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42    업데이트: 24-04-23 14:09

매일신문

[이인숙의 옛그림 예찬]정조(1752~1800) '파초도'- 매일신문[2019-07-10]
관리자 | 조회 255
[이인숙의 옛그림 예찬]정조(1752~1800) '파초도'



종이에 수묵, 84.2×51.3㎝, 동국대박물관 소장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보다 더 적극적으로 문예 활동을 했다. 영조는 그림에 화제를 썼지만, 정조는 직접 그림을 그렸다. 조선의 왕은 왕세자 때부터 공부도 많이 했고 시문과 서화의 교양도 높았다. 그러나 시서화를 창작하거나 감상하는 일은 금기시되었다. 물건에 정신이 팔리게 되면 수양에 이롭지 않다고 여겨졌고, 일거수일투족이 만인의 관심사가 되는 높은 자리여서 자칫 사람들이 따라하는 일이 생길까 우려했다. 왕은 공인일 뿐 개인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정조는 시도 많이 지었고, 글씨도 많이 썼으며, 그림도 조선 왕으로는 가장 많이 남겼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국왕의 활동이라는 정치의 영역과 예술이라는 심미의 영역을 통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멋진 애국가가 멋진 음악일 수 있듯 '파초도'는 왕으로서 그릴 만한 소재를 왕의 그림답게 그린 그림이다. 파초는 동아시아 문학과 미술에 자주 등장하는데 별칭 중에 잎과 줄기가 거대해 초제(草帝), 곧 '초본(草本)의 제왕'이라는 이름이 있다. 정조는 넓은 잎을 펼친 파초를 불변을 상징하는 돌과 함께 묘사보다 요약을, 채색보다 수묵을 선호한 문인화풍으로 그렸다. 조선시대 정치인들이 그렇듯 왕도 문인이었다.

'파초도'에는 백문방인(白文方印) '홍재'(弘齋)와 주문방인(朱文方印) '만기'(萬機)가 찍혀 있어 홍재라는 호를 쓴 왕의 그림임을 한 눈에 알려준다. '만기'는 만 가지 일의 기미를 다 살펴야 한다는 뜻으로 왕만 사용할 수 있는 신분인(身分印)이기 때문이다. 홍재는 정조의 시문을 모은 문집 '홍재전서'로 널리 알려졌다. 정조는 홍재의 뜻을 '군자는 포부가 크고 의지가 굳세어야 한다'는 '군자홍의'(君子弘毅)라고 했다. 군자가 인(仁)이라는 막중한 가치를 평생토록 실천하기 위해 가져야 할 삶의 자세로 널리 알려진 이 말은 '논어'에 나온다.

왕들도 호가 있었다. 영조는 양성헌(養性軒), 육오거사(六五居士), 일녕헌(日寧軒), 자성옹(自醒翁) 등을 썼고, 영조의 아버지 숙종의 호는 종덕재(種德齋)이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호는 능허관(凌虛關), 정조의 아들 순조의 호는 순재(純齋), 요절한 손자 효명세자의 호는 경헌(敬軒), 증손자 헌종의 호는 원헌(元軒)이다.

당신께서도 만기의 여가에 그림 감상 어떠실지? 지금 대구미술관에서 박생광전이 열리고 있다.

 

미술사 연구자
덧글 0 개
덧글수정