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재 서병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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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2012. 8월14일 대구 문화예술회관 비움서예포럼 홍강 논설 원고, 홍강 이봉호
아트코리아 | 조회 1,150

8월14일 대구 문화예술회관 비움서예포럼 홍강 논설 원고,

石齋선생에 끼친 秋史體의 影響



추사 김정희 선생의 生父이신 金魯敬은 1800년대 이조참판 시절,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당시 대구는 독립된 기관이 아니고 경상북도 달성군에 자리 잡고 있는 大邱府로서 지금의 布政동, 대구 중앙공원(경상 감영공원)이 그 자리이다.

관찰사(경상북도 지사)가 일을 하는 집무실에는 宣化堂이라는 懸板이 걸려있었는데 지금도 그 현판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몇 년 전, 대구 경찰서장을 지낸바 있는 鄭昌寬씨가 저에게 들려준 말에 의하면, 선화당이 완전히 불에 타 없어질 뻔 한 건물이 지금까지 잘 보전되고 있다는 것이다.

1960년 4, 19 학생 의거당시, 소위 민주당 당원들이 동참, 파출소를 불태웠고, 그 여세를 몰아 포정동 경상감영공원으로 모여들어 관찰사 집무실(선화당)을 파괴하려했다.

그때 신도환 의원과 정창관 서장이 담장위에 올라가서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고 했다.

“이 건물은 정부의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의 것이다. 대구의 문화유산이다. 이 건물이 불타는 날이면, 우리 모두는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물러 들 가라고 소리소리 외쳤다 한다.

그래서 대모 군중은 물러갔고, 선화당은 지금도 건재 해 있다는 것이다.

공원을 산책하면서 과거를 더듬어보면 인생무상이라. 무수한 역사적 변천과정이 파도처럼 흘렀는데, 지평선 너머에 여객선이 자무라 지듯, 추사선생의 흔적이 대구에도 잠겨있다.

대구에 오늘을 살고 있는 홍강이라는 자는 어저께 추사선생이 쓰신 해인사 상량문을 번역한 사실이 있다.

해인사 상량문은 [중건 상량문]인데, 법당이 화재로 불타 없어져 다시 재건했고, 그 재건한 사유를 기록한 것인데 내용을 읽어보니, 해인사 창건 때 부터의 사실들을 모두 써놓은 것 같이 소상하게 잘 쓴 글이란 생각이 들었다.

추사선생은 서예의 대가라 하기보다 고증학의 대방가라 하는 칭호가 이렇게 해서 전하는구나, 여겨진다.

해인사는 팔만장경이 보관된 사찰이므로, 전국 16개 宗刹 중에서도 法之宗刹로 유명하다.

때마침, 경상도 관찰사로 와있는 김노경은 이 사실들을 모두 알게 되었을 것이고, 유명한 해인사 상량문은 아들(추사)에게 쓰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경상도 관찰사가 주선을 했으니 해인사 측에서도 거절 할 리 없었을 것이니, 이렇게 해서 쓰이게 된 것이라 본다.

글씨는 짙은 남색 공단(비단)에 금분으로 썼다.

당시 추사선생의 연세가 31세로서 청년시절이었다.

글씨 서체도 아직 추사체가 형성되지 않았을 때라, 얼핏 보기에는 추사체로 이해하기가 난해했던 것이다.

처음은 접근 불가로 공개되지 않았는데, 대검 차장 김일두씨가 때 마침, 전국사찰 순력이라는 책을 쓰고 있는 중이라, 사진을 촬영하게 되었고 나에게도 한불 입수하게 된 것이라, 자세히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글씨는 세상에 공개되었으나 서울의 수장가(애호가)들도 추사선생의 필적(진적)인지 의심했다.

글씨 끝부분에 낙관도 없었다.

戊寅年 六月 日 밖에 없다.

그러나 필자는 추사선생 문집을 찾아서 열람 해 봤더니. 그 문집 안에는 해인사 상량문 원문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믿었고, 1985년 홍강은 그 글씨를 서울로 가지고 올라가 서문당 출판사에서 “秋史先生 眞書帖” 이란 서예교재도 발간했다.



오늘 [비움서예포럼]에서 石齋선생 書 藝術 연구발표 행사를 갖게 되는 것도 2백 여 년 전부터의 인연이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해인사에는 홍류동 계곡 광풍대 위에 玉流亭 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경신년 홍수에 떠내려가고 없다.

그 玉流亭은 해인사 주지였던 환경스님께서 세운 것인데, 대구에 石齋(서병오) 선생을 초대해서 주련(柱聯)을 썼다고 한다.

[海東名勝 海印寺]라 우리나라 관광지로서는 제일 좋은 곳이므로 제일가는 계곡에 제일 멋있게 세운 정자라, 柱聯 글씨도 천하 명필이란 소리를 들을 수 있게 쓰고 싶어서 심한 노력을 기우린 끝에, 그 글씨를 쓰고는 몸살을 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그러나 그 정자는 지금 없다,

그 뒤 병자년 대 홍수 때 유실되었는데 전설은 하늘에서 가져갔다고 한다. (石齋선생 뿐 아니라 전국의 명필을 다 새겨서 달았기 때문에 너무 귀한 보배라 하늘나라에서 가져갔다는 전설이다)

해인사 경내에 걸려있는 글씨들은 특히 추사선생과의 연관이 짙다. 팔만장경이 보관된 곳에는 추사선생의 제자인 申觀浩 (1810 -1888 호는 威堂=어영대장) 의 예서가 있고, 법당의 기둥 주련은 추사선생이 극히 칭찬을 하는 대원군 李昰應 글씨가 있고, 중문 위에는 추사선생의 서체를 지극히 좇는 萬坡스님의 글씨(海東圓宗大架藍)가 두드러진다. 이런 곳이니까 석재선생의 명 필적을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해인사 주지였던 환경스님 회고록에는 석재선생이 환경스님에게 보낸 편지글이 있다. 편지(簡札) 글씨에 보이는 서체는 100% 추서체로 쓰여 졌다. 서예 작품을 하기위해 작정을 하고 쓴 글시이면 계획적(의도적)으로 추사체를 쓰고자 했을 수도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인데, 서스름(거침)없이 쓴 편지글이라 추사선생의 서체(영향)를 깊히 담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보는 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팔공산 동화사 법당, 주련글씨는 석재선생의 글씨이나, 누가 봐도 추사선생 서체를 비켜갈 수 없다. 이런 경우는 깊숙이 젖은 영향이 있기 때문이지, 일시적으로 힘을 쓴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서체로 보아서는 않되는 것이다.

더욱 인연을 지울 수 없는 것은 모명재(慕明齋)에 있는 현판 글씨(崇禎遺樓)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중국 명나라 이여송장군이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왔을 때, 책사(지사)로 따라오신 두사충(杜師忠)은 전쟁이 끝났음에도 돌아가지 않고 대구에 살았는데 그 후손들은 지금도 많이 살고 있다.

현재 남부주차장 뒤 약 200m 거리에 위치한 곳에는 정려와 재실이 있는데, 그 재실을 중국 [명나라 황제(연호=숭정)가 이 루(집)를 너에게 준다], 고 쓴 글씨가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이다. 여기는 낙관도 없다. 그래서 추사선생의 글씨인줄 아는 이가 잘 없다. 이 글씨는 낙관보다 더 무서운 증거가 있다. 중국 명나라 황제의 하사 품 이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는 이 글씨가 해당되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崇자와, 樓자가 추사선생의 서체가 아니면 비교할 수 없고, 이렇게 쓸 수 없는 필법이기 때문에도 감정을 비껴 갈 수 없는 서체이다.

위와 같이 대구는 추사선생과 연관이 많고 인연이 두터운 곳이라, 비움서예포럼을 주관하는 송정택씨도 石齋선생을 추모하는 사업에는 秋史선생이 필연적일 것이란 생각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추사선생의 영향은 구한말, 서울에 小棠 김석준, 威堂 신관호, 진도에 小癡 허영, 영주에 小愚 강벽원, 진주에 星坡 하동주, 대구에 石齋 서병오 선생 등이 추사체 연구에 전염하여 국제적 명성을 얻었고,

21세기에 이르러서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1987년에는 전국적으로 참가한 추사체 연구회가 창립되었다.

그 회원이 서울에서 김鍵 (건국대학 학장) 如巖 김용태, 弗岩 이희찬, 전북전주 지회장 임병근, 충남대전 지회장 蓮坡 최정수, 대구경북 지회장 弘岡 이봉호 등으로 창립이 이루어지니, 蘭谷 김응섭, 정치인으로 靑谷 윤길중, 등이 들어와, 명실 공히 추사체 연구회로 활동하니 전국에 수 백 명이 동참해, 세종문화회관에서 매년 정기적으로 작품발표전을 개최했으며, 봉은사 절에는 추사선생의 절필(板殿)이 있는 곳 바로 밑에 [추사선생 기적 碑]를 세웠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글씨를 쓰기위한 서체연구에만 힘쓰고, 반면에 진품과 위작에 대한 연구가 없어서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 후지쓰카(藤塚鄰)는 처음부터 추사체에 관심을 갖고 논문을 쓰기 위해, 한국에 와서 자료 수집을 하는 과정에, 인사동 화랑가에서 추사작품(세한도)을 발견했다. 당시는 그 그림이 가짜라고, 주인을 못 만나, 이집 저집 옮겨질 때, 값싸게 구입 해 간 것이다. 그리고 후일 명작이란 논문이 발표되자. 국내 수집가들이 불이 났다.

그 소문을 들은 호남 국회의원 서예가 素荃 손재형은 즉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거금 1천만 원을 주고 세한도를 입수했는데, 지금은 국보로 지정 되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었다.

저는 오늘 비움서예포럼에 박수를 보낸다.

이런 행사를 자주 하므로 해서 작품의 성격, 진위에 대한 논설이 오가므로 해서, 서예문화의 질서를 바로잡는데 길잡이가 되는 것이다.

특히 우리민족의 사랑을 받고 있는 안중근의사의 글씨는 국가적 보물이라지만 위작(가짜)이 더러 숨어있다.

일본은 가짜를 만들어 보내고, 우리학계에서는 그것을 모르고 받아모시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 서예계는 돈이 없어 밥을 굶는 한이 있어도, 그 가짜는 일본으로 돌려주고 진품을 찾아와야 한다. 2012년 8월 14일,

 

한국금석문연구회 대표 홍강 이 봉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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