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례
점례는 어릴 적 내 고향집의 머슴으로 온 김씨 아저씨의 딸이었다. 이마에 커다랗고 검은 점이 있어 점례 할머니가 지어준 이름이라 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남의 집 머슴살이로 떠도는 아버지를 따라 같이 주인집 일을 거들고 생계를 이어가는 외롭고 가여운 아이였다.
나와 동갑내기였지만 학교도 가지 못하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나를 보면 반갑게 웃어 주었다. 그런 점례에게 나는 언제나 냉담했다. 항상 코를 훌쩍거리며 다녔고 손등엔 새까맣게 때가 끼어 있는 그 아이를 보면 더러운 물건을 보듯 외면했다. 그러나 점례는 그런 나의 냉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어린 동생들을 지성으로 보살피며 내가 하기 싫어하는 일을 재빨리 찾아내어 대신 해 주곤 했다. 그런 점례가 가엾고 안쓰럽기도 했지만 머슴의 딸과는 친할 수 없다는 내 치기 어린 자존심은 언제나 점례를 괴롭혔다. 그런 어느 날 점례와 나 사이에 큰일이 벌어졌다.
내 책가방에 있던 책을 꺼내 몰래 보던 점례를 발견하고 화가 난 내가 점례를 밀쳤는데 방안에 있던 놋화로에 이마를 부딪쳐 점례를 다치게 했던 것이다. 찢어져 피가 흐르는 이마를 짚으며 끙끙거리는 점례를 보는 순간 나는 두려움에 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 일로 어머니에게 심한 꾸중을 듣고 울고 있는 내게, “나는 괜찮아, 울지마 내가 잘못했어” 하며 내 눈물을 닦아주는 점례를 나는 더 이상 미워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점례에게 책을 사주시며 열심히 공부하면 학교에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이미 학교에 입학하기엔 나이가 훌쩍 넘어 있던 점례에게 글을 가르쳐 주기도 하며 점례와 나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그러나 어느 날 점례는 우리집을 떠나고 말았다. 우리집에서 받은 몇 년치의 새경마저 도박으로 탕진하고 여기저기 돈을 빌린 점례 아버지가 빚쟁이에게 몰려 점례를 데리고 야반도주를 한 것이다.
점례가 떠난 텅 빈 방에는 책과 공책 그리고 점례의 생일날 어머니가 사주신 검정 고무신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것은 점례의 가장 소중한 재산이었지만 폐만 끼치고 떠나는 주인집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두고 간 것이었다. 학교에 가면 신어야겠다고 한 번도 신지 않은 검정 고무신을 닦고 또 닦아 선반 위에 올려놓고 좋아하던 아이, 꽁꽁 언 겨울 냇가에 앉아 내 신발을 씻어주고 꽃을 꺾어 내 머리에 꽂아주며 예쁘다 예쁘다며 환하게 웃던 아이, 불우했지만 수정처럼 맑고 착했던 그 아이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오만과 우월감으로 군림하며 점례를 괴롭혔던 내 잘못은 잘 낫지 않는 부스럼처럼 오랫동안 둔한 통증으로 남아있었다. 이제 다시 만난다 해도 서로 알아보지도 못할 만큼 먼 길을 걸어와 버렸지만 점례와의 추억은 저문 마을의 등불처럼 내 가슴속에 반짝이고 있다.(시인)(매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