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175    업데이트: 25-02-03 09:48

동시

<정순오 동시 모음>
 
꽃순 선발대
정순오
 
 
애벌레 한 마리
나오지 않는 겨울
 
찬바람 부는데도
기어이 나온 꽃순
 
살며시 입 벌리는 매화
뾰족코 내미는 개나리
살포시 눈 뜨는 목련
 
얼음 땡!
 
씩씩하게 나오고야 마는
꽃순 선발대
 
  
 
 
 
 
 
꽃 자판기
정순오
 
 
넓게 펼쳐진 들판은
꽃 자판기
 
눈길 가는 곳마다
손길 닿는 곳마다
발길 머무는 곳마다
꾹 꾹 꾹
 
수레국화 꾹 눌렀더니
온통 보랏빛
 
금계국 꾹 눌렀더니
일렁이는 노란빛
 
양귀비 꾹 눌렀더니
여리여리 빨간빛
 
 
  
 
 
 
 
 
 
꽃차
정순오 
 
 
찻잔 위에
동동 뜬 꽃잎
 
스르르 펼쳐지는
꽃무늬 블라우스
 
어디선가
날아올 것만 같은
나비와 벌
 
 
 
 
 
목련꽃

정순오 
 
 
앙 다문 입술
하늘 향해
뾰족 내밀고 있다
 
하늘이 그걸 알고
쪽!
 
헤헤
좋아라
입 벌리는 목련꽃들
 
 
 
 
 
 
 
꽃무릇 1 
정순오 
 
보이나요?
 


파바박
 
한낮에 터지는
불꽃놀이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사랑

 
 
 
 
 
 
꽃무릇 2 
정순오 
 
마음 고약한 태풍을 만난 걸까
 
살은 뒤집어지고
대만 남은 빨간 우산
 
곧 장마가 시작될 텐데
우산 고치는 분, 어디 없나요?
  
 
 
 
 
 
겹벚꽃
정순오 
 
몽실몽실
오동통통
겉모습
 
포닥포닥
보들보들
속 느낌
 
보세요!
겉과 속이 같잖아요!
 

 
 
누가 이길까

정순오 
 
 
우리 집
빈 텃밭
 
아빠는 엄마 몰래
꽃씨 자꾸 뿌리고
 
엄마는 아빠 몰래
야채씨 뿌린다
 
나는 궁금하다
누가 먼저 나올지
 
 
 
 
 
비 자장가
정순오 
 
 
토독토독
연잎 잠재우는 소리
 
토닥토닥
내 동생 잠재우는 소리
 
타닥타닥
엄마 잠재우는 소리
 
잠들기 싫은 나는
버티는 중
 
 
 
 
 
 
 
연잎
정순오 
 
 
따가운 햇살
화살처럼 쏟아져도
다 막아 준다
 
뾰족한 장대비
북처럼 두드려도
다 막아 준다
 
불볕더위가 와도
장마에 휩쓸려도
 
물방개, 물장군, 붕어, 잉어
숨겨 주고 지켜 준다
  
 
 
 
 
 
잠자리
정순오
 
맵지도 않은데
고추잠자리
 
냄새도 없는데
된장잠자리
 
뜨개질 못하는데
실잠자리
 
수영도 못하는데
물잠자리
 
이불도 없는데
잠자리
 
 
 
 
 
 
좋은 걸 어떡해 1

정순오 
 
 
연두도 좋고
빨강도 좋고
 
 
노랑 불가사리도 좋고
 
 
초록 사슴뿔도 좋고
 
 
롯데 타워 같은
줄기도 좋아
 
모종을 심고
지지대를 설치하고
곁순을 제거하고
웃거름을 주는 거
 
다 좋은 걸 어떡해
 
 
 
 
 
 
 
 
 
 
좋은 걸 어떡해 2
 정순오
 
 
앞마당에서
야채 기르는 할머니
 
꽃 피는 거 봐서 좋고
잘 자라는 거 봐서 좋고
 
심심하지 않아서 좋고
먹을 수 있어 좋다고
 
몸이 좀 아파도
잡초 뽑기 힘들어도
 
좋은 걸 어떡하라고
 
 
 
 
 
바람
정순오 
 
 
연못 속에 비친
 
 

나무
구름

 
물결이 가만가만
접었다 폈다 합니다
 
바람은
아코디언 연주자
 
 
 
 
 
 
봄동의 뜻
 정순오
 
 
엄동설한 이겨내고
얻은 이름 봄동
 
속에는
이런 뜻이 들어있어요
 
 
고소하다
 
부드럽다
 
아삭하다
 
달달하다
 
 
 
 
 
 
엄마 같아요
 정순오
 
 
벌과 나비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매화 산수유 벚나무 개나리 진달래
남 먼저 꽃을 피운다
 
배고픈
벌과 나비에게
얼른 먹여 주려고

 
 
 
 
 
 
운동회
정순오 
 
 
봄이면 돌아오는
분홍빛 바통
 
분홍 바통 이어받은
붉은 진달래
 
가을 운동회에는
누가 나올까?
 
가을이면 돌아오는
노랑빛 바통
 
노랑 바통 이어받은
갈색 은행잎
 
봄 운동회에는
누가 나올까?
 
 
 
 
 
 
 
 
 
 
눈 온 날
정순오 
 
눈 온 학교 운동장
 
대팻날로 민 것 샅이
구김 하나 없다
 
새벽 지나 해 떠도
그대로 얼어붙은 운동장
 
내가 가서
땡 해줄까
 
 
 
 
 
 
 
 
꽃신

정순오 
 
 
전봇대 둘레에
바랭이풀, 괭이밥, 씀바귀꽃
자리 잡았다
 
비에 떠내려가지 않게
바람에 흩어지지 않도록
손 꼭 잡았다
 
밋밋하고 차갑던
전봇대가 꽃신 신었다
 
꽃신 신은 전봇대
발등 간지럽겠다
 
 
 
 
 
 
 
 
걷고 싶은 나무
정순오 
 
 
나무는 걷고 싶어
신발 연구소 만들었어요
 
바느질 자국 다 다르고
크기와 모양도 다르고
발레슈즈처럼 가벼운 신발 연구해요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는
걷고 싶은 나무의 신발 연구소
 
드디어
플라타너스 장화, 은행잎 구두, 단풍잎 운동화
완성!

찬바람 불기 시작하자
나무들은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풀 코스 레스토랑
정순오 
 
 
봄에는 부추, 열무

여름에는 상추, 깻잎
 
가을엔 배추, 무
 
겨울엔 시금치, 봄동
 
텃밭은
풀 코스 레스토랑
 

 
 
 
 
 
편지
정순오 
 
 
봄에는 새싹을
여름에는 꽃잎을
가을에는 단풍을
겨울에는 눈꽃을
봉투에 넣어 보냅니다
 
하지만 이제
받아볼 이 없어
내가 나에게 보냅니다
 
 
 
 
 
 
 
양파 1
정순오 
 
겹겹이 싸인
동그라미에
동그라미
그리고
또 동그라미
 
이웃에 살지만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
 
가까이에 있지만
간섭하지 않는다
 
그래도 한 집에 산다
 

 
 
 
 
 
 
 
양파 2
정순오 
 
 
양파 속에 들어있는
참 잘 했어요
동그라미 일곱 개
 
동그라미 하나가 십 점이면
세 개 더 있어야 백 점 되지만
더 이상 욕심 부리지 않을 거야
 
동그란 모습이
동그란 마음 만들고
동그란 마음이
동그란 맛 만드니
 
그만하면 됐어!
 
 

 
 
 
 
새(鳥)
정순오 
 
 
공중에 피어나는 꽃
 
잠시 피었다 사라지는 꽃
 
고개 들어야 볼 수 있는 꽃
 
아무 때나 볼 수 없는 꽃
 
어디서 필지 아무도 모르는 꽃
 
 
 
 
 
 
 
 
제비
정순오 
 
 
벌레 입에 문
어미 제비가 둥지로
날아올 때마다
 
하나 둘

셋 넷
 

활짝 피어나는
 
노란 꽃 네 송이
 
 
 
 
 
 
 
 
 
희망 주택
정순오 
 
 
300년 된 은행나무에 지은
튼튼한 집이에요
 
층간 소음 걱정 없고 전망 좋은
먹세권, 학세권 지역입니다
 
신혼부부에게 특별 공급하오니
어서 들어오세요
 
아기 새 있으면
무료 입주권 드려요
 
 
 
 
 
 
 
진눈깨비
정순오 
 
 
혼자 내리자니 외로워서
눈과 같이 내린다
혼자 내리자니 심심해서
비와 같이 내린다
 
눈이랑 비 머리 맞대고
우리 여기서 얼음 될까? 물 될까?
올 때 같이 왔으니 갈 때도 같이 가야지
 
비가 양보하자 눈송이로 내리고
눈이 양보하자 가랑비로 내린다
 
서로 눈치 보지 않고
사이좋게 내린다
 
 
 
 
 
 
 
 
토끼풀 꽃
정순오 
 
 
토끼가 뛰어 놀다
남겨놓은 발자국마다
쏙쏙 솟아나는 토끼풀 꽃
 
이 곳은 환하고
푸르른 보석가게
 
반지 목걸이 팔찌
머리에 쓰는 화관
무엇이든 만들어요
 
언제나 와글와글
대를 잇는 토끼풀 꽃밭
 
 
 
 
 
 
 
개미 걸음

정순오 
 
 
발 발 발 발
부지런히 걸어간다
 
척 척 척 척
발맞춰 걸어간다
 
서로 걸려 넘어지는 법 없는
여섯 개의 발
척척척 발발발

 
 
 
 
셀렘
정순오 
 
 
약속 시간 보다
늘 일찍 나오는 초저녁달
 
적적할까
나오는 개밥바라기별*
 
살짝 떨어져
도란도란
이야기 나눈다
 
 
 
 
 
 
*개밥바라기별 : 금성
 
 
 
 
 
 
 
타워크레인 1
정순오 
 
 
노을 진 허공에
긴 고리 늘어뜨리고
무얼 기다리고 있니?
 
 
날아가는 새
떠도는 구름
지는 해 기다리지
 
 
아무도 없는 공중에
긴 낚싯줄 드리우고
무얼 생각하고 있니?
 
 
반짝이는 별
환한 보름달
스치는 바람 생각하지
 
 
 
 
 
 
 
타워크레인 2

정순오 
 
 
타워크레인 선수가
경기장에 들어섭니다
 
 
물구나무 서기
수평 만들기
하늘 찌르기
천칭저울 자세
아주 훌륭해요
 
 
하늘과
수직 이룰 때가
바로 만점 포인트
 
 
네네
타워크레인 선수
이걸 해 냅니다
 
 
 
 
 
 
 
 
 
 
흰나비 되어 훨훨
정순오 
 
 
엄마 따라 간
텃밭에서 보았어
 
날마다 애써 가꾼 배춧잎 뜯어먹던
애벌레가 애써 지은 집을 뚫고
흰나비 되어 날아오르는 것을
 
순간 생각했어
 
하루 세 번 밥 먹을 때마다
엄마가 애써 만든 텃밭 채소 반찬
남기지 않고 모두 먹으면
 
꼼지락꼼지락
나도 한 마리 녹색 애벌레 되었다가
번데기 방을 벗어나
흰나비 되어 훨훨
어디든 날아갈 수 있을지
 
 
 
 
 
 
비닐 갈매기

정순오 
 
 
검정 비닐봉지에
날개 부리 꼬리 생겼다
 
바닷가에 도착한 비닐 갈매기
모래사장 맴돌다가
파도와 놀다가
조금씩 위로 떠올랐다
 
- 태풍이 오나 봐. 육지 바람보다 훨씬 대단해
- 이렇게 많이 화내는 파도 처음 봐
- 와! 높이 오르는데도 전혀 힘들지 않아
- 나 구름 속으로 빨려 들어갈 거 같아
땅에는 숨을 곳이라도 있는데 여기엔 없네
- 숨긴 왜 숨어. 이제는 아무 눈치 보지 마
자기들이 버려놓고 우리에게 눈살 찌푸리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여기까지 왔잖아
- 그래, 가슴을 활짝 펴고 하늘 끝까지 가보자
 
갈매기 두 마리!
먹장구름 속 힘차게 날고 있다
 





 
 
맛집 투어 1
정순오 
 
 
벌과 나비는
 
 
나팔꽃에게 갔다가
개망초에게 갔다가
백일홍에게 갔다가
여기저기 돌아다닙니다
 
 
입맛 쩝쩝 다시며
어디가 맛집인지
입에 맞는 식당 어디인지
 
 
검색 중입니다
 
 
 
 
 
 
맛집 투어 2
정순오
 
 
개망초에게 갔더니
고소한 달걀 맛이 났다
 
나팔꽃에게 갔더니
문이 닫혀 돌아왔다
 
접시꽃집은
접시가 정말 크고 예쁘더라
 
백일홍네는
영업기간이 아니네
 
고소한 걸 좋아하는
무당벌레에게는 개망초를
 
플레이팅을 중시하는
나비에게는 접시꽃을 추천해야지
 

 
 
 
 
 
보름달
정순오 


우리 집 고양이
까만 눈동자
 
 
! !
 
() ()
 
( ) ( )
 
○ ○
 
 
하루에도 몇 번씩 볼 수 있는
나만의 보름달
 
 

 
 
 
 
 
 
 
 
소금쟁이 그림
정순오 
 
 
늘 엎드려서
그림 그리는 소금쟁이
 
두 팔로도 모자라
다리까지 동원해
스르륵스르륵
 
아무리 부지런히 그려도
남지 않는 그림
 
 

 
 
 
 
 
 
 
세 개의 달
정순오 
 
 
접시 위에 와플
와플 위에 아이스크림
 
매끈하고 남작한 보름달 위에
울퉁불퉁 못난이 달
그 위에 달달구리 달
 
나는 지금
달 탐사를 시작한다
 
혀끝을 휘감으며
온몸에 녹아드는 달달구리 달!
 
 

 
 
 
 
 
 
 
 
 
햇살 문자
정순오 
 
 
안개는 땅이 보내는 문자
구름은 하늘이 보내는 문자
비는 바다가 보내는 문자
 
수많은 문자 가운데
지혜가
내게 보내는 문자는
 

따스한 햇살
 
 
 
 
 
 
 
 
 
북극성

정순오 
 
 
혼자 있어도 
예쁘게 빛나는 별
 
친구들이 찾아오면
더 빛나는 별
 
떠나는 친구
아쉬워하는 별
 
힘들어도
늘 제자리 지키는 별
 
 
 
 
 
 
연 蓮
정순오 
 
 
몸 씻으려나?
저수지 곳곳에
샤워기 걸어 두었네
 
방 데우려나?
연탄 들여 놓았네
 
뻥뻥 뚫린 구멍에서
무엇이 나올까
 
 
 
 
 
 
그림자 손
정순오 
 
 
해님에게
옆에 있는 나무의 손을
잡고 싶다고 말하자
그렇게 해주었다
 
마주 보고 있는
나무의 손도 잡고 싶다고 말하자
그렇게 해주었다
 
이제는 산 너머 나무도
보고 싶다고 말하자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한참 뒤
정말
저 쪽 친구가
내가 있는 곳으로 슬쩍 넘어왔다
 

 
 
 
 
 
할아버지 미술관
정순오 
 
 
산골짜기 다랑이 밭에
콩 농사 지으시는 할아버지
 
고라니 못 들어오게 울타리 치고
새 떼들 극성에 독수리 연 띄우고
반짝이 테이프도 걸어 두셨다
 
바람 비 햇살이
콩 쑥쑥 키우는 동안
 
농막에서 만든
우체통과 바람개비 솟대까지
비탈에 세우신 할아버지
 
얽히고설킨 작품들
그냥 두고 잠든 겨울
 
하얀 눈 내리던 날
외로운 고라니 왔다가
발자국만 남기고 갔다
 

 
 
 
 
 
 
앞마당 마트
정순오 
 
 
할머니네 마트
 
골라골라
하나 고르면 하나는 덤
 
달래 쑥 배추 강낭콩
당근 무 파 열무 쑥갓
부추 토마토 상추 고추
가지 오이 아욱 청경채
 
없는 게 없는
할머니네 텃밭 마트
 
감자전, 토마토 샐러드는
시식도 가능
 
할머니네 마트는
쉬는 날도 없답니다
 
 
 
 
 
 
 
 
 
달팽이관
정순오 
 
읍내 다녀오신 할머니
어지러워 누워 계신다
 
달팽이야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네가 좋아하는
초록잎 가져왔으니
얼른 나와 봐
 
그러면
우리 할머니가 일어날 것 같아
 
부탁이니
내 말 좀 들어줘
 
 
 
 
 
 
 
 
뽀짝*
정순오 
 
 
밥 먹을 때마다
뽀짝 땡겨 앉아라
 
 
손톱 보시면서
뽀짝 다시 깎아
 
 
심각한 얘기하실 때
뽀짝 잘 들어
 
 
그때는 듣기 싫었지만
할머니 시골 가시고 난 뒤
 
 
귓가 자주 맴도는 말
 
 
뽀짝
 
 
 
 
 
*뽀짝: ‘가까이’의 사투리
 
 
 
 
 
 
 
 
 
엄마도 그랬을까
정순오 
 
 
내 방 침대에 누워 있는
우리 집 고양이
 
살금살금 다가가
살포시 담요 덮어 주고
 
토닥토닥 등 두드리며
자장자장 노래 불러 주니
어느새 새근새근

고양이 옆에 누워
가만히 보고 있으니
내가 꼭 엄마가 된 것 같다
 
 

 
 
 
 
 
옆구리 터진 개구리

정순오 
 
 
간식 싸들고 풀 베러 가는 길
 
풀도 베기 전에 발아래
물크덩
 
 
옆구리 터진 개구리
 
이를 어쩌나?
 
저만치 웅덩이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꼬물거리는 올챙이
 
 
 
 
 
 
 
 
찔려서 그래요

정순오 
 
 
많고 많은
풀벌레 소리 가운데
오늘은 왜 하필
 
찌르르
찌르르
 
소리만 들릴까
 
친구와
싸우고 난 뒤부터
자꾸 들려오는 소리
 
찌르르
찌르르
 
 
 
 
 
 
 
 
 
 
종이 접기
정순오 
 
 
우리 집 가훈은
식구들이 직접 만든 동물
 
 
열정적으로 살자는 아빠는 드래곤을
여유롭게 살자는 엄마는 사자를
부지런히 살자는 누나는 비버를 만든다
 
 
드래곤은 선반 위에
사자는 책상 아래
비버는 어항 옆에
 
 
남다르게 살자는 나는
지금 청게구리 하나 만들어
숨기는 중이다
 
 
 
 
 
 
 
 
 
 
청개구리

정순오 
 
 
아무 생각 없이 가다가도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세요
만지지 마세요
올라가지 마세요
사진 찍지 마세요
라는 글을 보면
 
 
뒤집어 보고 싶다



 
 
 
 
 
 
 
잔소리

정순오 
 
 
쌀 한 톨도 아껴라
물 한 방울도 아껴라
전등 한 등도 아껴라
 
그런 말 다 어디가고
 
미세먼지 들어올라
창문 꼭꼭 닫아라
마스크 쓰고 다녀라
 
 
 
 
 
 
 
 
 
 
 
집을 짓다
정순오 
 
 
물 위 가로질러
힘껏 던져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가
 

한 조각
두 조각
떼 낸 수제비


모이고 모여
수제비 집이 된다
 
 
 
 
 
 
 
 
바람
정순오 
 
 
연못 속에 비친
 
 

나무
구름

 
물결이 가만가만
접었다 폈다 합니다
 
바람은
아코디언 연주자
 
  
 
 
 
 
 
 
 
 
마음으로 듣는 소리
정순오 
 
 
소중한 하루를 여는 해
 
 
시원한 그늘을 만드는 구름
 
 
활짝 웃음 짓게하는 꽃
 
 
반작 밤 하늘 수놓는 별
 
 
마음으로만
들을 수 있는 소리들
 
 
 
 
 
 
 
 
 
 
 
이룰 수 있는 일
정순오 
 
 
가창오리 떼지어 날며
차가운 하늘에
따뜻한 바람 일으키고
 
청둥오리 떼지어 헤엄치니
차가운 강물 따스해지네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
날개 퍼덕이며 다리 굴리니
이룰 수 없다 생각하던 일
이루어지네
 
아무리 기다려도 보이지 않던
땅 속 아지랑이들도
보리 싹 파릇파릇 떼 지어 올라오니
가물가물 솟아 오르네
 
 
 
 
 
 
 
 
 
 
작지만 큰 일
정순오 
 
 
안녕하세요?
마음을 여는 말
 
고마워요
마음을 움직이는 말
 
미안해요
마음을 통하게 하는 말
 
많이 할수록 좋은 말
언젠간 되돌려 받을 말
 
 
 
 
 
 
 
 
 
 
 
어디 갔을까

 정순오
 
벚나무는 벚꽃 품고
벚꽃은 개구리알 품고
개구리알은 까만 점 품었어
 
올챙이 살고 있는
연못 속 까만 점들
 
포근한 햇살에 와글와글
바람 물살에 꼬물꼬물
 
벌 나비들
한바탕 놀다간 후
찾아온 꽃샘바람에
우르르 흩어지네
 
그 많던 올챙이들
다 어디 갔을까
 
 
 
 
 
 
 
 
 
나를 찾아서

정순오 
 
선물 받은 목각 인형
인형 속에 인형 또 인형
 
동그랗게 싸인 양파
양파 속에 양파 또 양파
 
6학년인 나
나 속에 나 또 나
들어있다
 
인형 찾고 양파 찾듯
겹겹이 들어있는
내 안의 나
 
 
 
 
 
 
 
 
듣기 좋은 말

정순오 
 
 
책이 가방에게
- 네 덕분에 편안해
 
 
가방은 아이에게
- 업어줘서 고마워
 
 
아이는 가방에게
- 무겁지? 책이 많아 미안해
 
 
참 듣기 좋은 말
덕분에, 편안해, 고마워, 미안해
 
 
 
 
 
 
 
 
 
구직광고
정순오 
 
 
버려진 선풍기가
저 홀로
빙글빙글
 
 
-나 아직 일할 수 있으니 누구든 데리고 가세요
 
 
글귀 없는 전단지 돌리고 있다
 
 
 
 
 
 
 
 
 
 
혼자 웃는 새
 정순오
 
배고픈 소쩍새
밥 달라며
-소쩍 소쩍 소쩍
 
 
엄마에게 혼난 두견새
속상하다며
-뾱 뾱 뾱 뾱
 
 
친구 없는 휘파람새
슬프다며
-휘이이익 호르륵
 
 
다들 속상한데
검은 등 뻐꾸기만
뭐가 그리 좋은지
-호 호 호 호
 
 
 
 
 
 
 
 
 
 
 
벚나무
정순오 
 
햇살 쏟아지자
와글와글
들썩들썩
 
꽃샘바람에
휘청휘청
후두두둑
 
일 년 만에 만났는데
며칠 만에 떠나버린
벚꽃
 
 
 


양파 1
정순오
 
 
겹겹이 싸인
동그라미에
동그라미
그리고
또 동그라미

코앞에 있지만
아무 때나 들어가지 않는다
 
가까이에 있지만
간섭하지 않는다
 
그래도 한 집에 산다
 
 
양파 2
정순오

 
양파 속에 들어있는
참 잘 했어요
동그라미 일곱 개
 
동그라미 하나에 십 점
합치면 칠십 점이지만
 
동그란 모습이
동그란 마음 만들고
동그란 마음이
동그란 맛 만드니
 
잘했어
이만하면 됐어!
 
 
남산동 향수길
정순오
 
모르는 게 많은
대구의 골목길
 
엄마 따라 나선 남산동엔
책 만드는 인쇄 골목이 있고
빨간 벽돌 담장 안으로
성모당과 수녀원이 있고
조금 가니
관덕정과 남산 교회가 있다
 
다리가 아프지만
돈가스집이 있어 신나고
Yes 24시 반월당점에서 책도 보고
예쁜 카페에서 빙수도 먹으니
콧노래가 흥얼흥얼
 
오늘은
대구 속의 대구를 알게 된 날
엄마와 좀 더 가까워진 날
 
 
새벽 배송
정순오
 
 
안개 속에서
나팔꽃이 나팔을 분다고
 
너른 들판에서
익어가는 벼들이 찰랑인다고
 
내가 자고 있든 말든
엄마가 바쁘든 말든
 
나팔 소리 멈추기 전에
아침이슬 마르기 전에
빨리 배송해야 한다고
 
산책 나간 우리 아빠
실시간 사진 보낸다
 
 
 
인기척
정순오
 
 
탁탁
수박 고르기 전에 노크한다
맛있나 보려고
 
톡톡
사과 깎기 전에 노크한다
놀라지 말라고
 
똑똑
오빠 방에 노크한다
화내지 말라고



 
 
할머니의 봄나들이
정순오
 
구순이신 우리 할머니
 
마당에 핀 꽃봉오리 보고
-참 곱기도 하지
 
떠났다 돌아온 제비 보고
-친구가 놀러왔네
 
살구 밭에 찾아온 햇살 보고
-우리 손자 민우네
하십니다
 
늘 방에만 계시던 할머니
이번엔 아빠가 모시고
나들이 갑니다




 
연호역의 나비
정순오
 
 
연호동 화훼단지에 사는 나비가
지하철 2호선 연호역 안으로
날아 들어왔다
 
다음 역인 대공원역에 가서
꽃 배달시킨 친구를 찾아야 한다
 
라이온스 파크에서 함께
야구 경기를 보려면
 



 
물맴이와 매미
정순오
 
 
물맴이
맴이
맴이
매미 매미
 
물맴이는
물 위에서
맴맴맴맴
몸으로 맴을 돌고
 
매미는
땅 위에서
맴맴맴맴
소리로 맴을 돈다
 
 



그런 집
정순오
 
 
다닥다닥 붙어살다가
발 오그리고 살다가
넓디넓은 곳으로 이사를 했어
 
지붕도 담장도 없고
이랑 따라 쭉 뻗은 집이야

개구리와 우렁이가 살고
오리도 놀러오는 집
찰랑이는 물 발목 간질이고
햇살 바람 잘 통하는 집
 
뭉게구름 발걸음 멈추고
고요히 들여다보는 집
 
무논이 논 되고
모가 벼로 바뀌는 바로
그런 집
 



 
손에 손 잡고
정순오
 
너는 아니?
바다 끝에 있던 화물선과
땅 끝에 있던 자동차가
어디로 사라지는지를
-음, 사라지는 게 아니라
바다는 다른 바다와 이어지고
땅은 다른 땅과 이어지는 게 아닐까
 
그래? 그러면
바다가 이어지듯 땅도 이어질까
-그럴 거야
사람들이 손에 손을 잡듯
바다와 땅도 만나서 서로 손 잡을 거야
 
아하, 그래서
지구가 둥근 거구나
천천히 강강술래 하는 거구나
 



 
송전탑
정순오
 
 
여러 개의 팽팽한 줄이
나의 몸 당겨도 난 끄떡없지
 
가끔 지나가는 비행기를
새(鳥)로 착각하거나
에펠탑 흉내를 내기도 해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과 얘기 나누고
햇살이랑 바람과도 친하지
 
사람들은
내 곁에 오기를 꺼려하지만
나는 사람들을 위해 있어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한 자리에서
늘 같은 모습으로 있지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아주 많은 일 하고 있어
 
 


어디 갔을까
  정순오
 
벚나무는 벚꽃 품고
벚꽃은 개구리 알 품고
개구리 알은 까만 점 품었어
 
올챙이 살고 있는
연못 속 까만 점들
 
포근한 햇살에 와글와글
바람 물살에 꼬물꼬물
 
벌 나비들
한바탕 놀다간 후
찾아온 꽃샘바람에
우르르 흩어지네
 
그 많던 올챙이들
다 어디 갔을까
 
 


매미의 사투리
정순오
 
어떤 매미는 일절만
맴맴맴맴 노래하고
 
어떤 매미는
일절과 이절을 다 노래하고
 
어떤 매미는
일절과 이절의 반만 노래한다
 
누구랑 말이 통하는지
노래로 친구 찾는다
 
  
 
 
 
 
 
 
편식
정순오
 
 
밭으로 침투한 고라니
 
배추와 무의
가장 부드럽고
아삭한 부위만 골라서 한 입
 
어린 이파리만 골라
쏙쏙 빼 먹으며 한 입
 
한 입 한 입 늘어갈수록
쌓여가는 잔반
 
고라니야!
남은 건 다 어쩌라고
가리지 말고 골고루 좀 먹어
 


 
물범의 일기
정순오
 

날짜; 2024년 1월 1일
날씨; 맑지만 바람 많이 분 날
 
나는 남극기지에 사는 웨델 물범!
 
오늘 처음 보는 생물들이 내게 다가와
나를 잠재우기도 하고 털을 뽑기도 하고
이상한 걸 몸에 붙이고 갔어
 
나도 그들이 궁금해
그들이 사는 곳에 가보았어
 
문 앞을 어슬렁거리다가
노크해 보았는데 조용하기만 했어
 
그들은 누구일까
어떤 일을 하는 걸까
언제 만날 수 있을까
 
앞으로
참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 같아

 



 
 
 
 
 
해설
정순오 동시집 <좋은 걸 어떡해>를 읽고
 
 
동심으로 빚은 감성이 넉넉하고
개성 있는 따뜻한 시


최춘해
 
 
정순오 시인은 최춘해 아동문학교실(2010년)을 수료하고 혜암아동문학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혜암아동문학 교실 강의를 7년째 하고 있습니다. 정순오 선생한테서 배운 수강생들 가운데 여러 분이 등단을 했습니다. 21년 전에 《대구문학》 시 부문 신인상으로 등단을 해서 2017년에 시집 『이만큼 왔으니 쉬었다 가자』를 냈습니다. 그리고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습니다. 동시집은 첫 동시집이지만 일찍 인정을 받은 성숙한 시인임을 먼저 알립니다.
동시는 동심으로 쓴 시입니다. 동심이란 어린이만의 것이 아닙니다. 어린이라고 언제나 동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영악할 때도 있습니다. 성인이나 노인이라고 동심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동심은 순수한 마음입니다. 모든 사물을 어린이 자신같이 목숨을 가진, 귀천이 없고 고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 수직이 아니고 수평입니다. 나보다 더 높거나 낮다고 보지 않고, 또 나보다 더 귀하거나 천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남을 업신여기거나 두렵게 보지 않습니다. 남의 눈치를 볼 것도 없을 뿐더러 어려운 처지에 있는 것을 보면 돕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을 동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물활론이 동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는 무엇일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한마디로 나타내기는 어렵지만 예술성이 있는 작품이라는 건 틀림없습니다. 동심은 있으나 예술성이 없으면 동시라고 할 수 없습니다. 동심에만 치우쳐도 안 되고 예술성에만 치우쳐도 안 됩니다.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정순오 선생은 첫 동시집이지만 시인으로 등단한 지 오래 되었고, 시집도 낸 시인이라서 시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동시집의 작품 소재가 거의 다 자연입니다. 자연을 사랑하고 가까이한다는 것은 순수한 마음 곧 동심을 뜻합니다. 작품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1. 동심
 
 
앞마당에서
야채 기르는 할머니
 
꽃 피는 거 봐서 좋고
꽃 지는 거 봐서 좋고
 
심심하지 않아서 좋고
먹을 수 있어 좋다고
 
몸이 좀 아파도
잡초 뽑기 힘들어도
 
좋은 걸 어떡하라고

 
-「좋은 걸 어떡해2」 전문
 
 
앞마당에서 야채 가꾸는 할머니는 연세가 높으셔서 몸이 아픈데도 힘들게 잡초를 뽑으며 일을 하는 걸 보고 자식들이 ‘하지 마시라’고 말리지만 할머니는 야채를 가꾸지 않고는 못 배깁니다. 야채를 나와 같은 인격을 가진 사람처럼 생각해서 가꾼다고 하지 않고 기른다고 했습니다. 꽃 피는 것, 꽃 지는 것, 나날이 싱싱하게 자라는 걸 보면 여간 귀엽지 않습니다. 야채는 목이 말라도 할머니가 물을 주지 않으면 목이 마른 채로 참고 있어야 할 것을 생각하면 야채 곁을 떠날 수가 없어서 야채와 함께 있어야 합니다. 끝의 말 “좋은 걸 어떡하라고”라는 말만으로도 할머니가 야채를 얼마나 사랑한다는 걸 느끼게 합니다. 야채가 좋기 때문에 야채 곁에 있어야 하고, 힘이 들어도 잡초를 뽑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못 배깁니다.
여기서 야채는 야채 한 가지만 아니라 자연이 아닐까요? 자연 사랑은 인간의 순수한 마음 곧 동심일 것입니다.
 
 
전봇대 둘레에
바랭이풀, 괭이밥, 씀바귀꽃
자리 잡았다
 
비에 떠내려가지 않게
바람에 흩어지지 않도록
손 꼭 잡았다
 
밋밋하고 차갑던
전봇대가 꽃신 신었다.
 
 
꽃신 신은 전봇대
발등 간지럽겠다.
- 「꽃신」 전문
 
 

이 꽃들은 매우 작아서 눈에도 잘 띄지 않습니다. 산과 들에서 흔하게 보는 꽃이기 때문에 관심이 없습니다. 동심이기 때문에 전봇대 둘레에 이 꽃들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시적 화자는 이 전봇대 밑의 꽃을 여러 차례 지나면서 지날 때마다 쪼그리고 앉아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드디어 생각해 낸 것이 전봇대의 꽃신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전봇대를 의인화했습니다. 전봇대가 나와 같은 사람이 되고 둘레의 꽃들은 신발이 되었습니다. 눈에 잘 띄지도 않고 보잘것없는 흔한 꽃도 차별하지 않고 나와 같이 소중하다고 생각해서 관심 있게 지켜보았기 때문에 그 생각이 자라서 생명도 없는 전봇대가 사람이 되고 꽃들이 신발이 된 것입니다.
 
 
나무는 걷고 싶어
신발 연구소 만들었어요.
 
바느질 자국 다 다르고
크기와 모양도 다 다르고
발레슈즈처럼 가벼운 신발 연구해요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는
걷고 싶은 나무의 신발 연구소
 
드디어
플라타너스 장화, 은행잎 구두, 단풍잎 운동화 완성!
 
찬바람 불기 시작하자
나무들은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 「걷고 싶은 나무」 전문
 
 
꿈이 있는 것이 동심의 특징입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도 상상의 세계에서는 가능합니다. 현실에 바탕을 둔 상상일 수도 있고 판타지일 수도 있습니다. 나무도 나와 같은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걷고 싶은 생각이 날법합니다. 걸으려면 신을 신이 있어야 되겠기에 땅속에 신발 연구소를 만들어서 보기 좋고 가볍고 편리한 신발을 연구합니다. 이른 봄부터 시작해서 여름을 지나 가을에 드디어 완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신발을 신고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상은 지금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다보면 가능해 집니다. 처음으로 날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때는 불가능했지만 연구 끝에 지금은 비행기를 만들어서 하늘을 날고 있잖습니까?

 
2. 감성
 

엄마 따라 간
텃밭에서 보았어
 
날마다 애써 가꾼 배춧잎 뜯어먹던
애벌레가 애써 지은 집을 뚫고
흰 나비되어 날아오르는 것을
 
순간 생각했어
 
하루 세 번 밥 먹을 때마다
엄마가 애써 만든 텃밭 채소 반찬
남기지 않고 모두 먹으면
 
꼼지락꼼지락
나도 한 마리 녹색 애벌레 되었다가
번데기 방을 벗어나
흰 나비되어 훨훨
어디든 날아갈 수 있을지
 
-「흰나비 되어 훨훨」 전문
 
 

검정 비닐봉지에
날개 부리 꼬리 생겼다
 
바닷가에 도착한 비닐 갈매기
모래사장 맴돌다가
파도와 놀다가
조금씩 위로 떠올랐다
 
-태풍이 오나봐. 육지 바람보다 훨씬 대단해
-이렇게 화내는 파도 처음 봐
-와! 높이 오르는데도 전혀 힘들지 않아
-나 구름 속으로 빨려 들어갈 거 같아
땅에는 숨을 곳이라도 있는데 여기엔 없네
-숨긴 왜 숨어. 이제는 아무 눈치 보지 마
자기들이 버려놓고 우리에게 눈살 찌푸리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여기까지 왔잖아
-그래. 가슴을 펴고 하늘 끝까지 가보자
 
갈매기 두 마리!
먹장구름 속 힘차게 날고 있다.


- 「비닐 갈매기」 전문
 
 

안개는 땅이 보내는 문자
구름은 하늘이 보내는 문자
비는 바다가 보내는 문자
 
수많은 문자 가운데
지혜가
내게 보내는 문자는
 
늘 따스한 햇살

- 「햇살 문자’」 전문
 
 
 

혼자 있어도
예쁘게 빛나는 별
 
친구들이 찾아오면
더 빛나는 별
 
떠나는 친구
아쉬워하는 별
 
힘들어도
늘 제자리 지키는 별

- 「북극성 」 전문
 
 

해님에게
옆에 있는 나무의 손을
잡고 싶다고 말하자
그렇게 해주었다.
 
마주 보고 있는
나무의 손도 잡고 싶다고 말하자
그렇게 해주었다
 
이제는 산 너머 나무도
보고 싶다고 말하자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한참 뒤
정말
저 쪽 친구가
내가 있는 곳으로 슬쩍 넘어왔다.
 
- 「그림자 손 」 전문
 
 
위의 작품은 감각 시입니다. 사물을 접했을 때 여러 사람이 다 같이 느낄 수도 있지만 사람마다 다르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감성이 풍부한 사람은 미처 남이 생각하지 못한 신선한 시를 쓸 수 있습니다. 정순오 시인은 사물을 만났을 때 어떻게 느꼈는지 살펴봅시다.
 
위의 작품 ① 「흰 나비되어 훨훨」은 엄마를 따라서 텃밭에 가서, 애벌레가 제가 지은 집을 뚫고 흰나비 되어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걸 보고 “나도 하루 세 끼 밥 먹을 때, 엄마가 애써 만든 텃밭 채소 반찬 남기지 않고 모두 먹으면 흰 나비되어 훨훨 날아갈 수 있을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애벌레가 배춧잎을 실컷 먹고 스스로 집을 지어 번데기 속에 있다가 번데기를 뚫고 나와 흰 나비가 된다는 것은 배워서 알았지만 실제로 번데기를 뚫고 나와 날아가는 것을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번데기를 뚫고 나와 날개가 마른 뒤에 날아가는 것을 오랫동안 참고 관찰했다는 것과 그걸 관찰한 뒤에, ‘나도 나비처럼 배춧잎 채소로 만든 반찬을 많이 먹으면 어디든 날아갈 수 있을지’ 라고 엉뚱한 생각을 한 것이 돋보입니다.
 
 
② 「비닐 갈매기」는 검은 비닐봉지 두 개가 함께 바람에 날려 공중에 떠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날개, 부리, 꼬리가 있는 갈매기처럼 보였습니다. 바닷가에 도착한 이 비닐갈매기는 모래사장을 맴돌다가 파도와 놀다가 조금씩 위로 떠올랐습니다. 두 비닐갈매기를 의인화했습니다. 비닐갈매기 둘이 사람들을 비판합니다. “자기들이 버려놓고 우리들에게 눈살 찌푸리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여기까지 왔잖아” 하고. 소재는 비닐봉지이지만 주제는 자연보호입니다.
 
 
③ 「햇살 문자」. 요즘은 통신 수단이 모바일입니다. 무척 편리해졌습니다. “안개는 땅이 보내는 문자/구름은 하늘이 보내는 문자/비는 바다가 보내는 문자”라고 했습니다. 땅, 하늘, 바다도 무척 편리하겠지요. “수많은 문자 가운데/지혜가/내게 보내는 문자는//늘/따스한 햇살”이라고 했습니다. 땅, 하늘, 바다 등을 의인화해서 민지와 같은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여기서는 나타내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한테서도 문자를 많이 받겠지요.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민지가 보내는 문자는 늘 따스한 햇살이라고 했습니다. 소재는 문자이지만 주제는 지혜 사랑입니다.
 
④ 「북극성」. 시적 화자가 북극성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혼자 있어도/예쁘게 빛나는 별’ //친구들이 찾아오면/더 빛나는 별” 혼자 있어도 예쁘고 친구들이 찾아오면 더 빛난다고 하는 걸 보면 혼자서도 별을 쳐다보며 즐겁게 지내지만 친구들이 찾아오면 별이 더 빛난다는 걸 보면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떠나는 친구/아쉬워하는 별”이라고 한 것은 정이 많은 자신의 생각입니다. 북극성은 늘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 보고 힘들어도 변함없는 우정을 다짐하는 마음이 엿보입니다.
 
 
⑤ 「그림자 손」. 나무 그림자가 옆 나무 그림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걸 보고 나무가 손을 잡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시적 화자만의 특별한 생각입니다. 얼마 뒤 그림자가 붙어 있는 걸 보고 손을 잡게 해주었다고 했습니다. 마주 보고 있는 나무도 손을 잡게 해주었습니다. 산 너머 나무도 보고 싶다고 말하자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고 나서 한참 지난 뒤 정말 저 쪽 친구가 내가 있는 곳으로 슬쩍 넘어왔다고 했습니다. 밤이 되어 날이 어두워지니까 그림자가 합쳐진 것입니다. 손을 잡고 싶다고 하자 그렇게 해주었다는 말이 상당히 개연성이 있습니다. 친구가 되고 싶다고 간절하게 바라면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친구를 사귀고 싶어 하는 동심이 주제입니다. 원래의 동심은 친구를 사귀고 싶어 하는데, 왕따가 생기는 것은 동심을 잃은 것입니다. 놀자 하고 친구를 부르는 것은 사귀고 싶은 마음이고, 너하고 안 놀아 할까봐 겁을 내는 게 어린이 마음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친구를 사귀는 게 여간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나무가 손을 잡고 싶어 한다고 했지만 나무를 의인화했기 때문에 사실은 사람입니다. 독자도 친구를 사귀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합니다.
 
 
3. 사랑

산골짜기 다랑이 밭에
콩 농사 지으시는 할아버지
 
고라니 못 들어오게 울타리 치고
새 떼들 극성에 독수리 연 띄우고
반짝이 테이프도 걸어 두셨다
 
바람 비 햇살이
콩 쑥쑥 키우는 동안
 
농막에서 만든
우체통과 바람개비 솟대까지
비탈에 세우신 할아버지
 
얽히고설킨 작품들
그냥 두고 잠든 겨울
 
하얀 눈 내리던 날
외로운 고라니 왔다가
발자국만 남기고 갔다

- 「할아버지 미술관」 전문
 
“산골짜기 다랑이 밭에/콩 농사를 짓는 할아버지//고라니 못 들어오게 울타리 치고/새 떼들 극성에 독수리 연 띄우고/반짝이 테이프도 걸어 두셨다”는 것은, 할아버지가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바람 비 햇살이/콩 쑥쑥 키우는 동안“에 만든 미술품입니다. 또 ‘농막에서 만든/우체통과 바람개비 솟대까지/비탈에 세우신” 것도 할아버지가 만든 미술품입니다. 그밖에 자연 속에서 살면서 ‘얽히고설킨 작품들’이 무척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할아버지 농장을 ‘할아버지 미술관’이라고 했습니다. 소재는 할아버지 텃밭이고 시적 화자가 형상화한 것은 할아버지 미술관입니다. 주제는 미술관이 아니라 할아버지에 대한 사랑입니다. 자연과 더불어 할아버지가 만든 얽히고설킨 수많은 작품들을 그냥 둔 채, “하얀 눈 내리던 날/외로운 고라니 왔다가/발자국만 남기고 갔다”고 했습니다. 할아버지를 회상하는 대목에서 독자의 가슴을 쓰리게 합니다.
 
 
우리 집 가훈은
식구들이 직접 만든 동물
 
열정적으로 살자는 아빠는 드래곤을
여유롭게 살자는 엄마는 사자처럼
부지런히 살자는 누나는 비버를 만든다
 
드래곤은 선반 위에
사자는 책상 아래
비버는 어항 옆에
 
남다르게 살자는 나는
지금 청개구리 하나 만들어
숨기는 중이다

- 「우리 집 가훈」 전문
 
우리 집 가훈은 식구들이 직접 만든 동물’ 정했습니다. 그 동물이 상징하는 것은 드래곤은 ‘열정’ 사자는 ‘여유’ 비버는 ‘부지런함’ 청개구리는 ‘개성중시’입니다. 이것이 우리 집 가훈인 것이지요. 이 가훈의 특징은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권위로 만든 것이 아니고 식구들의 의견을 존중한 것입니다. 주제는 진정한 사랑입니다.
 
 
가창오리 떼지어 날며
차가운 하늘에
따뜻한 바람 일으키고
 
청둥오리 떼지어 헤엄치니
차가운 강물 따스해지네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
날개 퍼덕이며 다리 굴리니
이룰 수 없다 생각하던 일
이루어지네
 
아무리 기다려도 보이지 않던
땅속 아지랑이들도
보리 싹 파릇파릇 떼지어 올라오니
가물가물 솟아오르네

- 「이룰 수 있는 일」전문
 
이 시는 가창오리, 청둥오리, 보리 싹 등 자연이 소재이고 주제는 따뜻함 즉 사랑입니다. 차가운 하늘, 차가운 강물, 차가운 보리밭 등을 따뜻하게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가창오리가 떼 지어 날아서 따뜻한 바람 일으킬 수 있고, 청둥오리가 떼 지어 헤엄쳐서 강물이 따스해집니다. 또 보리 싹이 떼 지어 올라오니 찬 보리밭이 따스해져서 아지랑이가 솟아오른다고 했습니다. 혼자서는 안 되는 일도 여럿이 힘을 모으면 이룰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감각적인 시입니다.
 
 
4. 나가면서
 
정순오 선생은 21년 전에 《대구 문학》 시 부문 신인상을 받고 6년 전에 시집을 내고 시인으로 활동하면서 동시를 썼습니다. 동시집으로는 처음이지만 어느 작품이나 순수한 동심이 넉넉해서 어린이나 어른들에게 공감이 됩니다. 시로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 작품 즉 동심과 시심이 잘 조화가 되었습니다.
감각적인 시가 많습니다. 남들이 생각 못할 엉뚱하고 신선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따뜻한 느낌이 드는 작품이 많습니다. 모든 작품의 바탕에 사랑이 깔려 있어서 독자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혜암아동문학교실>이 맛있게 나눠먹은 동시
-《동시 먹는 달팽이》 25호(봄호), <신작 동시>

정순오
 
 
대구에 있는 <혜암아동문학교실>은 혜암 최춘해선생님께서 2003년에 만드셔서 운영해온 단체입니다. ‘혜암아동문학교실’은 ‘혜암아동문학회’ 소속으로 올해 수업하고 있는 ‘21기 월요반’은 모두 15명이며, 매주 월요일 오전에 만나 아동문학 전반에 관한 이론과 창작 실기를 공부하는 모임입니다.
<혜암아동문학교실>은 혜암 최춘해 선생님께서 10기생까지 수업을 하셨고, 11기부터는 혜암 선생님의 제자가 후배들을 위해 지도하고 있는데 어언 21년째 수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수업 기간은 1년인데 수료 후엔 <혜암아동문학회> 의 회원으로서 매달 월례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럼, 혜암 달팽이들이 맛본 동시를 함께 나누어 볼까요?
 
*이미선 달팽이 - 정지윤 「꽃장화」
디카시 「꽃장화」를 읽으니 꽃에 발이 생겨 돌아다니는 것만 같다. 상상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하다. 정말 온 동네가 향기로 가득한 느낌이다. 사진 한 장과 몇 줄의 시가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울렁이게 만드니 시는 참 힘이 센 것 같다. 이런 ‘꽃장화 화분’이 외롭고 소외된 곳에 더 많으면 좋겠다.
 
꽃들에게 발이 생겼어
얼마나 신나게 돌아다니는지
온 동네에 꽃향기 가득
- 정지윤, 「꽃장화」 전문
 
 
*정순오 달팽이 - 강벼리 「박쥐 친구」
학창시절은 공부에 대한 고민도 많지만 친구 관계에 대한 고민도 많은 때이다. 이 작품은 친하다고 생각한 친구가 박쥐처럼 이중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친구에 대한 주인공(나)의 집요한 추적(?)이 이어지는 내용이다.
이 글을 재미있게 만드는 점은 친구의 본성이 절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애의 본성은 검은 망토를 펄럭일 때만 나타난다. 작가는 박쥐를 상징하는 ‘검은 망토 - 살금살금 - 파닥파닥 - 쪼르르 - 찰싹 -검은 날개’로 변주되는 의성어, 의태어들로 실감나게 글을 이어간다. 그리고 ‘피구 시합’과 ‘비 오는 날’의 사건을 통해 알게 된 그 애의 진면목(본성)에 대한 묘사에서 피식 웃음 짓게 된다. 독자인 나도 이런 경우를 겪어봤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그 시절, 아니 지금도 친구 사귀기는 정말 크나큰 고민이다.
 
 
쉿, / 박쥐같은 친구를 만났다 / 이건 비밀이지만 / 그 애는 모른다 / 그 렇다고 / 그 애가 박쥐처럼 생겼거나 / 검은 망토를 휘두르고 있는 게 아니 다 / 살금살금 나만 붙어 다니는 / 그 애 그림자에서 / 우연히 날개가 숨어 있는 걸 보았다 / 처음엔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 피구시합하는 날, / 그 애는 내가 싫어하는 / 하진이 팀에 가서 파닥파닥 응원을 했다 / 막판에 우 리 팀이 이길 것 같으니까 / 검은 날개를 잽싸게 감추고 / 나한테 쪼르르 달려왔다 / 오늘은 비가 후드득 오는데 / 우산 안 가져 온 / 내 눈치를 얼 른 보다가 / 슬그머니 사라졌다 / 나랑 친한 줄 알았는데 / 하진이 우산 속 에 찰싹 붙어가는 / 그 애 뒷모습에서 검은 날개가 펄럭거렸다
- 강벼리 「박쥐 친구」 전문
 
 
*장점옥 달팽이 - 강벼리 「박쥐 친구」
작은 사회든 큰 사회든 비슷한 것 같다. 작가는 우리들의 세상살이가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작가는 친구의 그림자에서 박쥐 날개가 숨어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배신감을 기발하게 표현했다. 우리는 가끔 박쥐같은 사람으로 인해 마음을 다치기도 한다. 믿었던 사람에게서의 배신감이야 말로 대단히 실망스럽다. 그 상실감은 한동안 깊은 구렁텅이로 떨어져 허우적거리게 한다. 시간이라는 고마운 햇볕 덕분에 마음을 추스르기도 하고,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지듯 좋은 작품으로 위로 받으며 마음을 다스리기도 한다.
 
 
*오현희 달팽이 - 박예분 「시골집 이야기」
우리 시골집 마을은 집성촌이다. 매년 설이 되면 새벽같이 일어나 네 집을 순서대로 돌며 세배를 드리고 차례를 지내는 풍습이 있다. 이웃끼리 떡국을 나누고 선물을 주고받으며 분주하게 설을 보낸다. 하지만 지금 그 곳엔 빈집들만 남아있다. 1연과 2연에서 느껴지는 서글픔과 황량함이 낯설지 않은 이유이다. 자연의 섭리나 순리 같은 말로는 위로되지 않은 무엇이 있다. 3연의 ‘할아버지가 뒷산에 심은 감나무 밤나무 대추나무’, ‘할머니가 가꾸던 텃밭과 너른 마당의 수선화 철쭉 장미….’ 이 구절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부재로 인해 남겨진 것들이 더욱 그립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 땐 많이 힘들다 생각했는데 지나고나니 좋았던 기억이 더 많이 남아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다시 오지 못할 것에 대해 깊은 향수를 느끼는 것 같다. 우리나라 출산율이 0.65명이고 점점 노령화 되어가고 있다는 뉴스가 연일 보도된다. 현실적 우려는 차치하고라도 사는 동안 어떤 걸 남겨야 할지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지난가을, 할아버지 병원에 입원하자 / 시골 식구들 뿔뿔이 흩어졌다 / 할머니는 우리 집으로 오시고 / 강아지 다롱이는 삼촌네로 / 다롱이는 이모 네로 // 시골집 살림살이는 그대로 있다 / 가끔 삼촌이 둘러보고 이모가 둘 러보며 / 마을 소식을 물어 나른다 / 지난 일 년 동안 오수댁 할머니 돌아 가시고 / 아랫집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 윗동네 김씨 할아버지는 요양원으 로 가시고 / 박씨네 마을에 남아있다고 // 나는 속으로 안부를 묻는다 / 할 아버지가 뒷산에 심은 감나무 밤나무 대추나무 / 할머니가 가꾸던 텃밭과 너른 마당에 피고 지는 / 수선화 철쭉 장미 바늘꽃 족두리꽃 맨드라미꽃 / 봉숭아 꽃씨 톡, 톡, / 할머니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이름들 / 조용조용 불러 본다
- 박예분 「시골집 이야기」 전문
 
 
*권순우 달팽이 - 유이지 「팽나무를 만나거든」
이 산문시는 작가의 자연에 대한 사랑이 잘 녹아있는 글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그물처럼 촘촘한 하루를 사느라 잊고 살아온 나무와 풀꽃들을 시의 행간에서 만나자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그리고 키 작은 풀꽃은 눈을 씻고 보아도 잘 보이지 않기에 작가는 허리 굽혀 눈 맞춤을 하라고 조곤조곤 일러주네요. 내 마음 또한 봄볕이 꽃망울 터뜨리는 모습을 본 후라 시너지 효과를 느끼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오리나무’라는 단어에서 나의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어릴 적 산딸기를 따서 물오리나무 잎에 싸주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나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개나리 울타리에 연노랑 보리수나무꽃’ 두고 하늘나라 주민이 되신 아버지를 만나 고향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행복합니다.
 
 
거기서 모퉁이를 지나 계수나무 두 그루를 또 지난 후에 좁다란 골목길로 들어서세요. 생강나무 두어 그루를 지나 골목 안쪽 옹기종기 이어진 이웃들 의 담 밑에 꽃다지, 노루귀. 꽃마리, 양지꽃 아롱다롱 피어 있거든 몸을 낮 춰 인사하며 가세요. 가다 보면 유난히 개울물 소리 다정하게 재잘대는 곳에 오리나무 세 그루가 보일 거예요. 멈춰서서 개나리 울타리에 연노랑 보리수 나무꽃 피어있는 집, 거기가 우리 할아버지 주소예요.
- 유이지 「팽나무를 만나거든」 전문
 
 
*김성희 달팽이 - 유이지 「팽나무를 만나거든」
이 시 속에는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할아버지 댁으로 가는 시골길에서 주인공의 기분을 알 수 있고, 그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나무와 꽃의 향기가 느껴지고 걸어가는 마음에서 설렘이 가득하다. 작가는 시골길 풍경을 자세히 묘사하여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주변 상황을 이미지로 상상하게 만든다. 이 글 읽으니 그리운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고 문득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김도은 달팽이 - 정광덕 「빙하였다면」
신문지 놀이를 해 본 경험이 있다. 신문지에 여러 명이 올라가면 놀이가 시작된다. 처음 크기에서 접어나가다 보면 신문지가 점점 좁아진다. 신문지 위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업고, 한발로 서고, 안기도 하는 행위가 일어난다. 재미있기도 하지만 그 위에서 하는 게임은 우리의 사는 모습이기도 하다. ‘빙하’라는 설정이 신문지 밖의 긴장감을 더해준다. 인간은 아이러니하게 ‘나만 아니면 돼’라는 이기를 쫓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두려움도 크다. 그래서 오히려 누군가와 끊임없이 관계 맺기에 연연하는지도 모르겠다. 신문지 위에서 고군분투하는 북극곰의 모습이 그려져 마음이 짠하면서도 읽는 즐거움에 빠지게 된다. 마지막 연을 ‘휴우’로 마무리해서 불안했던 마음을 안도감으로 바꾼다. 작품의 설정과 스토리가 재치 있게 이어져 읽는 묘미를 준다.
 
 
펼친 신문지 위에 / 북극곰 두 마리가 올라서요. // 반 접은 신문지 위에 / 한 북극곰이 다른 북극곰을 업어요 // 또 반 접은 신문지 위에/ 한 북극 곰이 다른 북극곰을 업은 채 한 발로 서요. // 또 반 접은 신문지 위에 / 한 북극곰이 다른 북극곰을 업은 채 한발로 서서 발꿈치를 / 들고 겨우겨우 버티다가 / 그만 신문지 밖으로 나동그라져요. // 휴우, 신문지 접기 놀이 니까 망정이지/ 빙하였다면 어쩔 뻔 했어요.
- 정광덕 「빙하였다면」 전문
 
 
*박성희 달팽이 - 정순오 「발명의 발명」
이 작품은 1연을 시작하면서 발명이 어려운지 물어본다. 나도 모르게 “네”라고 답을 한다. 호기심을 싹트게 하는 1연이다. 2연은 길을 접어서 계단을 발명하고, 계단을 움직이니 에스컬레이터가 된다. 에스컬레이터를 세우니 엘리베이터가 된다. 난 한 번도 접어보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반짝이는 생각에 “아!” 소리를 지른다. 길이 징검다리가 되어 계단으로 확장되고, 다시 에스컬레이터로, 엘리베이터로 연결하는 모습에 눈이 동그래진다.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상상력이다. 상상력의 깊이에 푹 빠진다. 이 작품은 상상력이 빈곤한 아이들에게 감수성을 꽃피우게 한다. 3연은 사진기, 전화기, 계산기, 컴퓨터가 따로 나와 다 합치니 핸드폰이 된다고 한다. 각각인줄 알았는데 제각각이 아니라고 한 마지막 행이 특별함을 더해준다. 따로따로가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발명이 어렵다고? // 길을 접으니 / 계단이 되고 / 계단을 움직이니 / 에스컬레이터 되고 / 에스컬레이터를 세우니 / 엘리베이터 되었어 // 사진 기가 나오니 / 전화기도 나오고 / 계산기가 나오니 / 컴퓨터도 나오고 / 다 합치니 / 핸드폰 되었어 // 제각각인 줄 알았는데 / 제각각이 아니네 // 처음이 중요해 / 생각을 살짝 바꾸면 돼
- 정순오, 「발명의 발명」 전문
 
 
*장영미 달팽이 - 정순오, 「발명의 발명」
일상에서 느꼈던 불편함을 새로운 아이디어로 발견하는 과정이 잘 드러난 글이다. 발명이 어렵다하지만 생각을 살짝 바꾸어보면 제각각의 용도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서로 다른 기능의 사물이 합쳐지면 상상하지 못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여 종합 선물세트 같은 발명품이 탄생 된다는 것을 속삭이듯 말하고 있다. 특히 어린이의 마음으로 사고를 전환하여 동시로 이끌어 낸 표현들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처음이 중요해’, ‘생각을 바꾸면 누구나 발명의 발명’을 할 수 있다는 마무리 글이 와 닿는다.
 

*전명숙 달팽이 - 조진영 「단추」
짧은 시이지만 가슴에 툭 뛰어 들어온다. 예전에 같은 아파트 위층에 ‘리아’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가 이사 간 자리에 택배 트럭이 작은 옹기와 성모마리아상을 남겨놓았다. 이 시의 3연에 나오는 구절 ‘헤어지기 싫어서 흘린 민아의 눈물 한 방울’을 읽는 순간 그 친구가 생각나 가슴이 울컥하고 목이 뜨거워졌다. 밤새 잊지 못해서 이튿날 바로 이사 간 친구 집에 찾아갔다. 헤어지기 싫어서 남기고 간 성모마리아상을 꼭 안는다.
 
 
제주도로 전학 간 / 내 짝꿍, 민아의 빈 자리에 떨어진 / 단추 하나. // 잘 있어! // 헤어지기 싫어서 흘린 / 민아의 눈물 한 방울.
- 조진영, 「단추」 전문
 
 
*강희 달팽이 - 조진영 「단추」
초등학교 시절 전학 가는 나의 모습이 동영상처럼 어른 그리는 작품이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른들의 결정에 따라 정든 학교와 친구를 떠나는 순간, 남은 친구들은 나의 빈자리에 대한 허전함을 무엇으로 달래었을까? 그때는 나의 슬픔만 생각했지 친구들의 마음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위의 시를 읽고 보니 정든 친구들과 어쩔 수없이 헤어져야만 했던 나와 남은 친구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지은 달팽이- 최영동 「어깨동무」
최영동 작가의 시는 따뜻함과 희망을 안겨준다. 2연의 ‘숲의 울타리처럼 우리의 마음이 둘러싸이고 있었다.’에서 작가는 아이들이 사이좋게 어깨동무하고 사는 좋은 세상을 바라며 이 시를 쓴 것 같다. 서로가 서로의 어깨 위에 팔을 올리고 화합한다면 세상은 동시의 내용처럼 ‘꽃이 피고 새가 지저귀’ 고 ‘너와 내가 둥글게 둥글게’ 사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도 누군가와 어깨동무를 하고 흐르는 개여울을 들여다보고 싶다.
 
 
너의 팔이 / 어깨 위에 올려졌다 // 숲의 울타리처럼 / 우리의 마음이 / 둘러싸이고 있었다 // 꽃이 피고 / 새가 지저귀고 / 개여울 졸졸 흐르는 / 그 곳에서 // 너와 내가 / 둥글게/ 둥글게 자라고 있다
- 최영동 「어깨동무」 전문
 
 
<혜암아동문학교실> 달팽이들은 ‘2024년 봄호’의 동시들을 골고루 잘 먹었습니다. 동시 한편에 두 사람이 추천한 작품 네 편과 동시 한편에 한사람씩 추천한 작품 네 편을 올렸습니다. 회원마다 생각과 느낌이 달라 같은 작품이라도 평을 읽는 재미가 솔솔 했습니다. 혜암 선생님은 평소에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은 글도 글이지만 삶의 태도도 좋아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선생님의 문학 공부를 하는 자세에 대한 말씀을 올리며 마무리하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정으로 산다.
둘째, 좋아하면 잘하게 된다.
셋째, 계속하면 열매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