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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 대구극장이 된 대구좌(大邱座)는 1917년 10월 중구 화전동 4번지에 연극 전용 극장으로 개관되었다. 그해 8월 말 대구기업주식회사(나카무라 기이치가 운영하다 이후 야마네 하츠타로가 운영)가 서울 용산에 있던 극장 앵좌(櫻座)를 매수하여 그대로 옮긴 건물이었다.
대구좌에서는 주로 일본인들을 위한 노래와 춤 등이 공연되었으나, 이후 여러 가지 문화 활동을 하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당시는 대부분 사람들이 생활하기 어려운 시기라 음악 공연을 직접한다거나 보러가는 일이 드물었다. 당연히 음악 공연을 할 전용공간이란 엄두도 내지 못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여러 가지 무대공연을 할 수 있는 다목적 공간, 즉 극장에서 음악회가 열렸다.
극장의 입장료는 대부분 5전(현재 5천원 정도)이었으며, 나중에 10전으로 오르기도 했다. 객석은 의자 대신 모두 다다미로 깔려 있었다. 의자는 아래층 복판에 나무로 된 긴 의자가 있었을 뿐인데, 남녀 좌석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겨울철이면 돈을 받고 방석과 화롯불을 빌려주기도 했다.
대구극장에서는 홍난파 송별 음악회(1931년 6월 29일)와 명창 이동백 은퇴 공연(1939년 6월 23일~25일) 등이 열렸다. 특히 대구가 낳은 국
창 김초향 연주회(1931년 12월 2일)에서는 이봉희, 현계란, 최송희 등이 출연하기도 했다. 또한 이화중선의 인정을 받아 소리꾼의 길을 걷었던박귀희(1921~1993)가 달성권번에서의 소리 수업을 바탕으로 14세 때 무대에 올라 ‘소녀 명창’의 칭호를 얻은 곳이 바로 대구극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