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1    업데이트: 23-07-04 09:58

언론 평론

대구ㆍ경북의 문인 대구경북의 문인<27>강문숙 시인 - 대구일보
아트코리아 | 조회 2,679
인간과 종교의 경계에 있는 시가 
가장 좋죠


강문숙 시인은 삶에서 작은 것에 대한 간절함 없이는 큰 것을 쓸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시는 시인의 삶과 정서, 사유가 서로 어우러져 하나하나 꿰어 있는 묵주와 같은 것이다. 겸손하게, 마음을 다스리는 것으로 접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문숙 시인은 등단만으로 문단에 선풍적인 화제를 모았다. 
여성이면 그저 아이 잘 키우고 집안일 잘하는 것을 일등으로 쳐주던 시절이었다.
1990년대 초는 교사 등 전문직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많지 않았고 또 진출이 쉽지 않은 때였다. 
1991년 전국 각 일간지 신춘문예 당선자 중 여성은 강 시인 단 한 명뿐이었다. 
문학아카데미에서 함께 시를 공부한 여성들의 응원과 격려가 쏟아졌다. 
대리만족을 느끼는 그들에게 강 시인은 선구자적 역할과 소임을 다해야 했다. 
강 시인의 행보를 쫓기라도 하듯 이후 여성들이 시 세계에 입문하고,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로 진출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그 움직임은 1990년대 후반 여류 시인 급증으로 이어졌다.

◆고통의 시간 견디며 인생의 깊이 배워
등단 직후 화려한 조명을 받았다.
사회 각계각층에서 여성들의 사회 진출을 권장하던 때, 강 시인은 그 물꼬를 터뜨린 인물이었고 여세를 몰아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갔다.

“경상도와 충청도, 강원도 접경 지역인 영주 풍기에서 자라면서 사투리가 심하지 않은 것도 한 몫해 방송이나 라디오에서 섭외요청이 잦았다. 문학 관련 프로그램, 토크쇼 등에서 보조 MC, 리포터 등 방송 프리랜서 활동하는가 하면 다양한 여성지에서 자유기고가로 활동하며 여성들의 사회 진출을 위한 길을 닦았다.” 

대구예술가곡회 결성에도 앞장섰다.
경북대, 영남대,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계명대 작곡과 교수들과 내로라하는 성악가, 시인을 주축으로 대구예술가곡회가 꾸려졌다.
1992년부터 매년 한 번씩 정기연주회를 개최했다.

강 시인의 시는 30~40편 정도가 가곡으로 만들어졌다.
그중에서도 시 ‘낮달’은 음대 교재로 불릴 정도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스포트라이트가 꺼진 뒤에는 늘 어둠 속에서 남모를 아픔을 삼켜야 했다.
홀시어머니의 모진 시집살이를 견디며 살아야 했던 것. 
극심한 스트레스는 급기야 갑상선암으로 퍼졌고, 성대 절반을 잘라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등단 후 10년,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3년간 항암치료를 받으며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고통이 커질수록 시어머니에 대한 원망은 커져가는 듯했다.

그러던 중 어떤 것에 대해 이해하지 않고, 부정적인 의미에서만 글을 쓴다면 언어의 표피를 건드리는 것이지 진짜 문학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가엾은 시어머니의 인생을 읽기 시작했다.

“시어머니는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전쟁미망인이다.
궁핍한 시절, 겨우 몇 안 되는 땅뙈기를 가지고 청상과부의 몸으로 남매를 키우려면 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생존이었고, 자식을 키워야 한다는 책임과 의무가 있었기에 여자로서 자신을 돌볼 수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견뎠을 독하고 모진 풍파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왔다.” 

새벽이슬에 젖은 채, 어머니 맨발로 돌아오신다/검은 섬 하나 껴안고 잡풀처럼 쓰러지신 어머니/유월, 그 푸른 새벽을 돌아누우신다//(중략)//…. 강문숙 시인의 시 ‘유월’ 중 

강 시인은 “시인이 인간에 대한 이해 없이 시를 쓰는 것은 가짜다. 인간에 대해 이해한다면 인간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시어머니라는 존재를 이해하다 보니 해결이 되고 이해하니 인생이 깊어지는 것을 배웠다. 시를 쓰면서 마음속 내재한 상처를 치유해 나갔다”고 말했다.

◆오페라 쓰는 시인 
투병으로 시간을 보내면서 시에 대한, 문학에 대한 외경심, 스스로에 대한 소중함과 타인의 존재에 대한 소중함, 사물의 작은 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남달라졌다.

그는 문학에서 그치지 않았다.
시라는 예술이 또 다른 예술로 이어지길 간절히 바랐다.

시로써 조금 더 다른 세계를 어떻게 열어갈 것인지에 대해 고심하던 중 오페라 대본을 쓰기 시작했고, 오페라 ‘광염소나타’, ‘무녀도’, ‘유랑’, ‘배비장전’, ‘광야’를 비롯해 칸타타 ‘독도 판타지’가 그의 손끝에서 완성됐다.
위안부에게 바치는 ‘소녀들을 위한 레퀴엠’도 준비 중이다.

평론가들은 그의 시집에는 삶의 성찰이 담겨 있다고 입을 모은다.

강 시인은 가장 좋은 시는 종교의 경지까지는 가지 않되, 인간의 최고의 경지까지 가는 경계, 곧 인간과 종교의 경계, 신과 인간의 경계에 있는 시라고 말한다.

그는 교만한 시인은 진정한 예술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타인에게는 겸손하되 자신에게는 엄격해야 한다.
자신에게까지 겸손해지면 무뎌지고 문학세계가 칼날을 잃어버린 칼과 같다. 사회를 보고 불의를 보고, 정의에 맞서려면 칼날이 있어야 한다. 굉장히 아프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절망이 다가 아니라는 것은 보는 것은 날카로운 시 정신 외에는 없다.” 

그가 문단에 바라는 것은 명확하다. 
강 시인은 “세상이 혼탁한 가운데 언어가 격화돼 있고 어지러워져 있다. 언어가 어떻게 왜곡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 때도 있다. 문학은 언어를 가지고 하는 예술인데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없어지고 말 것이다. 결국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지킬 수 있는 것은 문학밖에 없다. 우리말을 지키는 데 주력을 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후배 시인들을 위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어려운 것만이 문학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내용은 깊되 쉬운 언어로 쓸 수 있는 것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쉽게 쓰려고만 하는 사람은 행간에 철학 없이, 너무 쉽게 흩어지는 언어로 쓰는 경우가 있는데 이 틈새를 잘 메우며 시를 썼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글ㆍ사진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강문숙 시인 약력>
-1956년 경북 안동 출생
-1991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안개’로 당선
-1993 작가세계 신인상 등단 
-시집 ‘잠그는 것들의 방향은?’, ‘탁자 위의 사막’, ‘따뜻한 종이컵’, ‘신비한 저녁이 오다’, 사진공동시집 ‘보고 싶다’ 등 출간 
-오페라 대본 ‘광염소나타’, ‘무녀도’, ‘유랑’, ‘배비장전’, ‘광야’, 칸타타 ‘독도 판타지’. 
-2000년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한국 시인협회 회원 
-대구예술가곡회 이사 
-방송프리랜서 
-푸른방송 시창작과 강사 
-대구시교육청 문학예술영재교육원 강사



 
덧글 0 개
덧글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