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과 떠남, 충만과 결핍은 삶의 순리…『따뜻해졌다』
[매일신문] 2016-10-15 04:55:02
오랜만에 마음이 아늑해지고 느슨해지는 시를 읽는다.
멀고 험한 길을 원망하고, 만나고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하고, 태어나고 떠남을 서러워하는 것이 사람인데, 황영숙 시인은 그 모두를 생명과 삶의 순리라며 위로한다. 그러나 황 시인의 ‘위로’를 절망의 끝에서 필연적으로 만나는 ‘체념’으로 이해하면 오해다. 시인이 말하는 ‘순리’는 매우 적극적이다.
‘초승달’과 ‘따뜻해졌다’는 별개의 작품이지만, 연작처럼 읽어도 좋다.
「여섯 해를 살고 아이는 죽었다/ 울다 울다 지친 어미가/ 아이가 보고 싶어/ 구천의 먼 길을 헤매고 다녔다/ 보다 못한 어둠이 캄캄한 손을 씻고/ 그믐의 한쪽을 빌려/ 아이의 눈썹을 곱게 그려 주었다.」 -초승달- 전문.
「먼 길을 혼자 울면서 걸었다/ 캄캄한 산을 넘어오니/ 언제 왔는지 달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울었구나/ 달이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달을 따라오던 별들이/ 싸늘한 내 손을 잡아 주었다/ 차가운 우주의 모든 손들이/ 따뜻해졌다.」 -따뜻해졌다- 전문.
‘초승달’의 아픔을 모든 사람들이 굳이 ‘자식을 잃은 아픔’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자식을 잃은 고통을 어디에 비할까마는, 사람이 저마다 겪고 있는 아픔이 덜하고 더할 게 있을까. 누구에게나 꾹꾹 눌러 참고 살아가는 울음이 있기 마련이다. ‘먼 길을 혼자 울면서 걷는 이’ 에게는 그만한 슬픔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꺼이꺼이 울면서 캄캄한 밤길을 걸어 산을 넘어갔는데, 언제 왔는지 달이 기다리고 있다가 눈물을 닦아 주었다.
슬퍼도 울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아무리 슬퍼도 눈물을 닦아 줄 사람이 없다면 울지 못한다. 밖에서 당한 억울한 일을 울면서 고해바칠 어머니가 없는 데, 아이가 어떻게 눈물을 흘릴 수 있겠는가.
지극한 슬픔에도 울지 못하니, 위로받을 길이 없고, 그 슬픔은 종내 무(無), 없었던 일이 되고 만다. 이 시대 한국의 성인(成人)들이 그 지경에 빠졌다. 억울하고 슬픈 일을 당하지만 고해바칠 어머니가 없어, 눈물마저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황 시인은 "우리가 그럴 수는 없노라"고 "지극한 슬픔을 없었던 것으로 묻어버릴 수는 없노라"고 노래한다. 그래서 그의 시는 따뜻하고 아늑하다.
그런 까닭에 시인 황영숙의 시는 ‘자식을 잃은 슬픔’이 아니라 ‘그 슬픔을 어루만져 주는 초승달’ ‘울면서 걷는 캄캄한 밤’이 아니라 ‘눈물을 닦아 주는 달’에 방점을 찍고 있다.
문학평론가 유성호 한양대 교수는 "황영숙 시인의 이번 시집을 통해, 어떤 사물의 속성이 한동안 그 사물을 규율하다가 차츰 소멸되어가는 순간을 포착하면서, 그 소멸 양상이 또 다른 생성을 준비하는 불가피한 단계라고 보여주는, 시인의 따뜻하고도 깊은 심성을 만나게 된다. (중략) 황영숙 시인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과 떠남, 정서의 충만과 결핍이 사실은 한 몸으로 결속되어 있는 두 가지 징후일 뿐이라는 역설의 이치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우리가 완벽하게 고립되어 있는 단독자가 아니라, 소멸과정을 통해 서로 몸에 각인되는 상호 결속의 존재임을 알려준다. (황영숙 시인이) 성취해낸 서정의 파문이, 한동안 우리 시단을, 잔잔한 울음으로, 은은한 슬픔으로, 그리고 그것을 넘어 따뜻한 사랑으로 적셔가지 않을까"라고 말한다. 따뜻한 시집이다. 112쪽, 1만원.
조두진 기자 earful@msnet.co.kr
출처 :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9481&yy=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