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가톨릭을 대표하는 인물을 추가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으나 누가 적당할지 미루고 있었다. 처음 이곳을 개척한 로베르 신부가 합당할 것 같은 생각을 가졌으나 동상이 이미 서 있어 다시 나무로 그를 기릴 필요가 없을 것 같고, 그 외에도 여러 주임신부들이 사목을 담당했으나 종교적으로는 훌륭한 분이지만 대중에게 크게 알려지지 않은 점이 아쉬웠다. 그래서 생각한 분이 김수환 추기경이었다.
대구 출신으로 세계 최연소 추기경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추기경으로 늘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한 분으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 추기경은 1922년 대구 중구 남산동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이다. 할아버지는 고향이 충남 연산으로 1866년(고종 3) 병인박해 때 순교한 김보현(金甫鉉)이고, 부친은 김영석(金永錫)이며, 모친은 대구 출신의 서중하(徐仲夏)이다.
박해를 피해 다녀야 했던 당시 천주쟁이들이 다 그랬듯이 옹기장수로 전전하는 부모를 따라 어린 시절은 선산에서, 초등학교는 군위에서 다녔다.
1941년에 서울 동성상업학교(현 동성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같은 해 4월 일본 동경의 상지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귀국하였고, 1947년에 성신대학(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편입하여 1951년에 졸업했다. 그 후 독일 뮌스터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전공하였다.
1951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고, 안동성당(현 목성동성당) 주임신부가 되었다. 1955년부터 이듬해까지 김천성당(현 황금성당)의 주임신부와 성의중고등학교의 교장을 겸임하였다.
독일 유학 후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 사장으로 자리하였고, 1966년에 주교가 되었다. 1968년에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된 뒤 대주교가 되었으며, 1969년에 추기경으로 서임(敍任)되었다.
1970년부터 1975년까지, 1981년부터 1987년까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을 2차례 역임하였고, 1975년부터 1998년까지 평양교구장서리를 맡았다가 1998년에 서울대교구장 및 평양교구장 서리에서 퇴임하였다.
197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과 2000년 제13회 심산상 등을 받았고, 2001년 독일 대십자공로훈장과 2002년에 칠레 베르나르도오히긴스대십자훈장을 받았다.
군사정권 당시 독재정권 퇴진운동과 시민활동을 전개하였고, 혼란스러운 시국과 관련한 사건들이 일어날 때마다 종교지도자로서 약자를 끌어안았다. 박정희 정권과 맞선 때도 있었지만 인간적으로는 늘 가슴 아파했다고 한다.
2009년 87세로 선종했다.
저서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이 땅에 평화를’ ‘우리가 사랑한다는’ 등이 있다.(참고자료:한국역대인물종합시스템)
추기경께서는 오랫동안 성직자의 길을 걸어왔지만 의외로 계산성당과의 인연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러나 사제서품을 이곳 계산성당에서 받았고 특히, 가난을 떨치기 위해 장사에 나서려 했던 그를 성직자의 길로 인도하고,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다잡아 준 어머니가 이곳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효성이 지극했던 김 추기경은 대구대교구 교구장 비서로 발령을 받자 교구청 바로 옆에 집을 먼저 마련하고 그곳에서 어머니를 모시며 임종까지 지켜보았다.
성당 남쪽 화단에 가지가 꾸불꾸불하지만 그래서 더 아름다운 향나무가 있다. 굴곡이 많은 현대사의 부조리에 대해 기회 있을 때마다 원로로서 책임을 다하려 했던 김 추기경의 삶을 닮은 나무다. 지난 2월 16일은 선종 5주기였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