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박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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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27    업데이트: 23-05-04 15:19

자유게시판

[매일춘추] 시(詩)에 대하여
아트코리아 | 조회 954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를 본 적이 있다. 영화를 보고 동성로 거리를 걸어 나오는데 영화 속의 주인공 ‘미자’가 시를 읊는, 실비 같은 촉촉한 목소리가 자꾸만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오는 것이었다. 예쁜 꽃 모자를 머리에 우아하게 쓴, 나이 든 문학소녀인 미자(윤정희)가 마치, 현재 시를 쓰고 있는 나와 자꾸만 오버랩 되어 왠지 연민이 가고 그 어려움에 처한 불온의 현실에서 그나마 아름답게 승화되길, 바라는 마음 간곡하고 간절했다.

 

미자의 손자를 포함한 같은 학교 남학생 여러 명이 학교과학실에서 한 여학생을 성폭행하자 수치심을 감당해내지 못한 이 여학생이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하고 만다. 이 사실을 알아버린 미자는 절망하여 캄캄하다. 미자는 손자가 죄의식을 느끼도록 뉘우침을 유도해보지만 손자의 가슴은 딱딱한 나무토막처럼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급기야 비행청소년이 저지른 죄의 합의금 오백만원 때문에 미자는 간병인에서 매춘 아닌 매춘의 대가로 오백만원을 마련하게 된다. 자신의 핏줄에 대한, 죄에 대한 책임의 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해 중풍 든 한 남자를 사랑도 없이 상대해준 것에 대해 씻을 수 없는 자기 모멸감에 허우적대며 하염없이 강가를 거니는 미자, 그 쓰라린 상처에 웅덩이라도 파듯, 비가 퍼붓기 시작하고 시를 쓰기 위해 펼쳐든 노트가 미자의 얼룩진 마음처럼 허무하게 번져나간다. 그러면서도 마을 문화교실의 마지막 숙제인 시(詩)를 제출하고, 온몸이 시로 숨 쉬는 맑은 심성의 여인이지만 미자는 끝내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다. 시를 쓰며 순박하게 살고 싶은 한 여인이, 이 사회의 고질적인 부조리와 불의를 가냘픈 어깨에 짊어지고 어느 길 위에서 마른 꽃잎처럼 헤

 

매고 있는 걸까.

 

 

칸 영화제에서 영화 ‘시’에게 각본상을 안겨준 것은 각양각색 사람의 모습은 다를지언정 인간이 지향하는 휴머니스트 같은 마음은 다 같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아닌가 생각한다. 세상이 각박할수록 가슴으로 소통하는 시를 많이 쓰고 읽으며 자신의 고통과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공감하여야 할 이 시대에, 시에 대한 큰 의미를 던져주는 영화 ‘시’는 오랫동안 찡한 여백의 여운을 남기고 있다. 문학소녀 미자가 마지막 강의 숙제로 선생님께 제출한 시, 죽은 ‘ 아네스’를 위해 쓴 시, ‘아네스의 노래’를, 기초수급자이면서도 문학의 꿈을 펼쳐나가던 그 순박한 꿈의 미자를 생각하면서 낭독해 본다.

 

 

그곳은 얼마나 적막할까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좋아하는 음악 들려올까요/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 소리 들리고/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을까요/ 한 번도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을까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중략. 이창동-아네스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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