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21    업데이트: 15-04-16 14:20

작 품 방

바다 책장
아트코리아 | 조회 2,462
바다 책장

-강문숙-


겨울 채석강, 어둠이 몰려오고 책장 넘기는 소리 분분하다. 파도는 행간을 자꾸 지우는데 무언가 읽어보고야 말리라 각오한 듯 일몰에 이미 젖었던 옷자락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 문장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젖은 책장 겨우 떼어내며 해풍에 내어 말리는 일 쉽지 않았을 것이다. 김다발처럼 너무 말라서 바삭거리거나 해감이 달라붙은 몇 페이지는 얼룩이 져서 맥이 뚝, 끊긴 읽다만 책이 빼곡하다. 반생의 쓰다만 책 한 권, 여기 또 있다. 끈질긴 투병의 시간 더듬어 보면 온통 멍투성이였지. 언젠가는 그 상처 위에 꽃 피울 날 있을 거라 믿었지. 덜컹거리며 반나절을 달려와서야 엑스레이 찍히듯 내 늑골까지 환하게 읽히고 마는, 걸어온 길을 지우고 새로 쓰라는 건지, 앞으로 써야할 문장들 저 짠 바닷물이라도 찍어서 쓰라는 건지 어느새 발목가지 밀려드는 차가운 물결. 책으로 가득 찬 저 검은 바다 앞에 나는, 일몰처럼 붉어지는 간절함으로 무릎 꿇고 싶다.

 

계간 『시와 세계』 2010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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