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한지 30여년 고수하다 아크릴·유화 작품 대거 출품
동·서양화 줄다리기 ‘큰 변화’
상반된 두 화풍에 2인전 오인
내용·형식 측면 공통분모 발견
씨실·날실 직조 균형상태 숨김
작업과정 우연성도 적극 수용
먹에 물감 등 채색 보존성 보강
캔버스에 아크릴물감으로 그린 김봉천 작 ‘은-현’ 연작. 달서아트센터 제공
김봉천 작가의 달서아트센터 개인전에 유난히 관심의 진폭이 큰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한지에 먹, 캔버스에 물감이라는 상반된 두 화풍이 적나라하게 대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전이라는 사전 정보 없이 전시장을 찾았다간 2인전으로 오인하기 딱 좋은 구성이다.
그의 달서아트센터 개인전인 ‘은현((隱顯)’전에 동양 회화의 전형인 한지에 먹 작업과 서양 회화의 정석인 캔버스에 아크릴이나 유화로 그린 작품들이 대거 출품됐다. 달서아트센터 기획인 ‘DSAC 로컬아티스 인 달서’ 초대전으로 꾸린 이번 전시에 가벽을 경계로 동양화와 서양화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서양회화 형식의 작품은 올해 처음 발표한 신작이다.
지난 30년간 그는 한 지점에서 일관성을 유지해왔다. 바로 동양적인 화풍이었다. 한지와 먹으로 대변되는 동양적인 물성은 작가로서의 그의 정체성을 대변했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 먹과 한지 대신 캔버스와 아크릴 물감을 채택하며 정체성에 균열을 예고했다. 이전 작업들과 비교하면 파격에 가까운 변화이며, 덩달아 이번 전시도 관심 전시로 부상했다.
“그동안 기법적인 면이나 형상적인 차원의 변화에 머물렀다면 이번에는 그보다 훨씬 큰 폭의 변화를 시도했어요.”
종교, 철학, 과학에서 언급하는 불변의 진리는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변한다’는 가르침이고 보면 세상의 모든 변화는 무죄다. 석가모니는 “태어나고, 존재하고, 형성된 것은 모두 부서지기 마련”이라고 했고, 노자도 도덕경에서 “세상 만물은 변하고, 생겨났다가 사라지므로 그 불안정함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했으며, 스코틀랜드의 식물학자인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도 모든 물질은 원자로 구성되고 모든 원자는 계속 떨리는 진동운동을 한다는 Brown 운동 현상을 발견했다.
이들 선지자들이 입을 모아 설파한 공통된 진리가 ‘모든 존재는 변화한다’는 명제였고, 그의 이번 변화도 그 진리에서 한 치의 어긋남이 없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의 변화에 대한 열린 태도는 새로울 것이 없다. 지난 30년간 그는 변화에 적극성을 띄었다. 작업기법이나 형상 등에서 몇 차례의 변화를 모색했다.
이번 전시에서 부각되는 가장 큰 변화는 동서양 화풍의 섭렵이다. 서양화를 새롭게 제시하면서 동양화의 정석을 따른 작품과 서양화의 골격에 부합하는 두 가지 화풍을 극명하게 대조하는 방식으로 전시를 구성했다.
이때 그에게 한 가지의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질적인 두 화풍을 동시에 구사하는 행위에서 어떤 타당성을 발견할 수 있는가?”다. 이에 대해 그는 “재료나 표현방법, 형상에서 완전히 다른 길을 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일관된 태도들이 숨어있다”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두 작품 속에 심어놓은 교집합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의 두 화풍들에 교집합이 존재한다는 것을 짐작케 하는 가장 큰 단초는 작품 제목이다. 이질적인 두 화풍에 그는 ‘은(隱)-현(顯)’이라는 공통된 제목을 붙였다. 그 공통된 제목 속에서 △ 개념적 토대인 중용이나 균형 상태 지향 △뜯어내기 기법 통한 숨김과 드러남의 병행 △ 선(線)의 미학 △ 우연성 흡수 등 내용과 형식적인 측면에서의 공통분모를 발견하게 된다.
가장 큰 교집합은 개념이다. 그는 치우침 없는 균형된 상태에서 극강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균형 상태일 때 진정한 아름다움이 발현된다”는 것이 그의 세계관이자 미학적인 태도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요약하면 ‘균형’이다. “반은 숨기고 반은 드러내는 숨김과 드러남의 혼용은 직설과 은유를 통해 획득하려는 중용의 세계입니다. 중용의 상태인 가장 아름다운 세계를 숨김과 드러남의 미학으로 획득해 가는 것이죠.”
그는 균형 상태를 숨김(은(隱))과 드러남(현(顯))이라는 씨실과 날실로 촘촘하게 직조한다. 먹이나 물감을 칠하는 과정에서 형상들을 숨기고, 먹을 흡수한 4합 한지를 뜯어내는 과정에서 숨겨진 형상들을 드러낸다. “그리지 않으면서 드러나게 하는 동양화의 정신을 저의 화면에도 녹여냈어요.”
작품 속 숨김과 드러남의 변주에서 동양화의 기법 중 하나인 홍운탁월(烘雲托月)을 떠올린다. 달을 표현하되, 달 주변의 구름을 어둡게 해 달을 드러내는 방식인데, 그는 가리개인 발(簾)의 특성을 활용해 홍운탁월을 발현한다. “발의 대오리나 갈대들 사이에서 언뜻언뜻 비춰지는 풍경을 그렸어요. 발을 통해 비춰지는 풍경에서 ‘고요함 속의 움직임’을 발견하면서 숨김과 드러남의 변주를 시작했죠.”
동양화하면 선(線)의 미학이다. 기운을 단숨에 모아 일필휘지로 긋는 단순한 선들을 통해 포효하는 웅장한 기백이나 칼날같은 담대한 기세를 담아낸다. 한지에 먹 작업이든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 작업이든 그의 작업에서도 가장 먼저 부각되는 것은 선이다. 가로나 세로, 직선이나 곡선의 선들을 일정한 간격으로 줄을 세우고는 그 속에서 형상을 잡아간다. “선 사이사이 또는 선들의 집적으로 의도하는 형태들이 갖춰집니다.”
세상의 모든 새로운 아이디어는 필연과 우연의 산물로 얻어진다. 그 또한 작업과정에서 찾아오는 우연성을 완력으로 제어하려 들지 않고, 적극 수용하려는 입장을 취해왔다. “제게 우연성은 제 화면을 풍요롭게 하는 자양분이자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여는 단초로 활용합니다.”
동양화와 서양화라는 정서적이고 시각적인 엄격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화면에서 몇 가지의 교집합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두 화풍의 온도차만큼의 극명한 차이점은 분명 존재한다. 가장 먼저 언급할 대목은 서로 다른 물성으로부터 기인한 기법적인 차이다. 먹과 한지가 흡수하는 장력에 기댄다면 캔버스와 서양물감은 층층이 쌓아올리는 특징을 가지는데, 그는 이 재료적인 특징을 기법적인 차이로 활용한다.
뜯어내는 기법 또한 두 화풍 모두에 적용하지만 과정적인 측면에서 차이를 둔다. 먹과 한지는 흡수하는 성질을 수용해 칠하고 뜯어내는 방식을 사용하고, 캔버스에 물감은 밀어내는 성질을 수용해 테이핑을 붙여 색을 칠하고 뜯어내는 과정을 추가한다.
“테이핑을 붙인 지점은 색을 차단하게 되는데, 이런 방식은 서양회화의 색을 쌓아가는 특성에 부합한 방식이죠.”
화면 속 형상은 기법의 차이보다 더 이질적이다. 한지 작업에는 선과 선들 사이에서 흔들리는 풍경을 표현하지만, 캔버스 작업에선 선으로 구현한 패턴만 고수한다. 선으로 조성된 기하학적인 패턴 자체에서 형상을 발견하려 한다. 색채의 변화 또한 극명하다. 한지가 먹의 세상이라면 캔버스는 화려한 색채의 향연이다. 먹 작업에 서양물감을 일부 활용했던 과도기를 거친 후 얻은 결실이다. 캔버스 작업에선 색에 대한 갈증이 푹발한다. 한 화면에서 2~3개의 색으로 제한하지만, 삼원색도 마다하지 않는 과감성을 드러낸다.
큰 틀에서의 개념적 기반은 ‘균형’이지만 그가 바라보는 세계의 차원은 보다 다채롭다. 한지에 풍경을 표현하는 작업에서 ‘현실 너머의 세계’까지 아우르며 본질을 향했다면, 캔버스에 색채의 향연으로 구축한 패턴들에선 현실세계에 발을 딛고 있다. 특히 서양회화에 구축한 패턴들에서 인체나 음악적인 선율들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 두 대상에게서 발견되는 개념은 ‘관계성’이다. 사람이나 음악 모두 관계를 숙명으로 한다는 전제가 깔렸다. 그는 관계라는 개념을 통해 균형이라는 주제를 서술해 간다. 관계는 갈등 아니면 조화로 흐를 개연성이 높다. 하지만 그는 조화에 무게중심을 옮긴다.
“한지의 풍경이 은은하고 고요한 세상을 추구했다면 캔버스의 패턴에선 갈등하고 사랑하는 현실 세계에 위치해 있어요.”
지난 30여년간 변화에 민감하게 응답했던 그였다. 우연이나 필연으로 변화의 단초를 발견하면 적극적으로 수용해왔다. 물론 처음부터 열린 태도로 일관하진 않아서 젊은 시절엔 그도 세상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시간이 그를 단련시켰고, 그의 내면에도 꽤 단단한 근육이 돋아났다. 더 이상 세상의 요구에 휘둘리지 않게 됐고, 그가 원할 때 언제든 변화의 편에 설 수 있게 됐다. “비워내고 내려놓게 되자 변화에도 주저하지 않게 됐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회화라는 범주 속에서 그는 동서양을 천하통일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동양화나 서양화라는 엄격한 구분이 무의미해진 현대미술의 지향과 궤를 같이한다.
전자든, 후자든 그는 개별성으로부터 출발하여 보편성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만큼은 확고하게 불태운다. “전통의 기반 아래서 시대와 민족 또는 국가를 초월하는 예술 세계를 만드는 것이 그의 지상최대의 과제죠.”
이번 화풍의 변화 또한 그 연장선에 있다. 먹 작업에 집중한 시간들이 중첩되면서 색에 대한 갈증이 생겼고, 무엇보다 작업의 완성도에 대한 열망도 크게 작용했다. 먹이 가지는 보존성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보편성 충족의 첫 걸음이라고 인식하고, 캔버스에 서양의 물감을 채색하며 보존성을 보강했다.
“사실 작가는 결과적인 화면 그 너머까지 신경을 써야 합니다. 저도 제 작품이 보존성의 측면에서 언제까지 살아남을지에 대한 고민을 한 것이죠. 이번 신작들에선 그 고민들을 심도있게 다뤘죠. 저는 그런 태도야말로 작가가 가져야 할 덕목이라고 믿어요.” 전시는 24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출처 : 대구신문(https://www.idaeg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