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는 왜
사랑을 꿈꾸는가?
글|장하빈 시인
나는 그녀를 아메리카, 아메리카라 부른다
그녀의 이름은 ‘미주’다
난 아직도 ‘미주’라는 이름의 어원을 모른다
그녀의 맑은 눈망울을 바라볼 땐 ‘아름다운 구슬’이었다가
깊은 볼우물에 머무는 순간 ‘아름다운 물가’로 금세 바뀐다
어쩌면, 그녀가 ‘VOGUE’라는 카페를 운영하는 걸로 보아
‘아름다울 미美, 술 주酒’일 거라는 엉뚱한 생각 스치기도 한다
그렇거나 말거나
나는 그녀를 아메리카, 아메리카라 부른다
나는 종종, 화투 패를 잡는다
그녀와의 궁합을 맞춰 보려는 게 아니라
오직 아메리카행 티켓을 손에 쥐려는 것
그리하여 한때의 유행 좇아
머나먼 약속의 땅에서 그녀와 아메리칸 드림을 펼치고 싶은 것
패거리들이여!
내가 대박을 노린다고 핀잔주지 마라
흔들고 피박시키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오롯이 존재하는 법
쓰리~고!
오늘밤도 태평양 가로지르는 대륙횡단열차에 꿈을 싣고
나는 아메리카, 아메리카로 간다
― 졸시, 「나의 아메리카」 전문
예술가에게 사랑은 밥인가 꿈인가? 아니면 약인가 독인가? 동서양의 시인이나 화가 등 예술가에게 연인은 자고로 영감의 원천, 창조의 동력이었다. 마치 ‘벚나무가 시체의 피를 빨아올려 아름다운 분홍색 꽃을 피운다’는 일본의 작가 카지 모토지로의 소설처럼 예술가는 연인에게서 아름다운 영혼과 기운을 자양분으로 삼아 걸작을 창조했던 것이다.
시를 쓰는 영어선생 백석(1912~1995, 본명 백기행)과, 춤추고 노래하는 권번 기생 진향(1916~1999, 본명 김영한)의 사랑이 불후의 명시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낳았다. 그들은 함흥 영생고보 교사 회식자리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백석은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 ‘자야’(子夜, 이백의 시 ‘자야오가’에서 따옴)라는 이름을 선사한다. 학교에 사표를 낸 후 서울로 온 백석은 조선일보에 취직한
뒤 청진동에서 자야와 살림을 차린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로 죽을 것처럼 사랑하다 결국 이별한 후, 광복과 전쟁을 겪으며 백석은 만주를 헤매다 북한에 머물렀고 자야는 남한에서 무진 돈을 벌어 길상사에 시주했다.
“천억이 그 사람의 시 한 줄만 못해.”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과 『내 사랑 백석』이란 책을 펴내 세간의 화제를 모으기도 했던 김영한의 백석에 대한 불멸의 사랑 고백이다. 파블로 피카소(Pablo R. Picasso, 1881~1973)만큼 연인을 자주 바꾸면서 그때마다 화풍이 바뀐 예술가는 흔치 않다. 페르낭드
올리비에의 조각 같은 육체에서 분석적 입체주의 작품 「아비뇽의 아가씨들」이 탄생되었는가 하면, 마리 테레즈 발테르의 금발과 육감적인 몸매에서 몽환적이거나 관능적인 자태를 드러낸 「누워있는 여인」이 나왔다. 불안한 감정을 지닌 도라 마르를 만날 땐 에스파냐 내전을 겪으며 날카롭고 무거운 그림으로 변모한 「게르니카」, 「우는 여인」이 탄생되었으며, 프랑수아즈 질로와 함께 지중해 연안으로의 여행을 즐기던 평화롭고 쾌락적인 순간을 「삶의 기쁨」으로 화폭에 담아내기도 하였다. 만년의 그를 헌신적으로 돌보며 신처럼 숭배하던 자클린 호크에게는 「꽃이 있는 자클린의 초상」 등 400여 점의 초상화를 남기기도 했다.
“뮤즈와 신발닦개, 내게 여자는 이 두 종류밖에 없어.” 블로 피카소는 그의 연인이 영감을 주는 동안엔 뮤즈(Muse, 여신)로 떠받들었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신발닦개처럼 내버렸던 것이다.
“살았고(visse), 썼고(scrisse), 사랑했노라(amo)”
몽마르트 언덕에 서 있는 스탕달의 묘비명에 새겨진 글귀다. 작가로서 산다는 것, 쓴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예술을 사랑하는 이여! 그대의 나타샤나 뮤즈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어느새 그대의 아메리카가 원고지나 캔버스에 오롯이 담겨 있기라도 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