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총의 연꽃작품에 대한 재탐구
2015.2.19 번역: 민승준
주사총(周思聰)의 연꽃작품들을 보면 중국인들이 자연과 인생을 어떻게 느끼고 살아왔는지 알 수 있다. 당신이 이러한 작품에 깊이 빠져들게 된다면 이 작품들이 당신을 어디로 데려 갈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이것을 ‘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靜’은 일종의 경지(境地)이다. 주량지(朱良志)는 문인화 속에서의 ‘靜’과 ‘氣’의 문제에 대해 밝힌 그의 논고에서 ‘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중국의 철학과 예술관념 속에는 세 가지 종류의 각기 다른 ‘靜’이 있다. 첫째는 환경에서의 안정감으로 떠들썩하고 시끄러운 것의 반대의 의미이다. 둘째는 마음속에서의 안정감으로 분분한 사사로운 일들과 반대되는 뜻이다. 셋째는 영원한 우주적 정신이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태어나고 사라지는 변화가 없어 외재적인 어지러움이 없는 절대적인 평화를 말한다. 이러한 ‘靜’은 매우 깊은 의미의 우주적 경지이다.”
이러한 경지의 ‘靜’은 철학이나 종교의 방식으로 이해하기에는 쉬울지 모르지만 회화의 방식으로 정말 표현하기 힘들다. 주사총(周思聰)이 창작해 낸 연꽃을 보면 특히 그녀가 말년에 그린 연꽃작품에서는 자아를 초월한 정신을 잘 살려내 절대적인 평화에 가까이 다가가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여기에서의 정은 마르고 건조하며 답답한 것이 아니라 매우 생동감이 넘치는 것이다. 마치 홍일법사(弘一法師)가 서거하기 전에 쓴 悲欣交集과 같은 느낌이다. 바로 이러한 정이 승화되어 情과 義를 담아내는 靜이 된 것이다.
홍일법사(弘一法師)의 悲欣交集
주사총은 불교신자가 아닌데 어찌하여 이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녀의 삶의 과정이 탐구해볼 가치가 있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나는 세 가지 단계로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전통예술의 계승을 바탕으로 자아 기예의 수련과정이다. 둘째는 자신의 주변에 대한 체득으로 자연과 친구 및 자신의 몸의 변화가 가져다준 정신변화의 감지과정이다. 셋째는 자아와 세계의 관계 및 생명의 마지막에서 깨달은 과정이다.
주사총이 연꽃이라는 주제에 집중하게된 것은 1980년대 초 부터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주사총의 3개의 연꽃작품은 <주사총의 연꽃세계>라는 전시회에서 볼 수 있었다. 이 전시는 2014년 6월에 북경화원미술관에서 열렸다. 중국미술가협회에서 주관한 주사총을 기리는 전시회였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朝露圖>이다. 이 그림에는 화제글씨로 ‘寫於藻鑑堂’이라고 써다. 조감당(藻鑑堂)은 이화원 서남쪽의 호수로 이화원 속의 정원이다. 청나라 건륭황제때 지어져서 문화대혁명 후 중국회화연구소 준비위원회 사무처가 되었다. 1980년대 초 이가염, 엽천여, 황영옥, 관량, 황위, 전송암, 송문치, 려웅재, 아명, 육엄소 등 유명한 화가들이 조감당(藻鑑堂)에 와서 작업을 했다.
화제글씨 ‘寫於藻鑑堂’ 이 있는 조로도(朝露圖)
기록에 따르면 1980년 설날을 막 지낸 후 당시 중국을 대표하는 30명의 중년화가를 엄선하여 이 곳에서 대규모의 창작활동을 했는데 그것이 바로 <중국화인물화창작좌담회>이다. 이 좌담회는 창작과 강연(엽천여와 이가염이 주요 강연자)을 위주로 3주 동안 이어졌다. 그 당시 주사총은 나이가 어렸지만 그 중 한 일원이 되어 참여했다. 화제글씨로 보아 바로 이 작품(朝露圖)이 그 당시에 그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화원 서편 제방의 연꽃들이 주사총에게 영감을 주었는지는 그저 짐작해 볼 수 밖에 없다. 작품의 풍격으로만 보자면 다이 주사총은 선배들의 풍격을 계승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고선, 반천수의 특색이 결합된 것이 보여 지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도 붓을 다루는 재능이 선배들에 핍진했다. 추구하는 취향이나 붓을 다루는 재능을 막론하고 주사총은 당시 보편적 미적 추구 경황과 일치하고 있었다. 이는 주사총의 제자인 전려명이 말한 다음의 말에 잘 드러난다.
“주사총 선생님의 초기작품에서의 연꽃은 농후하고 강건하였는데 여리고 청초한 이미지로 조금씩 천천히 전환되었다. 이는 선생의 변화과정이다.”
확실히 대가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다. 주사총 연꽃작품의 변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주사총의 사위는 옛 추억을 떠올리며 장인의 연꽃창작 기법 및 풍격의 형성에서 일본 히로시마 출신의 예술가 마루키부부(丸木位里, 赤松俊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전한다. 아래그림은 평화에 대한 기원을 담아 1967년 마루키부부가 세운 마루키미술관(丸木美術館)과 마루키 부부에 관한 소개이다.
사진출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4huichi&logNo=90082264251
마루키부부와 주사총의 교류는 매우 깊었다. 1956년 주사총이 18살 때 마루키부부의 <原爆圖>를 보고 영향을 받은 주사총은 <礦工圖>를 창작했다. 그 후 1980년 주사총은 일본에서 개최된 제1회 북경미술사진전에 초대되어 처음으로 일본에 갔을 때 마루키부부를 찾아뵈었다.
마루키 부부의 원폭도(原爆圖)
처음 보았지만 오랜 사이 같았고 깊은 우정을 맺게 된다. 1981년 마루키부부는 중국을 방문한다. 이 때 주사총은 매일 마루키 부부와 동행하며 함께 사생을 하며 여행했다. 이 때 주사총은 다량의 스케치를 남겼고 산수화 작품을 창작하는데 기반이 되었다. 그 중에서 <一湖煙雨半湖花>란 작품이 바로 뒷날 주사총이 연꽃창작을 위한 기법과 배경 구도상의 기틀이 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사총이 펴낸 <하루키 부부를 동행한 사생여행기>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녀가 당시에 창작한 이념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하루키 선생에 대해 기록한 주사총의 글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주사총의 광공도(礦工圖)
“그릴 수도 있고 그리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은 그리지 않는다.”
그리고 주사총은 하루키 선생과 함께 寫意(사의)에 대해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함께 토론했다.
“寫意(사의)라는 것은 마음속의 뜻이다!
마음에 뜻을 품지 않고 어찌 사의화를 그린다고 할 수 있겠는가?
고도의 예술을 어떻게 개괄할 수 있는가?”
이런 고민들이 아마도 주사총이 연꽃창작 추구해야했던 높은 경지 를 장악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보여 진다. 한편 하루키 선생은 주사총의 일호연우반호화 당시 중국화 창작의 모습을 보며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견해를 밝혔다.
(一湖煙雨半湖花)
주사총의 一湖煙雨半湖花
“많은 그림들의 풍격이 차이가 너무 없다.” 이 말에 주사총은 특히 자신의 작품을 검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른 이의 영혼으로 그림을 그린 듯하다. 다른 사람의 말을 담아냈다. 한 사람의 작가로서 감수성이 결여된다면 그의 작품에서 개성이 없어질 것이다. 비슷한 도구를 사용하고 준법과 채색이 동일하다면 각 작가들만의 독특하고 강렬한 감수성이 없다. 그런 작품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울릴 수 없을 것이다.” 이로 인해 새로운 언어, 자기만의 언어, 자신만의 정서 및 감정, 이것들이 훗날 주사총을 더욱 노력하고 발전하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다음해에 주사총은 대량산(大凉山)으로 사생을 떠났다. 그곳의 풍광을 보며 다음과 같은 감회를 남겼다. “거기에서 내가 바라보고 느낀 것은 내가 원래 상상했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 나는 그곳이 지구가 자전하는데 특별히 느린 곳이라고 여겼다. 사람들은 식물이 그러하듯이 저절로 나고 사라졌다.그들은 문화가 없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사이에서의 깨끗하고 원시적일 만큼 순수하였다. 내가 그곳에 간 후 비로서 나는 그들과 공감할 수 있었다. 마치 지난 세기에 내가 꿈 속에서 만나보고 싶어했던 것으로 이것이 바로 정신적인 융합이다.”
주사총의 山色空濛雨亦奇
주사총은 사생에서 돌아온 후 <日出而作 日入而息>, <凉山三婦女> 및 <一湖煙雨半湖花>와 같은 시리즈인 <山色空濛雨亦奇>를 창작했다. 이때 주사총은 인물화와 산수화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자아를 표현하는 언어가 드디어 초보적으로 형성되었다. 기법에서만이 아니라 이념을 표현하는 면에서 천편일률적인 것을 벗어버리고 담담하고 음일한 자신만의 기운을 드러내기 시작하며 주사총 답다라는 면모가 나왔다.
이가염의 雨亦奇
<山色空濛雨亦奇>이라는 작품은 원경의 방식을 가지고 산수라는 주제에서 연꽃 창작의 서곡을 연주했다. 또한 이 작품은 우리에게 예술전승의 연상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부분을 가져다 주었다. <주사총의 예술을 다시 바라본다>는 논고를 보면 한 가지 추측을 해 볼 수 있다. 이 작품 속에서의 축축하고 음울한 기운은 이가염이 1954년에 창작한 <雨亦奇>와 매우 비슷하다. 이러한 주사총의 감각적 기법은 그녀의 연꽃 창작 시리즈에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녀가 아득히 멀리 보이는 연못을 그린 작품에는 山色空濛雨亦奇라는 화제글씨를 남겼는데 이것이 바로 그것을 입증한다. 본래 山色空濛雨亦奇는 소식(蘇軾)의 시 飮湖上初晴後雨(음호상초정후우)의 한 구절이다. 호수 위에서 술 한잔하며 비 갠 후의 풍경을 읊조리고 있다.
소식(蘇軾) 飮湖上初晴後雨
水光瀲灩晴方好 물빛이 가득 차 반짝이니 활짝 갠 날도 좋고
山色空濛雨亦奇 산색이 몽롱하니 비오는 날도 특이하네
欲把西湖比西子 서호를 서시에 견주고 싶은 마음
淡妝濃抹悤相宜 엷은 화장 짙은 단장 모두 잘 어울리구나 |
제백석 작품
또한 이는 주사총이 이가염을 계승한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작품이 제작된 임술년은 1982년이고 이가염이 소장한 제백석의 작품에는 <草堂煙雨>이라는 화제글씨가 있는데 제백석 작품도 1922년 임술년이다. 제백석은 발문에서 이렇게 시를 지어 말한다.
老夫今日不爲歡 한 늙은이 요즘 즐겁지 않네
强欲登高箸履難 높이 오르려 하나 해내기 힘들고
自過冬天無日暖 홀로 겨울을 나며 날마다 온기가 없어
草堂煙雨怯山寒 초당에 내리는 음울한 비 산이 차가워질까 겁내네
壬戌三日詩因作畵白石山人 임술년삼일 시를 쓰고 그리다 제백산인 |
몽롱한 물의 기운, 서정적 감흥을 맡겨버리고 침윤되는 것은 제백석의 작품 중에서도 그리 흔하지 않다. 게다가 이 작품은 세 차례나 잃어버리고 되찾는 과정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가염 부인인 추패주 여사와그 가문의 힘으로 국가에 소장되어진다.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 만약 이 세 폭의 작품이 한 곳에 모여진다면 동일한 소재로 삼대에 거쳐 걸작이 나온 것을 보며 우리는 감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3명의 대가들이 수묵의 묘미를 파헤친 것을 통해, 우리는 같고 다름, 우연과 필연 이 모든 것은 중국예술이 발전하는 데 고려해야할 법칙이 됨을 깨닫게 된다.
1980년대 중말기의 주사총의 산수화 작품은 많이 남겨져 있다. 그 속에서도 마루키 선생의 영향이 전승된 작품이 적지 않다. 연꽃작품은 전지를 정사각형으로 잡은 네모난 화면구도가 비교적 많다. 구도에서는 대각선이나 역삼각형을 잘 살려 동세와 운율을 강조하는 등 변화가 많아졌다. 이 시기에는 종이를 구겨버렸다가 다시 펴서 그린 다든지 먹을 갈아 묵힌 다음 사용하는 숙묵(宿墨)을 사용하거나 알루미늄을 만드는 원료인 반토(礬土) 및 아교를 사용하는 등의 많은 기법들이 두루 사용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 북경의 중앙미술학원의 이양(李陽)교수는 당시 그가 노침(盧沈)의 조수로 작업을 할 때의 상황을 회고한다.
노침(盧沈) 작품
그가 노침 선생을 도와서 수묵기법의 실험을 계속해 나갈 때 주사총도 매우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았고 많은 실험적 수묵기법들을 가지고 자신의 작품에 적용하여 창작하였다고 말했다. 물론 당시에는 대만의 유국송(劉國松)의
비록 연꽃 작품의 사이즈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의 소품을 보며 주사총의 스승인 노침(盧沈)은 이렇게 그를 칭찬했다.
“손쉽게 그대로 베낀 것도 아니고 선물로 주기 위한 것도 아니다. 소품이지만 작품 하나하나 새로움을 담아내려는 열정이 보인다”, “한정된 화폭 속에 자연의 수많은 변화를 담아내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감정의 색채 드러내는 동시에 추상의 관념도 담아내고 있어 높은 예술 감상의 상징적 의의가 있다.”
바로 이 상징적 의미에 주사총 연꽃작품의 큰 방향성이 보인다. 그의 연꽃 시리즈 작이 비약적으로 도약하게 된 것은 1992년이다. 바로 <山色空濛雨亦奇>을 작업을 한지 10년 후이다. 아마도 두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녀의 지병이 나날이 심해져 손으로 붓을 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요양을 필요로 하여 북경의 경풍호텔에서 요양을 하면서 그림을 그렸는데 이것이 좋은 조건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해외의 한 소장가가 왕명명(王明明)의 독려로 싱가폴에서 주사총의 개인전을 열어주게 된 것이다. 이 요인들이 주사총이 비교적 짧은 시간내에 연꽃 창작을 걸출하게 해 낼 수 있게 해 주었다. 주관적으로 본다면 주사총은 연꽃의 기질과 그녀의 지병을 통해 연에 대한 특별한 깨달음을 얻었던 것으로 본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자료를 통해 보면 1992년의 연꽃작품이 제일 많고 작품종류도 다채롭다. 주사총의 병이 깊어짐에 따라 1994년부터 큰 규모의 연꽃 작업은 점점 줄어든다. 1996년 향년 58세로 운명했다.
“고요하고 편안한 기운 속에서 뭔지모를 슬픔이 느껴진다. 아이의 순수한 마 음을 진지하게 고민하며 성실하게 그려내는 주사총의 경지는 질병의 고통 속에서도 현실은 고통스럽지만 내면의 세계에서는 고요하고 청정하게 표현 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세계는 아득히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曹雪芹(1715-1763)의 邵大箴 작품
홍루몽(紅樓夢)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보옥이 말했다. “이 시들어 말라버린 연잎들 너무 보기 싫구나! 어찌 뽑아버리게 하지 않았는가?” 보차가 웃으면서 말했다. “요 며칠사이 어찌해서 정원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셨소? 밖으로만 떠돌아다니시면서 어찌 사람을 시켜 연잎을 치울 여력이 있나이까?” 임대옥이 말했다. “나는 이의산(李義山)의 시를 제일 싫어하오. 다만 다음 한 구절은 좋소. ‘留得殘荷聽雨聲(거친 잎 위로 떨어지는 아름다운 빗소리 듣고자 시든 연잎 버리지 않네)’ 어찌하여 그대들은 연잎을 버리려고만 하는가?” 보옥이 말했다. “과연 좋은 구절이오. 앞으로 우리 연잎을 정리하지 맙시다.”
앞에서 거론한 글에 드러난 정감은 주사총의 연꽃작품 특히 비를 맞고 있는 거칠고 메마른 연의 정서와 매우 잘 부합하고 있다. 이것이 아마도 중국식의 심미적 관점이 아니겠는가. 사람들 각각의 마음속에 다 자리 잡고 있는 정서이지만 다른 이와는 말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
이상은(李商隱)의 宿駱氏亭寄怀崔雍崔袞
竹塢無塵水檻淸 대나무 언덕 먼지 없고 물가 누각 맑은데 相思迢遞隔重城 그리운 이는 저 멀리 겹겹이 성 너머 秋陰不散霜飛晩 가을 습기는 흩어지지 않고 서리 날리는 으스름인데 留得枯荷聽雨聲 다만 들리는 건 마른 연잎 두드리는 빗소리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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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의 유명한 시 ‘락씨정(駱氏亭)에 묵으며 성난 최옹(崔雍) 최곤(崔袞)에게 부치다(宿駱氏亭寄怀崔雍崔袞)’의 마지막 구절 ‘留得枯荷聽雨聲’에서는 ‘殘’ 대신에 ‘枯’를 쓰고 있다. 이 시와 주사총의 작품을 곰곰이 비교해보면 비록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최근 21세기입장에서 20세기 중국예술을 돌이켜보면 전통을 중심으로 한 독특한 창조활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사총의 연꽃작품도 그 중 한 사례에 속한다. 주사총은 서위(徐渭), 팔대산인(八大山人), 임백년(任白年)의 토대위에 조금은 경향이 다른 제백석(齊白石)의 ‘顚倒荷花知佛性, 開來自若那知愁’ 경향으로 창작했다. 이에 그녀는 20세기 우수한 교육을 받은 여성지식인이란 평가를 받는다. 몸의 장애를 겪으며 특수한 경험을 하며 얻게 된 정감은 전세계 예술인들에게 두루 감흥을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감성의 공감은 처량한 미감을 갖춘 슬픈 표정으로 비춰지긴 하지만 예술적으로 승화된 시간을 초월한 고요한 적막의 미를 보여준다.
(끝)
광공도
[작가약력]
1939년에 태어났다. 중국 북경 중앙미술학원 졸업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주로 이족(彝族)을 표현했다. 1990년대 초반 지병을 겪으며 연꽃을 작업했다. 이 당시 심한 관절염으로 붓조차 잡을 수 없어 손가락 사이에 끼워 작품 활동을 했다. 1996년(57세)에 세상을 떠났다.
[작가소개]
주사총은 중국의 현대 미술문화를 형성하는 시기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여성화가이다. 그는 1939년에 태어나 19996년에 사망하였는데 중국 정치 사회의 격변기를 지나면서 그 영향을 받았다. 그의 실제적인 작품 활동 기간은 중국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1978년부터 약 1990년까지 약 13년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었다. 특히 1985년 이후 류마티스 관절염에 의해 그림을 그릴 수 없을 정도로 사지가 뒤틀리는 고통 속에서도 틈틈이 그림을 그리는 창작열정을 보였다. 주사총은 전통적인 동양적 필묵화를 바탕으로 부분적인 왜곡과 재해석으로 현대 수묵화의 영역을 개척하였다.
“나는 수묵화를 사랑한다. 변화무쌍한 흑백은 항상 나를 심취하게 한다” -주사총-
주사총(周思聰)은 서비홍(徐悲鴻)이 학장으로 있던 북경의 중앙미술학원 출신으로 이곡(李斛)과 함께 전형적 그 시대의 인물을 그려냈다. 즉 인물화법으로써 민중, 혹은 노동자계급이나 병사(兵士), 소수민족의 평민들을 소재로 한 극사실주의 화법을 구사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기조를 두고 출발하는 주사총(周思聰)의 미학적 입장은 ‘형식은 단지 내용의 존재방식(립스)’, ‘형식은 대상의 표현 현상(폴겔트)’이며, 예술의 주된 관심거리는 정치적 목적에 부합되는 ‘현실의 재현’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이가염(李可染)은 형식이야말로 미술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주사총의 礦工圖 遺孤
주사총의 이족(彝族)
북경 이화원 안의 정원의 모습이 아닌 또 다른 조로도(朝露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