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목사는 남산교회 김태련(金兌鍊) 조사와 업무를 분담하여 본인은 시위 참가자를 물색하고, 김 조사는 독립선언서 인쇄 등 거사에 필요한 준비물을 담당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에 미리 발각되어 3월 4일 천도교 대표 홍주일, 7일에는 백남채 등이 체포되었다. 다행히 이 목사와 김 조사는 경찰이 눈치 채지 못해 3월 8일 오후 3시경 시위 현장에 숨어들 수 있었다.
계성학교, 신명학교 학생 등 참가자가 800여 명으로 늘어나자 김태련이 황급히 달구지 위로 올라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그때 주변에 있던 일경이 제지해 다 읽지도 못하고 중단되자 이어 이만집 목사가 ‘대한독립만세’를 큰 소리로 외치자 시위 군중들이 따라 부르면서 본격적으로 시가행진이 전개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대구 만세운동은 체포된 사람만 무려 157명에 달했다.
그러나 1세기가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대구 만세운동의 주역인 이만집 목사를 기리는 기념물이 하나도 없다.
이 목사는 본관이 경주로 1875년 경주시 강동면 호명리에서 태어났다. 25세가 되던 1900년, 이 지역을 전도하던 선교사 애덤스(J, E Adams, 우리말 안의와, 1906년 계성학교 설립)를 만나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 후 애덤스가 개설한 계성학교 한문선생으로 초빙되어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고, 교회에서는 장로로 교회부흥에 노력하면서 대구지역 교계의 지도자로 자리를 굳혔다.
1912년보다 체계적으로 신학공부를 하기 위해 37세라는 늦은 나이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부르엔(H. M Bruen, 우리말 이름 부해리, 신명학교 설립자 부마태의 남편) 선교사와 남산교회 설립에 참여하고 1917년 남산교회, 1918년에는 제일교회 목사가 되었다.
1919년 3`1만세운동을 주도한 그는 3년의 징역형을 받았으나 2년 만에 출소했다. 그러나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교세는 많이 약화되고 그나마 내분이 일어나, 이 목사는 선교사들과 대립하다가 1923년 드디어 목회자로서의 자격이 정지되었다. 잇따라 있었던 법정싸움에서마저도 패소하자 고향 경주로 내려가 과수원을 경영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자 금강산으로 들어가 수양관을 세우고 기도생활을 하던 중 1944년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니 향년 69세였다.
전통적인 유학자였던 그가 기독교에 입문,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이외 일본제국의 압제로부터 민족을 해방시키려고도 무던히 애썼다.
특히, 1915년 장차 조국을 이끌어 갈 청년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김태련, 백남채와 더불어 교남기독교청년회 즉 대구YMCA를 조직했다.
이후 그는 회장이 되고 김태련은 총무가 되어 대구지역 청년들을 결집시켜 선교활동과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부해리, 맹의와에 이어 3대로 목회한 남산교회는 올해로 설립 100주년을 맞고, 내년에는 그가 창립한 대구YMCA도 100년을 맞는 겹경사가 다가오고 있다. 그간의 활동으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고, 2005년에는 경북노회로부터 복권도 되었다.
제95주년 3`1절을 맞는 올해도 어김없이 대구 3`1만세운동 재연행사가 열릴 것이다.
독립운동가로 목회자로 열심히 살아온 이만집 목사를 기리는 표석을 대신, 남산교회 정문 앞의 백합나무를 기념나무로 한다면 더 뜻 깊은 행사가 될 것 같다.
백합나무는 북아메리카가 원산지이나 우리나라에서도 잘 자라고 꽃이 튤립을 닮아 튤립나무라고도 하며 가을에 노란 단풍이 들어 옐로포플러(yellow poplar)라고도 한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