
선덕여왕(善德女王, ?~
647년, 재위:
632년~
647년) 또는 선덕왕(善德王)은
신라의 제27대
왕이며,
한민족 최초의
여왕이에요.
성은 김(金),
휘는 덕만(德曼)이며
진평왕과 마야부인(摩耶夫人)의 장녀이며
태종무열왕의 큰이모입니다.
다음은 진덕여왕입니다.
진덕여왕(眞德女王, ?~
654년, 재위:
647년~
654년)은
신라의 제28대
여왕이다.
성은 김(金),
휘는 승만(勝曼)이죠.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과 월명부인(月明夫人)의 딸입니다.
다음은 진성여왕 입니다.
진성여왕(眞聖女王, ?~
897년)은
신라의 제51대
여왕(재위
887년~
897년)이다.
성은 김,
휘는 만(曼) 또는 원(垣)이이며
경문왕과 문의왕후 김씨의 딸이자
헌강왕과
정강왕의 여동생입니다.
부인사 [팔공산 수태골]
창건연대 및 창건자는 미상이나 예로부터 선덕묘(善德廟)라는 사당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된 사찰로 추정된다.
불교가 흥왕하였던 신라와 고려 때에는 약 2,000명의 승려가 수도하였다고 하며, 고려 현종 때부터 문종에 이르기까지 이곳에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완성했던 고려 초조대장경(初彫大藏經)의 판각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초조대장경은 몽고의 침입 때 대부분 불타 없어지고, 현재 일본 경도(京都)의 남례사(南禮寺)에 1,715판이 전해지고 있다.
전성기에는 39개의 부속 암자를 관장하였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정기적으로 승려들만의 승시장(僧市場)이 섰다는 구전이 전하여지지만, 몽고의 침입 이후 중건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다는 사실 외에는 중창 및 중수의 역사가 전래되지 않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원래의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약 400m에 위치한 암자 터에다 1930년대 초에 비구니 허상득(許相得)이 중창한 것이다. 1991년선덕묘를 선덕여왕숭모전으로 좀 더 크게 옮겨 지었고, 선덕여왕 진영을 새로 조성하였다.
진덕여왕
휘(諱)는 승만(勝曼)이고,
진평왕(眞平王)의 모제(母弟)인
갈문왕 국반(國飯)의 딸이며 어머니는
월명부인(月明夫人) 박씨(朴氏)이다.
선덕여왕이 재위하던 647년에 비담(毗曇)이 반란을 일으켜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金庾信)이 이를 진압하였으나, 반란의 와중에 선덕여왕이 승하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여 연호를 태화(太和)라 하였으며, 반란 주모자인 비담을 비롯한 30명을 처형하였다.
즉위한 뒤 고구려와 백제가 계속 도발하자 김유신을 중심으로 백제와 대적하게 하는 한편, 648년(진덕여왕 2) 김춘추를 중국 당(唐)나라에 보내어 원군을 요청하여 나당동맹(羅唐同盟)을 맺었다. 649년
당나라를 본떠 복제(服制)를 개편하였고, 650년에는 법민(法敏)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여왕이 친히 지은 《태평송(太平頌)》을 바치고 당나라 연호인 영휘(永徽)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652년 김춘추의 둘째아들 인문(仁問)을 당나라에 보내어 친교를 더욱 돈독하게 하였다.
한편 국내적으로는 김유신으로 하여금 국력을 튼튼히 하여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왕이 죽은 뒤
사량부(沙梁部;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에 묻혔는데, 당 고종(高宗)은 비단 300필과 함께 사신을 파견하여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추증하였다.
진덕여왕과
셋째딸 선화공주와 무왕
선화공주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나옵니다
신라 진평왕의 세째딸인 선화공주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답니다
그녀의 사랑을 얻기위한 서동(무왕의 아명)은 서라벌로 가 마를 어린애들에 주며
선화공주가 밤마다 서동을 찾아와 안고 간다는 해괴한 향가를 부르게 하여 장안에 퍼지게 하고
이소문을 들은 진평왕은 대노하여 선화공주를 귀양을 보내고 귀양가는 선화공주를
서동이 데려와 부인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서동요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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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부인과 경주흥덕왕릉
다른 표기 언어 慶州興德王陵
시대 |
고대/남북국 |
성격 |
왕릉 |
유형 |
유적 |
면적 |
6만 1,983㎡ |
지정 (지정일) |
사적 제30호 (1963년 1월 21일) |
건립시기 |
통일신라시대 |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산42 |
분야 |
역사/선사문화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에 있는 신라 제42대 흥덕왕의 능.
[내용]
사적 제30호. 지정면적 6만 1,983㎡. 무덤의 지름은 20.8m, 높이는 6m이다. 흥덕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수종(秀宗)이라 하였다. 제41대 헌덕왕의 아우이며, 왕비는 장화부인(章和夫人)이다.
826년에 왕이 되어 836년에 승하할 때까지 10년간 재위하였다. 승하 뒤 먼저 죽은 장화부인의 무덤에 합장하였다고 하는 기록에 따라 이 무덤으로 비정되고 있다.
무덤의 외부모습은 비교적 큰 둥근 봉토분으로, 무덤 밑둘레를 따라 병풍처럼 다듬은 판석(板石)을 사용하여 무덤 보호석을 마련하였고, 판석 사이사이에 탱석(撐石)을 끼워 판석을 고정시키고, 아울러 각 탱석에는 방향에 따라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다.
판석과 탱석 위에는 갑석(甲石)을 올려 보호석을 마무리하였다. 호석 밑둘레를 따라 일정한 간격을 띄워 방사형으로 깐돌[敷石]을 깔았고 주변을 따라 돌난간을 세웠으나 난간기둥은 많이 없어졌다. 난간기둥에는 위아래에 둥글게 구멍을 뚫어 기둥돌을 끼웠으나 지금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무덤의 네 모서리에는 각각 돌사자를 한 마리씩 배치하였고 전방의 좌우에는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을 각 1쌍씩 배치하였으며 무덤의 전방좌측에는 능에 관한 돌비[石碑]를 세웠던 받침돌인 귀부(龜趺)가 남아 있으나 손상이 심하고 비신(碑身)과 그 위에 얹어놓은 이수(螭首)는 없어졌다. 표식물의 양식 및 배치로 보아 신라 제33대 성덕왕릉과 제38대 원성왕릉을 많이 모방하였다.
진성여왕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진성여왕(眞聖女王,
865년? ~
897년 12월 30일 (
음력 12월 4일), 재위:
887년 ~
897년)은
신라의 제51대
여왕이다.
성은 김(金)씨,
휘는 만(曼) 또는 원(垣)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경문왕과 문의왕후 김씨의 딸이자
헌강왕과
정강왕의 여동생이다.
생년은 미상이나 그녀의 부모인
경문왕과 문의왕후가
860년에 혼인했고 진성여왕이 그들 사이에서 3번째 자식인 점 그리고 문의왕후가 870년에 사망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볼때
860년대 중후반정도로 추정된다.
887년부터
897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887년부터
888년까지
이벌찬(
각간)
김위홍(金魏弘)이
대리청정을 맡았고
김위홍(金魏弘)이 서거한
888년부터
897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낭혜화상탑비[1] 등에 의하면 성군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군주로 즉위한 이듬해인
888년에 죽은 각간
김위홍(金魏弘)과의 사이에서 양패 등의 아들을 두었다.
목차
1 생애
2 공저
3 가족 관계
4 관련 작품
4.1 드라마
4.2 영화
5 참고
6 주석
생애
진성여왕은
경문왕과 문의왕후의 소생이다.
정강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서거하자
정강왕의 유언에 따라
887년 음력 7월에 왕위를 이어받아 즉위하였다. 소행이 좋지 못하고 음란하기 그지없었던 진성여왕은 색욕에 빠져 수많은 미소년들을 징집하여 처소로 불러들인 뒤 음사를 즐기는 데에만 주력하여 나랏일을 제대로 돌보려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여왕과 관계를 맺은 정부들과
여왕에게 아첨하는 간신들의 무리가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여 상벌이 함부로 행해지고, 뇌물이 난무하고, 관직을 매수하는 등 조정의 기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렇듯 왕실과 조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자 자연스레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가는 데다가
여왕의 심한 낭비로 국고가 텅텅 비어 각 지방의 호족들을 닦달하여 세금 납세를 독촉하였다. 그러자 민심은 점차 흉흉해져 여기저기서 민란과 도적이 숱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방의 호족들은 각자 독자적 세력을 키우는 데 전념하였다. 조정에서는 그들을 도적이라고 부르며 군대를 파견해 진압을 하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 뒤로 조정의 힘은 겨우 수도인
서라벌 주변에 한정될 정도로 급격히 쇠락해갔으며, 지방 호족들은 서로 간에 힘겨루기 양상을 보였다. 치열한 싸움 끝에 살아남은
견훤과
궁예가 각자 나라를 세우자
후삼국 시대의 서막이 열렸다.
이렇듯 나라가 분열해가자
894년 진성여왕은
최치원을 아찬으로 임명하여 그의 조언에 따라 조정을 일신하고자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던 도중
897년 음력 6월, 병마에 시달리던 진성여왕은
헌강왕의 서자(庶子)인
요를 왕태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러고는 그해 897년 음력 12월 4일 (양력 12월 30일)에 승하하였다.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낸 막내아들 양패(良貝) 외에도 아들들이 있었지만 자신의 아들들에게 왕위를 전하지 않고 오빠인
헌강왕의 서자에게 왕위를 전하였다. 각간
김위홍과
대구화상에게 명하여 《
삼대목》을 편찬케 하였으나 전하지 않는다.
헌강왕 때 신라향가 처용가와 처용아내
서라벌 밝은 달에 밤깊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 보니 가라히 네히어라
둘은 내것이다만 둘은 누구것인가
본디 내것이다만 빼앗으니 어쩌리꼬
웬 생트집? [정 숙]
-처용아내 1 [신처용가]
가라히 네히라꼬예?
생사람 잡지 마이소예.
달이 휘영청 청승떨고 있지예.
밤이 '어서! 어서!' 다구치미 깊어가지예.
임카 마시려던 동동주 홀짝홀짝
술삥이 혼자 다 비았지예.
용광로 부글부글 끓는데 임이 안오시지예.
긴 밤 지쳐 살풋 든 잠, 찔레꽃 꺾어 든
귀공자를 잠시 반긴 거 뿌인데예.
웬 생트집예?
셔블 밝은 달 아래서
밤 깊도록 기잡 끼고 노다거린 취기,
의처증 된기라예?
사청 봄바람인 싸나아는 간음 아이고,
외로움에 속 골빙 든 여편네
꿈 한번 살짝 꾼 기 죈가예? 예?
休火山이라예─ [정 숙]
-처용아내 2 [벼랑 끝의 꽃]
보이소예,
지는예 서답도 가심도 다 죽은
死火山
인 줄 아시지예? 이 가슴속엔예
안직도 용암이 펄펄 끓고 있어예.
언제 폭발할지 지도 몰라예.
울타리 밖의 꽃만 꽃인가예?
시들긴 했지만 지도 철따라 피었다 지는
꽃이라예.
시상에, 벼랑 끝의 꽃이 예뻐보인다고
지를 꺾을라 카는 눈 빠진 싸나아 있다카믄
꽃은 꽃인가봐예?
봄비는 추적추적 임 발자국 소리 겉지예.
벚꽃 꽃잎이 나풀! 나풀! 한숨지미
떨어지고 있지예. 혼차 지샐라 카이
너무 적막강산이라예.
봄밤이라예. 안 그래예?
제비캉, 꽃뱀캉
-처용아내 65 [춤바람]
지가예, 서방님 찾으러 안갔십디꺼.
월궁캬바레예.
불빛이 뻔쩍뻔쩍카디 마카 도깨비춤 춥디더.
막 흔들어싸미 정신없는 기라예. 요상합디더.
안개가 끼디
비누방울이 지를 무지개 우에 태우디예.
그카디예, 아 그러시 금새 또 제비캉, 꽃뱀캉,
삥글삥글삥글 지 눈알이 막 돌아가디예.
뺄가이 실눈 뜬 빛살들이 흐느적 흐느적카데예.
설마 서방님이 제비 아이겠지예?
도깨비들 꼬시가 방망이 얻어볼라꼬 그캅니꺼?
꽃뱀 비늘이 데기 이뿝디더.
물리머, 무리머 우얍니꺼, 예?
우야꼬, 지도 도깨비 아입니꺼?
우야믄 꽃뱀이 되겠심니꺼?
아무나 몬하는 기라꼬예? 알았심더만도
지발 꽃뱀인테 물리지 마이세이.
첩사이라꼬예1
-처용아내 77 [여성해방]
첩사이나 간첩이라꼬?
낮에 집 지키는 사람을?
우야다 그래됐는공?
재주라곤 살림하는거 뿌인데 밖에서 머하끼예?
그라고 보이 식당, 꼴푸장, 수영장, 노래방 모두
여자들이네. 여자들이 버글버글하네.
시상 천지예, 언제 시상이 이래됐는공?
서방님, 지보고 집 안지키믄 쫓가낼 듯 카시디
우예된 깁니꺼.
피바가지 모린다꼬 천대,
춤 몬춘다꼬 괄시, 지는 갈 데가 없어예
식당 거치 반찬 몬한다 괄시 마시고
한분 델꼬 가보이소.
가마 집 지키고 있으믄 빨리 노망든다꼬?
역신강 노닥거린다꼬? 천지가 노래지네.
퍼뜩 그케주지 이 빙시이를 인자 우야노?
자갈마당이 어덴공?
-처용아내 80 [태산이 높다하되]
서방님이 등산 간다 카고,
뒷잡이 꽃밭에 물주러간다 카고,
앞집이 경마장 간다카미 나갔다 카는데
자갈마당이 어데 있는공?
집안에도 두리뭉실한 산이 있고
빌로 볼품없어도 꽃밭과 튼튼한 말 안있나?
동네 싸나아들 와, 해필 와, 자갈마당에 가노?
집에서 냄비따고, 굴뚝 소지하믄
덧나능가 머?
눈물로 핀 들국화가 더 애처럽고 더 이뿌다꼬?
길섶에 채송화가 더 근지러분데 잘 긁어준다꼬?
싸나아들이 철드자 망령든다 카디
갈수록 태산 아이가.
지 암만 노푸다 케싸도 다 내 손 안에 안있나.
부처님 손바닥 아잉가베.
자갈마당:대구에 있는 색시집 동네.
지:제, 저의
절시구! 좋다!
-처용아내 81 [장구춤]
서방님,
자갈마당에서 등산하니라 줄줄 땀 흘리실 때
지는 장구쟁이인테 갔디더.
첨엔 간지리 듯 뚜디리디예
점점 중중모리에서 휘몰이로
소리하미
장단 마추미
몰아치미, 하도 기막히서예
지 궁디이가 지절로 춤을 덩실덩실 추디더.
절씨구! 좋다!
소리가 절로 나디더.
지화자 좋다!
서방님예,
지캉 장구춤을 추시는 기 더 안낫겠능게?
우포늪에서
어느 날 문득 깨달았던 것이다. 생각 없이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흐르는 물은
꽃을 피울 수 없다는 것을,
푸우욱 썩어 늪이 되어 깊이 깨달아야 겨우
작은 꽃 한 송이 피울 수 있으리라
퍼뜩 생각났던 것이다
일억 사오천 만 년 전 낙동강 한 줄기가 무릎을
탁, 쳤을 것이다. 분명히
달면 삼키고 쓰면 버릴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
제 속에 썩혀서 어느 세월엔가
연꽃 한 송이 꽃피울 꿈을 꾸었던 것이다
조상의, 조상의 뿌리를 간직하려고
원시의 빗방울은 물이 되고
그 물 다시 빗방울 되어 떨어져 물결 따라
흘러가기를 거부한 늪은, 말없이
흘러가기를 재촉하는 쌀쌀맞은 세월에
한 번 오지게 맞서 볼 작정을 했던 것이다
때론 갈마바람 따라 훨훨 세상과 어울리고저
깊이 가라앉아 안슬픈 긴긴 밤이었지만
세월을 가두고
마음을 오직 한 곳으로 모아
끈질긴 가시들을 뿌리치고, 기어이 뚫어
오바사바 세월들이 썩은 진흙 구덩이에서 기어이
사랑홉는 가시연꽃 한 송이 피워내고 만 것이다
흰 소의 울음징채를 찾아[정 숙]
딸아, 네 몸도 마음도 다 징이니라
한 번 울 때마다 둔탁한 쉰 소리지만
그 날갯죽지엔
잠든 귀신도 깨울 수 있는 울림의
흰 그늘이 서려 있단다
살다보면
수많은 징채들이 네 가슴 두드릴 것이니
봄눈을 이기려는 매화 매운 향이
낙엽까지 휩쓸어가려는 높새바람의 춤이
한파를 못 견디는 설해목의 목 꺾는 울음소리가
이 모든 바람의 징채들이 너를 칠 것이나
그렇다고 자주 울어서는 안 되느니라
참고 웃다가 정말로 가슴이 미어터질 때
그럴 때만 울어라, 단지 울고 울어
네 흐느낌 슬픔의 밑뿌리까지 적시도록
징채의 무게 탓하지 말고
네 떨림의 소리그늘이 은은히 퍼져나가도록
눈 내리는 이 밤, 아버지
그 말씀의 거북징채가 새삼 저를 울리고 있습니다
인생
의자 하나 끌고 가려다
죄인처럼 의자에 끌려 다닌다
어린 엉덩이 하나 걸칠 수 없는
작은 의자
평생토록
마음 편히 앉아보지 못한 채
안동 간 고등어
맛이 있다는 것은
간이 잘 들었다는 말이다
간이 잘 절여졌다는 것은
간잽이가
소금을 알맞게 잘 뿌렸다는 말이겠지만
고향을 떠나
그 곳까지 험하고도 먼 길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보니
그 성깔, 생 속 다 죽이고
저절로 푸욱 절여져서
그 맛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심히 흘러가기만 하는
시간과
칼바람에다 비린내와 썩은 냄새풍기는
삶의 현장만한
간잽이가 또 어디 있겠는가
나부상의 눈빛 날마다 폭발한다
-전등사 1
고통이란 금세 길들여지는 것
쪼그리고 앉아 절 추녀 받들며 끙끙대는 것도
잠시, 필요할 땐 언제라도 사랑이란 도구를
쓰는 세상의 남정네들 비웃는 벌거벗은 여인
돈 몇 푼에 마음까지 바칠 줄 믿었던 도목수의
어리석음 바람에 흘려보내고. 밤이면 부처님
신심의 높이 눈 맞추려 꿇어앉는다
발등에 입맞춤 한다
나무속에 갇힌 주모는 몸과 마음
아낌없이 천년 불공을 드리는지 그러나
눈빛만은 날마다 싱싱하게 되살아난다
삼존불은 발아래 놓인 불전들 그녀에게 모두
되돌려주지만 그녀는 이미 그녀가 아니다
깊은 바다 무늬진 푸른 몸 장삼 자락이 감추며
무명삼매의 눈 뜬다
석가모니불은 흙탕물 몇 번 가라앉혀야
지장수 된다는 걸 손가락 하나 들어 말없이 보이신다
몸으로는 *간대로 꽃뱀 비늘의 독기 녹일 수 없다는 듯
*함부로
*강화도 전등사 나부상; 자신의 돈을 가지고 달아난 주모를
도편수가 나부로 조각하여 절 추녀 밑에 올려놓았다고 함.
안개꽃, 흰 그늘
-유배 시편 46
조용히 악보만 넘기고 있는
그림자
연주자에게
조명과 찬사를 돌려주기 위해
있는 듯 없는 듯
너는 누구를 위한 페이지 터너인가
저 빛나는 주인공들을 위해
스스로 흰 그늘이 되어 떨고 있는 너
제 가슴 쓰다듬으며
영혼 깊은데서 두드리는 통증
그 페이지를
밤마다 남몰래 몰래 넘긴다
숟가락 섬
--유배시편 53
사람의
섬과 섬 사이
숟가락엔 어느 노가다의 탄식이 남아있는가
메마른 영혼의 물기 마르지 않게
기꺼이 메아리가 되어주는
범종의 파문처럼
숟가락 달그락거리는 소리 들으면
삶과 죽음
몸과 몸 사이의 생존을 위해
평생 밥을 실어 나르는
하늘님의 고단한 노동이 보인다
새삼 밥 한 알의 무게 달아본다
밤바다가 날개 펼치면
---유배시편 63
동성로 밤거리를 잠재울 줄 모르는
밤파도아저씨
싸구려 옷자락 펄펄 펼치며 날아오르기 직전
‘자 단돈 만원, 마-----ㄴ원, 배추 한 잎이면
당신이 바로 꽃보살!’
제 몸 어딘가 숨겨져 있다고 믿는
날개 찾느라
몸부림치며 소리 지르다가
밥알 한 숟갈
그 아득절망이 살아야할 질긴 이유이므로
다시 날개 퍼덕거려 본다
그 순간만은 밤하늘 낮게 아주 낮게
별들도 같이 내려앉고 있다
갯바위
----유배시편 65
바다는
산을 갉아 먹으려 쉼 없이 몸부림이고
산은 그 바다 밀어내느라 잠 한숨 못 들고
그 틈새 작은
돌부처 하나 가부좌 틀고 앉아
산은 산으로서
바다는 바다로서
서로의 경계선, 지켜야 한다며
미세기*의 시달림으로
제 온 몸 찢기고 부서지는 줄 모르고
세월없이 목탁 두드리며
경전파도 뒤적인다
*밀물 썰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