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모당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데 비해 낙재는 짧은 기간이지만 벼슬길에 나아갔다는 점이 다르다.
물론 이들을 전후하여 임하 정사철이나 계동 전경창, 송담 채응린, 태암 이주, 괴헌 곽재겸 같은 훌륭한 선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찍 돌아가셨거나 두 분처럼 체계적으로 제자를 길러내지 못했었다.
낙재는 본관이 달성으로 경산 전교(典校)였던 아버지 서흡(徐洽)과 어머니 인천 이씨 사이에서 1550년(명종 5)에 태어나 일곱 살 되던 해 큰아버지 서형의 양자가 되었다.
1575년(선조 8) 향시에 나아가 장원을 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송담이나 계동에게 글을 배웠지만 1577년(선조 10) 한강 정구로부터 본격적으로 성리학을 공부했다.
1587년(선조 20) 선공감(繕工監: 건축물의 신축, 수리 및 토목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감역(監役)에 제수되어 직무에 힘쓰다가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불과 일주일 만에 대구읍성이 함락되고 대구부사 윤현은 부민 2천 명을 이끌고 공산성으로 퇴수한다.
이때 팔공산 부인사에서 의미 있는 모임이 있었다(낙재일기 1592년 7월 6일). 이날 모임은 낙재를 의병대장, 공사원에 이주, 유사에 이경원, 채선행으로 집행부를 구성하고, 그 하부 조직으로 면(面), 이(里)별 의병장과 유사를 두었다. 당시 지역별 의병장은 다음과 같았다.
읍내(邑內: 시내 중심가를 말함인 듯), 용덕리장 하자호, 북산리장 김우형, 무태리장 여빈주, 달지리장 서득겸, 초동리장 서사술, 이동리장 배익수 채응홍, 신서촌장 설번 수성(守城), 겸대장현내장(兼大將縣內將: 대장 겸 수성현 책임자라는 것 같음) 손처눌, 동면장 곽대수, 남면장 배기문, 서면장 조경, 북면장 채몽연, 해안(解顔:오늘날 동촌 일대?) 오면도대장(五面都大將: 해안 5개 면의 책임자?) 곽재겸, 상향리장 곽재명, 동촌리장 우순필, 서부리장 최의, 북촌장 류요신, 서촌장 민충보 하빈(河濱: 오늘날 다사 하빈 일대?) 겸대장서면장(대장 겸 서면책임자?) 이종문, 남면장 정광천, 동면장 홍한, 북면장 박충윤이다.
공은 왜란이 발발한 그해 조모상, 다음해 생부의 상을 당하였으나 의병을 모으고, 국난 극복에 앞장섰다. 그 공로로 1595년(선조 28) 청안현감에 되었다.
전란 중이라 피폐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향교를 수리해 학문을 진흥시키고 사직단과 여묘를 보수해 선정을 베풀었으며 모속관(募粟官: 곡식을 수집하는 벼슬)으로 쌀과 콩 수백 섬을 모아서 오례성(청도 소재)으로 보내 군량을 보충하도록 했다. 훗날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주민들이 비를 세워 칭송했다.
잠시 청주에 우거하다가 1599년(선조 32) 고향으로 돌아와 거처하는 집을 미락재(彌樂齋)라 하고 선사재와 연경서원을 오가며 강론을 했다. 그 후 개령 현감을 비롯해 사헌부 지평 등 여러 차례 나라의 부름이 있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1615년(광해군 7) 돌아가시니 향년 66세였다. 도여유 등 문인록에 등재된 제자만 113명이다. 저서로 ‘낙재집’이 있고 대구의 ‘구암서원’, 청주의 ‘구계서원’에 제향되었다.
대구가 문향으로 자리 잡은 것은 멀리는 퇴계로부터 한강, 계동에 이어 낙재와 모당 두 분이 뿌린 씨앗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낙동강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곳, 파산(巴山)은 한강과 낙재가 수시로 소요하던 곳이다.
또한 한강과 낙재로부터 배운 사람들의 후손 아홉 문중이 유학 연구와 인격 도야를 위해 1798년(정조 22) 설립한 이락서당(伊洛書堂)이 있으며 낙재의 묘소도 있다. 이곳의 큰 소나무(대구시 보호수)를 낙재를 기리는 비목(碑木)으로 삼고 싶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