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는 무리 지어 옷을 벗고 이구락 늦가을엔 하루쯤 짬을 내어 영남알프스로 달려가 억새능선에 서 보아야 하리 간월산 구름 머뭇머뭇 다가오고 영취산 바람 데굴데굴 굴러오는 신불산 드넓은 억새 평원, 쯤에서 걸음 멈추고 오래오래 귀 기울이며 앉아 있어야 하리 무리 진 억새는 역광의 가을햇살 아래 키 작은 은빛 알몸 눈부시게 흔들고 있으리 -싫어요, 안 되요, 그러지 말아요! 흔들고 흔들리며 억새는 온몸으로 부르짖으리 머리채 흔들며 몸부림치는, 잠깐씩 어깨 들먹이며 흐느끼는 아, 억새는 한순간 숨막히는 관능이 되리 늦가을 여문 햇살과 바람, 오래도록 알몸의 억새와 살 섞는 저 눈부신 혼례 앞에서, 멀리 천황산 바라보며 참으로 오랜만에 얼굴 붉히리 그때쯤이면 소리와 움직임 모두 사라지고 아, 눈부신 슬픔 하나 껴안을 수 있으리 늦가을엔 하루쯤 짬을 내어 영남알프스로 달려가 억새능선에 서 보아야 하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