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9    업데이트: 22-12-26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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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세이] 길 끝에서 만나는 돌 하나
이구락 | 조회 2,257
[주말에세이] 길 끝에서 만나는 돌 하나
오늘은 일요일, 오전 4시에 일어나 잠든 도시를 홀로 빠져나간다. 텅 빈 아스팔트길이 주는 차가움과 일탈의 즐거움은 언제나 은밀한 유혹이다. 첫 신호등 앞에 멈춰서면 온몸의 감각이 서서히 깨어나며 짜릿한 흥분과 긴장감에 휩싸인다. 밤새도록 불 밝힌 가로등이 줄지어 서서 하품을 하는 도로는 서두르지 않아도 가는 길은 빠르다.

구마·남해·대통고속국도를 바꾸어 타는 동안 지독한 안개는 자주 시야를 방해했지만, 그리고 섬진강휴게소에서 따뜻한 우동으로 속을 달랬지만, 3시간 만에 거제 남단 학동해변에 도착한다. 9시까지 조용한 몽돌밭을 거닐다 함목으로 이동하여 단골식당에서 늦은 아침을 먹는다. 이제부터는 거제의 아름다운 돌밭들, 함목 도장포 해금강 여차를 순례할 시간이다. 때로는 수산이나 홍포도 궁금하다.

도장포 돌밭에 들어서니, 중년 남녀 세 쌍이 돌밭을 선점하고 술판을 벌여놓았다. 인사를 건네니 대뜸 술잔부터 내미는 남녘의 인심이 고맙다. 소주 한 잔과 회 몇 점 얻어먹는 사이, 일행 중 눈매 고운 여인이 어떤 돌을 줍느냐고 호기심을 드러낸다. 글쎄요, 참 어려운 질문이네요. 이때, 신선대 위에서 관광객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폭죽처럼 터졌다. 저 신선대를 닮은 문양석을 찾지요. 일어서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한 시간쯤 머무니 가랑비가 내린다.

차로 돌아와 잠시 해금강 돌밭을 떠올린다. 그러나 시동을 거는 대신, 의자 등받이를 깊숙이 뒤로 젖힌다. CD를 켜니,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추억’이 감미롭다. 차창에 맺히는 빗방울을 보며 선율에 젖다가, 다음 곡으로 넘어가자 이내 상념에 빠진다. 틈만 나면 무작정 길 위에 나서는 나의 바람기에 대하여, 내가 가는 길의 끝은 왜 언제나 물가에 가 닿는가를, 그 물이 언제부터 강에서 바다로 바뀌었는지를 떠올려본다. 다시 최근에 받은 친구의 신간시집을 펼쳐 메모까지 하며 몇 편을 읽다 까무룩 잠 속으로 떨어진다. 달디단 잠속에 파도소리가 스며든다. 깨어 보니 차창을 때리는 비바람이다.

다시 함목으로 나와, 늦은 점심을 먹고 여차로 간다. 이제 빗줄기는 굵어지고 바람까지 세차다. 여차 앞바다에 연꽃처럼 떠있는 병대도가 오늘따라 물안개 속에 요염하다. 여덟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저 병대도 때문에, 그리고 저 섬을 지킨다는 여차(汝次)라는 어여쁜 이름 때문에라도, 이곳은 거제에서 가장 아름다운 몽돌밭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흐린 날이지만 저물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일회용 비옷을 꺼내 입고 갯바위를 돌아 큰 돌밭으로 간다. 돌밭에 들어서자마자 처음 집어든 돌이 완벽한 ‘달마석’이다. 역시 자연은 위대하다. 특히 해석(海石)은 우주의 순환과 파도의 리듬에 의해 끊임없이 새 돌이 탄생되고 있으니, 이 어찌 축복이 아니겠는가.

수석인들은 흔히 일생일석(一生一石)이란 말을 자주 한다. 그만큼 좋은 돌을 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나는 오늘 ‘일년일석(一年一石)’을 한 것이다. 이 달마석은 이제 돌이 아니라 나의 부처이다. 내 책상머리에 모시고 오래 경배하다 보면, 옛 선비들에게서처럼 문방(文房)의 제오우(第五友)로서 나를 일깨우는 벗도 될 것이다.

오늘은 더 이상 탐석할 필요가 없다. 방파제를 거닐다 차로 돌아와 다시 음악을 듣는다. 몇 년 전만 해도, 강물이 달려오다 걸음을 늦추는 강변에서 온종일 강을 읽다가 마을의 저녁연기를 오래 바라보았지만, 지금은 포구를 밝히는 나트륨 등의 주황색 빛 속으로 빗방울이 모여들어 붐비는 모습을 보고 있다.

문득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는 박용래의 시 ‘저녁눈’이 떠오른다. 그도 겨울여행 중 이 시각에 눈 내리는 허름한 주막에 들렀다가 이 4행짜리 절창을 토해낸 것이리라. 비가 오지 않았다면 저 가로등에 기대 저무는 바다와 파도소리에 귀 기울였으리라.

길을 나서면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늘 따뜻하게 다가오는 것은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자면, 떠도는 자에게 있어서 길은 ‘영혼의 집’이기 때문이다. 또한 덤으로, 길 끝에서 만나는 돌 하나가 수석이 되어 나를 가꾸니, 길 위에서 이어지는 명상은 늘 풍요롭기 그지없다. 오늘도 늦은 귀가길이 전혀 피곤하지 않으리라.

이구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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