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이승찬
오늘 11     전체 68,782
글 수: 7    업데이트: 17-11-16 14:15

자유게시판

허방 이승찬의 다다름 - 무심한 붓질 속에서 만나는 ‘平淡天眞’의 세계
관리자 | 조회 873
허방 이승찬의 다다름

무심한 붓질 속에서 만나는  
平淡天眞’의 세계

 
글 : 장석호(문학박사, 미술사)
◀동북아역사재단 책임연구위원 장석호 박사
 
한 사람의 작가가 오직 그 만의 언어로 세계의 참 모습(平淡天眞)을 창출해 내기까지 얼마나 긴 고심참담한 시간들을 겪어야 하는지 뭇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작가로서 홀로 서기 위해서는 애초에 없었던 그만의 말(言語)을 찾아야 하고, 누구나 보면 알 수 있는 세상사의 참 모습을 그려서 제시해야 한다. 그 일이 얼마나 어려웠던지 옛 임들조차도 그것은 ‘배워서 될 수 없다(不可學)'고 단언하였다. 그것은 ’하늘이 주는 것(천수天授)'라고 하였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상상을 초월하는 가시밭길을 걸으며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그것을 얻을 수 없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이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그 일을 위해 헌신을 하였지만, 오직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험한 길을 걸어왔으며, 마침내 그때까지 세상에 없었던 단어들로 그가 목격한 세상의 참 모습을 새롭게 번역해 내었다. 이 여정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절대 다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처절한 좌절감을 느끼며 도중에 걸음을 멈추고 뜻을 접어야 했다. 게다가 스스로는 감히 그 길을 걸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뭇사람들도 이 창작에 대해서만큼은 독창성이라는 가장 냉혹하고도 절대적인 자로 개개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평가하였다.
 
사람들을 웃고 울게 만드는 작품의 이면에는 그 작가들이 걸어오며 겪은 숱한 모색과 수련의 과정들이 있는데, 그 길은 주로 번뇌, 고독, 불안, 슬픔, 아픔, 후회, 절망, 좌절, 회한 눈물, 배고픔 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래도 작가들은 이런 길을 마다않고 꾸역꾸역 앞만 보며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의 내면에서 중단 없이 솟구쳐 오르는 ‘참(眞)' 에 대한 갈망과 그것을 온전히 표현하겠다는 욕망 때문일 것이다. 바로 이들 작가 덕분에 뭇 사람들은 세상의 여러 내밀한 모습과 더불어 그 외곽 경계에 대한 인식을 조금씩 확장시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허방 이승찬! 이순이 넘도록 멈추지 않고 걸어온 그의 길은 한결같이 궁극을 찾는 과정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결코 짧지 않은 그간의 시간은 세상의 근원과 아울러 그림의 본래 모습이 무엇인가에 대해 답을 구하던 자문(自問)의 과정이었다. 마치 구도승과 같이, 그는 이 화두를 걸머지고, 허허한 창작의 길을 쉼 없이 걸어왔다. 그동안 그가 견지해 온 창작의 길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우리는 근년에 그가 우리 앞에 제시한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서 읽어낼 수 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일회적이고 즉자적이며 비정형적인데, 모두 부차적인 수사들의 집요한 유혹을 뿌리치고 획득한 '생명 현현(顯現)' 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그런 그의 작업 태도는 옛 임들이 명기하였던 ‘불성숙(不成熟)'의 개념과 맞닿아 있다. 이 말은 성숙되었다고 생각되었을 때 예술이 시들어버림을 에둘러 이른 것이며, 안주하지 않고 쉼 없이 정진하려는 작가적 태도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의 작품들을 한 번 보라! 그것들은 하나같이 밑그림이 없고, 또 억지스럽게 다듬은 흔적도 없다. 그가 척척 휘갈긴 붓질 속에는 뭇 사람들이 짐작조차 하지 못한 신비로운 언어들이 감추어져 있다. 그 언어들을 화가 이승찬 말고는 어느 누구도 읽어 낼 수 없고, 그러므로 그 이외의 누구도 그것을 생명이 깃든 새로운 조형예술로 번역해 낼 수 없다.
 
그의 작품들을 대하면서, 엉뚱하게도 시원(始原) 미술 속의 ‘마카로니'와 알타미라 동굴벽화 속 들소, 앙리 브뢰이의 '형상석(形象石)’ 미켈란젤로의 대리석, 그리고 E.공브리치의 ‘투사(投射)’ 등의 개념을 동시에 떠올렸다. 또 삼국유사 ☉「감통」편 속 ‘진신수공(眞身受供)'이나 경주 남산 여기저기의 석불과 산신당(山神堂), 그리고 안동 제비원의 돌부처(마애여래입상) 둥도 같은 연장선에서 떠올렸다. 그러면서 역시 작가는 심안을 넘어 ’영안(靈眼)'을 지닌 사람임을 다시 한 번 확신하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물성(物性) 속에 깃들어 있는 영상(靈性)을 읽어서 이끌어내는 사람이 바로 작가라는 믿음 때문이다.
 
작가 이승찬은 이전에 ‘거친 호흡을 꾹꾹 누르고 고요로 깊숙이 나를 내리며’, 물 흐르듯 구름 가득한 붓질로 그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는 독백을 한 바 있다. 그가 남긴 붓질 속에는 검정(緇:검은비단 치)과 하양(素)이 서로 얽혀 있고, 마치 알타미라의 화가가 그랬듯이 그 차이와 어우러짐 속에 숨어 있던 이미지를 적당한 선과 먹물로 화면 바깥으로 이끌어 낸다. 그가 그어 남긴 붓질과 그 위에 더해진 선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사람이 되고 또 닭이 되는데, 이 때 그는 껄껄껄 웃으며 혹은 깊은 깨달음의 마음을 담아 ‘스님(僧)', '속(俗)’, ‘합(合)’, ‘피에타’, 그리고 ‘베드로’ 등의 이름을 붙인다.
 
그가 딸꾹질처럼 해댄 붓질은 오늘 그가 다다른 세계에 대한 단상이다. 그가 휘갈긴 먹물 자국과 그 속에서 이끌어 낸 형상들은 이전의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허방 이승찬만의 조형 세계를 이룬다. 고맙게도 우리는 여태껏 본 적이 없는 또 하나의 세상과 만날 수 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근원을 찾아 나서는 그의 길이 또 얼마나 외로울지 우리들은 모른다.
 

장 석 호 (문학박사, 미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