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화는 서예로 닦은 필력(筆力)을 바탕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가슴속에 담은 뒤 이른바 ‘흉중성죽(胸中成竹)’의 영감으로 그려내는 작품양식을 일컫는다. 그렇기에 그리고자 하는 대상의 형사(形似 : 사물의 외형을 닮게 그린 것)보다는 내적인 면을 표현하는 사의(寫意)를 중시하는 경향성이 짙다. 현대 한국문인화단에서는 매(梅)·난(蘭)·국(菊)·죽(竹)의 사군자(四君子)가 주요소재로 그려지면서 화풍은 지역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그 가운데 근대 이후 영남지역의 문인화는 석재 서병오 선생이 큰 물줄기를 형성한 이후 죽농 서동균 선생에게 의발(衣鉢)이 전해졌고, 천석 박근술 선생이 하나의 맥(脈)을 이었으며, 청오(靑吾) 채희규(蔡熙圭) 선생은 천석 선생의 필의를 계승(繼承)하여 한 세대가 넘도록 영남문인화의 맥을 전수(傳授)하기 위해 예술혼(藝術魂)을 불사르고 있다.
청오 선생은 한국미술협회 문인화분과위원 및 이사, 한국문인화협회 부이사장(현 고문), 대구광역시미술협회 부회장, 대한민국미술대전 문인화부문 운영 및 심사위원장, 대한민국문인화대전 심사 및 운영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문인화단에서 널리 알려진 작가이다. 문인화가로서 명성을 얻고 있는 청오 선생은 삶의 전반기를 교육자로 보냈다면, 후반기는 예술가로서의 길을 걷고 있다. 우리는 선생의 삶과 작품세계를 살펴봄으로써 그의 예술세계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2. 교육자로서 걸었던 한 세대
청오 선생은 1933 년 4 월 29 일 경북 문경시 산양면 현리에서 채상식 어른과 이신촌 여사의 2 남 1 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선생의 향리에서는 빼어난 인물이 많았는데 채문식 전 국회의장이 8 년 위로 앞뒷집에서 함께 자랐고, 외조부 이조학선생은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원장을 지냈다. 이러한 유가적인 환경에서 성장하였기에 어려서부터 글을 읽고 쓰는 분위기에 익숙하였다.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외가에 기거하면서 중학교를 수료한 뒤 1950 년 당시 수재들이 모여든 대구사범본과에 입학을 하였고, 1954 년 3 월에 본과 3 학년을 졸업했다. 그 해 3 월부터 모교인 문경소재 삼북초등학교에서 7 년 동안 교편을 잡은 이래로 점촌초등학교에서 12 년, 1973 년 대구산격초등학교 주임교사 3 년, 1976 년 대봉초등학교 주임교사(교무) 5 년, 1981 년 다사초등학교 주임교사 4 년, 1985 년 서제초등학교 주임교사(교무)로 5 년 동안 근무하였다. 이처럼 선생은 교단에서 짧지 않은 35 년 11 개월 동안 교사로 봉직하였다. 교육자로서의 공로가 인정되어 1970 년과 1972 년에 2 회의 문교부장관 표창, 1989 년 국무총리 표창, 1990 년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모란장을 받았다. 특히 대봉초등학교에 근무하던 70 년대 중반에 ‘일요연묵회’를 조직하여 학부형과 교사들에게 문인화를 지도하기 시작하면서 교육자의 삶과 더불어 예술가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당시 대구초등교원서예연구회 부회장으로서 일본에서 도입한 ‘호흡식서예지도’를 통해 80 여명의 교사들을 동참시킴으로써 서예대중화에 기여하였는데 지금까지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3. 문인화가로서 도전한 반세기 길
“훌륭한 예술은 작가의 한결같은 노력에 의해서만 얻어진다.”는 레이놀즈의 말처럼 청오 선생은 붓을 잡은 이래로 지금까지꾸준하게 쉼없이 노력하는 작가상을 보여주고 있다. 선생이 처음 붓을 잡은 때는 담임선생님의 칭찬과 자극으로 환경정리를도맡았던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집안에서는 대대로 지필묵(紙筆墨)을 가까이 하는 가풍이 있어서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붓글씨로 휘호하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익히고 있었다. 초등학교 4 학년 때 붓글씨를 잘 써서 전교생 앞에서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상을 받으면서 큰 용기를 얻은 이후로 오늘날까지 붓과 함께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움튼 서예에 대한 애정은 1973 년 교사로서 대구시로 전입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붓을 잡는 배경이 되었다. 송재 도리석 선생의 문하에서 3 년동안 안진경의 <쌍학명>, <고신첩>, <안근례비>, <삼고>에 이르기까지 여러 법첩을 익혀나갔다. 학교에서 퇴근한 뒤 하루도 어김없이 밤이 늦도록 붓글씨에 몰두하였는데 심지어 장티푸스에 걸려 거동이 힘들었던 시간에도 거르지 않고 수련하였다.
서예적인 필획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기자 평소에 하고 싶었던 문인화를 시작하였다.
1975 년부터 천석 박근술 선생의 문하에서 체계적으로 문인화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당시 천석선생의 나이가 제자인 선생보다 적었던 관계로 일반 원생과는 달리 별실에서 지도를 받았는데 3 년 동안 난초만 치는 연습을 거듭하였다. 학교에서 퇴근한 오후 6 시부터 11 시까지 날마다 화선지 3 절지 200 장를 소화한 뒤 귀가하였다. 이러한 공부는 일요일을 제외한 6 일 동안 계속되었다. 필방주인의 회고에 의하면 서실에 아예 1 만 장의 화선지를 미리 가져다 놓고 하루 13 시간씩 붓을 잡았다고하니 얼마나 열정적으로 공부에 임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다 천석 선생이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대구와 서울을 왕래하면서 대나무를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수련의 강도는 조금도 식지 않았다. 이 시기에 동강, 학남, 일중 선생 등을 역방하고 모르는 것들을 질문하게 되었다. 이런 노력덕분에 1980 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입선을 하였고, 이때부터 청오서화실을 열어 후학들을 지도하면서 교학상장(敎學相長)하기 시작하였다. 1995 년 미술대전에서 초대작가로 등단하면서 특선 1 번과 입선 9 번의 입상실적을 쌓았다. 그 사이에 틈틈이 그려둔 작품들을 모아 1990 년 3 월 태백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5 월 대림화랑에서 2 회 개인전을, 대구선화랑에서 3 회 개인전을, 95 년 2 월에 동아쇼핑 동아미술관에서 4 회 개인전을, 같은 해 5 월에 구미종합문화예술회관에서 5회 개인전을 하였고, 2005 년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대규모로 6회 개인전을 열었으며, 2012 년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7회 개인전을, 2013 년 봉산문화회관에서 선면전(扇面展)으로 8회 개인전을, 2014 년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원로작가초대전으로 9 회 개인전을 열었다. 금년 2017 년 서울 한국미술관의 전시는 10 회 개인전이 된다. 선생의 열정적인 예술활동은 대구광역시장으로부터 대구미술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예술인상을 수상하는 등 대구미술계는 물론이고, 한국미술계에서 받은 수많은 상으로 그 위상이 평가된다.
4. 시기별 작품세계의 변화 양상
청오 선생의 문인화는 화풍상 국내에서는 천석선생과 죽농선생의 화풍을 모태(母胎)로 삼았고, 국외에서는 정섭과 석도 및포화의 영향을 받았다. 정섭의 정치함과 석도의 함축미, 팔대산인의 여백미를 습득하였다고 보여진다. 특히 대나무 그림에 관심과 필력을 집중해 왔다. 평소에 획을 긋는 기분으로 댓잎을 치고, 그린다는 생각보다 서예적인 운필로 댓잎을 그려서 기운생동함을 우선적으로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그림은 기운생동이 중시되고, 기초가 없는 맹목적인 추상에 가까운 그림보다 사실적 재현능력을 바탕으로 한 사의화가 본령(本領)을 이루고 있다. 또한 여백과 함축이 중시되는 화면에 농묵보다 은은한 담채(淡彩)를 사용하면서 영남문인화의 전통은 지키면서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입문하면서부터 기본적인 데생 능력을 기르기 위해 몇 백권의 크로키노트와 묵필소묘노트를 통해 사실적 묘사력도 높이려고 노력하였다. 필자는 실제 20여 년 전, 무더운 여름날 밤 11 시가 넘어선 시간에 선생의 화실을 지나다가 창문에 불이 켜져 있어 방문을 열자 원생들을 귀가시킨 뒤 선생께서 홀로 폐지가 키높이로 쌓일 정도로 그림공부에 몰두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생생하다. 일찍이 한유(韓愈)가 말한 “학업이란 부지런해야 능통해지고, 놀기에 힘을 쓰면 거칠어진다.[業精于勤荒于嬉]”는 말을 실천하고 있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조금씩 변화된 양식을 드러낸다.
청오 선생이 지금까지 제작해 온 작품을 시기별로 살펴보면, 사군자가 가장 많고 그 가운데 대나무 작품이 돋보인다. 예컨대1970년대 초기 묵죽은 잎 사이가 성글고 어색한 감이 없지 않지만 획질은 굳세다. 1986 년 공모전에 한창 출품하던 시기의 <풍죽>은 소소밀밀(疎疎密密)이 표현되어 있다. 주지하듯이 소소밀밀이란 청나라의 등석여(鄧石如)가 남긴 말로 “넓은 곳은 말이라도 달릴 수 있고, 좁은 곳에서는 바늘을 꽂을 틈도 없다."는 뜻이다. 문인화에서 중시하는 공간경영은 바로 소소밀밀의 묘를 살려내는 데 있다. 이 시기부터 선생의 작품에서는 소소밀밀의 처리에 있어 남다른 안목을 엿보인다. 1988년 8폭의 병풍으로 제작된 <묵매도>를 보면 그 동안 수련한 사군자의 세련미와 운필효과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90년을 넘어서면서 선생의 대나무 그림에서는 풍요로움이 나타난다. 1991 년의 <풍죽>을 보면, 이전과는 다르게 많은 잎들을 중첩시켜서 주(主)와 객(客)을 분명히 하고 한결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연출된다. 1992 년 2 회 개인전에서 선보인 <묵난>은 천석선생의 그림 위에 선생의 개성이 첨가된 느낌이다. 같은 전시에 출품된 채색된 <국화>도 능숙함이 엿보인다. 1995년 3회 개인전에서 발표된 매화는 가지와 줄기에서 역시 개성이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문인화에서는 농담(濃淡)을 표현할 때진한 먹과 연한 먹 두 가지를 쓰는 것이 보통인데 선생은 하나의 먹이지만 오로지 붓의 완급(緩急)으로 농담(濃淡)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감지된다. 즉 느리게 운필하면 진하게 되고, 빠르게 운필하면 연하게 되는 필획으로 서예성이 발현된 운필효과를 살려낸다. 이는 필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1995년 4회 개인전에서 발표한 <국화>는 선생의 작업에서 하나의 양식적 패턴화가 드러난다. 거의 독학으로 자가화풍을 이룬 선생의 작품양식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는 시점으로 보아도 좋을듯하다.
90년대 후반부터는 사군자 위주의 작품경향에서 다양한 화목들로 소재가 확산되고 있다. 1999 년 발표된 <연꽃>에서는 사군자에서 익힌 활달한 필력이 바탕이 되어 일필휘지(一筆揮之)로 그려내면서도 연꽃의 고아한 분위기는 살려내고 있다.2000년을 넘어서면서부터 선생의 문인화는 독창적인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2000 년에 발표한 <등나무>는 서예적인 필력과 문인화의 골간을 이루는 여백미가 살아있는 작품이다. 2003년 발표된 <수련>은 사의성이 강조된 작품으로 꿈꾸는 듯한 수련의 자태를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다시 2004년에 발표된 <풍죽>을 보면 원숙함과 여유로움이 확연히 드러나는 독특한 분위기가 드러난다. 바로 선생의 개성미가 담긴 대나무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선생의 작품은 초기 사군자를 위주로 발표하면서도 유독 대나무 그림에 심취했고, 천석선생의 작풍에서 서서히 벗어나 독자적인 화풍을 선보이고 있는 것으
로 살펴진다.2013년 선면전에서 발표된 작품을 보면, 한결 여유로운 용묵(用墨)의 운용효과가 눈에 띈다. 먹의 짙고 옅은 농담(濃淡)의 효과가 선명하게 부각되면서 옅은 먹색을 절묘하게 운용한 화면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일찍이 반천수 선생은 “먹은 반드시 담(淡)한 중에 농(濃)함을, 농(濃)한 가운데 담(淡)함을 얻어야 하니, 옅으면서도 혼후할 수 있으면 평범하면서도 비범하게 될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바햐흐로 선생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이제 용묵(用墨)만으로도 일가를 이루었다고 살펴진다.
5. 사실과 사의의 접점을 찾는 신문인화
2017 년 10 회 개인전인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품은 그 동안의 작품을 총체적으로 정리하는 의미가 있다. 출품작은 200여 점에 이르고 있으며 화목도 사군자를 비롯하여 목련, 포도, 연꽃, 비파, 소나무, 조롱박, 파초 등 다양하다. 대작도 8곡소나무 병풍, 대나무 난초 등 4점을 선보이고 6군자 12군자 등 실로 다양한 화목을 통해 반세기에 가까운 필력을 유감없이보여 준다. 출품작을 보면, 왜 문인화를 사의(寫意)의 미학이라고 일컫게 되는지 느껴진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사군자와 각종 식물과 꽃 등을 실재하는 소재의 형상에서 벗어나 절대해방 혹은 자유분방하게 작가의 조형의지를 반영시킨 자유의 미학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인화는 본래 일회성의 미학으로 간결함을 중히 여겨 덧칠이나 개칠을 하지 않고, 사물의 내면을 표현하는 정신성을 중시한다. 이는 서양의 추상주의와도 일맥상통하며 현대인의 정서에도 소통될 수 있는 문인화만의 장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선생의 근작은 청윤하고 간결하며, 필요없는 부분을 떼어낸 일필의 문인화정신이 깃든 작품들로 즐비하다.또한, 사실(寫實)에 사의(寫意)를 가미한 화풍을 견지하면서 회화적 요소를 화면에 투영시키기 위해 담채를 곁들인 작품을선보이고 있다. 즉 수묵의 전통성을 살리면서도 현대인의 시각까지 고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화면을 통해 원숙한붓터치와 은은하게 노정(露呈)된 색감을 통해 작가의 농익은 솜씨를 읽을 수 있다. 부연하면, 문인화가 갖고 있는 본래의 사상과 사유를 화면에 함축시키고 있으면서도 기법과 방법론에서 청아한 맛과 기운생동하는 힘찬 필치를 속사(速寫)하고 있어새로운 분위기가 연출된다. 예컨대 ‘추국유가색(秋菊有佳色)’이란 화제를 쓰고 왼쪽 바위 위로 세 송이의 황색국화가 포치되어 있고 그 위로 붉은 구기자가 달렸으며 대각선 오른쪽 위로는 붉은 벽돌이 그려져 있다. 가을느낌이 나는 주황계열의 담채를 통해 계절의 운치를 느끼게 된다. 먹색의 변화도 다양하여 깊은 층차를 통해 그윽한 맛을 전달하고 있다. 아울러 출품작을 보면, 문인화의 진수를 실현한 격조있는 작품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부드럽고 유연하면서도 강인한 선질(線質), 깊고두터우면서도 중후한 맛을 표출하는 활달한 운필, 전통적인 소재에 현대적 감각을 입혀 추상표현주의와 같은 양식을 모색하는 등 다양한 예술양식을 창조적으로 시도하려는 작가의 조형의지가 화면에 녹아있다. 예컨대 세로로 긴 화면에 매화 줄기를 가로로 강하게 10 여 개를 긋고 매화꽃은 붉은 물감으로 7~8 개를 그린 뒤 작은 꽃이 연상하는 분홍색의 물감으로 여러개의 점을 찍어놓았다. 활달함과 강한 먹선이 시선을 주목시키면서 집산(集散)의 현대적 구도를 사용하고 있고, 하단부에‘청우(淸友)’라는 예서체로 간단한 화제를 넣어 마무리 하였다.
이와 같이 선생의 작품에는 비록 전통적인 소재를 다루지만 기존화법에서 벗어나 현대적 감각을 발현하기 위한 끈질긴 집념과 열정이 읽혀진다. 선생의 작품은 법고(法古)로 시작하였지만, 이제 법고에서 일탈된 자신의 조향세계를 펼치면서 현대성과 상징성이 강한 메타포[隱喩法, metaphor]가 담긴 문인화로 새로운 경지를 열고 있는 것으로 살펴진다.
6. 수신위본(修身爲本)의 예술정신으로 지평을 넓히고
청오 선생의 좌우명은 수신위본(修身爲本)이다. 『대학(大學)』 에서는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일체 모두 수신을 근본으로 삼는다”고 하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