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사한 봄꽃들이 손짓하니 여기저기 가보고 싶은 곳도 많은 요즘은 괜히 마음이 설레기도 합니다. 책상 앞에서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있어야 하는 게 조금은 억울하기까지 하지만, 발목 잡고 있는 우리들의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네요. 그래서 ‘즐거운 글쓰기’를 읽는 순간만이라도 잠시 마음의 일탈이라도 하라고 여기 재미있는 한편의 시를 얼른 데려왔습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켜는 / 라디오가 되고 싶다.(장정일 시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전문)’
이 시는 패러디의 대표적인 예시로 사용하고 있는 관념적 풍자적 비판적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 현대인들의 사랑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널리 알려진 김춘수의 시 ‘꽃’을 패러디합니다. 하지만 이 시를 하나의 패러디만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지요. 이 작품이 단순한 패러디에 그치지 않고 작가 특유의 독특한 관점을 시에 대입시킴으로써 새로운 작품으로 재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텍스트 시 ‘꽃’이 진지하고 묵직하게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를 노래했다면 이 시는 그와 반대로 가볍고 감각적인 어투로 사랑의 세태를 풍자했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즉 사랑의 의미를 그저 편하고 가볍게만 받아들이고 사랑 자체를 일회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현대 사회의 풍토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가 1988년 장정일의 시집 ‘길안에서의 택시 잡기’에 수록되었으니 그 시대의 생활이 기준이 되었음은 물론입니다. 지금 우리가 글을 쓸 때는 ‘스마트 폰’ ‘인터넷’ 등의 또 다른 새로운 소재를 등장시켜 얼마든지 의미의 영역을 확장시켜 볼 수도 있어서 흥미로운 작법이 될 것도 같습니다.
패러디는 ‘희작’ 즉 ‘장난스러운 창작’과 같은 말인데, 그 어원은 ‘어울리지 않은 모방’이라는 의미를 지니며 진지한 문학작품이나 문학 장르가 가지고 있는 제재나 태도를 장난스럽고 어긋나게 모방하는 것을 말하지요. 과거에는 이미 이루어진 원작과 유사하게 반복하는 것이어서 창작으로 보지 않았지만, 근래에는 과거의 희작 이미지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가치를 지닌 창조적 행위의 결과로 인식됩니다. 탈근대주의의 예술이론 중심개념 중에 하나인 ‘상호 텍스트성’에 비추어볼 때 패러디는 기존 원작에 대한 ‘창의적 모방’이라는 점에서 단순한 희작을 넘어서기에 즐거운 글쓰기의 목록에 올려도 무방하지요. 정끝별 시인은 ‘패러디는 원 텍스트에 대한 해독이자 패러디하는 이가 새로운 기호를 창조하는 소통과정인 것이며 표절은 베끼고 따오고 바꾸는 일을 독자들이 모르게 숨기는 것이고, 패러디는 이를 드러내고 즐기는 것이다’라고 책에 쓴 바 있습니다. 이러한 패러디를 할 때는 현실적인 비판의식과 깊은 사고의 결과물일 때 그 가치를 극대화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인·전 대구시영재교육원 문학예술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