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일보 - 이춘호기자 - 2014-05-30
대구미술관은 오는 8월31일까지, 6월17∼29일 봉산문화회관과 동원화랑에서 개인전을 한다. 네 번째 변신작을 볼 수 있다.
[人生劇場 .8] “천편일률적 제도권 캔버스가 싫어 아무도 가지않은 新미술의 세계를 걸어왔다” ‘블랙미학’의 조형작가 차계남
아득한 미래로 도망가고 있는 ‘블랙미학’을 붙잡기 위해 자신의 작품을 배경으로 지그시 눈 감은 조형작가 차계남씨. 존 레논을 단숨에 사로잡은 일본의 행위예술가 오노 요코 못지 않은 포스를 갖고 있다. 섬유를 이용해 새로운 조형세계를 독보적으로 펼쳐보여 오사카미술관 등 전세계 유명 미술관 11곳에서 그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나는 비구상적이고 기운 가득한 색채가 좋았다. 일반 그림은 갑갑하고 판박이여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난 충격적인 컬러를 썼다. 교수는 그런 나를 미워했다. 그럼에도 나는 시키는 대로 하기 싫었다. 창작을 하고 싶었다. 교수는 “왜 질서 안의 그림을 안 그리느냐”고 야단을 쳤다. 난 속으로 ‘왜 같은 그림을 그려야 해요’라고 되물었다.
나는 특이한 종족이다.
일상이 올 블랙이다. 하지만 꿈은 ‘은빛’.
모르긴 해도 금성 근처에서 태어났을 것 같다. 목소리도 꼭 북극성이 휘파람을 부는 것 같다. 미안하지만 난 우리 은하계 소속은 아니다. 울음을 먹어 본 적이 있는가. 그래, 치우자. 그깟 말과 글로 뭘 형용하리오. 사하라사막의 밤 속으로 틈입하는 게 낫겠지. 전갈을 가슴에 품고.
그런 꿈을 꾸다가 일어났다. 누군가는 날 ‘스페셜 블랙’이라고 했지. 검정. 모든 물체를 집어삼키는 그 슈퍼 아우라. 여기서부터 내 생애의 절규가 시작되는 거야.
난 상주 촌년이다. 상주시 청리면 청하리에서 태어났다.
가난했지만 우리 3남매(차상남·차계남·차우철)는 그래, 한 성깔이 있지. 우린 지금껏 독신이다. 한 이성에게만 올인하기엔 우린 피가 너무 뜨거운가봐. 언니는 대구에서 추어탕으로 유명한 상주식당을 꾸려가지. 잘 퍼주는 여자다. 남동생도 예술 유전자를 갖고 있어. 지금은 언니와 남동생이 오직 날 블랙스완처럼 키우기 위해 붉은악마처럼 뛰고 있다.
가난보다 더 무서운 건 공허감이지. 그 공허감이 세월을 만나면 ‘미학의 날개’를 달지. 미래를 향하면 ‘블랙’, 과거를 향하면 화이트가 된다. 난 그 날개를 철길에서 만났어. 녹슨 못 하나를 주웠지. 그걸 철길 위에 올려놓으면 금세 수은빛, 마치 가을날 첫 귀뚜라미 울음 같은, 그 실버톤의 화이트를 평생 잊을 수가 없어. 내 섬뜩한 가슴의 색채이고, 울 엄마 너무 힘들어 울 때 그 눈물의 빛도 어른거렸지.
울 엄마는 천대겸. 추어탕을 정말 잘 끓였어. 그거 끓여 삼남매를 키웠지. 60년 전 대구로 건너왔다. 어머니는 구멍가게를 열었는데 장사가 안 돼 다시 옛 한일극장 근처에서 추어탕을 끓여 팔았다. 어느 날 우리 가족을 불쌍하게 여긴 한 성직자가 식사 도움을 주려 했다. 발끈한 어머니는 밥그릇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면서 “내 자식은 거지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우리 모두 모성 덕분에 자립적으로 성장했다.
난 원화여중·고를 나왔다. 미술반 선생이 내 미술솜씨에 관심을 갖고 미대에 가라고 진로를 정해주었다. 난 이게 아니다 싶으면 조폭이라도 멱살을 잡는다. 그렇게 학창시절부터 ‘정의·의리파 차계남’으로 살았다.
◆ 왜 같은 그림을 그려야 하죠
1974년 옛 효성여대 응용미술과에 입학을 한다. 하지만 강단의 미술은 너무 고루하고 체제유지적이었다. 교수는 권위주의만 앞세우고 ‘자기가 곧 진리’라고 학생을 몰아붙였다. 난 속으로 교수들은 모두 시대착오적이라고 봤다. 솔직히 현대미술적 에너지를 느끼기는 힘들었다. 당시 난 비구상적인 염색을 주로 했다. 천에 대고 그림을 그렸다. 다른 동료는 거의 화조류와 예쁜 풍경화 등을 즐겼다. 나는 비구상적이고 기운 가득한 색채를 품었다. 일반 그림은 너무 갑갑하고 판박이라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난 충격적이고 언밸런스한 컬러를 사용했다. 교수는 그런 나를 미워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자에 대한 묘한 시기와 질투였던 것 같다.
나는 시키는 대로 하기 싫었다. 창작을 하고 싶었다. 당시 캠퍼스에서 이건 불경이었다. 교수는 대뜸 ‘왜 범주 안의, 질서 안의 그림을 안 그리느냐. 벌써 겉멋이 들었다’고 야단을 쳤다. 나는 속으로 ‘왜 같은 걸 그리지’라고 독백했다.
희한했다. 졸업한 뒤 화가가 되는 애는 거의 없었다. 다들 교편을 잡거나 시집가는 게 전부였다. 지도교수가 조교로 남으라고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좀 더 큰 물을 찾았다. 서울 이화여대 대학원 염색과에 들어간다.
◆ 서울도 현대미술로 봐선 시골이었다
사업가 기질이 짙은 언니는 그때 서울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다. 비즈니스가방 판매회사의 중역이었다.
뭔가 다른 세계를 추구하기 위해 유학을 왔는데, 거기도 대구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다들 간판을 따기 위해 이 과에 입학했고, 내심 좋은 신랑 만나 호강하고 싶은 맘뿐이었다. 내가 색다른 작업을 하면 다들 이상한 여자로 봤다. 학교가 되레 내겐 독이었다. 수업이 내게 아무런 자극이 되지 않았다.
어느 날 도서관에 갔다. 거기서 책 한 권을 만난다.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던 ‘형염(形染)’에 대한 정보를 접하게 된다. 순간 모골이 송연했다. 나도 모르게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었다. 이게 바로 내가 추구하려는 예술이야. 갑자기 피가 끓기 시작했다. 교수를 만나 형염에 대해 물었다. 교수도 몰랐다.
답은 나왔다. 그럼 한시라도 빨리 일본으로 유학을 가자. 더는 한국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백남준이 왜 그렇게 빨리, 한대수가 왜 그렇게 빨리 미국 뉴욕으로 갔는지 조금 이해할 만했다. 나는 ‘한국년’이 아니라 ‘세계년’이었다. 1년 만에 대학원을 중퇴한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미술시장서 아직도 난 아웃사이더
평생 검은색 계열의 옷만 고집하는 차계남씨. 그는 섬유를 통해 블랙톤의 조형미학을 추구해온 신개념 조형작가다. 2009년 일본 생활을 마감하고 달성군 가창면 팔조령 터널 초입에 마련한 작업실에서 모처럼 4번째 작품 변화에 성공한 기분을 만끽하기 위해 두 팔을 펼쳐보이고 있다.
길이가 8m에 육박하는 흡사 정선의 ‘진경산수화’ 같은 한지를 꼬아만든 최근작
길이가 8m에 육박하는 흡사 정선의 ‘진경산수화’ 같은 한지를 꼬아만든 최근작
# 麻絲를 장만하는 게 힘들었다. 오직 수작업뿐. 대마껍질을 일일이 염색하고, 말리기 위해 한 올 한 올 풀어냈다. 마실은 유리가루를 발라놓은 듯하다. 줄칼같아 만지다 베이기 일쑤였다.
# 일본인들은 내 작품에 칭찬반 걱정반이었다. “이런 작품을 하면 안 팔려 굶기 십상”이라고. 난 “내 몸을 팔아서라도 이 작품을 계속할 것”이라고 되받았다.
# 십수년동안 작품이 하나도 팔리지 않았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하지만 내가 누군가. 차계남이야. 이건 분명 내 인생의 ‘찰나적 고난’일 거라고 최면을 걸었다.
# 92년 국제조각대회서 은상 수상, 그간의 설움 씻어버리다. 미술평단도 나에 대한 평가를 새롭게 하기 시작했다.
◆가자 일본으로
당시 한국 여성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건 하늘의 별따기였다. 다들 공부가 아니라 공부를 핑계로 몸 팔러 가는 것으로 간주했다. 일본인의 국내 기생관광이 성행하던 시절이었다. 누구도 내가 예술 때문에 일본으로 간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문화공보부 책임자도 나의 일본행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는 그런 사례가 없다고 했다. 언니가 뿔이 나 중재에 나선다. 책임자를 만나 설득에 들어간다. 하지만 불가능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그때까지 받은 상 꾸러미까지 내밀었다. 끝내 문이 열린다. 조건부 승낙을 받아낸다. 고작 1개월짜리 비자. 언니가 100만원을 유학비용으로 주었다. 꿈을 찾으라고 격려했다.
일본 도쿄에 도착했다.
지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국의 고아 신세. 과연 내 예술을 어느 공간에서 불살라야 할지 확인하고 싶었다. 도쿄예술대, 와세다대, 오사카예술대, 교토예술대 등을 비교하면서 순례했다. 교토예술대에 입성한다.
그런데 왜 대학은 다 그 모양인가. 그곳 분위기도 서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학생의 일탈을 허용하지 않았다. 작품을 만드는 데 대한 매뉴얼이 있었다. 이건 되고 저건 안 된다는 식이었다. 학교 수업과 관계 없이 내가 원하는 작품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내 운명을 바꾼 미술 재료를 만난다. 멕시코에서 오는 마실(麻絲)용 대마초 껍질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내가 예술을 위해 대마초를 피우려고 하는 행위로 오해했다.
난 천편일률적인 제도권의 캔버스가 시시해 보였다. 독보적인 작업을 하고 싶었다. 대마초 껍질을 닥나무처럼 두드리고 갈무리해서 실을 만들고, 그 실을 일일이 색을 먹이고, 그 마색실을 빼곡하게 묶은 뒤 그걸 잘라 조각 같고 그림 같은 신미술의 경지를 개척하고 싶었다. 국내는 물론 일본에서도 그런 장르에 도전한 작가는 없었다. 난 전인미답의 길을 가고 있다는 희열과 자부심을 느꼈지만 동시에 이게 제대로 결실을 볼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도 느꼈다.
‘식은밥’ 같은 학교를 후딱 졸업해버렸다.
◆ 1981년…절체절명의 순간
1981년 절체절명의 순간이 온다.
‘차계남, 넌 이제 목숨을 버려라. 그리고 배수진을 쳐라.’
누가 선몽하는 것 같았다. 24시간 작품만 생각한다. 무명이라 아무도 날 찾는 이가 없었다. 용맹정진의 나날이었다. 언니도 나를 어떤 반열에 올리기 위해 생활비를 계속 공급했다. ‘목숨을 걸어도 성공하기 힘든데 알바하면서 어느 천년에 명작을 만들 수 있겠냐.’ 그게 언니의 생각이었다.
이사도 수십 번을 했다. 작은 아파트에 살 때는 작업실이 없어 지하 주차장을 작업실로 사용했다. 차량들이 귀가하기 전 서둘러 작품을 거두어 방에 보관해야만 했다.
마실을 작품용으로 장만하는 게 지긋하게 힘들었다. 안동포 만드는 것 이상으로 어렵고 고됐다. 기계도 이용할 수 없었다. 오직 수작업뿐이었다. 대마껍질을 일일이 염색을 하고, 말리기 위해 한 올 한 올을 풀어낸다. 마실은 일반 실과 달랐다. 유리 가루를 바른 듯했다. 줄칼 같아 툭하면 상처가 났다.
난 오방색에 빠져 있었다. 마실을 갖고 일정한 형태를 갖도록 하기 위해선 낱낱의 마실 여러 개를 김처럼 짜내야 했다. 공업용 본드액에 담가 실을 빳빳하게 만들었다. 감각을 위해 맨손을 용액 안에 담갔다. 동절기 내 손은 언제나 동상 투성이였다. 지금도 동상 후유증을 앓고 있다. 노파의 손마디다.
한지처럼 변한 마실판을 갖고 조형물을 만들 차례. 일단 한문화의 출발인 한글의 자모 중 몇몇 자음을 형상화하고 싶었다. 마실을 가로 45㎝ 세로 45㎝ 두께 1㎝ 크기로 만든 뒤 그걸 차곡차곡 쌓은 뒤 작두로 잘라 ㄱ·ㄴ·ㄷ·ㄹ·ㅁ·ㅂ·ㅅ·ㅍ을 만들었다. 대마초가 새로운 예술로 환생하는 순간이었다. 서른한 살이었다.
◆ 생애 첫 개인전
교토 마로니에 화랑에서 생애 첫 개인전을 갖는다.
이에 앞서 백남준이 뉴욕에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만나는 이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내 이름은 차계남’이라고 알렸다. 일본문화예술계와 친해지기 전쟁이 시작된다. 아직 유학생이고 언젠가 개인전을 할 거고 언젠가 유명해질 거라면서 상대에게 최면을 걸었다. 첫인상은 영국의 인디카 갤러리에서 퍼포먼스처럼 존 레논을 만난 ‘오노 요코’ 같았단다. 항상 블랙톤의 옷만 입고, 머리를 묶고 다니고, 형형한 야수의 눈빛을 가져 다들 ‘교토의 악녀’라 했다. 처음엔 이상한 눈으로 봤지만 다들 나의 적극성에 반한다.
가난해서 제대로 된 팸플릿을 만들 수 없었다. 그냥 조그마한 수제 엽서를 보냈다.
오픈일, 예상을 넘어 대박이었다. 마실을 갖고 입체적인 작품을 만든 선례를 보지 못한 일본인에게 내 작품은 하나의 경이로움이자 센세이션이었다.
그런데 이구동성으로 염려를 해준다. ‘이런 작품을 하면, 잘 안 팔려서 굶어죽을 것’이란 걱정이다. 이렇게 되받는다. “내 몸을 팔아서라도 이 작품을 지속시키겠다.”
30년 전 어느 날이었다. 30년 후 현실을 직시하라고 했던 그 친구들은 훗날 그 말을 모두 취소한다.
◆ 두 번째 실험
색은 안팎이 싸운다.
예술적인 건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그걸 안으로 집어넣고 누르고 감추는 힘이라고 믿는다. 아름다움은 내면에 있다. ‘시원의 컬러’라고 볼 수 있는 블랙을 갖고 유채색을 감싸는 시도를 한다. 아름다운 건 10분의 1 정도 띠모양으로 보여주고 나머지는 검은색으로 감쌌다.
그런데 갈수록 예쁜 게 싫어졌다.
87년 유채색을 다 버린다. 더 숨기면서 ‘폐쇄적 개방미’를 발현하기 위해서다. 말하자면 거문고의 ‘농현(弄絃)’ 같은 것이다.
작가는 먹고살기 위해서 일정한 상업성을 지녀야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오직 예술만 추구했다. 작품만 본 이들은 그 심플함과 거창함 때문에 다들 내가 남자인 줄 안다.
그러나 십수 년 동안 작품이 하나도 팔리지 않았다.
대작이라서 별도로 작품 모아둘 곳이 필요했다. 교토에서 벗어나 결국 시가현으로 옮겨간다. 구사츠시의 한 근교 헛간을 발견한다. 10년간 비워둔 염색공장이다. 거기를 모두 반대했다. 난 맘이 편했다.
어느 고즈넉한 밤이었다. 지붕에선 빗물이 새고, 쥐소리까지 들렸다. 독방에서 바퀴벌레로 연명했던 영화 ‘빠삐용’ 주연배우 스티브 맥킨과 같은 처지였다. 뻐꾹새가 울었던 것 같다. 여자란 사실이 절망스러웠다. 빌어먹을 현모양처! 팔리지도 않는 예술에 빠져 누더기처럼 살고 있다니. 참으로 오래 울었다. 자살로도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차계남이야. 이건 필시 하늘이 날 위대하게 만들기 위한 ‘찰나적 고난’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작품 앞으로 걸어갔다.
◆ 차계남의 날이 도래하다
1992년 오사카 국제조각트리엔날레에 작품을 출품한다.
세계에서 조각 좀 한다는 작가들이 모여 기량을 겨루는 대회였다. 그래, 난 은상이었다. 국제적 위상을 차지하는 순간이다. 그날 내 명예도 회복했다.
평단도 비로소 나에 대한 해석에 나선다.
‘차계남의 작업은 사이잘 삼(Sisal Hemp)이라는 천연재료를 접착제로 고착시켜서 거대한 조각(Fiber work)을 만든다. 80년초 ‘실의 조형’ 이라는 연작을 발표. 84년 제작한 한글문자를 날카로운 칼로 입체적으로 잘라낸 것 같은 형상의 작품 발표. 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바람’ 혹은 ‘무제’ 시리즈 발표.그녀의 검은빛은 존재의 거대한 구조이자 침묵의 심연을 대변하는 색채. 검은 빛깔이 주는 장엄함과 죽음의 상징성이 차계남에 있어서는 섬유의 유연성에 대한 기존관념을 깨뜨리는 강인함의 표상이다.’
◆ 더 좋은 작품에 대한 고뇌 재발
한 경지를 찾은 뒤 더 깊은 고뇌가 왔다.
더 나은 작품을 못 만들 수 있다는 불안감이었다. 예술은 ‘변화’ 아닌가. 99년부터 직선에서 벗어나 부드러운 곡선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그게 2009년까지 이어졌다. 나로선 세 번째 변신이다. 네 번째 변신이 절실했다. 수십 년간 이어온 조각품형 도상작업을 평면으로 옮겼다. 2009년 마실과 결별을 하고 한지를 주재료로 간택한다.
2009년 그리워하던 대구로 온다.
달성군 가창 팔조령 초입에 작업실도 마련한다. 새 작업을 위해 학정 서예실의 정성근 서예가한테 서예를 배운다. 반야심경을 주로 적었다. 글씨가 적힌 전지 한지를 1㎝ 폭으로 72토막을 내 지승공예식으로 손으로 꼬았다. 그런 작업 때문에 내겐 지문도 사치다. 거대한 나무박스를 만들고 2㎜ 간격으로 못을 박는다. 꼰 한지실을 여러 동선으로 감는다. 길이 8m급을 만들려면 엄청난 양의 한지가 들어간다. 수없는 파지가 생겼다. 실패의 연속이다.
그렇게 해서 모두 10점을 얻었다. 방황한 지 3년 만이다. 누군가는 가격을 운운하겠지만 이미 값은 내 손에서 벗어났다. 세월만이 거기에 가격을 매겨줄 것이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나는 젊은 작가의 작품을 자주 감상한다. 서예전도 보러간다. 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화단은 문제가 있다. ‘나는 완성이고 남은 미완성’이란 편견이다. 구상그룹은 비구상그룹, 비구상그룹은 구상그룹을 서로 무시한다. 창작의 한계가 곧 파벌로 이어지는 것 같다. 슬프다. 한 인간이 표현하는 건 다 같은데.
지금도 열정에서는 자유롭지만 시장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이 또한 즐기지 않고 어쩌랴. 운명이다. 되든 안 되든 이 대책 없는 길, 나 아니면 누가 가겠는가?
◆ 취재 후기
한국, 일본, 독일 등지에서 34차례 개인전을 가졌다. 그동안 500여점을 세상에 내놓았다. 일본 오사카 현대미술관은 국내 작가로는 처음으로 그녀 작품을 소장한다. 이 밖에 국립현대미술관, 헝가리 사비리아 미술관, 독일 갤러리 카롤라 베버 등 전세계 11개 미술관이 그녀의 작품을 구입한다.
살아오면서 그녀만큼 강렬한 눈빛을 보지 못했다. 기구함과 초월, 그리고 인내와 성실함이 섞인 것 같다.
올해 예순하나. 그녀의 다섯 번째 변신작이 궁금해졌다.
대구미술관은 오는 8월31일까지, 6월17∼29일 봉산문화회관과 동원화랑에서 개인전을 한다. 네 번째 변신작을 볼 수 있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