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4    업데이트: 23-04-13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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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남기지 않는 일의 미학. 송광익전 - 양준호 (미술사박사
아트코리아 | 조회 816

, 남기지 않는 일의 미학. 송광익전

양준호 (미술사박사)

 

근기(根氣)로 찾은 끈기

사람이 일어선 키에서 위로 팔을 쭉 뻗은 높이보다 높으며 옆으로도 양팔을 뻗어도 크기가 남는다. 벽에 온통 하얀 종이가 관객 쪽으로 향한 작은 부분들로 무리 지은 한지들은 무수한 무늬를 만들어내고 있다. 일정한 부분들에 변화를 주어서 하얀색과 검은색 한지가 수직, 수평으로 결을 이루는 그 위쪽에 검은 의자의 골격만으로 이루어진 것에 검은색 고무 띠로 칭칭 동여매어 놓았다. 흰색과 검은색의 대비가 강렬하다. 재료와 재료, 부드러움과 강한 당김에 의해 꼭 죄어진 것과의 효과도 강해 작품은 전체적으로 팽팽하게 긴장된 모습이다.

다른 한 작업은 한지 앞에 고무로 묶은 의자가 수직으로 높이를 이루며 허공에 쌓여있다.

이들 작품처럼 전시의 대표 작품은 세 가지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지 층, 그리고 이번 작업에 새롭게 도입된 검은 고무 띠로 감은 입체 의자가 그 위에 또 한 층을, 그리고 작품에서 거의 드러나진 않는 나머지 지지층으로 이루어진 설치작업이다.

이번 전시를 위해서 꼬박 일 년이 넘는 시간을 작품에 쏟았다. 작품을 이루는 부분들을 끝없이 생산한다. 쉬지 않고 한지를 접고, 찢고, 뜯고 하여 한 장한 장 마련한 것의 모음이다. 재료 중에 민감한 재료들이 많지만, 한지처럼 변화가 무한한 재료는 드물다. 손으로 찢은 면들은 같은 모양의 결이 생겨나지 않는다. 섬유질이 보푸라기처럼 결을 만들어 끊어진 면에 무한한 변화가 있다. 주로 관람자를 향해서 세워진 면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서 더욱 변화가 많다. 세워진 날처럼 관람자를 향해서 곤두선 면들이 모여서 책꽂이에 꽂혀 나열된 한지 종이로 된 뒷면에 모습의 뒷면을 보는 듯도 하지만 그것처럼 조밀하지는 않지만 책가도(冊架圖)에 숨어 있는 면이라고 할 수도 있다. 책으로 치면 잘 꾸며진 겉면이 아니라 내용에 더 가까운 안쪽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번 작업에 등장한 고무와 의자는 의자의 상징성도 있지만, 일 년 이상을 재료의 성질을 다스리며 놓아두어 생경한 냄새와 같은 화학적 성질을 순화하여 작가의 시간으로 녹여낸 것을 작업의 재료로 사용한다. 고무는 입체적으로 재료를 조여 매는 팽팽한 힘이다. 그 힘은 견디는 것은 강인함을 넘어 바탕을 이루는 종이의 질김과 강인함도 표현된다. 부드러움과 강인함의 힘은 서로 대비하기도 혹은 서로의 힘을 뒤바꾸기도 한다. 조선 시대에는 한지로 갑옷을 만들었다고도 한다. 재료의 서로 다르지만 같은 힘들의 가치를 찾아 보여준다. 끈질긴 노력을 근기로 보여준다. 작업 중에는 앉지 않는 작가에게 의자가 유혹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스크린 너머는 무엇일까?

문종이로 차단된 문이나 한지로 봉해진 봉창은 어디에 있던지 밝은 쪽에서는 안쪽이거나 바깥을 볼 수가 없다. 밝은 쪽에서는 빛을 받아서 밝은 봉창 문이 보이고, 어두운 곳에서 보면 햇볕은 종이의 두께만큼만 담고는 밝게 빛난다. 바깥의 사물을 감지하려면 더 밝은 곳의 형상이 비치고 더 큰 쪽의 소리가 들리게 된다. 보통 투명한 것들도 그럴 수 있지만, 투명도가 떨어지는 얇은 막과 같은 재료는 무엇을 너머 있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차단하는 것이 무엇인지와 차단되지 않는 무엇이 있는지는 순간순간 전달이 되는 점이지만 짐작이 가능한 것일 뿐이다. 마치 그림자놀이처럼 말이다. 짐작 가능한 그렇지만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는 사물들의 모음은 누가 더 조용하게 기다릴 수 있는가? 이다. 어디가 더 어두운 곳일 수 있는가는 영화관에서 스크린을 향해 기다렸던 어린 시절의 기다림에서 회상할 수 있다. 영화 상영 이전에 빛이 비치고 빛 속에 빛을 산란하게 한 부유물들의 모습이 그의 작업 어디엔가는 설정되어 있다. 그래서 숨은 밝은 쪽의 물체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투과되는 만큼의 종이로서의 빛의 주름을 끄집어내고 있다. 그래서 빛의 산란이나 주름으로 그는 자기 경험의 특수함을, 이 특수함의 일반화나 보편성을 찾아 투과되거나 투영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짐작만 가능한 것이면서 실제로 비친 것은 마음의 잔상이기도 할 예술적 판단을 한다. 단지 행위들의 계속된 반복과 그 과정을 반성한 판단으로, 자신의 바깥 사물에 대한 관찰이나 자신의 행동 자체를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신중하고 논리적 자아 혹은 살아 있어 현재에서 가능성을 생동적으로 찾는 자아 기능의 성찰을 통해 전개되는 사고 작용이다. 사고의 전개과정 자체를 되짚어보면서 깨달아가는, 삶의 문제 해결 과정에서 작동하는 중요한 정신능력이다.

 

노동의 내면

송광익의 작업은 새로이 풀을 쑤어 금방 바른 뒤의 문살 위의 햇볕에 마른 새하얀 창호 문들이 아니다. 문종이가 겨우내 시간의 무게를 간직한다. 사람의 수없는 드나듦이 있으며 추운 마파람을 막아주던 창호 문이나 문틈 사이의 문풍지 역할들로, 종이가 시간이 지나면서 바람을 받기도 하고 사람의 몸과 스치고 하거나 인위적인 일들로 차단을 넘어가고 싶은 뚫어진 것을 새롭게 메워 놓은 것과 같이 흔적이면서 바람에 펄럭이고 드나드는 옷자락에 스쳐서 일어난 보푸라기와 같이 문지르고 스치고 너무 문질러 아린 생채기 같은 삶의 흔적이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종이 자체가 아닌 작가의 손때가 미묘하게 묻은 흰색은 빛의 변화를 더 뚜렷하게 보여주는데 그 의미는 더 깊은 것이 된다. 밝은색의 변화와 검은색으로 염색한 한지의 대비는 밝은 것과 어두운 것들의 대비를 넘어 변화가 서로의 깊이를 이해하면서 자신의 차이를 강조한 재료의 가진 힘보다 더 날카로우며 더 따뜻하기도 하며 더 많은 변화로 만든 작가의 손에 만져진 새로운 감성의 힘으로 자신을 스스로 나타낸다. 그의 작업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숨어 있었던 단면을 표현하고 있다. 추상적이면서 분석적인 회화이거나 철학을 담은 설치 작업이다.

한국의 노동시간이 긴 것은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다. 긴 노동시간 때문에 경제발전을 이루었다느니, 혹은 부지런함으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느니 하는 것도 하나의 논리였다. 지금도 그 논리는 통하기도 한다. 열심히 한다. 일하고 일로 하루를 보내고 일을 생각하면서 쉬는 것이 일 중독증을 만든 자본의 논리인가? 자신의 삶에 충실한 것이라는 데, 그러면 무엇이 여가이고, 여가의 의미는 무엇인가도 논란이 함께한다. 그런데 송광익의 작업은 많은 반복을 한다. 그리고 일반노동 시간보다도 더 많으면 많았지 작지는 않다. 노동시간 이상으로 작업하면 훌륭한가를 차치하더라도 일반인이 구도자를 보았을 때 고행이란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기 때문에 존경한다. 하지만 수도승처럼 엄격한 고행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구도자와 맞먹을 정도의 집중은 그의 작업의 성과이기도 하다. 고행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목표를 향해서 일관되게 변화가 없이 수행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일반노동보다 훨씬 지루하게 반복되어 부담이 많이 가지만 그 작업 과정에서 얻는 지루함을 없애는 작업이기도 하고 반복을 없애는 작업이기도 하고, 노동하지만 노동이지 않은 노동이기 때문에 그의 작업은 작업의 무화(無化)이면서 행위의 무화이기도하다. 일반 목표가 무엇을 이루는 성과이라면 그의 작업은 그 성과를 없애는 성과이다. 잉여 노동이 아니므로 그래서 작가의 작업은 더욱 값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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