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처용가는 발표되기 전 10년간의 사회실정이었고 그런 것들을 소설처럼 연작으로 엮은 작품입니다.
내방가사에 더 가깝다고 볼까요? 순서대로 읽어보시면 결국 부부가 서로 화합해야한다는 그런 내용이지요.
무딘 칼도 다시 벼리고 툭수바리 된장찌게처럼 구수하게 그렇게 살자는 것입니다.
현대시학에 발표한 향피리 연작시와 부메랑 그외 작품
관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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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옥문 깨뜨리셔요
------향피리 1
이 몸, 그대가 불어주지 않으면 한갓
죽은 대나무일 뿐
다시 혼불 지피며 되살아나고 싶어요
석양을 지우면서 밤이 번져나고 있어요
어서 입김을 불어 넣어주셔요 뜨거이
더 뜨거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쓰레기 더미에서 치민 그대 분노 곰삭히며
마침내 혼절할 듯 떨리는 몸짓으로
차갑게 굳은 제 살에 숨결을, 피를 돌게 해주셔요
동짓달 긴 겨울 밤바람에 시달리면서
부대끼면서 막힌 숨구멍의 석녀, 하도 허망해서
더 이상 소리 내지 못했어도 한 때 떨림의
황홀함 잊지 못하는 밤의 낭떠러지
쌓인 미움 다 태우며, 그 벼랑 끝이
비록 명부일지라도 활짝 꽃피우렵니다
차갑게 닫힌 제 옥문 두드리셔요.
살이 떨리면 두근두근 심장이 깨어나지요
톡, 쏘면서 질 붉고 달착지근한 꽃뱀처럼
속 파고들어 꽁꽁 언 가슴 녹여드리겠어요
그득히 채워드릴래요 그대,
어둔 밤 달아오르기 기다리는 이녁은 향피리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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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녀의 노래
--향피리 2
두려워요 거듭 태어나 그대 숨결로 꽃 피며
뜨거운 피 간절히 흐르고픈 이 몸이어요
빈 잔 채울 길 없어 스스로 깨뜨려서 얻는
그릇의 홀가분함으로 눈물을 녹여버릴 때
그대의 잔 향기로이 채울 힘 생기더이까
저 별빛으로 눈물 삼키면
*애왇봄이 둥근 달 키워 밤길 불 밝히며 굽이굽이
긴 아리랑 고개 넘어가더이까
질그릇 하나 깨어진다고 세상이 무너지더이까
정갈하게 흙을 빚어 뜨겁게 새로 구우라지만
은애의 입김, 반색하며 흐느낄 수 없는
한 맺힌 이 마디 제발 풀어주시어요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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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맞이
----향피리 3
꽃잎 밟히는 소리에도 제 눈썹 가늘게 떨려요
슬며시 저무는 해 나무라며 산마루 노을이나 쓸고 있어요
죽은 대나무 꽃피우지 못하는 님는 이미 님이 아닙니다
이 몸은 저승 넘나들며 흐느낄 수 없어
얼음 동굴에 갇힌 석녀
온 산천 불 지르는 날, 빈 구멍마다
자진모리 휘모리 무등 태워 새 봄맞이 함께 가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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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숲에서
-----향피리 4
깊은 밤 연민의 몸부림으로 여름 소나기
제 몸을 물어뜯으며 대숲을 흔들고 있어요
깨어나셔요, 이제 깨어나셔요
대숲 흔들리면 온 하늘 흔들리지요
오늘도 그대는 마디마디 지른 칸을 밟고
비상할 슬픈 꿈만 꾸고 있나요
오셔요, 어서 오셔요
이 몸 온전한 떨림의 향피리 하나 되어
좁은 그대 가슴 속, 온 누리 울리고 싶어요
빈 방 지키는 싸늘한 떨켜 보듬고
땅을 밟으며 다시 뿌리를 뻗어 보시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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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별의 간이역에서
-향피리 5
긴 밤 내내 사라진 별 찾아 헤매다가 지치어
슬픈 가락이 울고 있어요.
간밤 태풍이 느닷없이 사랑채
대숲 쓰러뜨리더니 든든했던 울타리 짓밟혔어요.
아스스한 어둠이 떨어진 뭇 별들을
찬 시멘트 바닥에 모아놓고 자책의
회초리 휘두르는 시간,
당신은 지금
어느 별의 간이역에서 홀로 떠돌고 있나요?
22
혼불 소리
--------향피리 6
짐작해보셨나요? 황조롱이의 발톱에 채인
들쥐처럼 숨 한번 크게 내쉬지 못하고 죽어가는
삶의 생지옥에서의 오십년 세월 기다리며
눈멀고 귀멀어 살아온 세월들
*흐놀며 한 뜸 한 뜸 봄꽃 수놓아 임의 옷
박음질하고 있는 제 모습 짐작해보시나요
눈먼 세월 그나마 살아 만날 수 있는 것은
바람결로 당신이 불어대는 혼불 소리 때문이예요
*그리워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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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롱불 밝히는 사연
----향피리 8
달빛이 어둠 몰아내며 입김 뜨거워지면
동백꽃잎 황홀히 열리면서 그리움
간드러지게 흐느끼는 향피리, 레테의 강 건너는
영혼들의 기억 흔들어 깨운다는 것을
보리깜부기 같은 밤 동백꽃봉오리 똑똑 분질러
*보쟁이는 승냥이들, 숨결 거친 도시의 숲길에서
둥지 잃어버린 *열쭝이의 부등깃은
높새바람에 날려 찢어지고,
그래도 떨어진 동백 꽃 이파리 무참히 밟고
가신다면, 기어이 칼이 되리니 잊으셨나요?
비바람에 지친 돌 날카로이 신경세우다 보면
언젠가 칼이 된다는 것을
달빛향피리
-향피리 9
아시는지요
바르르 떨며 빛나는 저 달빛 한 올 한 올의
비밀을, 그리움 다 못 이루고 떠난 영혼들의
*휘휘한 눈빛이라는 것을
거듭 태어난 향피리가 이승과 저승 넘나들며
잠든 혼령들 흔들어 깨워, 간절한 기원으로
달이 차오를 때 비로소 슬픈 영혼들이 땅을 밟지요
창 바깥에서 떨며
향피리의 속 떨림 밤새도록 울려요
달빛이 되지 못하고 동굴 속에 갇힌 혼들은
떨어지는 눈물방울로 제 가슴 석순을 가꾸지요
달빛유리 기둥을 밟고
그대 창가 서성이게 될 먼 훗날 기다리면서
오르시어요, 달빛 *오솔하게 눈부신 이 밤 백년 묵은 여시가 되고 싶어요.둔갑술로 그녁 호리는 처녀 되어 몽실몽실 눈웃음 헤프게 걸친 건초더미로 유혹하여 밤새도록 그녁은 행운목 꽃 살 냄새 연주하시고 이녁은 질펀히 땀에 젖도록 흐느끼겠어요. 꽃잎이 다 떨어져야 씨앗 *암만해진다며 빈 구멍마다 닦고 문지르며 속 비웠어요.
이제 가실의 *이울진 푸새 향기에 취해 빼앗긴 세월 잊으시어요. 산신령과 수피아들의 솔버덩 베어 콘크리트 벽, 물침대보다 물레방아에 장단 맞춰 달빛 휘감고 쿵덕! 쿵덕! 방아 찧어 죽은 대나무 꽃피워보셔요.
시린 바람만 끌어안고 홀로 뒹구는 향피리에 불그레 취한 *푸나무 서리 풀벌레들이 못 견디도록 황홀한 입김 불어넣어주셔요. 어둔 맘 이 밤 대책 없이 피어나는 *온-달, 길 못 떠나게 그녁 가슴에 꼬옥 꼭 품으소서!
*무섭도록 호젓하게 *여물어 *시든 풀 *풀과 나무 우거진 사이 *보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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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향피리 11
"돌아보지 말 것을"
‘뒤를 돌아보지 말 것을’
아파트 벽 할키며 피맺히도록 울부짖는
저 회오리바람
오르페우스, 그대인가요
찢어지는 가슴으로 귀 기울이고 있는
제 전생은 에우리디케
꽃들은 흐드러지다 못해
저물고 있는데
기다리셔요
이 몸안에서도 바람싹이 자라고 있어요
조금씩, 조금씩 부풀어 오르면서
봄파도 키우고 있어요
더 이상 돌아보지 마시고 훨훨 날아가셔요
이젠 이 나무요정이 찾아가겠어요
어린 이파리들 편히 잠들 수 있도록
피리 소리나 따스히 들려주시어요
씨방의 노래
--향피리 11
내려오소서! 오를수록 대나무 칸 좁아지고 하늘은 큰기침으로 물러앉아 도포자락에 차운 눈발만 흩날리나이다. 진흙을 밟으시어 뿌리 깊이 발 뻗으시고 대차게 한번 죽어서, 다시 태어나소서. 눈바람을 가두어 전생을 넘나들며 심금 울리는 대금이 되어, *이운 풀 향기에 생기 살아나도록 울타리 되어주소서. 당신이 머무신 흙 자리 기름지게 하시어 어린 죽순들 떨지 않게 하소서.
밤낮, 향피리의 떨림 켜 살뜰히 껴안으며 씨방 뜨거이 불어대시고 대숲에 바람 자면 자갈밭도 덩달아 고요하더이다. 당신의 헛기침만이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그 허방에서 내려오소서! 제발 눈멀겠어요. 비 개인 뒤 가녀린 싹이 눈뜨면서 흙을 밀어내고 바위 두드리며 하늘 너비와 깊이를 재고 있어요. 땅이 무너지면 하늘도 *들피지고 죽은 대나무가 대숲 살린다는 걸 세상물너울에 시달리다보면 *믄드시 깨닫게 될 것이어요.
* 굶주려 기운이 쇠약해지다 * 시든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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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홀씨의 꿈
--향피리 12
끝을 지워버린 하늘로 미처 여물지도 못한 씨앗을 홀홀 떠나보내면서 민들레는 살길을 전혀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푸근한 어미 품 떠난 홀씨들, 저허하며 무작정 바람에 너울지다가 직조공장의 딱딱한 보도 불럭 위에 제여곰 떨어져 마구 밟히면서 *날호여 흙 속으로 발 뻗어야 살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게 됩니다.
후려치는 물푸레나무 회초리의 맵고 찬 살바람 이삐 참고 견뎌야 *아야라 잔풀나기바람이 햇볕 따스하게 실은 아지랑이 타고 와 어둔 세상 화안히 불 밝힌다는, 오직 믿음 하나로 제 꿈의 씨앗 정성스레 가꿉니다.
그 자라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
깨어진 유리 조각의 부릅뜬 눈 두렵지 않습니다
비록 몇 푼 품지 않은 *암물 하나지만
*여투면서 끈질기게 꿈꾸는 자만 꽃 피워
흥겨워질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그 *즈시 돋을볕 되어 눈부십니다
*천천히 *겨우 새싹 틔우는 봄바람 *보얀 빛을 띤 샘물 *아껴쓰고 모아두다 *얼굴
나부상의 눈빛 날마다 폭발한다
-전등사 1
고통이란 금세 길들여지는 것
쪼그리고 앉아 절 추녀 받들며 끙끙대는 것도
잠시, 필요할 땐 언제라도 사랑이란 도구를
쓰는 세상의 남정네들 비웃는 벌거벗은 여인
돈 몇 푼에 마음까지 바칠 줄 믿었던 도목수의
어리석음 바람에 흘려보내고. 밤이면 부처님
신심의 높이 눈 맞추려 꿇어앉는다
발등에 입맞춤 한다
나무속에 갇힌 주모는 몸과 마음
아낌없이 천년 불공을 드리는지 그러나
눈빛만은 날마다 싱싱하게 되살아난다
삼존불은 발아래 놓인 불전들 그녀에게 모두
되돌려주지만 그녀는 이미 그녀가 아니다
깊은 바다 무늬진 푸른 몸 장삼 자락이 감추며
무명삼매의 눈 뜬다
석가모니불은 흙탕물 몇 번 가라앉혀야
지장수 된다는 걸 손가락 하나 들어 말없이 보이신다
몸으로는 *간대로 꽃뱀 비늘의 독기 녹일 수 없다는 듯
*함부로
*강화도 전등사 나부상; 자신의 돈을 가지고 달아난 주모를
도편수가 나부로 조각하여 절 추녀 밑에 올려놓았다고 함.
14
인연의 감옥 깨뜨리며
-전등사 2
서까래 밑 주모의 나부 상에서 살 비린내 밤낮 흐느끼며 법당 안으로 흘러들어 부처님 전에 하소연하다가 돌덩이에서 깨어 제발 눈을 뜨시라고 얼어붙은 온 몸을 입김으로 뜨겁게 불어보다가 제 사특한 불심으로는 어쩔 수 없어 다시 추녀 밑으로 들어가 시지프스의 받침대가 된다
천년을 추녀 밑 배회하며 한 마리 늑대가 된 그 사내, 도목수 산발한 채 바람 되어 흐느끼는 소리에 부처님들 *지즈로 바위 깨트리고 나와 온 몸 돌고 있는 푸른 피톨 내보이신다 그들의 비린 인연 삭히려고 수평선 트여오는 햇살 한 줌 잡으시고 두 가슴 위 말갛게 얹어 미소 지으시며
*드디어
15
花蛇登仙
----전등사 3
사랑이란 저 스쳐가는 바람결 같은 것
천년 시간을 전등사의 서까래 들어 올리도록 발가벗겨 쪼그리고 앉혀진 몸
눈바람이 몰려와 칼끝으로 빗금 그어놓거나 꽃바람이 애무 하다가 찰싹 뺨을 떄리기도 한다
햇발은 그 분홍빛 살결 얼렸다가 녹였다가 마음대로 주무르다가 어둠 속에 가둬버린다 법당의 염불 소리는 저승처럼 아스라이 들리고 생밤을 깨물며 돌아다니는 도깨비들과 어울리면서 제 몸에 박힌 가시들을 뽑는다
이 갈며, 알록달록 고운 무늬로 문신을 그려 시시로 풍화되는 몸 길들인다 드디어 몇 천 번의 허물벗기로 거듭 태어난다 나부상의 나무껍질에 갇힌 속 살결 되살아나고 이젠 주모의 솜털 하나하나 눈을 뜬다
추녀 밑 꽃뱀의 전생 모든 인과 벗어두고
지글거리는 지옥의 혀 끊어버리고
한 마리 저승새로 날아오르려
16
悲歌
-전등사 4
거문고 가락 눈발에 툭, 끊어진다
그 끈적끈적한 인연의 줄 어쩌지 못해
전등사 처마 밑을 떠나지 못하는
저 사내, 도편수
제 사랑의 깊이 재어보지 못하고 세상의 여자들을 벌레 먹은 장미라며
꽃봉오리까지 마구 짓밟더니
남몰래 새 한 마리로 거듭 태어나고 있는 주모보다 자신이 먼저 사랑이란 주는 것이란 걸 깨닫기엔 너무 끈질긴 상처의 깊이와 집착, 달콤한 죽음의 길 찾지 못해 천년 시간은 흐르고
밤마다 꽃잎 질근질근 씹으며 자신이 깎아 만든 나부상의 연옥에 갇혀 너덜너덜 헤진 제 옷자락 쥐어뜯는다 언젠가 세상 한판 뒤집어 볼 바람, 미친바람을 주문으로 외면서
일 쪽마루에 앉아 <br>
제 가슴 태울 마른 나뭇잎을 찾아 <br>
꺼진 듯 숨은 불씨들의 번득이는 <br>
눈빛 감추느라<br>
노도의 바다 건너 산그림자만 품고 기다렸을 <br><br>
서포, 김만중<br>
긴 세월 간직한 그의 불씨에 불붙여주려고<br>
찾아온 한 여자<br>
지 먼저 불이 붙어 타오르고 있는가<br>
온 몸 젖어 달아오르고 있다<br>
독도
이제와 새삼 다께시마로
강제 창시개명당한
그 가슴 밑바닥에서
생체실험당한 우리 핏줄들의
원한맺힌 통곡소리 들려온다
유관순 언니
피묻은 저고리 밤낮 펄럭이며
대한독립만세 부르고 있다
그 들끓음 속에서도
민들레 홀씨
대마도로 날려 보내는가
파도와 갈매기 울음이나 벗 삼아
홀로 동해를, 땅끝을 지키는
대한의 남아
독도여
팔공산 서봉
도심 한 복판에 우뚝 솟은 절벽
풀 한 포기 자랄 틈 주지 않는 콧대센 그
옹고집이 숨을 콱, 콱 막히게 한다
멋모르고 오르려다 깨지는 숱한 등반객들
발 디딜 곳 없어 미끄러지기 일쑤
절정 2
팔공산 동봉
정이라곤 바람이 다 깎아 먹어버린
절벽, 그 사내
혼자 타오르다가 지친
어느 가랑잎이 안겨 주었는지
흐드러진 구절초 꽃 한 다발 받아들고
두근대는 심장 어찔할 줄 몰라
굵은 외눈을 껌벅거리고 있다
거센 파도에 시달리면서, 부대끼면서
막힌 숨구멍 뚫어버린
향피리
하도 허망해서 텅 비워버린 구멍들
한 때 떨림의 그 황홀함 잊지 못하는
밤의 떨켜로
쌓인 미움 다 태우며, 벼랑 끝이 비록
죽음일지라도 활짝 꽃피우렵니다
차갑게 닫힌 제 옥문 두드리셔요
살이 떨리면
두근두근 심장이 깨어나지요
톡, 쏘면서 질 붉고 달착지근한 코냑이 되어
압력솥 달군 열판이 되어
꽃뱀처럼 그대 속 파고 든 불 칼 녹여드리리
사랑! 그득히 채워주셔요 그대,
어둔 밤 달아오르기 살뜰히 기다리는
향피리여요
석녀 2
______멍에
두려워요 거듭 태어나 님의 입김으로 꽃 피며
뜨거운 피 간절히 흐르고픈 향피리, 기다리는
빈 잔의 충만함과 스스로 깨뜨려서 얻는 그릇의
홀가분함으로 생의 속임수가 준 분노와 슬픔,
눈물을 녹여버릴 때 님의 잔 향기로이 채울 수
있는 힘 생기더이까 슬픔은 별빛으로 눈물은,
둥근 달 키워 밤길 불 밝히며 굽이굽이
긴 아리랑 고개 넘어가더이까
잊을 수 없어요! 냉이 흰 꽃잎 짓밟던 금빛 도금의
무자비한 구둣발, 밤 내 걸어둔 빗장 살피며 불면으로
치욕의 밤 씹으면서 움푹 패인 발자국에 쏟아진 오물
무자비하게 꽂힌 쇠기둥들 뽑히지 않아 심연에 어둠
숨겨두고 핥으며 찢어발기며 멍에를 짊어집니다
질그릇 하나 깨어진다고 설마 세상이 깨어지랴 면서
정갈하게 흙을 빚어 뜨겁게 다시 구워라 지만
사랑의 입김, 반색하며 흐느낄 수 없는 한 맺힌
이 마디 제발 풀어주시어요
석녀 3
_______위안부
싸늘히 식어지면서 스스로 어둠이 되어버린
빈 구멍마다 눈물이 고였어요 절벽 끝에서
바람이 그 눈물방울 흔들며 즐기는 동안
한 순간에 사라질지라도 눈물은 떨어지는
별빛을 간직하고 그 별빛이 고여 뒤안길에
갇힌 한숨을 풀어줍니다
그 누구를 위한 변기였나요? 사막의 선인장은
가시라도 굵게 세워 살아가지만 끝없이 지긋지긋한
어둠의 날들 굶주린 이리떼의 위안부 외로운
하이에나들을 위해 고장난 변기 그 기억들이
눈바람 불러모으다 허파 뒤집혀 죽은 향피리여요
뜨거운 입김 불어 넣어주셔요 굳은 살 박힌
성감대를 활활 불사르는 ............
지하 감옥에 갇혀 새벽 없는 향피리가 애절히
흐느끼며 흑 공단 수틀에 학을 수놓으면
저 푸른 하늘로 훨훨 날아갈 수 있나요?
석녀 4
________고속세차장에서
잊으셨나요? 달빛이 어둠 몰아내며 입김 뜨거워지면
동백꽃잎 황홀히 열리면서 그리움 간드러지게 흐느끼는
향피리, 레테의 강 건너는 영혼들의 기억을 흔들어
깨운다는 것을
보리깜부기 같은 밤 동백꽃봉오리 똑똑 분질러 짓밟는
승냥이들, 숨결 거친 도시의 숲길에서 둥지 잃어버린
어린 새와 고속세차장에서 꼼짝없이 당해야 하는
찻집 소녀 주리에
그래도 떨어진 동백 꽃 이파리 무참히 밟고 가신다면,
기어이 칼이 되리니 잊으셨나요? 비바람에 지친 돌
날카로이 신경곤두세우다 보면 언젠가 칼이 된다는 것을
님은 달빛이 되어 무너진 다리 부드러이 애무하소서!
향피리, 허벅지게 흐느끼면서 끊어진 인연 질기게
새로 이으며 작은 호롱불 밤새도록 밝히오리다
석녀 5
______봄맞이
꽃잎 밟히는 소리에도 시방 눈썹 한 올 흔들리지
않는 대숲, 슬며시 짧아지는 해 나무라며 산마루의
붉은 노을이나 쓸고 있어요 며느리밥풀 꽃의 하얀
나비, 꿀맛에 두 손 비비며 애걸복걸입니다
건성으로 뜨거운 님의 입김으로 제 속에 숨은
살모사를 이기지 못해 자궁 속 박 박 긁어 갓 맺힌
꽃봉오리 찢어발깁니다
죽은 대나무 꽃피우지 못하는 님은 성 불구자
저승 넘나들며 흐느낄 수 없어 살모사에 휘감긴 석녀
얼음 동굴에 갇힌 사랑이 꽁꽁..., 제발 불 지피소서!
온 산천 화안히 산불 지르는 날, 빈 구멍마다 숨은
독사 불태워버리고 자진모리 방아에 아지랑이 무등
태워 새 봄맞이 함께 가소서!
희고 붉은 찔레꽃 흐드러지며 그 향기,
향피리를 원 없이 울리어 죽은 대나무
꽃피우소서!
석녀 6
________사랑
두려워요! 님은 사랑이지마는 그 이름으로 밟히는
온갖 상처들 봄바람 부드러운 입김에 속절없이
무너져 쌓인 꽃 이파리들 후려치는 굵은 빗줄기에
맨몸 내던진 채 사랑, 질근질근 씹고 있어요
가끔 번개 불처럼 번득이는 야생 짐승의 날카로운
그 눈빛 남몰래 뾰족 뾰족 날 세우는 그 송곳니
아! 사랑, 발자국 소리 두려워요! 그래도 온 몸으로
기다려지는 이 낭패감 뒤로 짜릿해지는 제 귓불이 끝내
미워, .......
깊은 밤 사랑의 이름으로 어린 죽순 잘려나가는 비명이
메아리치며 대숲을 흔들었어요 깨어나셔요, 깨어나셔요,
그러나 대숲 흔들리면 세상이 흔들린다며 마디마다 지른
칸을 밟고 하늘로 올라갈 궁리에만 빠져있었지요 그래도
달콤한 님의 입김 기다리는 향피리,
수치스러워요 두려워요
석녀7
______엄지발가락
들리시나요? 슬픈 가락이 사라진 별 찾아 헤매다가
지치어 울고 있어요 간밤 태풍이 느닷없이 사랑채
대숲 쓰러뜨리더니 든든했던 울타리 참혹하게
짓밟혔어요
지하철역 싸늘한 어둠이 떨어진 뭇 별들을 찬
시멘트 바닥에 모아놓고 증권 안내지 덮어주며
쉬어라! 인심씁니다 실은 자책이 회초리를
휘두르는 시간, 튀어나온 엄지발가락의 자존심이
되려 뻔뻔스러워 낡은 가죽부대에 퍼부은 독주로
세상이, 온 세상이 황홀하다 무너집니다
암내가 부는 향피리의 구슬픈 가락 밟으시고
돌아오소서! 어둠을 뿌리치면 빛이 보입니다 같이
대숲을 가꾸어요 님이 술 취하면 세상이 비틀거려요
내려꽂히는 빗줄기 속에 접시꽃 우산 펴고 기다립니다
아직 태풍은 토끼 몰이하듯 꼬리 휘두르며 후려칩니다
행여 향피리 소리 찢어지더라도 님이 짐작하소서!
석녀 8
______지뢰 밭
짐작해보셨나요? 황조롱이의 발톱에 채인 들쥐처럼
숨 한번 크게 내쉬지 못했을 죽은 삶, 생지옥에서의
오십년 세월이 풀리던 날 통곡이 넘쳐 억장이 막혔지만
그 가락 흥겨웠어요 저물던 그리움들이 별에게 서시를
암송했어요
한 뜸 한 뜸 봄꽃 수놓으며 님의 옷 박음질하고 있는
모습 짐작해보시어요 질퍽하게 흐느끼던 피리 소리가
지뢰밭도, 삼팔선도 다 지워버린 거지요
눈먼 세월을 그나마 살아 만날 수 있는 것은
용담초 꽃피워내면서 애간장 끓는 젖가슴들이
밤낮 불어대는 향피리 소리, 철의 장벽을
무너뜨리면서 백두산에서 한라산 넘나들며
혼불을 지피고 개개비들이 그 흐느낌 물고물고
푸른 하늘을 천지연에서 백록담까지 아니
몽블랑까지 널리 퍼뜨린 탓이어요
낮달2
이미 왕만두만큼 지워진
제 모습에서
무얼 잃었는가
앞으로 얼마나 더 버려야하나
밤새 골몰하느라
여직 서편 하늘에서 어정거리는
달에게
빛을 뿌려 눈부시게 한 뒤
살짝 낮달의 살점 한 점을 또
얼른 베어 삼킨다
급히 먹다 체했는지, 해님의
낯색이 창백하다
맹세
봄바람
간드러진 몸짓에
흐물흐물
녹는
칼,
석녀 9
_______물레방아
오르시어요, 달빛 눈부신 이 밤 백년 묵은
여시가 되고 싶어요 둔갑술로 님 호리는
숫처녀가 되어 몽실몽실 눈웃음 헤프게 걸친
건초더미로 님을 유혹하고파요 밤드리 님은
모처럼 행운목 꽃 살 냄새 연주하시고 향피리,
질펀하게 땀에 젖도록 흐느끼고
꽃잎이 다 떨어져야 씨앗 여물어진다며
빈 구멍마다 닦고 닦으며 속 비웠어요
가을의 시든 풀 향기에 취해 빼앗겨버린
세월을 잊으시어요 산신령과 수피아들의
솔버덩 베어 콘크리트 벽, 물침대보다
물레방아에 장단 맞춰 달빛 휘감고 쿵덕!
쿵덕! 방아찧어보셔요 죽은 대나무
꽃피워보셔요
시린 바람만 끌어안고 홀로 뒹구는 향피리에게
불그레 취한 가을 풀벌레들이 못 견디도록 황홀한
입김 불어넣고 있어요 눈부신 이 밤, 대책 없이
핀 보름달, 밤 길 못 떠나게 님의 가슴에 꼬옥
꼭 품으소서!
석녀 10
_____________대금
내려오소서! 오를수록 대나무 칸 좁아지고
하늘은 큰기침으로 물러앉아 도포자락에 차운
눈발만 흩날리더이다 진흙을 밟으시어 대차게
한번 죽어서, 다시 태어나소서 눈바람을 가두어
전생을 넘나드는 대금이 되어, 시든 풀 향기에 생기
살아나도록 울타리 되어주소서
님이 머무신 흙 자리 기름지게 하시어 어린
죽순들 떨지 않게 하소서 밤낮, 향피리는 님의
떨켜 살뜰히 애무하고 님은 향피리의 씨방 뜨거이
불어대시고 대숲에 바람이 자면 자갈밭도
덩달아 고요하더이다
제발 내려오소서! 눈부시어요 비 개인 뒤 가녀린
싹이 눈뜨면서 흙을 밀어내고 바위까지 두드리다가
하늘의 높이 갸웃거려요 땅이 무너지면 하늘도
무너진다는 것 그리고 죽은 대나무가 대숲
살린다는 걸 파도에 몇 번 시달리다보면 절로
깨닫게 될 것이어요
사랑
뭔가 심상찮다
당음지가 수선스럽게 들떠있다
물에서도 꺼질 줄 모르고 부푸는
불덩어리,
제 꽃봉오리 숨기려
연잎이 가시 날카로이 세워
치마폭 넓히며 서성이는데
지독한 가시 틈 기어이 찢고 뾰족이 올라서는
보랏빛 입술,
가을 햇살들이 몰려 플래시 터뜨리고
길 떠나는 바람들이 핸드폰 번호 적어주며
입맞춤하며
서로 아우성이다
뜨거운 가슴 열리는 날 기다린다고
황홀한 고통 물밀 듯 터져 나올 때
그 때를 누가 알리!
서산 마루에 걸터앉은 낮 달이 빙긋이 웃는다
가시들 잔뜩 긴장한다
*당음지;;경산시에 있는 연못
따돌림
산에서
길을 잃었다
순간, 그 그늘 좋았던 참나무들이
하늘 가리더니
일제히 가시들을 세워 다짜고짜
찌를 자세였다
숨었던 어둠들이 바짝 다가서며
사방을 에워싸고
오르는 길도
내리는 길도
다 묻어버렸다
시든 냉이 풀까지 외면하며
하얀 솜털을 일으켰다
휴, 구역질 끓는 쓰레기하치장이 내겐
천국이던 것을....
향기
음식쓰레기를 쏟으면서
숨을 막았더니
그 악취,
세상살이 냄새가
악착같이 기다리다가
내 숨구멍 사정없이 찌른다
그립구나!
적막히 산골 지키며
바위를 등에 업고
글썽한 눈망울로
숨어 우는 바람들을 감싸는
야생 난초의 그
은은함이여!
추억
춥고
긴 겨울 밤
화롯불에 몇 알씩 아끼며
구워먹는
알밤,
목구멍 뜨끔하게 막다가
눈시울 뜨겁게도 하면서
시린 옆구리에
몽클몽클 안개꽃 피워 올린다
석녀 11
_______________풋사랑
내 말의 뼈 속에 숨은 가시가
한 꽃다운 청춘을 살해했던 적이 있었어요
대학 이 학년 무렵이었을까요? 외딴 과수원을 끼고 도는 자갈밭에서
가을 바람에 긴 머리 휘날리며 멍석 깔고 앉아 가을볕과 공기놀이하던 논두렁 콩을 콧노래로 살피고 있었는데 냇물 건너 코스모스 핀 언덕에[집 대문 맞은편] 자주 앉아있던 마을 소년이 하얀 쪽지를 주었어요
‘사랑합니다’
단 한마디에 대뜸 얼음짱처럼 준엄하게
‘공부나 열심히 해라!
그는 대학 재수를 준비하는 어린 청년이었어요 나에겐 코흘리개였고 감히 오르지 못할 나무를 올려다본다고 쾌심하다 생각했었지요
이듬해 초봄 재시험을 본 그가 돌아온 새벽 뒤 안에서 목을 메어
세상 하직했어요 그는 삼대 외동이었고 난 죄의식이 전혀 없었지요
살아오면서 말의 가시에 찔려 온몸 가시 투성이 된 뒤에 사
코스모스 꽃잎 모질게 찢으면서 서 있는 그 푸른 옷자락, 하얀 얼굴이
석녀의 가슴 찌르기까지 참 기인 시간이 흘렀어요
그가 언제부터 쓰디쓴 풋사랑의 독약을 마신 걸까요? 쪽지를 건네기까지 끓어오르는 시간은 또 얼마나 길었을까요? 짐작도 못한 채 내뱉은 무심한 말의 가시에 찔린 불쌍한 청년, 그 죄의 댓가로 결혼 후 한 이십 년 벙어리처럼 말의 화살을 거부하지 못했던가요?
붉게 노을지는 이 저녁 답, 새삼 진실로 다가서는 하얀 쪽지가 그리워요
그 어둠의 시간들을 기억하는 코스모스 꽃봉오리들 아직도 피어나지 않고 있대요 지금까지 벼르고 있었을까요? 이미 내 심장에 꽂힌 가시들이 더 강하게 힘을 가하네요 오늘 밤 향피리 신명나게 불어 죽은 그 청춘, 반드시 살려야겠어요.
어느 홀씨의 꿈
끝을 지워버린 하늘로
미처 여물지도 못한 제 씨앗을 홀홀 떠나보내면서
민들레는 살길을 전혀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푸근한 어미 품 떠난 홀씨들,
두려움에 떨며 무작정 바람에 밀려다니다가
직조공장의 딱딱한 보도블럭 위에 떨어져 마구
밟히면서 무작정 흙 속으로 발 뻗어야
살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게 됩니다.
후려치는 물푸레나무 회초리의 맵고 찬 겨울바람을
잘 참고 견뎌야 봄바람이
햇볕 따스하게 실은 아지랑이 타고 와
어둔 세상 화안히 불 밝힌다는, 오직
믿음 하나로 제 꿈의 씨앗을 정성스레 가꿉니다
꼬르륵 꿈 자라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
깨어진 유리 조각의 위협이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끈질기게 꿈꾸는 홀씨들만이 노오랗게
샛노랗게, 꽃 피워 향피리 흥겨워질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마냥 행복합니다
빛나는 그 얼굴에 햇살 눈부십니다
석녀 14
_______첫 키쓰
ufo를 보았다
오, 신비로운 그 광채
섬광을
아무도 보지 못했단다
순간,
달빛이 은빛 솜털을 호호 불어가며
당음지로 쏟아져내려
가시연 꽃봉오리 쏙 내민 입술에
불을 붙였다
못물이 끄지 못하는
불덩이,
불로써 끌 수밖에
그날 밤부터 나의 별, 하나
밤하늘에서 빛나기 시작했다
향피리,
울음에도 길이 있다는 걸 알았다
석녀 15
_______방황
시인의 시화
정 숙
신 내림굿을 기어이 받고 말았다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말못하고 죽은 처녀 귀신인가
처용 아내의 억울한 혼령인가
작두 날 위에서 돼지머리 콧구멍 속에서
대나무 가지 몸살나게 흔들며
굿판을 벌인다. 횡설수설
그래도 끓는 피 가라앉지 않는지
밤마다 향피리 절절히 울며
살풀이춤을 추다가 혼절하기도 한다
가을 바람이 슬쩍 속삭이고 꼬리 감춘다
남근을 잘라야한다고
밤낮 모르고 파고드는 내 시의 남근을
선무당이 사람 잡는단다
손길 닿는 것마다 순금으로 굳어지지 말고
파닥파닥 되살아나 울며, 웃으며, 꿈꾸다가 때론
나목이 되어 찬바람 회초리로 끊임없이 제 내면을
다스리도록 기원하는 아, 그런 무당이고 싶다
깊은 호수의 앙금들을 꿰뚫어볼 밝은 눈, 가지려면
밤 내 잠들 수 없다
석녀 15
_______바람
멈추시어요
어제의 태양이 오늘 먹구름이 되더니
아름다운 깃털 다 뽑혀 흩날리는 은행나무가
앙상한 뼈대 후려치며 치욕에 떨고 서 있어요
그 슬픔의 누더기로 치장한 생크림 케익이
한 잔의 쓰디쓴 에스프레소 커피를 삼키며
창 바깥을 바라보고 있어요
눈바람 휘몰아치는 지금 이 순간
녹두 어린 떡잎이 땅을 밀어 올리고 있을 것이어요
언젠가 산을 무너뜨리겠다는 꿈 키우면서
흔들림 멈추시고 옷깃을 바로 잡으시어요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일으킨다면
어린 새싹들이 곧 힘을 키울 것입니다
보시어요, 바람이
허방다리 집고 선 나무들 뿌리뽑는다지만 결국
열매들과 잎들만 떨어집니다
결빙의 계절
얼음이 얼음끼리 굳게 손잡아도
물결은 그 아래서 흐르고
부드러이 님은 향피리 불어 혼불을 지피시면
그 흐느낌, 깊이 숨은 어둠의 뿌리들을 찾아
지하 감옥 끝까지 나서오리다
석녀16
--- 티베트버섯
꿈의 어디쯤이 욕망으로 가는 길목일까요?
새벽, 검은 는개의 유혹 뿌리치지 못하는 죠앙 마두와
그 슬픔 짊어지겠다는 라비크, 그들은 내 인생의
꿈이었다가 이젠 덩굴손이 되어 밤마다 차가운
벽을 타고 오르려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기껏 10센티의 정사각형 벽을 발로 차며 그들은 끊임없이
세포 분열입니다. 뽀얀 우유로 검은 어둠의 덩어리에 순전히
믿음을 심어 끝내 간암 환자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으로
변화시킨 티베트버섯의 욕망이 오늘따라 위대해 보입니다.
아랑곳없이, 흰 어둠을 씹으며 제 꿈의 뿌리내리느라 분주한
욕망의 끈질김에 귀기울이다 잠 못 이루는 향피리,
나이를 잊고 탱글탱글 부풀어오르는 젖무덤이 두렵습니다.
제 덩굴손들이, 너무 외로워 혼수상태에 빠진 어느 적막한 이의
어둠을 밝힐 달콤한 수밀도 과원이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곧 통 바깥으로 넘쳐 나올 그들을 꿈 잘려버린 지하철의
맨발들에게 나누리라 중얼거립니다.
석녀 17
______달빛
아시는지예
바르르 떨며 빛나는 저 달빛 한올 한올의
비밀을
그리움 다 못 이루고 떠난 영혼들의 외로운
눈빛이라는 것을
거듭 태어난 향피리가
이승과 저승 넘나들며 잠든 혼령들 흔들어 깨워
간절한 기원으로 달이 차 오를 때
비로소 슬픈 영혼들이 땅을 밟지예
밤새 유리창 바깥에서 떨며
향피리의 떨켜 밤새도록 울려예
달빛이 되지 못하고 동굴 속에 갇힌 눈물들은
떨어지는 눈물 방울로 석순을 가꾸지예
그 유리기둥을 밟고
님의 창가를 서성이게 될 먼 훗날을 기다리면서
글썽이는 눈, 저 눈빛들
달빛 눈부시게 외로운 밤이거든
그리운 이여, 창문을 살몃 열어두셔예
넝쿨장미
-----향피리 19
몇 번의 겨울을 끌어안아야
名技가 되려는지요?
그리움으로 맺힌 연두 빛 잎사귀들이
초록으로 짙어지면서 젖 몽우리를 키우고 있어요
바람이 고무풍선을 부풀리면서
국도변 철조망을 딛고 또 딛고 올라가며
어설피 웃고 있는 향피리들을
뜨겁게 불어대고 있어요
그 흐느낌 가히 요염해서
시간의 발걸음 느려터지고......
마주 선 오동나무
하루에 몇 번씩 불끈불끈,
자신이 부끄러워 퍼렇게 짙은 잎새로
맨몸을 가리고 있어요
_________사랑초
날은 저물고,
원시 처녀림의 질 빛깔 같이 선명한 분홍 꽃잎이
힘없이 고개를 수그립니다.
꽃은 본시 밤에 피는 것이어서 인지
신혼 첫날밤 족두리 쓴 신부가
신랑의 손길 기다리는 모습
다소곳하게 보입니다.
황촛대의 떨림 사이로
비단 스치는 소리 들리는 듯 귀기울입니다.
매화꽃
쏟아지는 시간의 불화살에
장미나무 이파리가 제 꽃봉오리들을 숨기지만
철없는 꽃봉오리들 살짝 고개 쳐들고 뒤돌아본다
어느새 떨어지는 꽃이파리들
매 순간이 전투태세라
화산돌처럼 구멍 숭숭한 내 심장에 먼지 하나 심는다
몸 깊숙이 파고드는 화독 이기기 위해
그 사이
꽃잎들 물결 따라 흐르며
하프를 연주한다
1
28
가을 풍경화
---향피리 13
샛노랗게 질린 은행나무 한 그루
쏟아지는 짓푸른 바다를 머리에 받쳐 이고
파들파들 떨고 서 있습니다 그 아래
이미 자벌레에 갉아 먹히고
햇빛에 베여
단풍든 줄 꿈에도 모르는
낡은 향피리,
파르르 자지러지는 은행잎을 주워 모읍니다
멀리 번지점프에 매달린 소녀
하늘파도에 휩쓸리며 지르는
비명 소리에
따가운 가을 햇살이 마구 잘리면서도
겨울로 가는 제 바퀴 잠시도 멈출 줄 모릅니다
노란 물감을 입에 문 바람이
무덤 주위를
삼베도포 자락 빛깔로 색칠하면서
시간의 흐름에 반항하듯 소용돌이 칩니다
하루살이 연가
-------향피리 14
살펴주시어요
풀물 빳빳하게 먹인 모시도포자락 거두시고
발밑을 내려 보시어요
가로등이 제 덫에 걸려든 것들의 기름으로
어둠을 태워버리는 그 아래
한 남자 긴 의자에서 신문지 이불삼아 잠들어
있어요 젊은 날 꽃봉오리도 맺은 적 있고
씨앗도 더러더러 뿌린 적 있어요
*바드라이 방향 없이 몰아치는 태풍에 밀려
남의 뒤만 따라다니는 그림자도 될 수 없어
투신해 죽은 불나방과 누워있어요
그들은 자신의 기름으로 세간의 어둠 잠시
불 밝혔던 일 모른 채 하찮은 존재 자책하다가
숨통 조이며 죽어가고 있어요 제발 곰방대
두드려 삿대질만 말고 부서진
가족사진틀 품고 한숨 쉬는 그들 살펴주셔요
아소님하, 그늘이 아무리 넓고 깊어도
한 *뉘 불빛이나 쫒다가 눈 돌칠 새
*죽사리 마무리해야 하는 우린 같은 이슬방울이어요
*위태로이 *생애 *죽고 사는 일
29
넝쿨장미
-----향피리 19
몇 번의 겨울을 끌어안아야
名技가 되려는지요?
그리움으로 맺힌 연두 빛 잎사귀들이
초록으로 짙어지면서 젖 몽우리를 키우고 있어요
바람이 고무풍선을 부풀리면서
국도변 철조망을 딛고 또 딛고 올라가며
어설피 웃고 있는 향피리들을
뜨겁게 불어대고 있어요
그 흐느낌 가히 요염해서
시간의 발걸음 느려터지고......
마주 선 오동나무
하루에 몇 번씩 불끈불끈,
자신이 부끄러워 퍼렇게 짙은 잎새로
맨몸을 가리고 있어요
거센 파도에 시달리면서, 부대끼면서
막힌 숨구멍 뚫어버린
향피리
하도 허망해서 텅 비워버린 구멍들
한 때 떨림의 그 황홀함 잊지 못하는
밤의 떨켜로
쌓인 미움 다 태우며, 벼랑 끝이 비록
죽음일지라도 활짝 꽃피우렵니다
차갑게 닫힌 제 옥문 두드리셔요
살이 떨리면
두근두근 심장이 깨어나지요
톡, 쏘면서 질 붉고 달착지근한 코냑이 되어
압력솥 달군 열판이 되어
꽃뱀처럼 그대 속 파고 든 불 칼 녹여드리리
사랑! 그득히 채워주셔요 그대,
어둔 밤 달아오르기 살뜰히 기다리는
향피리여요
석녀 2
______멍에
두려워요 거듭 태어나 님의 입김으로 꽃 피며
뜨거운 피 간절히 흐르고픈 향피리, 기다리는
빈 잔의 충만함과 스스로 깨뜨려서 얻는 그릇의
홀가분함으로 생의 속임수가 준 분노와 슬픔,
눈물을 녹여버릴 때 님의 잔 향기로이 채울 수
있는 힘 생기더이까 슬픔은 별빛으로 눈물은,
둥근 달 키워 밤길 불 밝히며 굽이굽이
긴 아리랑 고개 넘어가더이까
잊을 수 없어요! 냉이 흰 꽃잎 짓밟던 금빛 도금의
무자비한 구둣발, 밤 내 걸어둔 빗장 살피며 불면으로
치욕의 밤 씹으면서 움푹 패인 발자국에 쏟아진 오물
무자비하게 꽂힌 쇠기둥들 뽑히지 않아 심연에 어둠
숨겨두고 핥으며 찢어발기며 멍에를 짊어집니다
질그릇 하나 깨어진다고 설마 세상이 깨어지랴 면서
정갈하게 흙을 빚어 뜨겁게 다시 구워라 지만
사랑의 입김, 반색하며 흐느낄 수 없는 한 맺힌
이 마디 제발 풀어주시어요
석녀 3
_______위안부
싸늘히 식어지면서 스스로 어둠이 되어버린
빈 구멍마다 눈물이 고였어요 절벽 끝에서
바람이 그 눈물방울 흔들며 즐기는 동안
한 순간에 사라질지라도 눈물은 떨어지는
별빛을 간직하고 그 별빛이 고여 뒤안길에
갇힌 한숨을 풀어줍니다
그 누구를 위한 변기였나요? 사막의 선인장은
가시라도 굵게 세워 살아가지만 끝없이 지긋지긋한
어둠의 날들 굶주린 이리떼의 위안부 외로운
하이에나들을 위해 고장난 변기 그 기억들이
눈바람 불러모으다 허파 뒤집혀 죽은 향피리여요
뜨거운 입김 불어 넣어주셔요 굳은 살 박힌
성감대를 활활 불사르는 ............
지하 감옥에 갇혀 새벽 없는 향피리가 애절히
흐느끼며 흑 공단 수틀에 학을 수놓으면
저 푸른 하늘로 훨훨 날아갈 수 있나요?
석녀 4
________고속세차장에서
잊으셨나요? 달빛이 어둠 몰아내며 입김 뜨거워지면
동백꽃잎 황홀히 열리면서 그리움 간드러지게 흐느끼는
향피리, 레테의 강 건너는 영혼들의 기억을 흔들어
깨운다는 것을
보리깜부기 같은 밤 동백꽃봉오리 똑똑 분질러 짓밟는
승냥이들, 숨결 거친 도시의 숲길에서 둥지 잃어버린
어린 새와 고속세차장에서 꼼짝없이 당해야 하는
찻집 소녀 주리에
그래도 떨어진 동백 꽃 이파리 무참히 밟고 가신다면,
기어이 칼이 되리니 잊으셨나요? 비바람에 지친 돌
날카로이 신경곤두세우다 보면 언젠가 칼이 된다는 것을
님은 달빛이 되어 무너진 다리 부드러이 애무하소서!
향피리, 허벅지게 흐느끼면서 끊어진 인연 질기게
새로 이으며 작은 호롱불 밤새도록 밝히오리다
봄맞이
꽃잎 밟히는 소리에도 시방 눈썹 한 올 흔들리지
않는 대숲, 슬며시 짧아지는 해 나무라며 산마루의
붉은 노을이나 쓸고 있어요 며느리밥풀 꽃의 하얀
나비, 꿀맛에 두 손 비비며 애걸복걸입니다
건성으로 뜨거운 님의 입김으로 제 속에 숨은
살모사를 이기지 못해 자궁 속 박 박 긁어 갓 맺힌
꽃봉오리 찢어발깁니다
죽은 대나무 꽃피우지 못하는 님은 성 불구자
저승 넘나들며 흐느낄 수 없어 살모사에 휘감긴 석녀
얼음 동굴에 갇힌 사랑이 꽁꽁..., 제발 불 지피소서!
온 산천 화안히 산불 지르는 날, 빈 구멍마다 숨은
독사 불태워버리고 자진모리 방아에 아지랑이 무등
태워 새 봄맞이 함께 가소서!
희고 붉은 찔레꽃 흐드러지며 그 향기,
향피리를 원 없이 울리어 죽은 대나무
꽃피우소서!
석녀 6
________사랑
두려워요! 님은 사랑이지마는 그 이름으로 밟히는
온갖 상처들 봄바람 부드러운 입김에 속절없이
무너져 쌓인 꽃 이파리들 후려치는 굵은 빗줄기에
맨몸 내던진 채 사랑, 질근질근 씹고 있어요
가끔 번개 불처럼 번득이는 야생 짐승의 날카로운
그 눈빛 남몰래 뾰족 뾰족 날 세우는 그 송곳니
아! 사랑, 발자국 소리 두려워요! 그래도 온 몸으로
기다려지는 이 낭패감 뒤로 짜릿해지는 제 귓불이 끝내
미워, .......
깊은 밤 사랑의 이름으로 어린 죽순 잘려나가는 비명이
메아리치며 대숲을 흔들었어요 깨어나셔요, 깨어나셔요,
그러나 대숲 흔들리면 세상이 흔들린다며 마디마다 지른
칸을 밟고 하늘로 올라갈 궁리에만 빠져있었지요 그래도
달콤한 님의 입김 기다리는 향피리,
수치스러워요 두려워요
석녀7
______엄지발가락
들리시나요? 슬픈 가락이 사라진 별 찾아 헤매다가
지치어 울고 있어요 간밤 태풍이 느닷없이 사랑채
대숲 쓰러뜨리더니 든든했던 울타리 참혹하게
짓밟혔어요
지하철역 싸늘한 어둠이 떨어진 뭇 별들을 찬
시멘트 바닥에 모아놓고 증권 안내지 덮어주며
쉬어라! 인심씁니다 실은 자책이 회초리를
휘두르는 시간, 튀어나온 엄지발가락의 자존심이
되려 뻔뻔스러워 낡은 가죽부대에 퍼부은 독주로
세상이, 온 세상이 황홀하다 무너집니다
암내가 부는 향피리의 구슬픈 가락 밟으시고
돌아오소서! 어둠을 뿌리치면 빛이 보입니다 같이
대숲을 가꾸어요 님이 술 취하면 세상이 비틀거려요
내려꽂히는 빗줄기 속에 접시꽃 우산 펴고 기다립니다
아직 태풍은 토끼 몰이하듯 꼬리 휘두르며 후려칩니다
행여 향피리 소리 찢어지더라도 님이 짐작하소서!
석녀 8
______지뢰 밭
짐작해보셨나요? 황조롱이의 발톱에 채인 들쥐처럼
숨 한번 크게 내쉬지 못했을 죽은 삶, 생지옥에서의
오십년 세월이 풀리던 날 통곡이 넘쳐 억장이 막혔지만
그 가락 흥겨웠어요 저물던 그리움들이 별에게 서시를
암송했어요
한 뜸 한 뜸 봄꽃 수놓으며 님의 옷 박음질하고 있는
모습 짐작해보시어요 질퍽하게 흐느끼던 피리 소리가
지뢰밭도, 삼팔선도 다 지워버린 거지요
눈먼 세월을 그나마 살아 만날 수 있는 것은
용담초 꽃피워내면서 애간장 끓는 젖가슴들이
밤낮 불어대는 향피리 소리, 철의 장벽을
무너뜨리면서 백두산에서 한라산 넘나들며
혼불을 지피고 개개비들이 그 흐느낌 물고물고
푸른 하늘을 천지연에서 백록담까지 아니
몽블랑까지 널리 퍼뜨린 탓이어요
낮달2
이미 왕만두만큼 지워진
제 모습에서
무얼 잃었는가
앞으로 얼마나 더 버려야하나
밤새 골몰하느라
여직 서편 하늘에서 어정거리는
달에게
빛을 뿌려 눈부시게 한 뒤
살짝 낮달의 살점 한 점을 또
얼른 베어 삼킨다
급히 먹다 체했는지, 해님의
낯색이 창백하다
맹세
봄바람
간드러진 몸짓에
흐물흐물
녹는
칼,
석녀 9
_______물레방아
오르시어요, 달빛 눈부신 이 밤 백년 묵은
여시가 되고 싶어요 둔갑술로 님 호리는
숫처녀가 되어 몽실몽실 눈웃음 헤프게 걸친
건초더미로 님을 유혹하고파요 밤드리 님은
모처럼 행운목꽃 살 냄새 연주하시고 향피리,
질펀하게 땀에 젖도록 흐느끼고
꽃잎이 다 떨어져야 씨앗 여물어진다며
빈 구멍마다 닦고 닦으며 속 비웠어요
가을의 시든 풀 향기에 취해 빼앗겨버린
세월을 잊으시어요 산신령과 수피아들의
솔버덩 베어 콘크리트 벽, 물침대보다
물레방아에 장단맞춰 달빛 휘감고 쿵덕!
쿵덕! 방아찧어보셔요 죽은 대나무
꽃피워보셔요
시린 바람만 끌어안고 홀로 뒹구는 향피리에게
불그레 취한 가을 풀벌레들이 못 견디도록 황홀한
입김 불어넣고 있어요 눈부신 이 밤, 대책 없이
핀 보름달, 밤 길 못 떠나게 님의 가슴에 꼬옥
꼭 품으소서!
석녀 10
_____________대금
내려오소서! 오를수록 대나무 칸 좁아지고
하늘은 큰기침으로 물러앉아 도포자락에 차운
눈발만 흩날리더이다 진흙을 밟으시어 대차게
한번 죽어서, 다시 태어나소서 눈바람을 가두어
전생을 넘나드는 대금이 되어, 시든 풀 향기에 생기
살아나도록 울타리 되어주소서
님이 머무신 흙 자리 기름지게 하시어 어린
죽순들 떨지 않게 하소서 밤낮, 향피리는 님의
떨켜 살뜰히 애무하고 님은 향피리의 씨방 뜨거이
불어대시고 대숲에 바람이 자면 자갈밭도
덩달아 고요하더이다
제발 내려오소서! 눈부시어요 비 개인 뒤 가녀린
싹이 눈뜨면서 흙을 밀어내고 바위까지 두드리다가
하늘의 높이 갸웃거려요 땅이 무너지면 하늘도
무너진다는 것 그리고 죽은 대나무가 대숲
살린다는 걸 파도에 몇 번 시달리다보면 절로
깨닫게 될 것이어요
사랑
뭔가 심상찮다
당음지가 수선스럽게 들떠있다
물에서도 꺼질 줄 모르고 부푸는
불덩어리,
제 꽃봉오리 숨기려
연잎이 가시 날카로이 세워
치마폭 넓히며 서성이는데
지독한 가시 틈 기어이 찢고 뾰족이 올라서는
보랏빛 입술,
가을 햇살들이 몰려 플래시 터뜨리고
길 떠나는 바람들이 핸드폰 번호 적어주며
입맞춤하며
서로 아우성이다
뜨거운 가슴 열리는 날 기다린다고
황홀한 고통 물밀 듯 터져 나올 때
그 때를 누가 알리!
서산 마루에 걸터앉은 낮 달이 빙긋이 웃는다
가시들 잔뜩 긴장한다
*당음지;;경산시에 있는 연못
따돌림
산에서
길을 잃었다
순간, 그 그늘 좋았던 참나무들이
하늘 가리더니
일제히 가시들을 세워 다짜고짜
찌를 자세였다
숨었던 어둠들이 바짝 다가서며
사방을 에워싸고
오르는 길도
내리는 길도
다 묻어버렸다
시든 냉이 풀까지 외면하며
하얀 솜털을 일으켰다
휴, 구역질 끓는 쓰레기하치장이 내겐
천국이던 것을....
향기
음식쓰레기를 쏟으면서
숨을 막았더니
그 악취,
세상살이 냄새가
악착같이 기다리다가
내 숨구멍 사정없이 찌른다
그립구나!
적막히 산골 지키며
바위를 등에 업고
글썽한 눈망울로
숨어 우는 바람들을 감싸는
야생 난초의 그
은은함이여!
추억
춥고
긴 겨울 밤
화롯불에 몇 알씩 아끼며
구워먹는
알밤,
목구멍 뜨끔하게 막다가
눈시울 뜨겁게도 하면서
시린 옆구리에
몽클몽클 안개꽃 피워 올린다
석녀 11
_______________풋사랑
내 말의 뼈 속에 숨은 가시가
한 꽃다운 청춘을 살해했던 적이 있었어요
대학 이 학년 무렵이었을까요? 외딴 과수원을 끼고 도는 자갈밭에서
가을 바람에 긴 머리 휘날리며 멍석 깔고 앉아 가을볕과 공기놀이하던 논두렁 콩을 콧노래로 살피고 있었는데 냇물 건너 코스모스 핀 언덕에[집 대문 맞은편] 자주 앉아있던 마을 소년이 하얀 쪽지를 주었어요
‘사랑합니다’
단 한마디에 대뜸 얼음짱처럼 준엄하게
‘공부나 열심히 해라!
그는 대학 재수를 준비하는 어린 청년이었어요 나에겐 코흘리개였고 감히 오르지 못할 나무를 올려다본다고 쾌심하다 생각했었지요
이듬해 초봄 재시험을 본 그가 돌아온 새벽 뒤 안에서 목을 메어
세상 하직했어요 그는 삼대 외동이었고 난 죄의식이 전혀 없었지요
살아오면서 말의 가시에 찔려 온몸 가시 투성이 된 뒤에 사
코스모스 꽃잎 모질게 찢으면서 서 있는 그 푸른 옷자락, 하얀 얼굴이
석녀의 가슴 찌르기까지 참 기인 시간이 흘렀어요
그가 언제부터 쓰디쓴 풋사랑의 독약을 마신 걸까요? 쪽지를 건네기까지 끓어오르는 시간은 또 얼마나 길었을까요? 짐작도 못한 채 내뱉은 무심한 말의 가시에 찔린 불쌍한 청년, 그 죄의 댓가로 결혼 후 한 이십 년 벙어리처럼 말의 화살을 거부하지 못했던가요? 돌이켜보면 그의 풋사랑이 가장 순수한 사랑 아니었을까요?
붉게 노을지는 이 저녁 답, 새삼 진실로 다가서는 하얀 쪽지가 그리워요
그 어둠의 시간들을 기억하는 당시의 코스모스 꽃봉오리들 아직도 피어나지 않고 있대요 지금까지 벼르고 있었을까요? 이미 내 심장에 꽂힌 가시들이 더 강하게 힘을 가하네요 오늘 밤 향피리 신명나게 불어 죽은 그 청춘, 반드시 살려야겠어요
석녀 12
_____________홀씨의 꿈
끝을 지워버린 하늘로
미처 여물지도 못한 제 씨앗을 홀홀 떠나보내면서
민들레는 살길을 전혀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푸근한 어미 품 떠난 홀씨들,
두려움에 떨며 무작정 바람에 밀려다니다가
딱딱한 보도블럭 위에 떨어져 마구 밟히면서
무작정 흙 속으로 발뻗어야 살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게 됩니다. 후려치는
물푸레나무 회초리의 맵고 찬 겨울 바람을
잘 참고 견뎌야 봄바람이
햇볕 따스하게 실은 아지랑이 타고 와
어둔 세상 화안히 불 밝힌다는, 오직
믿음 하나로 제 꿈의 씨앗을 정성스레 가꿉니다
꼬르륵 꿈 자라는 소리에 귀기울이면
깨어진 유리 조각의 위협이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끈질기게 꿈꾸는 홀씨들만이 노오랗게
샛노랗게, 꽃 피워 향피리 흥겨워질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마냥 행복합니다
빛나는 그 얼굴에 햇살 눈부십니다
석녀 13
______가을 풍경화
샛노랗게 질린 은행나무 한 그루
쏟아지는 짓 푸른 바다를 머리에 받쳐 이고
파들파들 떨고 서 있습니다 그 아래
이미 자벌레에 갉아 먹히고
햇빛에 베여
단풍든 줄 꿈에도 모르는
낡은 향피리,
파르르 자지러지는 은행잎을 주워 모읍니다
멀리 번지점프에 매달린 소녀
파도에 휩쓸리며 지르는
비명 소리에
따가운 가을 햇살이 마구 잘리면서
제 바퀴 잠시도 멈출 줄 모릅니다
노란 바람이 노란 무덤 주위를 배회합니다
석녀 14
_______첫 키쓰
ufo를 보았다
오, 신비로운 그 광채
섬광을
아무도 보지 못했단다
순간,
달빛이 은빛 솜털을 호호 불어가며
당음지로 쏟아져내려
가시연 꽃봉오리 쏙 내민 입술에
불을 붙였다
못물이 끄지 못하는
불덩이,
불로써 끌 수밖에
그날 밤부터 나의 별, 하나
밤하늘에서 빛나기 시작했다
향피리,
울음에도 길이 있다는 걸 알았다
석녀 15
_______방황
날은 저물어가고
해가 산마루에서 붉은 융단을 펴고
초롱에 불 밝힌다
밤은 쫓기 듯 급히
대도시 술집 게이의 바지 속이나
창녀의 브레지어 아니면
더 깊고 엉큼한 숲 속으로
홍등가 처마 밑으로 숨어든다
시인의 시화
정 숙
신 내림굿을 기어이 받고 말았다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말못하고 죽은 처녀 귀신인가
처용 아내의 억울한 혼령인가
작두 날 위에서 돼지머리 콧구멍 속에서
대나무 가지 몸살나게 흔들며
굿판을 벌인다. 횡설수설
그래도 끓는 피 가라앉지 않는지
밤마다 향피리 절절히 울며
살풀이춤을 추다가 혼절하기도 한다
가을 바람이 슬쩍 속삭이고 꼬리 감춘다
남근을 잘라야한다고
밤낮 모르고 파고드는 내 시의 남근을
선무당이 사람 잡는단다
손길 닿는 것마다 순금으로 굳어지지 말고
파닥파닥 되살아나 울며, 웃으며, 꿈꾸다가 때론
나목이 되어 찬바람 회초리로 끊임없이 제 내면을
다스리도록 기원하는 아, 그런 무당이고 싶다
깊은 호수의 앙금들을 꿰뚫어볼 밝은 눈, 가지려면
밤 내 잠들 수 없다
석녀 15
_______바람
멈추시어요
어제의 태양이 오늘 먹구름이 되더니
아름다운 깃털 다 뽑혀 흩날리는 은행나무가
앙상한 뼈대 후려치며 치욕에 떨고 서 있어요
그 슬픔의 누더기로 치장한 생크림 케익이
한 잔의 쓰디쓴 에스프레소 커피를 삼키며
창 바깥을 바라보고 있어요
눈바람 휘몰아치는 지금 이 순간
녹두 어린 떡잎이 땅을 밀어 올리고 있을 것이어요
언젠가 산을 무너뜨리겠다는 꿈 키우면서
흔들림 멈추시고 옷깃을 바로 잡으시어요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일으킨다면
어린 새싹들이 곧 힘을 키울 것입니다
보시어요, 바람이
허방다리 집고 선 나무들 뿌리뽑는다지만 결국
열매들과 잎들만 떨어집니다
결빙의 계절
얼음이 얼음끼리 굳게 손잡아도
물결은 그 아래서 흐르고
부드러이 님은 향피리 불어 혼불을 지피시면
그 흐느낌, 깊이 숨은 어둠의 뿌리들을 찾아
지하 감옥 끝까지 나서오리다
석녀16
--- 티베트버섯
꿈의 어디쯤이 욕망으로 가는 길목일까요?
새벽, 검은 는개의 유혹 뿌리치지 못하는 죠앙 마두와
그 슬픔 짊어지겠다는 라비크, 그들은 내 인생의
꿈이었다가 이젠 덩굴손이 되어 밤마다 차가운
벽을 타고 오르려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기껏 10센티의 정사각형 벽을 발로 차며 그들은 끊임없이
세포 분열입니다. 뽀얀 우유로 검은 어둠의 덩어리에 순전히
믿음을 심어 끝내 간암 환자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으로
변화시킨 티베트버섯의 욕망이 오늘따라 위대해 보입니다.
아랑곳없이, 흰 어둠을 씹으며 제 꿈의 뿌리내리느라 분주한
욕망의 끈질김에 귀기울이다 잠 못 이루는 향피리,
나이를 잊고 탱글탱글 부풀어오르는 젖무덤이 두렵습니다.
제 덩굴손들이, 너무 외로워 혼수상태에 빠진 어느 적막한 이의
어둠을 밝힐 달콤한 수밀도 과원이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곧 통 바깥으로 넘쳐 나올 그들을 꿈 잘려버린 지하철의
맨발들에게 나누리라 중얼거립니다.
벚꽃이파리
쏟아지는 불화살에
장미나무 이파리가 제 꽃봉오리들을 숨기지만
철없는 꽃봉오리들 살짝 고개 쳐들고 뒤돌아본다
어느새 떨어지는 벚꽃이파리들
매 순간이 전투태세라
화산돌처럼 구멍 숭숭한 내 심장에 털 하나 심는다
몸 깊숙이 파고드는 화독을 이기기 위해
그 사이
벚꽃이파리들 물결따라 흐르며
하프를 연주한다
석녀 17
______달빛
아시는지요
바르르 떨며 빛나는 저 달빛 한올 한올의
비밀을
그리움 다 못 이루고 떠난 영혼들의 외로운
눈빛이라는 것을
거듭 태어난 향피리가
이승과 저승 넘나들며 잠든 혼령들 흔들어 깨워
간절한 기원으로 달이 차 오를 때
비로소 슬픈 영혼들이 땅을 밟지요
밤새 유리창 바깥에서 떨며
향피리의 떨켜 밤새도록 울려요
달빛이 되지 못하고 동굴 속에 갇힌 눈물들은
떨어지는 눈물 방울로 석순을 가꾸지요
그 유리기둥을 밟고
님의 창가를 서성이게 될 먼 훗날을 기다리면서
글썽이는 눈, 저 눈빛들
달빛 눈부시게 외로운 밤이거든
그리운 이여, 창문을 살몃 열어두셔요
석녀 19
-----넝쿨장미
몇 번의 겨울을 끌어안아야
名技가 되려는지요?
그리움으로 맺힌 연두 빛 잎사귀들이
초록으로 짙어지면서 욕망을 꽃피우고 있어요
고무 풍선처럼 부풀린 욕망들이
붉은 꽃잎이 되어
국도변 철조망을 딛고 또 딛고 올라가며
어설피 웃고 있는 향피리들을
오월이 뜨겁게 불어대고 있어요
그 흐느낌 가히 요염해서
시간의 발걸음이 느려터지고......
마주 선 오동나무
하루에 몇 번씩 불끈불끈,
자신이 부끄러워 퍼렇게 짙은 잎새로
몸을 가리고 있어요
_________사랑초
날은 저물고,
원시 처녀림의 질 빛깔 같이 선명한 분홍 꽃잎이
힘없이 고개를 수그립니다.
꽃은 본시 밤에 피는 것이어서 인지
신혼 첫날밤 족두리 쓴 신부가
신랑의 손길 기다리는 모습
다소곳하게 보입니다.
황촛대의 떨림 사이로
비단 스치는 소리 들리는 듯 귀기울입니다.
매화꽃
쏟아지는 시간의 불화살에
장미나무 이파리가 제 꽃봉오리들을 숨기지만
철없는 꽃봉오리들 살짝 고개 쳐들고 뒤돌아본다
어느새 떨어지는 꽃이파리들
매 순간이 전투태세라
화산돌처럼 구멍 숭숭한 내 심장에 먼지 하나 심는다
몸 깊숙이 파고드는 화독 이기기 위해
그 사이
꽃잎들 물결 따라 흐르며
하프를 연주한다
여자에게
주택에서 김장김치 백포기 쯤 담을 때
배추를 씻던 고무 다라이가
이젠 아파트 발코니에서 나팔꽃을 피우고 있다
몸빼이 입고 시집마당에서
늦은 가을바람에 손 호호 불어가면서
이웃 어른들 거든다는 핑계로 버지기* 깨지는 웃음에
점심 수발들기 더 힘든 줄도 몰랐었지
그 새댁, 이젠 식구도 줄어들고
뒷방 늙은이 되더니
그래도 오가는 바람 받아들이며
언제 씨앗을 숨겼는지 아침마다 보랏빛 나팔꽃 피워
제 모습 가꾸고 있다
여자는
죽을 때까지 제 얼굴 책임져야한다며
수련에게
돌확에서
꽃 한 송이 피워보겠다고
봄을 찾아서
물밑, 진흙 구덩이를 밀어제치고 올라오느라
갓 올라온 잎이 불그스럼하다
산다는 것이
길 찾는 일이니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느라 흘린
피땀인가
벙그는 봉오리 속까지 저리 붉은 걸 보면
각시붕어에게
한 생이
물먹는 일인지라
세상은 넓은 듯 좁기만 하고
밝은 듯 어둡기만 하다
종일 진흙탕 물 일으키다가 지친 몸
잠시 수초에 기대어 눈을 감는다
그러나 눈을 반쯤 뜬 채 감아야한다
먹고 먹히는 순간의 연속
그만 끈을 놓아버리고 싶은지
마름을 물고 늘어지다가
꼬리로 소용돌이 일으키다가
곰곰 생각에 잠긴다
어차피 누구에게 먹히는 일이라면
비늘을 더 고운 빛깔로
더 맛깔스런 몸빛으로 가꾸어야겠다고
외로운 양치기에게
온몸으로 밀려왔다가 덧없이 밀려가는
파도소리 종일 견디느라
섬
하나, 제 살과 뼈 깎이며
피를 말리며
양떼를 보살핀다
비록 어리석은 짐승이지만 그들의
길잡이가 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 바로 밤하늘 지키는 별이 아니겠는가
누더기지만
그것이 바로 성의가 아니겠는가
매화꽃
쏟아지는 시간의 불화살에
장미나무 이파리가 제 꽃봉오리들을 숨기지만
철없는 꽃봉오리들 살짝 고개 쳐들고 뒤돌아본다
어느새 떨어지는 꽃이파리들
매 순간이 전투태세라
화산돌처럼 구멍 숭숭한 내 심장에 먼지 하나 심는다
몸 깊숙이 파고드는 화독 이기기 위해
그 사이
꽃잎들 물결 따라 흐르며
하프를 연주한다
향피리
시인은
바위 속 잠든 부처를 깨트리려고
날마다 돌을 두드리며 얘기 나누다가
그 바위에 꽃씨를 뿌리기도 합니다
어쩌다 싹이 튼 새싹을 물뿌리개로
입김으로 키워
꽃 한 송이를 위해
제 속에 숨은 꽃뱀까지 깨워야 합니다
비늘부터 비린내까지
숨구멍 속 작은 솜털까지도 그리고
그 아픔과 그리움까지
B>금붕어</B>
하늘이 높은지 푸른지 무슨 상관이지?
숨 쉴 수 있는 물이
수초 그늘 사이 먹이가 있으면 그만이지
하루를 살아도
백년을 살아도
어차피 하루살이인 것을
아무리 몸부림쳐도 제 가슴 안인 것을
날다가 추락하면 끝인 걸
진화론
수영장에서 물살을 가르다 보면 양팔에 걸쳐지는 물결이 날개처럼 느껴진다
양팔을 크게 벌리면 하늘을 나는 학의 큰 날개가 얼마나 힘드는 지 안다
그래서 물고기들은 지느러미를 최대한 엷게 가늘게 흔들며 헤엄을 치는가 보다
사람 역시 사는 일이 바람을 가르는 일이니
욕심껏 날개 펼치다가 날아오르려다가 넘어지거나 날개 꺾인 사람들
증권사 객장에서 지하철 역사에서 아니면 보름달처럼 노숙을 하는 이들
그래도 꿈 한번 크게 꾸어본 이들이니
박수를 쳐야 마땅하리
지워진다는 것은
지워진다는 것은
사라진다는 것은
아름다워라, 아름다워라
아름답다는 것은 또한 눈물이어라
눈물이어라
눈물은 또한 한 방울의 이슬이어라
이슬 또한 생목숨이어라
생목숨은 금세 또 지워지는 것이어라
사라지는 것이어라
세상에서 가장 큰 모자를 쓴 여자
깊이도 넓이도 모르는
바다 이고지고
세파와 맞서 견디는
저 처용의 아내
내 어머니
두 여자와 동거하다
내 몸 하나에 동거하는
안과 밖
저 용암덩어리
날마다 짠물 들이 마시며 서로 소금간 맞춘다
간잽이 파도까지 가세하니
온 바다가 부글부글 들끓어오른다
갈증
출렁출렁 서로 보듬어주며 힘이 되어주던
이웃 情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한 여름 가뭄 못 견디는
연못 속 잉어들
온몸 촉각 곤두세워 진흙으로
애달픈 시를 쓰고 있다
파랑주의보
세상 파도를 짊어지느라 이 악물고
고래고래 고함지르는
서문시장 난전의 아줌마들
골라, 골라
목이 터지도록 종일 외쳐도
마트로 백화점으로 간 손님들 돌아오지 않는다
날은 청명한데 파도는 더 거세어지고
자. 욘사마보다 미남 티셔츠가 단돈 천원이요
골라 !골라!
춤을 추며 아예 파도타기를 즐긴다
높다
오늘따라 파랑주의보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다
연밥
제 씨앗 몇 영글도록
뻘에서 저자거리에서
햇살과 눈바람 색바람을 거래한
여자
저 연꽃에 누가 돌 던질 수 있으리
타짜
피박이다
몇 배로 물어내야한다
눈알에 핀 불꽃들 휘발유를 덮어쓴다
교묘하게 사기꾼 피해가던
밥, 내 목숨줄이 한 순간에
또 반토막이 난다
비닐로 위장해 번쩍이는 오광
그 산정에 눈이 멀어
내 피가, 핏줄이 터져 흐른다
무엇으로 지혈을 한단 말인가
광풍에 지친 이들의 설사물 주워 배불리던 시절
아, 옛날이여
이젠 내 흐르는 피도 설사도 막을 수 없는
주식, 저 차차차 리듬의 추락
밑바닥은 누가 어디로 밀어버렸단 말인가
그래도 언젠가 닿을 발 끝을 기다리며
목숨을 부지해야 한다
기다릴 줄 아는 이가 진정한 꾼이기에
사는 일 늘 이 지경이기에
아슬아슬 빗줄기라도 잡을 심정으로
살얼음판을 걷는 생, 그것이 바로
삶의 또 다른 얼굴이기에
치타를 위한 변명
달리기만 잘해서 무슨 소용 있으리
한 성깔 사납게 물어뜯을 줄 몰라
다 잡아 놓은 먹이도
사자나 하이에나 떼에게 빼앗기고 마는 걸
뱃가죽은 창자에 붙어버렸지만
그래도 또 뛰고 뛰어야 하리
나보다 어리거나 다리 절룩이는
사는 게 캄캄 절벽인
가련한 짐승들 향해
오늘도 새빠지게 달려야 하리
생의 사막은 갈수록 넓어만 가고
이정표도 사라졌으니
그냥 무작정 달려야 하루 해 넘길 수 있으리
그림자를 위한 아다지오
먹물처럼 속 깊은 여자
음흉한 저 여자
제 속 빛깔을 절대 드러내지 않고
안으로 안으로만 주인의 빛깔 다 빨아들인다
시시로 산란하는 내 시들도
연꽃이 누드로 일어서는 그림들
내 혼신이 모두 그녀의 내면으로 빨려 들어간다
내 인생 모조리 흡수해서
제 피로 정제해 소금으로 살아남으려면
청산가리 같은 외로움에 떠는 가슴 달래줄
시 한 편 그림 한 점을 찾아
들꽃 폐차 안으로 들어가 몸을 눕혀야 한다
그들의 고단함을 달래주어야 한다
알맹이 다 줘버린 내 껍질은 죽어버리지만
그녀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므로
불꽃놀이
설악산 한 자락 베고 누워 밤하늘 눈빛만 바라본다
그는 바람의 천의 손길 빌어 내 무덤 초인종 울리다가
불두덩 계곡 쓸어내리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리다가
무슨 견디지 못할 형벌을 받는 신음이였다가
비명이 참다못해 터뜨리는
그 섬광의 순간
하늘과 대지는 밤마다 저 현란한 불꽃 터뜨리면서
별빛을 굴리고 꽃잎을 갖은 모양으로 다듬고
그래서 골짝마다 무덤이 생기고
새싹이 태어나고
내가 깜빡 죽는다는 건
대지의 여신이 되어 비바람 모두 받아들이다는 것
하늘 순정을 받아들인다는 것
그래서 밤마다 별들을 쏟아내고
생과 죽음의 고리, 고리를 엮어 나가고
꽃반지*
여름 한 낮입니다
수련 꽃잎이 새찹게 달아오르는 시간
소낙비 한 차례 지나가기 전
꽃반지를 끼세요
어둠의 씨앗은 뿌리내리지 못하게
한 곳에 가두어야 해요
프러지어 향 아무리 색을 뿌려도
며느리 밑씻게풀 발 뻗을 수 없도록
그대 살못이 꽃잎건반을 연주하기 직전
그 꽃반지 끼우세요
부디 시간이 목 조르는 새끼줄 풀고
지친 바람이 쉬어갈 충전기
모텔 고추 잠자리에서 **
막힌 물꼬 속 시원히 틔우고 가세요
맘껏 폭죽을 터뜨리고 가세요
*콘돔
**오탁번 시인의 시에서
다보탑, 처용여자
한 세월
죽네 사네 깨지느라
몸 속 사리공 다 비워버렸는가
낮엔
한 여름 햇살과
그 그림자 사리들 불러 모으느라
밤엔
초사흘 달빛 머금은 이슬과
어둠 뒤 새벽사리 받아들이느라
온사방 몸 꽃살문 열어놓고 기다린다
눈빛은 먼 산봉우리에 걸어놓고
내 정충은 길을 묻는다</B>
쏟아야 한다
어딘가 누군가의 집을 찾아 씨를 뿌려야 한다
저 가슴 밑뿌리에서 눈뜬 무엇이 나의 거웃 속 솜털을 깨우고
하늘 뒤 하늘 그림자를 보여준 그들을
몽땅 털어내어 기름진 땅에 심어 싹을 틔워야 한다
그 새싹이 잎을 꽃을 피워
아무리 보고 들어도 허가진 가슴과 동공에
언어의 빛화살 촉을 꽂아주어야 한다
그 촉에 묻은 독과 만난 씨앗
시 한편이 달빛이 되고
햇살이 되어
누군가의 삶에 이정표가 될 수 있다면
할인판매
난 삼류다
시 쓰는 일도
살림 사는 요령도
내 영혼이 녹아든 시도 금싸라기 소꼽시절도
천원도 아닌 무료로
시간까지 덤으로 얹어 나누어 주는
삼류 ,헤프다 비웃지 마라
그것도 밭을 갈고 씨 뿌리는 일인지라
이랴! 이랴!
묵묵히 채찍 맞아가며
음메~
음메~
겨우 숨 구멍 틔우는 소리 내면서
밭을 갈다가
1
산다는 건 시간 바퀴를 죽어라고 돌리는 일
햇살도 달빛도 요사스레 피어나는 살구꽃도
향기는 다 주는 척 너스레떨다가
다시 빼앗아가야만 하나
봄 비 오는 어느 날 어둠만 달랑 남겨놓고
2
네 눈엔 어둠만 보이느냐?
이 미련의 멍에 아직 못 벗은 소
이랴!
어서 밭이나 갈아라
저 어둠 뒤 햇살보다 더 눈부신 빛을 볼 수 없다면
죽어서도 살아서도 멍에를 지고
밭을 갈아야하느니
거울
저 거울 속엔 수많은 등불을 켠 내가 서 있다
나를 바라보는 그들 눈빛은 모두 다르다
찡그리거나 입술 뽀루퉁한
내가 바라볼 때의 표정 그대로 비춰주면서
내 모든 것 간직하다가
필요할 때 하나씩 꺼내 보여주며 닥달한다
그 때 그 남자한테 왜 꼬리치는 미소 흘렸느냐
책임도 못지면서
왜 야사시하게 진홍빛 속 비치는 옷을 입었느냐
퍼즐놀이 1
부메랑 37
끝내 세상이 헝클어져야 하는가
인과 연으로 이어진 사람바다에 빠져 허우적허우적
눈치 살피며 사는 사람 길 찾기
서로 마음의 무게 저울에 달아보면서
패랭이가 겨울 지나면 또 싹을 틔울 것인지
수수꽃다리가 제대로 사월 꽃향기 퍼뜨릴 것인지
풍문의 잣대로 재고 재면서
변덕스런 계절풍과 햇볕의 끓는 넋두리 조각으로
자신만의 한해살이 이정표 짜맞춰보는데
퍼즐놀이 2
부메랑 38
탯줄 따라
우물 속 갇혀 때 묻지 않은 어린 나를 찾아 가다보면
막다른 골목길은
죽음 건너 저 세상 뿐
코브라폭포
-부메랑 39
무조건 밀어붙이라는 독재자와
그 그늘 아래서 붉은 계절 활짝 피우고 있는 백일홍
그 밑에서 추락하느라 잔뜩 물먹은 이들
다시 민초라며 촛불을 켜고
그 어둠스리한 불꽃 뒤에서 코브라 송곳니를 숨긴다
촛불의 저 미약한 힘이
물대포보다 더 밀어부치기 명수라는 걸 아는 터이므로
저 완강한 힘이
언젠가 밀려 떨어질 것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으므로
빛그늘환풍기
-부메랑 40
파닥파닥 욕망의 날개 돌리느라 새빠지는
선풍기
그 바람을 또 잠재워달라며
그 거품들 정화시켜달라며
앙금 깊은 제 심연 다스리느라
벌새의 날갯짓하는
빛
그리고 저 하얀 그늘
순간거울꽃
----부메랑 41
산 오르막에서 눈 마주쳐
시퍼런 파도비늘 한 순간 파닥거리던
그 패랭이꽃의 미궁
수위를 지킬 줄 모르는 내 육감의 전율
그 만남이
과연 먼 내리막길까지
찌리릿 찌르며, 찔리며 따라 오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