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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평생 징을 치며 감각적이고 섬세한 빛깔의 마디를 남긴 시인 [박주일시인] 대구문학의 터 14 정 숙 글
관리자 | 조회 271
대구문학의 터 14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DSC00817.JP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6000pixel, 세로 3376pixel

사진 찍은 날짜: 2020년 10월 13일 오후 13:59
 
 
글 정 숙 시인
 
 
⦁1993년 계간지 <시와 시학> 신인상
⦁만해 ‘님’ 시인상.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낸 책: <신처용가>, <위기의 꽃>, <불의 눈빛>, <바람다비제>, <유배시편>, <청매화 그림자에 밟히다><한국서정시 100인선> <연인.있어요>등 출간
⦁이육사기념사업회 공동대표
⦁용학도서관에서 현대시 창작, 현대시 이해 강의
⦁대구문학아카데미 정 숙 문학반 운영
 
 
 
 
 
⦁42099 대구 수성구 동대구로 범어동 궁전맨션 2동 406호
jungsook48@hanmail.net
 
 
평생 징을 치며 감각적이고 섬세한 빛깔의
마디를 남긴 시인 
 
-초민 박주일 시인
1.신선한 상상력과 섬세한 빛깔의 시인(김춘수 시인의 해설)
 
“박주일시인 대부분의 시들도 모발로 몇 겹이나 엮어놓은 듯이 섬세하면서 질기게 보이는 것은 신선한 상상력과 감각의 섬세함이 문장의 밀도를 통하여 얻게 된 견고성이다”
김춘수 시인이 쓴 박주일 시인의 [잡초기] 시집 해설에서

한줌 뜰귀에서도 짐짓/ 잘려나가는 여름의 그림자,/ 핏줄 또한 안으로 가다듬은/ 풀잎 하나에도/ 벌레 울음은 또한 스민다./ 그 운 오래오래 삭아서/

제스네리아 빛으로,/ 제스네리아 빛으로,/

타고 있는 眉間,/ 때때로 눈 어두워/ 그대 만남이 잔잔한 虛空인/
것을 알리라./

나의 깊은 곳으로/ 아, 풀잎 속살의 제일 아픈/곳으로/다가오는 발자국 소릴/ 이젠 알리라/ 잘린 그림자여./[박주일 시, 제스네리아] 전문
 
하나의 사람은 죽어갔지만
그 사람의
돼지며 삽사리도 데불고
갔지만
죽어간 사람은
살아남은 사람을 밤새
손가락 사이로 기웃거린다
하나의 사람은 살아있지만
살아남은 사람은
죽어간 사람의 발치에 깔려
끝내 눈 감을 수 없고
죽은 자와 산 자의 사이를 밤은
하염없이 무덤을 내왕하면서
피를 재우고 눈썹을 재운다
 1980년 시집 <신라유물시초- 동물 토우> 전문
 “박주일의 유물시초는 유추가 자유롭다. 유물이 과거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게 아니라 자기 동일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토우는 생사의 변증법을 드러낸다. 그것은 알레고리가 아니고 유추다. 의지를 위한 유추가 아니라 사실(reality)을 위한 이미지, 인형으로 전재된 유추로서는 기발하다고 아니 할 수가 없다. 죽음이 삶을 역광으로 보여주는 것, 이것은 하나의 통찰이다.”
“그는 늘 구체적이고 감각적이다. 술맛에 민감하고 안주 맛에 민감하다. 그는 술과 안주를 다루듯 시를 다룰 뿐이다.” 시집,『잡초기』,『신라유물시초』 출판을 축하하며 쓰신 김춘수 시인의 해설이다. 김춘수 시인의 말씀처럼 시어 선택에도 아주 신중하셨던 선생님께서 직접 쓰신 프로필을 그대로 옮겨본다.
 
2.박주일 선생님이 직접 쓴 프로필
 
“내 고향은 경주다. 학연, 혈연이 모두 그곳에 얽혀있다. 하지만 내가 오랫동안 터를 잡아 정착한 곳은 대구이다. 부친은 대구사범을 나오신 접장이지만 바이올린에 취미가 있으셨다. 어린 기억에도 그 어른이 바이올린을 키시는 걸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가족 중 어느 누구도 음악을 한 사람은 없다. 술이 취하면 그나마 내가 흉내를 내는 정도지만.
  8남매 형제 중 넷이 시인이다. 부친의 음악성을 문학적 기질로 이어받았나 보다. 맏이인 내 밑으로 주영(동시) 주오(현대시) 무화(시조)가 등단을 했고 두루 교사, 교장, 교수를 역임했다.
 나는 1967년, 미당 서정주 선생의 추천(현대문학)으로 문단에 나왔다. 경주중학을 거쳐 경희대 문학부를 다녔지만 6.25동란으로 졸업식에 참석을 못 했었다. 미진하던 차 그 부분을 최근에서야 회복할 수 있었다. 학교로부터 졸업장을 받은 것이다. 교사생활은 30년을 넘는다. 의성중학을 시작으로 예천농고, 경주여고, 대구공고, 대구여고, 대구상고, 선덕여상고를 거쳤다. 이제 자연인인가 했는데 우연찮게도 대구문학아카데미라는 시 창작 교실을 운영하게 됐다. 사실은 이하석 시인께서 맡게 된 강좌였는데 한사코 넘기는 통에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떠안게 된 것이다.  그 세월이 20 여 년이다. 150명이 넘는 제자들과 70여 명의 등단시인들까지, 그야말로 대구에 새로운 문학의 터가 만들어진 샘이다. 나름 열과 성을 기우렸다고는 하나 그들 스스로의 학구열과 선후배 간의 배려, 고락을 함께 한다는 연대감이 없었더라면 어찌 그리 고운 시어들로 해마다 작품집을 엮어낼 수 있었겠는가.
내가 쓴 시집으로는 미간, 모양성, 바람아 문둥아, 잡초기, 시의 하늘 구만리, 신라유물시초, 피그미풀꽃, 제비풀들이, 는게 그리고 달빛, 박주일 시 전집 등이 있다.
  
살면서 가장 보람 있다고 생각되는 일은 제자들의 성장이다. 작품 활동을 활발히 하는 제자들은 그 자체가 모든 시름을 잊게 하는 청량제이다. 나는 곳곳에다 문학의 기반을 다지려 노력했던 것 같다. 화려한 조명을 받는 시인보다는 어린아이 같은 눈으로 사물을 바볼 줄 아는 사람이 참 시인임을 알렸었다. 그중 영양 중학 때의 제자인 조석우는 조지훈 시인의 후손으로 지금도 시의 기백이 지조론을 따른다. 교과서에도 곧잘 작품이 실리는 부산의 정성화는 수필작가지만 대구여고 담임이던 시절, 공부도 빼어나 계속 급장 자리를 지켰었다.
  <대구문학아카데미>의 성장은 눈부셨다. 창출어람, 신춘문예나 공모전, 문예지 선정 수상소식에는 못 생긴 아내나마 끌어안고 환호를 한다. 시집 출간 때의 기쁨도 그에 못지않다. 거의가 전업주부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탄탄하게 다져온 스스로의 내공이라 그 결실이 여간 흐뭇하지 않다. 상을 타는 일이 대단한 게 아니라, 그것을 통해 시인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동력이 될 수 있음이 다행스러운 것이다. 괄목할만한 시적 성취가 우후죽순처럼 드러나는 그들을 보면서 보람과 희열이 세월을 제침을 느낀다.
  제자라면 남자 제자들도 한 몫 한다. 특히 의성중학 때의 제자들은 교사로서의 사명감으로 젊음을 송두리째 불태웠기에 잠시도 잊을 수 없다. 나는 그들을 떠밀 듯 맹훈련시켰다. 특공대를 만든 것이다. 덕분에 중앙은 물론 곳곳의 지방명문고에 대거 합격시킬 수 있었다. 사회 곳곳에서 보람찬 활동을 하는 그들은 매년 휴가시기를 맞춰 나에게 와룡선생 상경기의 혜택을 준다.“
 
 3.유고시집 ‘서둘지 말자, 바람아’
 
그 외 ‘물빛, 그 영원’ 제 13시집 ‘가솔송아, 꿈결 같구나’를 출간하시고 2009년 2월 2일 86세를 일기로 영민하신 후 대구문학 아카데미 제자들이 발간한 유고시집 ‘서둘지 말자, 바람아’를 출간하였다.
대구문학아카데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박주일 선생님의 20 여 년 간 거의 66명의 제자를 배출하셨다. 대구문학 아카데미 10주년 행사 뒤 시창작반을 필자에게 넘겨주셨기 때문에 대구문학아카데미 26집을 내기까지 30여명 필자의 제자들이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박주일 선생님과 필자의 제자들 중 몇 분이 모여 ‘은시 문학회’ ‘정 숙 문학반’을 이끌고 있다. 이 많은 제자들 중 늘 선생님을 정성으로 모시고 다니며 잘 받들어 모신 어느 시인은 현대시학으로 등단하고 전국적으로 아주 빠르게 유명한 시인이 되어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대구 시단에서 박주일 시인이 배출한 시인들이 전국 또는 대구에서 조명을 받고 있다 함은 문학 수련이 얼마나 치열하였었던가를 엿볼 수 있는 증거라 말할 수 있습니다.’
옛날 시하늘 행사에서 하신 고 박곤걸 선생님의 말씀이 새삼 떠오른다.
 
4.박지평 수필가의 상어 이야기
 
경희대학 문학부 국문과 4년 수학이라는 약력에서 돌아가시기 몇 년 전 졸업장을 받으셔서 무척 기뻐하셨다고 전해주시는 사모님은 남편 뒷바라지에 그 동안 고생도 많이 한 늦깎이지만 수필이 아주 신선하다. 사모님이신 박지평수필가의 ‘우리 집 상어 이야기’ 속엔 남편 박주일시인의 모습이 보인다. 제삿날이면 어김없이 보게 되는 선생님의 행동에 대해서 쓴 글이다. 조상신을 대하는 마중이나 배웅이 팬터마임처럼 우스꽝스럽지만, 산 조상 대하듯 정성을 다함이 더없는 진정성으로 와 닿으신 거다. 전구 한 알 못 갈아주는, 현실적이지도 가정적이지도 못한 남편이지만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 그 점 하나 바라보며 평생을 사신 분이다. 박주일 시인을 향해 누군가가 그랬다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세속은 서툴지만 시심은 소박하다.”그 말에는 많은 사람이 동의를 했다고.
그리고 친한 문인들 중 현대시학의 정진규시인과 하늘이 맑고 푸른 날에도 전화로 ‘눈이 펄펄 옵니다’ 하면 두 분만이 아는 어떤 암호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곤 하셨는데 박지평 수필가의 ‘시인과 가발’작품에서는 미당과 김춘수, 박주일 시인과 세분이 얼마나 가까웠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선생님의 말씀 중엔 ‘궁합이란 게 있기는 있는지 모르겠다. 사람의 세계에서는 흔히 궁합이 맞다, 안 맞다 말을 쓰기도 한다. 하나의 작품 세계에서도 그 작품을 이루고 있는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 이 궁합이 맞는 단어들이 모여 있나, 그렇지 않나 에 따라서 작품의 성패가 결정된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하시며 시는 감동을 주거나 아니면 재미라도 있어야 한다는 점을 제자들에게 강조하셨다.
 
5.마디라는 것은
 
경상북도 문화상(문학부문), 금복문화예술상(金福文化藝術賞) 등 수상하시고 대구문학아카데미 대표 20년을 지킨 박주일 시인님의 작품 중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은 ‘마디라는 것은 ’이다.
그렇게 원하시던 대구문학아카데미 20주년 행사를 2009,1월 [아르정 탱]에 참석하셔서 ‘제자들을 옛날엔 향기만 맡고도 알았는데 이젠 선생님 누굽니다 라고 해도 잘 못 알아본다’고 하셔서 모두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는데 86세를 일기로 돌아가시는 날 아침엔 식사 잘 하시고 ‘봄날은 간다’ 노래까지 정확하게 부르시고 운명하셨다고 한다.
 
마디라는 것은
-박주일

나무에는 마디가 있다
쉬었다 간 자리다
혹은 그 흔적이다

달리는 열차의 마디는 역이다
나의 집은 나의 마디다

무덤은
인간이 남기고 가는
마지막 마디다

시를 쓰는 일은 꿈꾸는 일이라 했던가? 꿈꾸면서 남긴 선생님의 시집들도 마디가 될 것이고 제자를 키우는 일도, 산다는 것도 마디 만드는 일인 것 같다. 가르치느라 평생 징을 치시다가 제자란 많은 마디를 남기시다가 결국 무덤이란 마디를 남기고 떠나신 선생님, 특히 김춘수 시인님은 필자의 경북대학교 국문과 시절 스승님이기도 해서 늘 반가웠지만 시집 산다는 핑계로 대접해드릴 줄도 몰랐다. 지금 생각하면 참 죄송하기만 한데 박주일 선생님께 진지하게 미당과 김춘수 시인과 정진규시인의 여인들에 대한 얘길 듣고 싶어 하니까 그런 건 많이 알지만 절대 말해줄 수 없다며 무덤까지 비밀로 가져가야한다고 하셨다. 시를 쓰다 보면 모든 사물이 스승이지만 특히 박주일 시인은 필자가 시에 빠져들게 한 분이다. 평생 교사로 시 지도로 징을 치신 징잡이신데 신경림의 ‘갈대’를 낭송하실 때의 그 열정에서 시 한편이 소설보다 더 진한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하셨다.
 
6. 대구문학아카데미 정 숙 시창작반이 생긴 이유
 
칠순을 넘기느라 가물가물해진 시력 때문에 대구문학아카데미 10주년을 지나면서 16기부터 필자에게 시창작반을 넘겨주셨다. 파도 센 바다에서 시의 길 찾느라 벌써 30년이 지나버렸다. 덕분에 전국 60여명의 제자와 인터넷 시마을과 포엠토피아에서 포엠스쿨 정숙반까지 운영하면서 여러 제자들이 계간지 ‘시안’ ‘시와 시학’ ‘전태일 문학상’ 포엠토피아 신춘문예‘ 등 그 외 여러 문학잡지로 등단하는 많은 성과가 있어 늘 감사드린다. 물론 필자가 시전문지 ’시와시학‘으로 등단하는데 도움을 주신 이태수 선생님, 무작정 처용아내라며 쓴 사투리 연작시 첫 시집 ’신처용가‘를 대단한 작품으로 인정해주신 김재홍 교수님과 여러 선생님들 생각하면 더 열심히 좋은 시를 써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대구작가회의 특집에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그 많은 제자 중에서 왜 하필 정 숙 시인에게 시 창작반을 맡꼈느냐 고 필자가 여쭤보니 씨익 웃으시며 ‘정 숙은 발이 이뿌지 난 여자 얼굴은 안 봐 손발이 이뻐야 해’ 해서 무안했던 적이 있었다. 죽으면 썩어질 몸이라고 30년 시집 살며 마구 부려 먹었는데, 사실은 그보다 1996년에 발표한 정 숙의 첫 시집 ‘신처용가’가 전국적으로 좋은 반응을 얻었고 [참고로 ‘신처용가‘는 1995년 정 숙 혼자 쓴 작품임] 또 몇 사람 강의하는 모습을 직접 시험으로 보시고 정하신 것 같은데, 회원들의 거센 반발도 있었지만 그냥 밀고 나가셔서 고맙고 괴롭기도 한 일이었다. 단지 필자는 묵묵히 명시 한편 쓰는 꿈 가꾸며, 지금까지 인터넷 강의와 여러 도서관 강의를 하며 제자들의 징을 치열하게 쳐서 풋울음을 잡아 재울음으로 키우는 일이 보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7.시의 긴장미와 역동적 이미지 (정 숙 시인의 시 해설)

  시 쓰는 일은 그 자체로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이며, 가장 순수한 나로 회귀하는 일이라면서 관습에서의 해방, 자유로운 세계를 위하여 시인은 상상력을 발휘합니다. 상상력은 모든 사물의 고정관념을 부정하는 힘이며,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일상성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면서 그 일상성을 긍정한다는데 그래서 부정과 긍정의 교차에서 시의 원리가 여러 알레고리로 나타나는 가 봅니다.

 네 번째 시집[바람아. 문둥아]는 그러한 비실제성의 집약이며, 일상성을 부정함으로써 비로소 해방되는 시적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해방이 또 하나의 구속이기에 시인은 외로움의 늪에 다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엔가 우연히
너는 있고 네 그림자가 없는
그림자는 있고 네가 없는
그런 시간에
눈은 있고 눈깔이 없고
잇빨이며 혓바닥이 달아난
그런 시간에......                     -박주일의 [문둥아.40]에서-

눈은 있고
눈깔은 없다.
눈썹은 바람에 가고
살점은 놀 끝에 묻어있다.               -박주일의[문둥아.24]에서-

시인의 시안에 비친 [눈은 있고 눈깔이 없고/ 잇빨이며 혓바닥이 달아난],[눈썹은 바람에 가고/살점은 놀 끝에 묻어있다.] 문둥이를 통해 버림받거나 소외된 존재에 대한 아픔을 절규로 자학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자학으로 자기를 억제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바람’을 역동적으로 이미지화하고 있습니다. 그 아픔에 순응하지 않고 기계화에 시간에 자신도 모르게 풍화되어 가고 있는 현대인의 위기의식을 바람의 빠른 흐름으로 표현하는 젊은 감각이 숨어 있습니다.
 
시에서 긴장미란 생명이라고 배웠는데 요즘 이상하게 수필 같은 시들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진정한 시인은 고독을 즐겨 끌어안고 사리 한 알로 승화 시킬 줄도 알아야겠지요. 잡초기 연작시 가운데서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 한편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수련에게’는 ‘안윤하’시인의 낭송과 함께 음미해야 맛이 나긴 하지만 수련을 통해 눈길은 늘 바람 부는 쪽으로 돌려져 있어 마음은 그리움과 기다림으로 떠돌고 몸은 지친 다릴 묶고 또 걸어가야 하는 시인의 꿈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을 숨 가쁘게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갈 수 있겠는가/ 뜨거운 숨소릴 밀치고/ 빈 가슴으로 훌쩍/ 떠날 수 있겠는가/ 이글이글 타는 눈 버리고/고독의 벌판을 지나/ 아득한 바람의 늪에서 내/ 눈감을 수 있겠는가/ 너를 버리고/ 젖은 음성 널 버리고/ 깨풀이며 강아지풀이나 죽이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훌훌 한 세월/ 잊을 수 있겠는가/ 살기 위하여/ 잡초같이 살아남기 위하여/ 지친 다릴 함께 묶고/ 초록빛 사이/ 저 시퍼런 하늘 뭉게며/불기의 모래밭 짓밟고/ 박토의 그늘을 마구 자르고/ 억새풀 치를 떠는 그늘을 피의/ 상채기 재우고 재우면서 영원히/영원히 우리는/잠들 수 있겠는가/
-박주일의[잡초기 중 -----수련에게 전문]

수련이나 겨자씨 보다 작은 피그미 꽃 술 속에서 우주를 찾아내시던 꼿꼿하신 시성(詩聖) 한 분이 뒷짐 진 채 잠든 들풀들과 나무들 그들이 세상의 중심이란 걸 깨우치기 위해 평생 징을 치시더니, 징도 징채도 내려놓으시어 가벼이 아름다운 세상으로 혼자 길 떠나신 뒤 날마다 저 하늘 위로 흩어지는 푸른 징 소리 들리는 걸 보면, 수성 들판 어디쯤 들꽃으로 오시거나 선덕여왕과 지귀(志鬼)가 지나쳤을 반월성 둔덕 설류화 꽃그늘로, 돌 틈 사이 노루귀 한 쌍으로 오셔서 어리석은 나무들에게 그 징소리 다시 울려 주고 계시는 것 같아 필자는 아직도 쫓기는 듯 시를 쓰고 가르치고 있나보다.
 
8. 대구문학아카데미 30주년 기념과 은시 문학회 20호 출판기념식
 
‘선생님. 제자들이 명주처럼 섬세하고 신선하면서 밀도 있는 상상력, 아니면 감동을 주거나 풍자 해학으로 재미있는 시 한편을 맞이하기 위해 시시각각 낚시 줄 길게 드리우고 눈 빠지도록 찌만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아시는 지요? 초민선생님! 정 숙의 제자들과 선생님의 제자들이 모여 대구문학 아카데미 30주년 기념식을 했고, 은시 문학회 20호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 칭찬해 주실 거지요?’
 
끝으로 박주일 선생님을 도와 대구문학 아카데미 기반을 닦느라 십년 동안 회장으로 수고하신 이선영 아동 문학가님 몇 년 동안 은시문학회 회장을 맡아주시는 남주희 선생님을 비롯해 대구문학아카데미회장단과 회원, 은시문학회 회원님 그리고 정 숙 문학반, 정 숙 사랑방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동안, 사모님께서는 의성중학 제자 한 분에게 선생님의 추억담을 부탁하신 모양이다. 제자들은 선생님 가신 후에도 사모님께 여전히 정성을 기울이고 있었나 보다. 
 
9. 박주일 선생님 제자의 추억담
 
 “1991년 5월, 이번에는 선생님과 함께 일본여행을 하기로 했다. 선생님도 눈치가 있으신 분이다. 만사 제쳐놓고 부른다고 달려오실 분이 아니다. 우리 역시 기쁨이라며 간곡히 부탁드린 결과이다. 마침 도꾜 인근에는 꽃박람회가 열리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선생님은 소설 ‘빙점’의 작가인 미우라 아야꼬( 1922-1999)와 통화를 하셨다. 만나고자 하나 일정이 안 맞는 듯 통화만 하셨다. 세계대전 패전 후, 군국주의 교육에 속해있던 국가방식을 도저히 따를 수 없어 작가는 재직 중이던 학교를 퇴직한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써의 변모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국가를 위한 개인의 절대적 추종, 그 점에 대해 반기를 든 작가의식에 늘 공감 하셨던 거로 보인다.
   며칠 후 우리는 한식이 그리우셨을 선생님을 위해 미스코시 백화점 안의 한식집엘 갔다. 한국 여자 유학생이 서빙을 하고 있었다. 구운 쇠고기와 정종을 주문해서 한참동안 먹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갑자기 배를 움켜잡으며 복통이 온다고 하셨다. 부랴부랴 호텔로 돌아왔다. 선생님은 멀쩡했다. 음식 값이 너무 많이 나올까봐 벌이신 연극이었다. 사실 택시비며 숙박, 음식 모두가 한국의 4배였다. 하지만 우리가 각오를 하지 않고 그 여행을 계획했을 리 없는 데도 선생님께선 우리의 호주머니가 안쓰러우셨던 게다.”
 
10.마무리 (박지평 수필가의 연서)
 
“떠나시기 전날까지도 대구은행 달력 뒷장에다 시를 쓰셨다. 주먹만큼 큰 글씨였다. 제목은 「바오밥 나무」, 상처 나 아문 자국이 너무 커서 그 안에선 제사도 지낼 수 있고 살인자도 숨는다는 곳, 비가 오면 피할 수 있고 나중 주검도 안치할 수 있는 곳, 선생님이 느끼시기에 충분히 매력적인 나무였을 것이다. 하지만 미완성이다. 지금쯤은 다 쓰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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