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재 서병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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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32    업데이트: 15-12-30 10:35

석재1관

매강정사
아트코리아 | 조회 845



매강정사

 

0소재지 : 북구 태전동 567

0, 문중별 : 달성 서씨 감찰공파

달성인 서진손(徐震孫)과 공의 아들 서미수(徐眉壽)를 기리는 재사이다. 진손은 벼슬이 직장(直長)에 이르렀고, 미수(1453~1516)는 생원이다. 아버지 진손이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는 등 나라가 혼란하자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고 전원으로 돌아와서 자연을 벗 삼아 살았듯이 아들 미수 역시 아버지의 삶은 그대로 따랐다.

아들 생원 미수의 묘가 칠곡 이매동(理梅洞) 뒷산에 있음에 비해 아버지 진손의 묘는 실전(失傳)되어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없었다. 후손들이 뜻을 모아 아들 미수의 묘 옆에 단을 세우고 그 아래 재사(齋舍)를 건립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 되자 낡고 비좁아 자손들을 다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1982년 제사를 새로 지으니 지금의 매강정사(梅岡精舍)다. 중건기문은 성산인 이헌주(李憲柱)가 썼다.

그 후 가문을 빛낸 인물이 태어나니 의병장 죽계(竹溪) 서재겸(徐再謙, 1557~1617)이다.

그는 조카뻘 되나 나이는 7세위인 낙재 서사원(徐思遠)의 문하에 들어가 갔다. 36세가 되던 1592년 왜란이 일어나 대구가 함락되자 6월 16일 형 득겸(得謙)과 함께 의병 300명을 거느리고 왜적이 머물고 있는 낙동강 아금암(현, 달성군 문양리)으로 달려가 30여명의 목을 벴으나 안타깝게도 이 때 형은 전사했다.

이어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를 만나 아금암에서의 패전 소식을 알리고 25일에는 그와 더불어 의병 80명으로 왜적 19명을 죽이고 또한 총 15자루와 군량 일부를 탈취했다. 7월 대구로 돌아와 공산의병진에 합류했다. 1594년에는 다 허물어진 공산성을 수축하고, 1596년 영남의병장들이 팔공산에서 회맹할 때 대표로 뽑혀 회맹 문을 낭독하고 회맹시를 지었다.

그는 임란이 종결될 때까지 팔공산, 화왕산 등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1816년 사림들이 경상감사에게 증직의 상소를 올렸으나 세월이 너무 지난일이라 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저서로 <죽계유고(竹溪遺稿)>가 있다.

 

발췌

http://blog.daum.net/ljw1674/18302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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