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이다.
‘바람이 분다. 이제 살아야겠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
폴 발레리의 시구를 변주한 어느 시인의 글을 읽다가 잠이 들던 밤이 지나고, 아침…. 슬며시 딴죽을 걸어보고 싶은 무엇엔가 딱히 설명할 수도 없는 이유로 뒤틀린 심사를 다스리며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선다. 내겐 이맘때쯤이면 겪게 되는 계절병 비슷한 것이 있다. 더 구체적으로는 11월쯤 되면서부터 찾아오는 강박증인 셈이다. (11월과 2월은 자연적으로나 심정적으로 매우 유사하다는 생각)
초등학교와 공업대학이, 주유소와 병원이, 은행나무와 이팝나무가 서로 마주보며 있는 작은 네거리에 현수막이 펄럭인다. 벌써 두 달째다. 간혹 어느 유명 스님의 법문이 있다든가 스피치 강좌가 있다든가 하는 글이 걸려 있어 눈길을 잠시 머물게도 했지만 한동안 그저 지나가던 바람과 차가 없었다면 너무나도 조용한 교차로인 곳이다.
‘집 잃은 할머니를 찾습니다’ 치매노인이 요양원에서 홀연히 사라져 폐쇄회로에 찍힌 사진을 크게 확대해서 현상금과 자녀들의 휴대폰 번호를 함께 인쇄해서 걸어놓았으나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다.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집중한다. 뽀글이 파마에 퀭한 눈두덩은 참 세월 징하게 살아온 티가 역력했다. 작은 체구는 오랜 치매로 지쳤다는 듯 다리가 휘었다. 흰 바탕에 푸르스름한 줄무늬가 그려져 있는 환자복 주머니에 두 손을 꼭 찔러 넣은 채, 노인은 카메라를 힐끗 쳐다보며 속내를 알 수 없는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사라졌다. 세상을 향해, 아니 그 숱한 세월을 향해 조롱하듯이 입꼬리를 슬쩍 치켜올리는 모습이 장난기마저 어리어있다.
아, 저 사진에 왜 내 어머니 얼굴이 겹쳐지는 걸까. 점점 땅으로 들어갈 나이가 되니 키도 겸손해지나부다, 하시며 이젠 거의 ㄱ자로 굽은 허리를 펼 생각도 않으시는 친정 엄마. 아니, 더 기가 막히는 건 내 얼굴이 겹쳐져 잠시 현기증을 일으킨다. (나를 찾고 있구나…. 끝내 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구나….)
신호등이 바뀐다. 이제 건너야 한다. 삼각형 파란 불빛이 세 칸 남았다. 나는 건너지 않는다. 발을 내디딜 수가 없다. 내가 이 길을 건너는 순간 내가 살아왔던 시간들이 모두 사라져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유체이탈의 끔찍한 순간을 길 위에서 맞다니…
다시 빨간 불이다. 가방을 고쳐 멘다. 휴대폰이 울린다. 문득 안도의 숨을 내쉰다. 나는 아직도 여기에 있는데 무슨 상관인가.
신춘문예의 계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누구나 한 번쯤 가슴앓이했을 문학의 병이 도지면 절망도 찬란했던 시절.
그곳은 안개도시였다. 술에 취하듯 지금 가슴 아픈 사람이 불면의 밤을 지새우고 있다면 그는 분명 안개도시의 시민임이 틀림없다. 결핍의 그림자를 껴안고 그냥 떠밀려 살아왔다고 억울해하는 여자들이 거기 있었다. 아직 개방되지 않은 이 지역사회는 낯선 여성성을 불편해하느라 단점부터 먼저 찾아내기에 바빴고 줄리아 크리스테바에 동조하는 여자들의 결연한 눈빛은 문학의 열정을 불태우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때 자주 출몰하던 안개의 군단은 일기예보에도 없는 기상이변을 일으키며 시단에 활기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시가 무슨 소용이냐고, 시만 쓰면 밥이 저절로 나오느냐고, 차라리 시장바닥에 좌판을 깔고 앉은 할머니의 쭈그렁방탱이 사과가 더 배를 불리겠다고 소리 없는 뭇매를 맞아가며 마조히스트의 몰골을 하고 거리를 떠다니는 결핍의 시절이 있었다.
닫힌 문 앞에서 신발을 거꾸로 신은 채 발을 동동 구를 뿐 내 인생의 계절도 안개투성이였다. 안개는 계절의 끝과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는 접경지에서 피어난다. 어쩌면 여자의 길 끝에서 사람의 길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를 비롯한 많은 여자의 길이 그랬던 적이 있다.
아직 울음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영혼이 있다면 그는 젖은 나뭇잎의 골똘해지는 뒷면을 보아야 한다. 뿌리를 거부할 수도 없고, 수없이 뻗쳐있는 가지를 떠나기에는 너무나 두려운 잎들. (피카소의 열혈팬이었던 시인 에드워드 커밍스의 난해한 퍼즐작품처럼 나는 하나인 것, 홀로의, 단독의, 잎이 무성하던 나무라는 집에서 떨어져나온 나뭇잎 하나같은 존재.)
언젠가는 몸을 던져 나무의 발등을 덮어주면서 생을 마감하겠지만 그것은 자신의 의사가 아니라 거대한 섭리의 한 입김에서부터 시작되고 완성되어지는 것을 아프게 인식하는 그 경계의 지점에서 나는 진정한 안개의 전언을 들을 수 있었다. 다행히 나는 외롭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 안개의 계절에 사람들의 얼굴은 늘 반쪽밖에 보여주지 않는다. 뇌의 어느 한구석에서는 따로 작업이 시작되는 공장처럼 웃으면서 동시에 울고 말 것 같은 얼굴을 늘 심심찮게 대할 수 있었는데, 특히 아침이 더 그랬다.
출근길 차들이 밀려들어 끼어들다가 부딪히는 사고가 빈번했다. 밀리는 도로에서 진행을 막으며 언쟁을 벌인다. 서로 네가 피운 안개 탓이라고 주장한다. 버섯처럼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인다. 그때 나는 재빨리 안개탓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뒤통수를 갈긴다. 서로 네 탓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안개는 좋은 핑곗거리였고, 스스로의 무덤을 파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다니…. 나의 신춘문예 당선 시 ‘안개’는 그렇게 해서 쓰여졌다.
빨간 가방을 멘 여자아이 하나가 안개 속으로 들어간다. 잠시 후, 죽은 새를 안고 낯익은 여자가 나온다. 그 사이로 안개가 흘러갔다가 흘러나온다. 천진하던 어린 시절의 소녀는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월이 흐르고 욕망과 시련의 상처로 여자는 상심한 표정으로 늙어가고 있다.
시는 시인의 서랍을 떠날 때 이미 독자의 것이라는 말은 맞다. 나의 의도와는 별개로 그 행간이 읽힐 수도 있다. ‘환경시’라는 말이 낯설었을 그때 환경문제를 언급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리 나쁘지 않은 일.
이젠 도무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숨겨져 있는 것들을 어떻게든 끄집어내서 갈고 닦고 다듬고 세워야만 직성이 풀린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잘 지키는 것인 줄 안다. 그러고는 와서 보라고, 즐기라고, 힐링하라고?!
태어나는 순간에 이미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에 이미 자연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지.
자유와 억압의 접경지대 그곳에서 출발된 시의 경계선. 다시 말하면 그 경계의 아슬아슬함이 긴장과 자포자기의 순간을 외줄타기하듯 넘나드는 것이 현대인의 삶이다. 그런데 그 접경지대의 뒷골목은 자주 수상한 안개에게 점령당하고 만다. 때로는 천국도 지옥도 아닌 모호함이 사람들의 영혼을 어지럽게 한다.
몇 번의 푸른 신호등이 꺼지고 다시 바뀌기를 기다린다.
이제 나는 건너야 한다. 어디로든 갈 수 있지만 어디로도 갈 수가 없다. 엘리아스 카네티가 머리 없는 세상은 현혹, 혹은 바벨탑이라고 말하는 이 두려운 거리에서 저 늙은 여인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아니다, 얼마나 천진스럽게 걸어갔을까.
곧 집이 있을 거야…. 다정한 내 가족이 기다릴 거야…. 따스한 불빛을 그리며 앞으로만 걸어갔을 것이었다. 치매환자는 구부러진 길을 갈 줄 모른다고 한다. 무조건 앞만 보고 걷는다는 것은 가장 본능에 가깝다는 말이기도 하다.
도시의 심장을 가로질러 직선의 도로가 한창이다. 빠르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이 어디 한둘인가.
KTX를 타고 가면서 삶은 달걀과 책 읽는 낭만이 사라졌다. 차창 밖의 풍경을 감상하려 들다간 눈동자가 흔들리며 멀미가 난다. 물론 그럴 땐 먼 곳으로 눈길을 주면 좀 해결되기도 하지만 한때 상징처럼 박혀있던 측백나무와 콜타르냄새 풍기는 침목들의 기찻길 옆 풍경은 기억의 저편으로 밀려나고 만다.
이 바쁜 세상에 웬 한가한 타령이냐고 나무라겠지만, 그런 동안의 일탈이 얼마나 치명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벌써 잊었는가. 오죽하면 뒷골목까지 죄다 뒤져서 둘레길, 갈랫길, 소래길, 올레길…. 길이란 길들은 다 불러내 일부러 걷고 있겠는가.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다. 길을 건넌다.
인간의 순수성과는 점점 멀어져가는 현실이 우리를 더욱 목마르게 한다. 모든 것은 변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본질은 변할 수 없다는 뜻인데, 그것이 마음이다. 시인은 변하는 것들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보려고 하는 존재다.
변방에서 혹은 중심에서 인간의 마음을 되새김질하는 것이 ‘지금, 여기’에 발을 딛고 사는 시인의 몫인 것이다.
P. 엘뤼아르의 말처럼 오늘날 시인의 고독은 사라졌다. 속된 말로 어떤 집단 못지않게 잘 먹고 잘 산다. 설탕의 달콤함에 빠진 개미 같다. 그늘을 감추기에 급급하다. 조금이라도 그늘이 보일라치면 그것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번져서 순식간에 어둠의 장막 속으로 밀려나고 말기에 두려움에 맞설 용기조차 없어진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속에서 아직도 시인의 꿈을 꾸는 이들이 있다는 건 기적이다. 뭐가 어떻게 달라질 것이 없는 게 뻔한데도 그 속에는 순수와 불온이 뒤섞인 열정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보면 정말 대책 없기도 하다.
어쩌랴, 나도 그들과 같은 족속이므로 기꺼이 이 결핍의 찬란한 축제를 향유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다시 P.엘뤼아르는 ‘이곳에 살기 위하여’ 절규한다.
‘어떠한 인간도 사라지지 않으며/ 어떠한 인간도 잊혀지지 않으며/ 어떠한 어둠도 투명하지 않다// 나 홀로 있는 곳에서 나는 많은 인간을 만나며/ 나의 근심은 가벼운 웃음으로 깨어지고/ 엄숙한 나의 목소리에 들려오는 부드러운 목소리/ 내 눈은 순수한 시선의 그물을 유지한다// 우리는 험난한 산과 바다를 지난다/ 미친 듯한 나무들이 맹세한 내 손의 길을 가로막고/ 방황하는 동물들은 생명을 산산조각 내어 나에게 몸을 바친다 /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의 영상이 풍성해지는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자연과 거울이 흐려진다는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늘이 비어 있다는 것이/ 나는 외롭지가 않은데’
정말이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시인 강문숙
1991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1993 작가세계 신인상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시. 열림’ 동인
대구시인협회 부회장
시집 ‘잠그는 것들의 방향은?’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