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재 서병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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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86    업데이트: 15-06-19 12:27

석재 서병오

1862(철종 13)∼1935. 서화가.

교남서화연구회 회장, 조선미술전람회 부심사위원

 

본관은 달성(). 호는 석재(). 영남출신으로 일찍이 군수를 지냈다. 1901년을 전후하여 중국 상해()로 가서 그때 그곳에 망명중이던 민영익()과 친밀히 교유하면서 그의 소개로 당시 상해에서 활동하던 유명한 중국인 서화가 포화()·오창석() 등과 가까이 접촉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09년도 상해와 일본을 여행하였고, 중국에 머무르는 동안 특히 포화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그의 문인화법의 영향을 받은 문기() 짙은 묵죽() 등 사군자를 그리게 되었다. 글씨는 매우 격조 있는 행서()를 남겼다.

대구에 살면서 영남일원의 대표적 서화가로 최대의 명성을 누렸다. 1922년 대구에서 교남서화연구회()를 발족시켜 회장이 된 뒤, 서화연구생들을 지도하였다. 서동균()과 성재휴()가 그 시기의 그의 제자이다.

1922년부터 서울에서 조선미술전람회(, )가 열리게 되자 박영효()·정대유()·김돈희()·김규진() 등과 더불어 ‘서()와 사군자’ 부심사위원을 여러번 역임하였으나 한번도 작품을 출품하지는 않았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1] 대구가 낳은 천재,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
이에 대한 기록은 여러차례 발표되었지만 많은 호기심으로 항상 새로워지는 느낌은 그만큼 재능과 예술이 넓고 깊으며 많은 일화와 전설적인 이야기가 우리들의 잎에서 회자하기 때문이다.
팔능거사(八能居士)로써 문(文)에 능했는가하면 해박한 시(時)를 남겼고 글씨(書)를 잘 썼는가하면 그림(畵) 또한 감히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게다가 거문고로 풍류를 즐겼고 바둑, 장기 또한 프로급을 넘어 당시의 대원군도 두 손을 들었다. 의술(醫術)에 대한 조예도 깊어 멀리 중국, 일본에서 조선의 명의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서민층에서 즐기는 화투, 투전, 골패 또한 당할 자가 없었다.
백년에 한 번 태어날 수 있는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천재 서병오. 그의 발자취 뒤안길에는 많은 일화가 있기 때문에 여기 몇 구절 적어본다. 대원군(1820 ~ 1898)과의 만남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민비의 세력에 밀려나 운현궁의 울적한 생활에서 자신의 재능 상대자를 찾던 중 기재 서동(奇才徐童)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초청하였다. 이때 석재의 나이 17세였다. 대원군을 위시한 당시 명대신들의 경탄을 받으면서 대원군 이하응은 "나의 호는 석파(石破)인데 너의 호는 석재(石齋)로 하여라" 하고서 화첩을 하사 받았다. 또다른 호칭은 석재(惜哉, 惜才)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어쩄든 대원군은 석재와 동거 동침을 하면서
시, 서, 화로 연일하였고 특히 장기, 바둑을 많이 즐겼다. 대원군이 바둑을 연삼패(三敗)를 하니 크게 노하여 "이놈아! 한번쯤은 패해주어야지. 이놈을 골방에 가두어라." 하고 농담을 하였다고 한다.
한편 장기에는 하수였던 석재는 어느날 대원군에게 집을 떠나온지 몇 달이 되어 부모님을 뵈러 집에 다녀오겠다고 하고는 그길로 동대문 밖 절방을 얻어 머물면서 장기책을 구하여 열심히 연구하여 결국 대원군을 이기니 "석재(惜哉)로다 서동아"를 몇 번 거듭 부르며 양반집 출신이면 능히 관직에 앉혀도 손색이 없다고 하며 "아깝도다 석재(惜才) 야".하였다.
중국과 일본여행 석재는 제자인 긍석 김진만(肯石 金鎭萬)과 동행하여 37세와 47세에 두차례 중국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제백석(濟白石), 오창석(吳昌碩), 손문(孫文), 포화(浦華)등 중국 제일의 예술가, 정치인 등을 만났다. 그때마다 화국지개(華國之才)란 극찬을 받았는데 그중에서 낙임정(駱任庭) 영국총통을 만나 나눈 국화에 대한 시가 그 당시 합방 이후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에게 커다란 희망을 주어 동아일보에 대서특필이 되었다.
'초나라 굴원(屈原)은 반찬으로 한 뒤에 이름이 멀리서 전해지고/ 진나라 도연명(陶淵明)은 나물로 하여 그 향기는 끊이지 않는구나/ 백.적.국화꽃 색 종류도 많지만 그 중에서 황색꽃이 제일이다' 라는 시는 우리 황인종이 제일이라고 국화꽃에 비유하여 읊은 국화그림에 병제한 시의 그림은 낙임정이 귀국하여 대영박물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동생 서상위(徐相緯)의 소개로 일본의 정계 거물이자 고문인 두삼만의 초총을 받게 되었는데 두삼만 또한 호방한 성격으로 글씨를 잘 썼으며 주색을 좋아하는 호걸로써 석재와는 일백 상통인 만큼 같이 동침 하면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사경을 헤메는 두삼만의 손자를 석재의 의술인 부자(附子)를 써서 구해주니 소동파(蘇東坡) 서첩 한권을 선물로 받았는데 이 서첩은 석재 사망 이후 엄청난 가격으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일본 명문 귀족들의 소개로 석재의 질녀(주병화 씨의 처)가 무시험으로 입학하였는데 정문에서 "조선에서 온 누구이다"고 하니 총장이 정문까지 마중나와주었으며 졸업때까지 맣은 배려를 받았다고 한다. (계속)

[2] 석재의 스승
석재는 태어나면서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천재성으로 예술의 길을 걸었지만 그의 천재성에 맞는 또 다른 천재 선배들이 석재를 이끌었다. 석재 또한 이 분들의 영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임으로써 만년에 팔능(八能)이란 별명을 얻기에 이르렀다.
석재의 집안은 대대로 동화사의 대주지사였던 만큼 석재는 산사에서 큰 불편 없이 공부를 하였다. 석재의 부친 서상민(徐相敏)은 매일 종이 한권을 하인을 통하여 보냈고, 그 인편에 전 날 썼던 서화를 가져 오게 하여 일족인 팔하 서석지(八下 徐錫止)에게 서평을 받게 하였다.
주로 왕희지. 조맹부, 김생의 글씨와 개자원화보(介子園畵譜)를 익혔고, 뒤에 추사의 영향을 받은 대원군의 서법에 관심을 가졌다. 37세에 중국을 다녀온 이후는 안진경체를 익혔고, 차츰 구양순, 동기창, 소동파 등의 서법을 익혔다. 사군자는 중국에서 만난 포작영(浦作英)법을 따랐다. 그 가운데 추사체는 만년에 이르도록 떨구지 않았다.
학문의 길은 당시 영남의 대유학자요 문장가인 방산 허훈에게 사사받고 문학적인 기초와 학문의 방법을 물어 유학자로써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에 스승의 이름자를 별명으로 하명 받아 그의 작품중에 서훈(徐薰)이란 인각을 자주 볼 수 있다. 그 후 경남 산청의 면우 곽종석(郭鍾錫)에게도 사사받았으며, 가장 정신적인 지주로 존경한 분은 석곡 이규준(石谷 李圭晙)이다. 석곡은 영일 석동 사람으로 중국의 사상가인 양계초(梁啓超)와 상통하였다. 석재의 만년 회술에 공자 이후에 석곡이 유일하게 탄생하였다고 극찬하면서 7세의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밥상을 마주하지 않았다고 할 만큼 존경하였다. 석재는 이렇게 많은 석학과 예술가들을 접하면서 학자와 예술가로서 급변하는 당시의 정세에도 흔들림없이 후일 팔능거사로서의 길을 걸어 갔던 것이다.
석재는 만년 팔능이란 별명을 얻어 전국적으로 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석재의 제자 필자가 지난 1987년 그 문하생 긍석 김진만(肯石 金鎭萬), 운강 배효원(雲岡 裵孝源), 죽농 서동균(竹農 徐東均)등 23명의 서화를 가지고 영남교류전이란 전시회를 열어 연보를 마련한 적이 있었다. 이외에도 다양한 제자들을 열거하여 보면의술은 달성의 문경수(文敬洙), 청도의 이원세(李元世), 영일의 황보준(皇甫浚)등의 제자가 있다.
이원세는 무의당한약방으로 한때 대대 구 능인고등학교 앞에서 명의로 이름을 떨쳤다. 석재의 바둑제자로는 성주의 배상연(裵相淵), 경주양동의 이석홍(李錫泓), 합천의 김효석(金孝錫), 대구의 이근상(李根祥), 전남광주의 이노인등이 있다. 또한 바둑계에서는 국내 유일의 국수로 알려진 진주 노사초(盧史楚)와는 쌍벽을 이루었다고한다. 당시 국내 바둑계에는 유단제도가 없었으며, 최고수를 통칭 국수(國手)라 하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현재와 같이 유단제가 있어 최고 유단자 6단이 석재와 여러차례 바둑 경선을 하였다. 대판매일조선판에서는 석재를 5단으로 필적하였다고 대서득필하였다. 뒷날 경북지사 일본이 아베가 석재의 바둑솜씨를 듣고 인력거를 보내 초청하여 대국을 가졌다. 석재는 두 판 이기고, 한 판을 져주니 여기에 힘을 얻은 아베는 결국 밤을 세워 바둑을 두었다. 석재는 새벽녘에 과로로 인한 뇌일혈로 오른 팔이 마비되면서 얼마 뒤 별세하였다. 석재는 바둑과 필연 아닌 악연을 갖게 되었다.
전라도 부안에 거주하는 대부호 아들 김성수(金性洙)가 석재를 찾아와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는데 인촌(仁村)이라는 호를 지어 주면서 시 한 수를 지어 주었다.

朝朝喚起自家魂 不是某 是血  細看字字行行意 舌弊唇焦出苦言 매일 아침 자기의 정신을 환기시키니 이것은 활자 끄으름이 아니라 피먖힌 흔적이구나. 글자 한 자마다 줄줄이 그뜻을 자세히 보지 혀를 헤치고 입술이 마르도록 고언을 말했도다. '인촌 회고록'에 나오는 이 시를 보면 그 당시 동아일보가 일제히 필거하도록 격려한 시구로서 석재의 항일 정신의 일면을 볼 수 있다.

 

[3] 석재의 집안은 대구 진골목에서 오랜 세거를 이루는 집단 문벌이었지만 뛰어난 인물이 배출되지는 못했다.그래서 그의 부모를 위시한 문중에서는 학자, 또는 정치가의 꿈을 키워 보았으나 천부적인 예술가의 길을 막지는 못했다. 일반 범인들은 어느 한편의 뛰어남도 어려운 법인데 석재는 팔능(八能)이란 별명을 얻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니 그 뒤를 추종하는 제자들이 운집하였고 항상 그의 뒤안길에는 일화가 줄을 이었다.
석재는 식민지 시대를 살아간 한 예술가로서의 친가 만석, 양가 만석 이만석의 재산을 탕진하면서 예술적 자존과 방탕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며 살다 갔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중기 이후 평양에 본부를 둔 권번(卷番)조합은 기생을 선출, 양성한 제도가 있었는데 풍류를 좋아하는 석재는 이곳 출신의 기생(지재, 이향, 연옥, 진옥, 비취, 염농산, 경란, 람전, 계난, 금심, 옥란, 금계, 근영 둥)과 숱한 염문을 뿌렸다. 뿐만 아니라 평양, 개성, 금강산을 비롯하여 진주, 동래, 경주, 밀양 등을 왕래하면서 무수한 기생들과 사랑과 시기를 받았다.
석재가 머물다 떠난 뒤에는 항상 염문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한번은 평양 제일가는 기생 금계(錦溪)가 대구로 석재를 찾아왔다. 주안상이 차려지고 주흥이 돌면서 거문고, 가야금으로 시구(時句)가 오가는 분위기 속에서 춤을 추는 금계의 치마폭을 움켜 잡은 석재는 일필휘지(一筆揮之)하니 같이 동석했던 대구 갑부 이종면(李宗勉)은 그 자리에서 비단전에 연락하여 치마 한 벌을 지어오게 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예술가로서, 장부로서 영남인의 기량을 발휘한 석재는 권번조합 고문을 맡아 진주에서 한 달간 머물면서 여러 기생들과 어울렸다. 그러나 진작 진주 제일의 명기인 향전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자존심 강한 향전은 분함을 이기지 못해 석재의 뒤를 따라 대구로 와서 "나의 부족함이 무엇이냐"고 따지면서 석재에게 사모의 정을 토로하였다. 석재는 계획했던 방법인 만큼 결국 말년까지 향전과 함께 살았다. 혹자는 석재를 한 시대를 멋지게 살다간 임백호(林白湖)에 비견하여 풍류객이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추사 김정희(金正喜)이래 몇 안되는 삼절인(三絶人)으로 석재를 세칭하는데도 그만한 이유가 있다. 시는 도교적(道敎的)인 풍과 당.송(唐宋)의 품격을 갖추었으며 시대 저항적인 시편으로 일제의 집요한 회유와 협박에도 흔들림없이 자신의 길을 갔다.
서(書) 또한 대구의 원근에 있는 사찰, 서원등에 많은 편액을 남겼으며 그곳에서 사회를 열어 연축(聯軸)을 많이 남겼고 만년에는 생후 처음이자 마지막인 작품전을 열어 동양 삼국을 놀라게 하였다. 화(畵)는 그의 유품중에서 초년의 작품이 가끔 소장가와 화랑에 보이며, 중년기의 작품은 희소하다. 석재는 중국을 두 번, 그리고 일본도 다녀왔다. 이런 견문이 결국 많은 작품을 남기게된 영양소가 되었다고 하겠다. 외국 방문 때마다 최고의 예술가, 정치인, 지식인들과 교유하면서 나라 잃은 정세속에서도 국위를 떨치고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존앙(尊仰)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술의 길은 고집했기 때문 일 것이다. 결국 이 길로 만년에 그 많은 재산을 탕진해 버린 석재는 허탈과 무위(無爲)의 자신을 원망하면서 필자에 없는 사업인 국농소(國農所)허가를 내어 개간 간척사업에 손을 대었다가 엄청난 재산 손실은 보게 되었다. 그때 나이 60여세, 석재는 몹시 슬펐다.
석재는 한 평생 후회없이 이 세상을 크게, 높게 살아왔지만 어느 한편 완성을 보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개탄하며 후일을 걱정하였다. 그래서 만득(晩得)의 외아들 복규(復圭)와 같이 한집안에서 자란 신대식(申大植, 의사)을 불러 의교(義交)를 부탁하고 후사(後嗣)를 걱정하였다고 하니 만년은 얼마나 참담했을까?
하늘이 낳은 천재 서병오. 영남이 배출한 기재만능(奇才萬能)의 예술가.작고한 지 어언 62년이 지난 지금 그의 무덤도 없다.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은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소장가들에 의해 보존되고 있다. 그러나 요즘처럼 흔한 도록 한권, 논문 한편 나오지 않았으니 후일의 상유지목(桑楡之木)을 바랄뿐이다.
일제 강점기의 한 시대를 살다간 예술가 석재에 대한 단편적인 여재의 글을 마친다.
풍성한 가을에 추수한 농부가 빈 들판을 바라보는 허탈감처럼 우리 모두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김항회. 대구화랑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